장터의 아이들 비유 - ‘무관심, 무감각, 무기력’은 죄악이다.
장터의 아이들 비유
‘무관심, 무감각, 무기력’은 죄악이다.
마태복음 1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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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가진 이는 들어라.
이제, 내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시장터에 털버덕 앉아서 제 동무들을 불러대는 아이들과 같다. 그 아이들이 말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흥겨워 춤을 추지 않았다.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실제로,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한다.
“그가 귀신들렸다.”
사람의 아들은 와서 먹고 마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한다.
“봐라! 이 사람은 먹보요 술꾼인데다가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
낱말풀이
* 무엇에 비교할까? : 티니 호모이오소 Τίνι ὁμοιώσω
* 시장터에서 주저앉아 : 카테멘노이스 엔 타이스 아고라이스 καθημένοις ἐν ταῖς ἀγοραῖς
* 사람의 아들(인자) : 휘오스 투 안트로푸 ὑιό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예수 자신을 말한다.
* 먹보요 술꾼 : 파고스 카이 오이노포테스 φάγος καί οἰνοπότης
들어가는 말
21C 우리 시대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현대사회를 ‘무관심의 사회’라고 한다. 너도 나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다‘라고 실토한다. 실제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지도 않고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다면, 나는 외롭게 되고 병들어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죽어가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외로움과 소외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언론에 보도되는 수많은 고독사와 자살사건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사회의 무관심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데 무관심은 ‘무감각’을 동반하게 된다. 무관심한 삶의 태도는 정의와 평등에 대한 판단과 선택, 공동체적 소통과 연대와 참여에 대한 무감각을 키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정의와 평등, 양심과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진 세태를 한탄한다. 그러나 결국, ‘내 일도 아닌데’하는 무관심이 불의와 비양심이 판치는 세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무관심과 무감각은 사회를 전체를 ‘무기력’에 빠트리고 만다. 너도 나도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사회에서는 혹여 선한의지를 가진 이라도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라는 자포자기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가장 큰 대중조작 음모는 무관심과 무감각의 유포이다. 무관심과 무감각은 사람 사는 세상의 공동체성을 거부하는 것으로써,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 인권적이다. 무관심과 무감각은 사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시대의 지배제체에 종속시키는 죄악이다.
이러한 무관심의 세태에서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는 현상은 ‘자기중심성’이다.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기력한 세태에서 ‘자기중심성’은 퇴행적 아집과 편견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이러한 자기중심성의 퇴행적 아집과 편견이 국가와 사회의 지배체제에 적용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가 바로 그렇다. 독점재벌과 독점관료집단, 독점정치세력과 사회기득권 세력들이 어둠의 커넥션을 이루어 대한민국 사회를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기력한 거대 기계구조사회로 조직했다. 21C 대한민국은 독점재벌․독점관료들의 사적국가로써, 맘몬․자본 지배체제 내부자 기득권세력들의 자기중심성 퇴행의 아집과 편견이 판치는 나라이다. 참으로 두렵고 걱정스럽다.
이끄는 말
예수는 비유에서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기력한 유대 대중의 삶의 행태를 거세게 꾸짖는다. 나아가, 유대 종교․사회기득권 세력의 자기중심성 편견과 아집을 트집 잡고 따진다. 예수는 유대 대중의 무관심․무감각․무기력증을 장터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여 ‘이 세대를 무엇에 비교할까’라고 꼬집어 지적한다.
본문비유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장터에 따라 나섰다가, ‘부모들이 장터에서 일하는 동안’ 아이들끼리 모여 놀이를 즐기려고 한다. 아이들은 혼인잔치 행렬의 즐거움과 기쁨을 놀이내용을 삼는다. 또한 장례 예식의 슬픔과 곡하는 모습을 놀이에 가져다 쓴다. 아이들 가운데서 일부가 피리소리를 흉내를 내면, 다른 아이들이 흥겨운 춤을 추며 혼인잔치 행렬을 흉내 낸다. 그러다가 결혼잔치 놀이가 시들해진 일부 아이들이 장례 예식을 흉내 내어 곡을 하면, 다른 아이들도 장례 예식에서 봐왔던 대로 가슴을 치고 울며 슬퍼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제 나름대로 어른들의 세계를 흉내 내며 논다. 오늘날까지도 팔레스타인지역에서는 이러한 아이들의 놀이가 전래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비유의 이러한 아이들의 놀이들은 우리의 옛 소꿉놀이와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들의 일부가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다. 몇몇 아이들이 모여서 피리를 불어도 다른 아이들이 흥을 내어 춤추지 않는다. 또 다른 몇몇 아이들이 곡을 해도 다른 아이들이 가슴을 치고 슬퍼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흥을 내어 춤을 추거나 가슴치고 슬퍼하기는커녕, 무덤덤하고 무관심하다. 그렇게, 한 무리의 아이들의 놀이판은 아무 맛대가리도 없이 무기력하게 흩어지고 만다.
예수는 이러한 아이들의 놀이판을 빗대어 유대 대중의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기력증을 꼬집고 나무란다. 또한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대어 성전제사종교와 율법체제를 기득권의 도구로 이용하는 유대 종교․사회 엘리트 계층의 자기중심성의 편견과 아집을 트집 잡고 꾸짖는다.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와 율법체제 매몰되어 퇴행적인 자기중심성의 아집과 편견에 휩쓸리는 유대 대중들의 무기력한 삶의 행태에 경종을 울린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 대중은 세례요한과 예수의 유대 종교․사회 개혁운동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기력하게 대응했다. 본문비유에서 그들은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것을 보고 ‘그가 귀신들렸다’라고 비난했다. 또한 예수가 와서 먹고 마시자 ‘사람의 아들은 먹보요 술꾼이다,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라고 욕을 해 댔다.
이렇듯이, 세례요한과 예수에 대한 유대 대중들의 이러한 갈지자 비난과 욕설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들의 이러한 갈지자 행태의 배경에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와 율법체제가 있다. 유대 대중들과 예루살렘 성전제사 및 율법체제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삶의 관계로 얽혀져 있다.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루살렘 성전제사뿐이다.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통하여야 만 하나님께 ‘죄 사함’을 요청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 나아가 그들에게 율법체제는 그들의 전 생애를 규정하고 이끄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계시였다. 오직 율법만이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죄’를 규정하고 판단하며 심판할 수 있다. 율법체제만이 유대인들을 유대인답게 하는 실체이고 현실 삶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누구이고 무엇을 했을까? 세례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와 율법체제를 개혁하려는 민중예언자였다. 이와 관련하여 신약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세례요한 모습은 전형적인 북이스라엘의 민중예언자 엘리야의 모습 그대로이다. 가난한 유대 민중들 사이에서는 ‘세례요한’이 하늘에서 내려온 엘리야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광야의 은둔자처럼 약대털옷을 입었고 가죽허리띠를 맸으며 메뚜기와 산꿀을 먹고 살았다. 그렇게 광야의 고독한 고행자 세례요한이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음으로써, 유대 종교․사회 지배체제는 세례요한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와 율법체제는 세례요한의 ‘죄 탕감을 위한 회개의 물세례’를 이단시 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으로 인해 이제 멀리 예루살렘성전에까지 가서 값비싼 제물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난한 민중들은 지킬 수조차도 없는 율법의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온 유대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죄 탕감을 위한 회개의 물세례’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와 율법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대한 반역이다. 유대인들의 율법 지배체제를 파괴하는 반사회적 행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제사와 율법체제는 예수시대의 1%의 상류 기득권계층에게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 밖의 99%의 유대 민중에게는 예루살렘 성선제사와 율법체제가 죄와 심판, 두려움과 절망일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유대 민중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제사는 종교기득권자들의 착취의 도구이었고, 율법체제는 차별과 배제, 죄의 낙인이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유대 대중들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와 율법체제 안에서 자신들의 삶을 자포자기(自暴自棄)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유대 대중들의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기력이야말로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세력들의 술수이고 음모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이고 무엇을 했을까? 예수는 광야의 고행자 세례요한과 정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와 고아와 세리와 죄인들, 심지어 창녀들까지 서로 어울려 먹고 마시고 즐겼다. 그러자 유대군중들은 ‘사람의 아들은 먹보요 술꾼이다,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라고 비아냥거렸다. 한편 세례요한에게는 고독한 유대광야가 활동무대였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써 갈릴리 하층 민중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운동을 실천행동 했다.
또 한편 세례요한은 유대 민중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날을 위한 회개’를 요구했다. 그런데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세례요한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날은 ‘하나님이 친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날’이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수에게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빠’이다. 예수에게 하나님나라는 ‘아빠의 나라, 아빠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고통 받은 민중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며 함께 연대하는 아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은총의 나라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아빠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잔치이다.
이와 관련하여 세례요한은 유대 민중들에게 ‘죄 탕감을 위한 회개의 물세례’을 베풀었다. 하지만 그는 유대 민중들의 실체적 삶의 마당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며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공동체 삶을 살았다. 곧 예수와 민중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삶을 공유하며 실천하는 한 식구였던 것이다. 예수는 날마다 가난한 민중들과 공동밥상을 차렸다. 예수는 갈릴리 민중들의 친구이고 동지이며 한 밥상머리 식구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유대 군중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세례요한에게 ‘그가 귀신들렸다’라고 비난하다가도,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를 보고는 ‘사람의 아들은 먹보요 술꾼이다,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유대 군중들은 고독한 광야의 고행자 세례요한을 거부하고 밀쳐냈다. 또한 가난한 민중과 세리와 죄인과 창녀까지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공동체밥상을 즐기는 예수마저도 거부하고 밀쳐냈다. 마치, 장터에서 어떤 놀이를 해도 흥미가 없고 무관심하며 무감각한 아이들과 똑 같았다. 놀이를 즐기려는 아이들이 혼인잔치를 흉내 내어 피리를 불어도 거기에 맞추어 흥을 내고 춤을 추지 않는다. 그래도 놀고 싶은 아이들이 이번에는 초상집을 흉내 내어 애곡을 해보지만, 그에 따라 가슴을 치고 슬퍼하지 않는다.
이와 똑 같이 예수시대의 유대 대중들은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기력한 세태를 그냥 받아들이고 따랐다. 예루살렘 성전제사와 율법체제의 굴레를 쓰고 살아가는 유대 대중들에게 세례요한과 예수는 반 종교, 반체제의 이단아(異端兒) 일뿐이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유대 대중들의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기력의 태도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와 율법체제에 예속된 그들의 삶의 행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본문비유에는 유대 민중들을 향한 예수의 애끓는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아 있다.
맺는 말
이제, 21C 우리시대의 예수 신앙인들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과 창녀의 친구라는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갈릴리 민중들과 공동밥상을 차렸던 예수의 편’에 굳게 서야한다. 그 예수와 손을 잡고 다함께 삶의 연대를 맺어야 한다. 우리 시대의 고단한 삶의 마당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며 조롱받는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시대의 무관심과 무감감과 무기력한 세태를 끝장내야 한다. 21C 우리시대의 교회가 맘몬(자본)지배체제에 종속되어 자기중심성의 아집과 편견을 진리인양 수호하려는 신앙행태를 변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의 삶의 스승이고 친구이며 주님이 되시는 예수의 은총을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