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경제 한파가 만들어 준 사장님자리
IMF 경제 한파가 만들어 준 사장님자리
25살 청년 김철웅(가명)씨는 충청도 고향 시골마을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구미공단으로 떠났습니다. 가난한 농가의 3남 2녀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상 초등학교를 마치고 형님과 같이 농사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시골에서 농사일로는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었습니다. 일거리를 찾아 객지로 나온 김철웅씨는 구미공단에서 공원생활을 하기도 하고 건축 일용노동을 하기도 하면서 도회지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30세 때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슬하에 딸 둘을 두었습니다.
김철웅씨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한 후에 부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부산에 내려 간 후 얼마 안 있어서 첫째 딸을 태어났고 연이어 둘째 딸도 태어났습니다. 김철웅씨는 부산에서 한동안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몇 차례 직장을 옮기다가 철강회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김철웅씨는 철강회사에 입사한 후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김철웅씨는 철강회사에서 일을 하며 철을 다루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철을 다루는 일이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IMF 경제 한파가 만들어 준 사장님
그러다가 김철웅씨가 입사한지 10년쯤 지났을 무렵 회사가 갑자가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다니던 철강회사는 한보철강에 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이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한보철강으로부터 납품대금을 제때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직원들의 월급도 한 달 두 달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77년 IMF 경제 한파가 절정을 이루던 때에 한보철강은 최종부도가 났습니다. 이후 김철웅씨가 다니던 철강회사마저 부도위기에 내몰렸습니다.
회사가 부도위기에 내몰리면서 김철웅는 10년 동안 정들었던 직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IMF 경제 한파가 극성을 부리던 때에 갑작스레 직장을 잃게 된 김철웅씨는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배운 기술이라고는 오직 철을 다루는 것밖에 몰랐던 그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김철웅씨는 우선 다급한대로 일용건축노동을 하며 실직의 위기를 넘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건축 일용노동마저도 IMF 경제 한파로 인해 일거리가 줄어들어 노는 날이 다반사 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김철웅씨는 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사업을 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김철웅씨는 IMF 경제 한파 속에서 폐업한 김해시의 한 공장을 보증금 1,500만원에 월50을 주기로 하고 임대를 했습니다. 김철웅씨일행은 공장을 임대한 후 ‘삼성비철금속’이라는 작은 철강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렇게 회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김철웅씨는 퇴직금으로 받은 돈 1,500만원을 모두 투자하였습니다. 그리고 가건물을 짓고 지게차를 구입하는 등 사업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습니다. 이때 김철웅씨는 ‘한국주택은행’과 ‘삼성생명보험’으로부터 자금을 빌렸습니다. 또한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보증을 받아 ‘부산은행’ 김해지점에서 사업운영자금을 융자받았습니다.
이처럼 김철웅씨일행은 사업경험도 없고 자기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오직 성실하게 일하면 모든 것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으로 시작한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김철웅씨의 사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공장의 위치가 김해시청으로부터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는데도, 주민들의 반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 용광로에 불을 지피기만 하면 그 연기를 보고 주변 주민들이 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주민들의 민원제기를 받은 김해시청 환경과에서는 그때마다 조사를 나와서 벌금을 매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제때 물량을 대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었고 거래처 주문물량들이 자꾸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직원월급과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관리비 부담이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김철웅씨의 철강회사는 부도를 맞이하게 되었고 1999년 폐업신청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회사가 폐업한 후 부채를 못 갚게 되자, 김철웅씨가 담보로 제공했던 22평 아파트는 경매로 날아갔습니다. 김철웅씨는 배우자와 두 딸아이를 데리고 40만 원짜리 월세 방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그러는 중에 날이면 날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보니 배우자와의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로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철웅는 사업 실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낙담과 절망감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우자와의 갈등은 그에게 더 큰 고통을 더하는 꼴이었습니다. 이렇게 1년여가 넘도록 김철웅씨는 배우자와 갈등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허송세월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더해지는 고통들
그러다가 김철웅씨는 아는 선배로부터 해외취업 제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철웅씨는 조금이라도 빚을 갚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저 없이 금속계통 직종으로 사우디아라비아현장에 해외취업을 나갔습니다. 김철웅씨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두 딸아이의 아버지로서 다시 한 번 떳떳하게 살아보겠다는 의지에 불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외취업을 한 지 3개월 만에 신장염이라는 몹쓸 병에 걸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김철웅씨는 더 이상 일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사우디에서 일단 응급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도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김철웅씨는 완전히 노동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배우자와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김철웅씨는 배우자와 합의 이혼을 한 후 혼자서 충청도로 고향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신장병이라는 것이 이식을 받기 전에는 낫지 않는 불치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틀에 한 번꼴로 투석을 하지 않으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지고 심하면 목숨을 잃기도 하는 병입니다. 다행히도 김철웅씨는 신장장애2급 판정을 받았고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투석 등 신장치료를 받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빚독촉은 빗발치고
지금이라도 김철웅씨는 빚을 갚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아직까지도 그는 본의 아니게 채무를 못 갚게 된 것에 대해서 마음속 깊이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김철웅씨는 2급 신장장애자입니다. 김철웅씨는 이틀에 한번 꼴로 병원에 가서 신장투석을 받지 않으면 죽은 목숨입니다. 한번 신장투석을 받는데 약4시간정도 걸리는데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빚 독촉은 끊이지 않고 극성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김철웅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김철웅씨는 생목숨을 끊는 것이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옳은 일도 아니라고 믿습니다. 언젠가는 그에게 신장이식기회가 오리라고 소망합니다. 오늘도 김철웅씨는 결코 미래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하루의 삶을 몸부림으로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철웅씨는 불치의 신장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도 법원에 개인파산면책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성심으로 파산면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상황에 절망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실천행동에 나서려고 합니다. 부디, 법원이 김철웅씨의 처한 상황을 헤아려서 파산면책이라는 관대한 결정을 내려 주시기를 고대합니다.
추가: 김철웅씨는 2012년 법원의 파산면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14년 봄 무렵 신장이식수술도 받았습니다. 김철웅씨는 어떤 뇌사자분의 신장을 기증받았는데 수술결과가 아주 좋습니다. 지금은 수술 후 아무런 부작용 없이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아가 지금 김철웅씨는 60대 초반 이지만 미래의 새로운 경제활동에 대한 기대와 의지를 다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