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 25-36
시작하는 말
교회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위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그 십자가의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힘써서 이것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회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교회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고백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하나님나라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목수 일을 하시며 가족을 돌 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나라사역을 시작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세리와 창녀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들의 삶의 마당에 참여하여 그들에게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받는 세리와 어부를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섬김과 나눔과 봉사의 삶을 통하여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 끝내는, 십자가위에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으심으로써 이웃사랑의 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참 스승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사람 비유가 교회에게 지시하고 있는 이웃사랑입니다. 이것을 바로 ‘디아코니아’라고 말합니다.
이점에서 여러 성서학자들은 교회의 참된 모습을 두 개의 양쪽 바퀴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한쪽 바퀴는 말씀의 바퀴인데 ‘케리그마’입니다. 이 말의 뜻은 “외치다 선포하다” 라는 뜻입니다. 곧 복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깨닫고 세상에 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한 바퀴는 섬김과 나눔의 바퀴인데 ‘디아코니아’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섬김 나눔 봉사’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이 가난한 자와 어린이와 고아와 과부 죄인들과 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말씀의 바퀴’와 ‘섬김과 나눔과 봉사의 바퀴’가 나란히 잘 굴러가야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끄는 말
이와 관련하여 착한 사마리아사람 비유말씀에는, “‘참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세 가지 질문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질문은, 어떤 율법사가 자신의 율법지식과 신학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자신을 뽐내려고 던진 질문입니다. 사실 율법사 내심으로는 이 질문의 정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써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따름으로써 밤낮으로 정결하고 의로운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날에, 메시아의 날에, 모든 죄인들이 심판받고 멸망 받는 가운데 영광스럽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영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사의 신앙입니다. 무한한 자부심이며 자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이 율법사의 질문을 통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에 대한 사랑은 추상적이며 개인적인 독백이 아닙니다. 하나님 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되어지고 증명되어 져야만합니다. 그래야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웃사랑은 교회의 외적인 모습이거나, 행위이거나, 사회적인 정의이거나, 도덕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교회의 이웃사랑은 우리가 몸으로 봉사하고 물질을 나누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영생의 문제입니다. 바로 우리와 우리의 이웃의 구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사람 비유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구절은 성서 헬라어 용법에서 ‘이중 명령형’ 혹은 ‘조건 명령형’이라고 합니다. “~해라,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웃사랑을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명길이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 우리 이웃들의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 모두의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복음적인 이웃 사랑은, 우리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온전한 하나님 사랑과 참된 이웃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율법사는 퉁명스럽게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가 섬기고 나누고 봉사해야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사랑하고 좋아합니까? 늙으신 부모님?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부모님보다는 자식들을 더 사랑합니까? 아무랬거나, 우리는 가족을 사랑합니다. 또한 친족들이나 친척들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나와 같은 교회 성도님들, 나의 구역식구들,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에게 관심을 갖거나, 그분들을 좋아하고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마을 사람들, 같은 직장 동료들, 같은 학교 동창들, 같은 직업의 친목 계원들 등, 자주 만나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을 좋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착한 사마리아사람비유에서 율법사는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고 질문했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의 율법사들은 바리새인들 중에서 유대인들 중에서 뛰어나게 경건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율법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매일 세 차례 기도를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온갖 절기를 지켰습니다. 십일조와 또 매 삼 년마다 구제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도 의롭다고 생각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의롭다고 구별되어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죄인이나 세리나 창녀, 고아와 과부나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지도 않고 가까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칭 타 칭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율법사와 그 율법사의 이웃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자들 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자랑스러운 이웃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에, 율법사는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병든 자와 가난한자와 약한 자의 친구임을 자처하시는 예수님께 으스대며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이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사람비유에 나오는 여리고 길은 매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높은 고지대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낮은 요단강 변에 있는 여리고를 향한 내리막 길 이었습니다. 이 길의 언덕 편에는 수많은 석회암 동굴이 있어서, 그곳에서 강도들이 숨어 쉬면서, 강도질할 대상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에서도 어떤 유대인이 이 길을 지나다가 강도를 만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강도 만난 사람을 통하여,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뽐내며 자랑하듯 질문하는 율법사에게, “어떤 사람이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율법사의 마음에 있는 그의 이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의롭고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죄인과 창녀와 사마리아인과 이방인과는 완전히 구별된 온전한 유대인들입니다. 율법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친구들은 그저 동냥이나 주고 외면해야 할 대상이지 결코, 이웃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이웃은, 율법사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정치․경제․사회․종교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인이고 가난하며 힘이 없는 약한 자들이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에서와 같이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참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율법사나 제사장이나 서기관들 등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사람 비유말씀을 보십시오. 강도 만난 사람의 곁을 누가 제일 먼저 지나갑니까?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상징으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 체 멀찍이 피해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율법사나 예루살렘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사람이나 들짐승이나 시체를 만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사장 성결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죽은 사체에 4큐빗(2.2m) 이내로 접근하면 부정을 탑니다. 또한 제사장의 그림자가 시체를 덮기만 해도 부정을 탑니다. 혹여 바위나 나무그림자가 시체를 덮고 있을 경우 그 그림자 안으로 들어서기만 해도 부정을 탑니다. 나아가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주는 동안에 그가 죽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부정을 타게 되고 그 부정함을 씻는 기간 동안 제사장 직무를 수행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사에서 나오는 제사장 몫의 제물들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성결법이 옳다고 여기십니까? 말도 안 되는 종교규범으로 인해 사람이 사람다움을 외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요? 여기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사람 비유의 제사장의 삶의 태도를 통하여 헛된 종교윤리를 핑계로 하나님의 주신 불쌍히 여기는 사람본연의 양심을 저버리는 이들을 통렬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두 번 째 로 강도 만난 사람의 곁을 지나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레위인 입니다. 레위인 역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상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고 섬기도록 선택받은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마땅히 율법과 제사법에 따라 정결한 생활을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착한 사마리아사람 비유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누구입니까? 율법사를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수긍을 했을 까요? 아닙니다. 거룩한 제사장을 저렇게 불의한 사람으로 표현하다니! 그리고 레위인 마저! 라고 하면서, 율법사와 유대인 청중들의 마음은 매우 불편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세 번 째 강도만난 사람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누가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유대인 청중들은 다음 등장인물은 당연히 어떤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유대인이 와서 이 강도만난 자에게 선행을 베푼 다면 율법사와 유대인 청중들이 그나마 위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누가 등장합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놀랍게도 유대인 대신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유대인 대신에, 유대인들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짐승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사마리아사람이라니! 율법사와 청중들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사마리아 사람은 앞서서 등장한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강도 만난 자를 못 본체 지나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운 후에 주막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고, 이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경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겨”라는 말은 신약성서원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ὶζομαι)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애간장이 타는 듯하다’ ‘내장이 녹는 듯하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삶의 고난과 절망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 앞에서는, 율법도 제사의 규칙도 세상의 의 모든 가치도 체면도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유대인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너무도 어이가 없고 놀라운 일이라서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끓는 사랑의 마음 앞에서, 그들이 지금까지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온 율법과 제사의 규칙과 모든 정치․경제․사회․종교적 가치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허탈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어떻게 저 짐승만도 못한 사마리아인이 제사장과 레위인과 유대인을 제치고 저런 선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율법사는 더 더욱 놀라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의 패거리 동료들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뽐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으스대던 율법사에게 천둥 같은 세 번째 질문을 들이댑니다.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자신과 자신의 패거리 동료들의 의로움을 뽐내며 그들 서로 간에 베푼 선행과 구제를 자랑하기 위하서 거들먹거리며 ‘내 이웃이 누구이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이 강도 만난 사람처럼 ‘죄인이고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사람들을 위해서, ‘누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겠느냐’라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2ㅣC 금융자본경제체제에서 세상은 온통 강도 만난 자들뿐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사회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은 맘몬(자본)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사탄인 맘몬(자본)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과 정신을 짓 눌러 온갖 상처를 입히고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본의 탄압을 받아 감옥에 갑니다. 어떤 이는 물질이 없어 굶주림을 당합니다. 누구는 치료비가 없어 죽을 질병치료를 포기합니다. 또 누구는 자본의 유혹을 받아 영과 육이 피폐해 집니다.
맺는 말
오늘 누가, 우리시대에 이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오늘 기독교인의 신앙의 진정성은 다음 세 가지 지표에서 잘 드러납니다. 첫째는 ‘로고스’<λόγος>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두 번째는 ‘파토스’<πάθος>우리 이웃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입니다. 세 번째는 ‘에토스’<ἔθος>우리의 신앙과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최후의 만찬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오늘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사람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배웁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의 참된 신앙의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내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습니다.”라고 응답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합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증명해 보입시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우리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인 것을 온 세상에 나타내 보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