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신약성서

부활신앙 - 갈릴리 민중의 아들 나자렛 사람 예수의 부활

희년행동 2022. 7. 15. 23:03

갈릴리 민중의 아들 나자렛 사람 - 예수의 부활

요한복음 20:24-29

 

읽기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열둘(제자) 중 한사람이다.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했다.

우리가 주님을 뵈었다네!”

그러자 도마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그분 손에 못 자국을 볼 수도 없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 안에 넣을 수도 없고,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볼 수도 없다면, 나는 결코 신앙하지(믿지) 않겠다!”

여드레 후, 예수의 제자들이 다시 ()안에 있었다. 그리고 도마도 그들과 함께 했다. 문이 잠겨져있었는데도 예수께서 오셔서 한 가운데 서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에게 평화!”

그러시고는, 예수께서 도마를 부르셨다.

그대의 손가락을 이리로 내밀어서 내 손들을 살펴보라! 또한 그대의 손을 내밀어서 나의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러니, 그대는 신앙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 오직 신앙의 사람이 되라!”

도마가 응답했다. 그리고 그가 예수께 고백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를 신앙했는가? 복되어라!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이들, 그러면서 신앙하는 이들이여!”

 

낱말풀이

 

* 디두모스 δίδυμος 두 배, 쌍둥이, ‘도마라는 아람어 이름을 헬라어 음역인 듯하다.

* 에오라카멘 ωράκαμεν 우리가 뵈었다네!, ‘ὁράω바라보다, 또는 우러러보다.

* 에안 메 이도 Ἐάν μή ἴδω 만약 내가 볼 수 없다면, ἴδω - ἔιδω의 가정법, ‘에이도’ ἔιδω 보아서 알다 = εδον 보다 + οδα 알다 로 이루어진 합성어

* 에이레네 휘민 Ερήνη μν 여러분에게 평화!

* 메 기누 아피스토 μή γίνου πιστος 신앙 없는 사람이 되지 마라! 아피스토스 πιστος신앙 없는 사람 = ἀ 부정접두어 + πιστός 신앙의

* 아페크리테 πεκρίθη 응답했다. ἀπό ~부터 + κρίνω 선택하다 로 이루어진 합성어

 

 

말씀풀이 들어가는 말

 

성서의 대부분은 이야기이다. 성서는 다양하고 잡다한 여러 인물 군상들의 신앙서사로 가득 차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바울 등등 이 그렇다.

그런데 성서의 모든 이야기에는 상부구조가 있고 하부구조가 있다. 이야기의 상부구조는 그 시대의 종교와 관념과 사상, 시류와 사회윤리를 형상화 한다. 반면에 이야기의 하부구조는 삶의 마당이다. 기독교인들은 성서 이야기의 상부구조만을 해석함으로써 교리 신앙과 종교 신화를 꾸미고 만들어내는데 몰두해 왔다.

그러나 21C에 이르러는 성서이야기의 하부구조인 삶의 마당을 적극 해석함으로써 오늘 우리시대의 삶의 질문에 답하고, 우리의 신앙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 때이다.

 

이끄는 말

 

그러한 관점에서 본문말씀은 도마 이야기이다. 구체적으로는 도마와 갈릴리 민중의 아들 나사렛 사람 예수의 부활, 그리고 그에 따른 도마의 신앙 삶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도마는 누구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의 신약성서 정경 안에서는 마땅한 답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초대 기독교에 안에서는 현재의 경전 이외에도 다양하고 잡다한 기독교문서들이 존재했었다. 그것들 중에서 도마와 관련된 것으로는 도마행전 있었고, 지난 세기에 발견된 도마복음이라는 문서도 있다. 본문말씀에는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를 단 한번만 만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도마가 썼다는 도마행전(Acts of Thomas)에는 예수의 십자가에 처형과 부활 이후 여러 차례 도마를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나아가 도마행전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도마를 인도에 보내어 전도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인도 북부 타지마할(Taj Mahal) 인근의 화테푸르 시키리(Fatehpur Sikiri)에서 발견된 돌비석에도 적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도마가 인도를 거쳐 가야 시대에 한국에 와서 김해를 중심으로 전도를 했다는 주장까지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김수로왕의 묘석에 오병이어에 대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일부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AD 70년 유대전쟁 전후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야고보와 도마가 이끌었던 예수공동체 사람들이 예루살렘 예수공동체를 적극 지원했던 시리아 북방의 에데사왕국으로 거점을 옮겼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그리고 4세기 초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도 이미 예수 당대에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와 역사적 예수와 본인 사이에 구체적 서한의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에데사의 문서 보존 창고에서 아브가르왕과 예수 사이에 오간 편지를 기록한 시리아문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한다. 그는 그 문서들을 시리아어로부터 희랍어로 번역해놓았다. 그 중 예수의 답변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나를 보지도 않고 나를 믿는 그대여, 복이 있도다. 나에 관하여 이미 기록된 바,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으려 하지 않고 나를 보지 않은 자가 오히려 나를 믿고 생명을 얻는다 하였도다. 그대가 나에게 왕진을 요청하며 쓴 것에 관하여, 나는 먼저 이곳에서 내가 보내진 사명을 완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리노라. 이곳에서 나의 임무가 완수되면, 나는 나를 보낸 그이에게로 다시 들리우리라. 내가 들리울 때 나는 나의 제자 중 한 사람을 그대의 고통을 고치기 위해 파견하리라. 그는 그대와, 또 그대와 같이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리라.”

도마복음서에서는 야고보와 도마가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정통지킴이로 등장한다. 또한 살로메(Salome)와 마리아(Mary) 등 여성들이 진실한 제자를 대변하여 예수께 올바른 질문들을 던지기도 한다. 반면에 베드로와 마태 등 집단적 제자들(the disciples)’은 항상 어리석은 질문들을 던진다. 한마디로 도마 전승그룹은 현재의 전통교회가 배척하는 이단 예수그룹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도마에 대한 정경 이외의 문서들의 기록은 참고 사항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신약성서로부터 잘못 해석된 도마라는 인물상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본문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의심 많은 도마가 옳은 것일까? 그러나 본문말씀에서 도마는 소심하지도 유약하지도 의심쟁이도 아니다. 도리어 도마는 열성적이고 적극적이며 과단성 있는 사람이다. 본문말씀에서 도마, 디두모스(δίδυμος)’라는 이름이 이러한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디두모스 - 쌍둥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두 배의 사람 , 두 몫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제자그룹 중에는 열심당원들이 있었다고 믿는다. 대표적으로는 셀롯당원또는 열심당원라는 별명을 가진 시몬이다. 또한 가롯유다베드로도 열심당원으로 분류한다. 나아가 도마역시도 열심당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들 열심당원들은 로마제국에 굴복하지 않고 로마제국에 세금 바치기를 거부했다.(12:13,17) 또한 새로운 다윗이 출현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열망했다. 나아가 이들은 때가 이르면 무장봉기를 통하여 메시야왕국을 건설하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신약성서 안에서는 이러한 도마의 인물상을 분명하게 언급한 곳은 전혀 없다. 도리어 도마는 예수의 제자단을 나열하는 곳에서(10:3, 3:16, 6:15) 아무런 수식어도 없이 이름만 나타나 있다. 또한 이렇게 나열된 제자단 끝에는 항상 예수를 파는 자가 될 가롯유다가 언급된다. 도마 등 비주류 제자그룹에 대한 의도적인 폄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 11:16, 14:5에서는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도마가 가장 독특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드러낸다. 요한복음 11장을 살펴보면, 지금 당장 예수와 친밀한 베다니 마을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들은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한다. 이 소식을 듣고 예수는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다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이 달려들어 예수를 말렸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했었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십니까?”(요한복음11:6-) 사실 그때 가보았자 나사로는 죽었을 터이고, 실제로도 예수가 도착했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어 장사된 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예수의 유대 땅 행보를 말리려는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친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어쩌면 도마는 예수님이 부득불 죽을 자리로 가시려 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다 가서 같이 죽자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도마의 이 외침은 예수의 유대 행보를 빈정대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의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해지는 것은, 도마가 어떠한 경우라도 예수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려는 의지가 분명했다는 사실이다.

또 도마는 사리분별과 결단에 있어서 자기 의지가 확고한 사람이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일과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하는 이유, 그리고 이후에 되어 질 일들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 그 때 예수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리고 내가 다시 오겠다. 내가 가는 곳과 그리로 갈 수 있는 길을 너희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고 하셨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의 그 알다가도 모를 말씀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마는 그냥 넘어 갈 수 없었다. 도마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께 물었다. “주여,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요한복음 14:5). 그러자 예수께서 도마에게 이렇게 답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로써 도마에게는 예수를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해졌다. 예수처럼 생각하고 결단하며, 예수처럼 살고 행동하는 것이 진리이며 생명이다. 누구든 예수의 말씀과 삶과 행동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하고 누리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러한 도마의 삶의 마당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가 로마제국의 정치범으로, 로마제국의 빌붙어먹고 사는 유대지배계층에 의해 유대 종교사회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십자가에 처형된 이후, 예수의 제자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이런 저런 계기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제자들이 다시 하나 둘 모여들었다. 도마 역시도 그 소문을 듣고 다시 모여든 제자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그러나 도마는 아직 부활하신 예수를 대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뵈었다네라고 증언을 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떤 부활의 예수를 보았을까? 이와 관련하여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노라고 증언하는 제자들의 말에는 호라오’(ὁράω 바라보다, 우러러보다)라는 동사가 사용된다. 풀어서 해석하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는 했으나, 그 예수가 자신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던 그분이었는지, 바로 삼일 전 로마제국의 정치범으로 유대종교사회 불순분자로 몰려 처참하게 십자가처형을 당한 갈릴리 나사렛사람 그 예수인지, 확인을 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도마는 한사코 이렇게 명토 박아 말한다. “내가 그분 손에 못 자국을 볼 수도 없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 안에 넣을 수도 없고,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볼 수도 없다면, 나는 결코 신앙하지(믿지) 않겠다! ”

이 때 도마가 말한 헬라어 문구가 에안 메 이도 (Ἐάν μή ἴδω) 만약 내가 보아서 알 수 없다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에이도’<ἔιδω>라는 헬라어 동사는 (에이돈 εδον 보다 + 오이다 οδα 알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한마디로 도마에게 예수의 부활은 로마제국의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그 예수의 부활이어야 했다. 로마제국에 빌붙어 사는 유대지배계층에 의해 유대 종교사회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십자가에 처형된 갈릴리 민중의 아들 나자렛사람 그 예수의 부활이어야 했다. 도마에게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이 땅의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던 갈릴리민중의 아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하나이다. 갈릴리 민중의 아들로써 이 땅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계시자인 예수가 시대의 지배자인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과 무관한 부활신화는 참된 부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마에게 있어서 이러한 부활신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예수는 민중의 아들로써 시대의 지배체제인 로마제국과 이에 빌붙어 사는 유대지배계층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로 예수의 부활신앙에 핵심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도외시한 관념적이고 교리적인 부활열망으로 인해,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금관의 예수가 난무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말씀의 도마에게 현현하신 부활예수사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본문말씀의 예수부활 현현사건이야말로 예수시대 예수의 부활현장을 직접목격하지 않은 인류에게 예수 부활신앙진리의 절정이며 결정적 매듭이다.

본문말씀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부활사건 여드레 후, 예수의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였다. 그리고 도마도 그들과 함께 했다. 문이 잠겨져있었는데도 예수께서 오셔서 한 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에게 평화!” 그러시고는, 예수께서 도마를 부르셨다. “그대의 손가락을 이리로 내밀어서 내 손들을 살펴보라! 또한 그대의 손을 내밀어서 나의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러니, 그대는 신앙 없는 이가 되지 말라! 오직 신앙의 사람이 되라!”

예수는 도마에게 신앙 없는 이가 되지 말고 오직 신앙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신앙 없는 이는 무엇이고, 신앙의 사람은 무엇일까? 예수의 부활신화만 있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금관의 예수만 있다. 또한 자기 삶의 마당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만 있고 예수의 부활현현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예수신앙이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예수의 부활신화만을 떠들어대는 사이비종교 장사꾼들의 삶의 마당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사실이 분명해진다.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만 천착하는 이들의 삶의 마당에서도 예수신앙은 외피에 불과하다.

본문말씀에서 분명한 강조점은 신앙의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이 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가 (기누 γίνου - 너는 (신앙의 사람이) 되라)이다. 그런데 본문말씀의 기누라는 헬라어 동사의 원형은 기노마이’(γίνομαι는 중간태 디포넌트 재귀형 수동태 스스로 애써서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부활 신앙의 사람은 예수부활신화를 듣고 그저 고개한번 끄덕이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부활 신앙의 사람은 단 한순간의 황홀한 영적(종교적)깨달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불활 신앙의 사람은 시대의 구조적 불의와 죄악에 대한 처절한 죽음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대안세상으로 부활하는 사람이다.

도마는 로마제국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실체적으로 확인한 후 즉시 이렇게 신앙을 고백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러한 도마의 신앙고백은 여타 다른 제자들에게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실존적인 신앙고백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시대의 불의와 죄악으로부터 십자가 처형을 당한 갈릴리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곧 도마의 부활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도마가 응답했다라는 동사는 아페크리테’(ἀπεκρίθη = 아포 πό부터 + 크리노 κρίνω 선택하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이렇게 도마의 예수부활신앙은 로마제국과 거기에 빌붙어 사는 유대지배계층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갈릴리나사렛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시대의 불의와 죄악으로부터 십자가처형을 당한 갈릴리 민중의 아들 나사렛사람 예수를 통하지 않은 예수부활신화는 거짓이다. 그러한 부활신화는 시대의 불의와 죄악들을 은폐하는 종교적 장식물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세상을 속이고 현혹하려는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금관의 예수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대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를 신앙했는가? 복되어라!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이들, 그러면서 신앙하는 이들이여!”

이제 도마의 예수부활신앙,’ 로마제국의 십자가에 처형당한 갈릴리민중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부활이라는 실존적 부활신앙은 이후의 모든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으로 유전되었다. 예수 시대 이후의 예수를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모든 기독교인들도 도마의 실존적 예수부활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오늘 21C의 한국 기독교인들도 도마처럼 십자가처형당한 갈릴리민중의 아들 나사렛사람 예수에 대한 실존적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시대의 불의와 죄악에 맞서서 십자가의 처형된 갈릴리민중의 아들 나사렛사람 예수의 부활은 누구에게 행복한 하늘의 은총이다.

 

맺는 말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4.16 세월호참사 진도 팽목항 현장을 다녀오려고 애쓴다. 우리 모두는 아직 4.16세월호참사로 인해 비탄에 잠겨있다. 속속 밝혀지는 진상을 통하여 세월호참사가 오늘 한국사회의 구조적 폭압과 불의와 죄악들로 인한 것임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불의와 죄악들로 인해 참사를 당한 이들이 새로운 세상의 아들딸로 부활하기를 기도한다. 또한 우리도 불의와 죄악된 세상에 대하여 죽고 생명과 평화, 정의의 세상을 이루는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