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사람, 맨 사람, 엘리야의 야훼신앙 - 절뚝발이 대중들의 회심을 위하여!
들사람, 맨 사람, 엘리야의 야훼신앙 : 절뚝발이 대중들의 회심을 위하여!
열왕기상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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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왕이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냈다. 또한 예언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았다.
그때 엘리야는 그 모든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외쳤다.
‘여러분!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릴 작정이오? 만약, 야훼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분 뒤를 따르시오. 반대로 바알이라면 그를 쫓으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엘리야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낱말풀이
* 엘리야 : ‘엘리야후 אֵלִיָּהוּ’, 풀어서 새기면 ‘나의 하나님의 야훼시다’
* 언제까지 : ‘아드 마타이 עַד־מָתַי ’ - 언제까지? 얼마동안?
* 양다리 : ‘세이핌 סְּעִפִּים’ - 나무의 갈라진 부분을 이용하여 만든 ‘목다리’
* 머뭇거릴 작정이오 : ‘포세힘 פֹּסְחִים’ - 쩔뚝이다. 머뭇거리다.
* 그분 뒤를 따르시오 : ‘레쿠 아하라부 לְכוּ אַחֲרָיו”
들어가는 말
20C 한반도 이 땅과 이 땅 붙박이 사람들은 동북아시아 지정학적 위기와 갈등 속에서 고난과 절망의 백년세월을 보내왔다. 이제 21C 이 땅과 이 땅에 매여 사는 사람들,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할 상황들과 시간들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해방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위한 국민주권 공동체의 존망이 지구촌 제국주의 전쟁광들의 망언망동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다.
이제, 20C 혹독한 제국주의 세월과 군사독재 속에서 그나마, 이 땅의 민초들이 피땀으로 일구어온 모든 사회․경제․공동체적 가치와 업적들이 깡그리 무너진 지금. 21C 대한민국 사회는 돌이킬 수조차 없을 만큼 깊고 큰 사회․경제․공동체 위기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국가와 민족 차원에서도 그렇고, 사회․공동체 차원에서도 그렇다. 나아가 개별 집단들 차원에서도 그럴 뿐만 아니라,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한 사람의 개인차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21C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의 자리는 돌이킬 수조차 없을 만큼, 위기와 절망의 그늘이 깊고 크다.
물론, 이 땅의 1% 독점재벌․대기업․특권․기득권세력들은 살판이 났을 수도 있다. 그들은 지난 20C 내내 누려보지 못했던 맘몬․자본 사적국가 시장독점 무한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또한 지구촌 제국주의와 독점재벌․대기업 사적국가에 충성하는 ‘소수의 마름 관료들과 마름 엘리트 정치․종교․언론인들도 ’불의하고 사악한 시대의 운 때를 즐거워 할 것‘이다. 오직 소수의 특권․기득권 부류들만의 희희낙락 사익추구와 사적권력이 난무한다. 어쩌다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실제로, 21C 들어 우리는 여러 차례 절차적 민주주의 선거를 치르고도 여전히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자본 지배체제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국민주권을 깡그리 무시당하고 있다. 독점재벌․대기업․특권․기득권세력들의 사적국가 권력과 시장 독점권력 횡포로 인해 모든 서민들이 죽을 만큼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국정운영 권력을 사적권력으로만 인식하는 여의도 정치모리배들과 공권력을 시장에 내다바치려는 환관관료 무리들의 맘몬․자본 지배체제에 대한 충성경쟁이 21C 이 땅에 판치고 있다. 이 무리들은 한결같이 사익을 위해 뭉치고,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무소불위로 행동한다. 이 무리들의 반생명, 반평화, 반인권 패륜 행태로 인한 지금의 우리사회 상황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무엇보다도 21C 지금 이 땅에는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자본 지배체제를 거스르고 국민주권을 받들어 위기와 절망의 사회․경제 상황을 씻어낼 만한 정치세력이 없다. 이러한 사실이 21C 지금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종교․문화․교육․언론․정치 등 모든 부분의 엘린트 주도세력들의 삶의 행태로 보아, 그들에게는 진실과 거짓에 대한 경계조차 없다. 이제야말로, 이 땅의 붙박이 민중들의 국민주권행사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이 땅의 붙박이 주민인 우리 스스로 국민주권을 결단하고 행동하며 전파해야한다.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경험, 이성과 감성, 더하여 신앙과 역사를 통한 깨달음 조언 등, 우리의 모든 삶의 요소를 총동원하여 국민주권을 실천행동 해야 할 때이다.
이와 관련하여 요즈음에 나는 ‘시대의 언어로 성서를 읽고자’ 노력한다. 내 나름의 신앙과 역사로 성서 본문을 읽고 시대의 언어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할 때, 역사실증주의로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성서의 역사는 ‘한 처음’부터이다. 성서 속에서, 인류가 수렵과 채취를 시대를 지나 농경시대로 접어든 이후까지 모든 인류사를 다 읽어내고 상상할 수 있다. 역사 실증주의와 역사과학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듯이, 성서역사의 빛을 따라 성서를 읽다보면, 한 무리의 제국주의 약탈권력과 제국주의 종교들이 서로 뒤엉킨 지배체제 내부자집단을 만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늘의 생명은총, 자연과 생의 속절없음과 절절함 등을 신화화, 종교화, 자본화, 권력화 한다. 성서는 ‘그들 무리들이 민중의 삶을 약탈하고 채무노예화 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증언한다. 대표적으로는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 지배체제 건설의 과정들인데,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증언되어 있다.
물론 성서는 대부분 그 시대의 권력계층 내부자들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그들은 성서의 진실을 바꾸고 왜곡하며 제멋대로 재해석 하곤 하였다. 그렇더라도 성서가 문서 이전 시대마다의 민중들의 삶과 신앙역사라는 진실은 너무도 또렷하다. 성서는 수 천 년에 거쳐 수많은 시대와 사람들의 삶과 신앙과 역사를 담았다. 성서는 수많은 시대의 기록자들의 손을 거쳐서 지금까지 이르러 왔다. 그러는 가운데 성서는 시대의 제국주의와 맘몬․자본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담았다. 그렇듯이 히브리 성서 출애굽기는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 지배체제를 뒤집어엎는 야훼신앙 전개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 노예들이 어떻게, 노예제국 파라오의 지배체제에 저항하고 탈출하며 투쟁했는지? 성서는 히브리 노예들의 야훼신앙을 통하여 인류역사 속에서의 저항신앙, 해방신앙, 정의와 평등신앙, 생명평화신앙 등 ‘참 사람됨의 신앙영성’을 여실히 증언한다.
그러므로 애당초, 민중의 삶을 약탈하고 굶주림을 만들며 가난하게 하는 것이 시대의 제국주의와 지배체제 종교권력의 생태적 기능과 작용이라면, 그래서 모든 민중들을 채무노예화 하고 통제하며 지배하는 것이 권력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인류사 안에서 종교와 교육과 문화와 언론과 법 등 모두가 시대의 지배체제의 내부자라면, 참 사람됨의 올곧은 신앙은 오직 ‘저항신앙’뿐이다. 나는 ‘성서가 여실히 참 사람됨의 올곧은 신앙으로써 저항신앙 진실을 증언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저항, 또는 저항신앙이 사람됨의 전부이다. 저항이 생명의 한 처음이다. 저항이 생명의 자궁이고 탯줄이며 탄생이다. 성서가 이를 여실히 증언한다. 한 처음에, ‘생명 없음’에 대한 처절한 저항이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생명 없음’을 무찌르심으로써 저항의 바람, 영의 바람, 생명바람이 되셨다. 찬란한 태초의 역사, 천지창조의 역사를 이루셨다.
그러나 이제 21C에 이르러,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종교와 국가권력은 공공연하게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내부자임을 천명한다. 지구촌 제국주의와 독점재벌․대기업과 관료들과 종교․사회특권․기득권세력들이 한 통속으로 시대의 지배체제가 되었다. 국가, 종교, 정치, 교육, 언론, 문화 등 온 사회가 맘몬․자본 지배체제 돈 저울대에 올라 스스로 몸값을 매긴다. 국가, 공권력이 자본에게 팔린다. 정치도 자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값을 쳐달라고 조른다. 종교와 언론도 맘몬․자본을 무소불위 하나님으로 떠받들며 자기 몫을 주장한다.
이제 다시, 야훼 하나님의 해방신앙, 정의평등신앙, 생명평화신앙, 저항신앙을 간구할 때이다. 저항이 모든 살아있음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살아있기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사람은 마땅히 저항신앙으로 일상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 돈벌이도 저항신앙으로 해야 한다. 교육, 문화, 종교생활도 저항신앙이 핵심이다. 선거도 정치도 저항신앙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한 저항신앙 선택과 찬성은 뒤로 미루어 둘 수 있다. 그러나 반인권, 반생명, 반평화 등 우리시대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사회공동체 죄악들에 대한 저항신앙 실천행동은 결코 뒤로 미룰 수 없다. 우리의 사람됨의 저항신앙이 뒤로 밀리는 때부터 우리의 생은 낡아지고, 좀 먹고, 닳아 없어질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이끄는 말
히브리 성서 본문에 나타난 북이스라엘 시대상황은 21C 한반도 우리시대 상황과 판박이 같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북이스라엘의 시대상황을 살펴서 우리시대의 온전한 저항신앙의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본문말씀에서 세 부류의 인물 군상에 따르는 시대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아합왕과 바알예언자들을 통한 시대상황을 살펴보자. 아합왕은 북이스라엘 왕조역사에서 처음으로 대를 이어 왕권을 이어간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이다. 그런데 ‘오므리’라는 이름은 이스라엘민족에게는 낯선 이름이고 북이스라엘 유력가문 족보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출신이 확실하지 않고, 어느 지파에 속하는지, 부모와 가족이 누구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오므리는 아바비아 출신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오므리는 이방인으로서 북이스라엘 왕국의 용병이었을 텐데, 군 내부에서 성공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군사령관 직위에 올랐고 왕궁 내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틈타 군의 지지를 얻어 왕으로 옹립 되었다.
그러나 오므리왕은 북이스라엘의 야훼신앙 전통에서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외국인 용병인 오므리는 야훼신앙을 지켜내기 위한 보루로써 북이스라엘 전통 지파동맹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또한 오므리와 그를 따르는 군대는 야훼신앙 지파동맹 전통에 따르는 민병대가 아니라, 왕국의 상비군으로써 국경 최전선을 지키는 용병군대이었다. 당연히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반발과 그로 인한 내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오므리의 적수는 북이스라엘 지파동맹 민병대를 이끄는 ‘기낫의 아들 디브니’였다. 이 내전은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최후의 승자는 오므리였다.
오므리왕은 북이스라엘의 오랜 수도였던 디르사를 떠나 개인 돈을 들여 ‘사마리아 산’을 매입해서 성을 쌓고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옮겼다. 또한 야훼신앙과 지파동맹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오므리의 정책은 소제국주의 다윗왕조의 통치정책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이로써 북이스라엘의 야훼신앙과 지파동맹 전통은 엄청난 ‘위기의 때’를 맞이하게 되었다.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야훼신앙과 지파동맹 정체성은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야훼신앙과 지파동맹 전통에 따르는 민병대조직은 해체 되었고, 왕조의 상비군 및 사병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북이스라엘 민중들도 너나없이 야훼신앙을 버리고 풍요다산의 신 바알을 숭배했다. 이러한 북이스라엘 야훼신앙 위기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왕 때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아합왕은 페니키아 두로왕 에드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 시대의 두로는 지중해를 제패하고 해상 제국주의를 구가하던 도시국가였다.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여러 곳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지중해 해상무역을 독점했다. 거래 상품들도 자주색 옷감, 목재, 밀, 기름, 포도주 등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돈이 남는 장사는 지중해에 흩어진 섬들과 식민지 주변에서 약취 유인한 약탈노예들의 거래였다.
아합왕은 일찍이 소제국주의 다윗왕조 솔모몬왕이 그랬듯이 해상제국 두로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 부를 축적하고 힘을 키워 나갔다. 그를 바탕으로 주변 소왕국들을 정벌하거나 규합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맹주역할을 자임했다. 앗시리아 제국 문헌에도 ‘오므리의 집’이라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아합왕이 주변 12개 왕국을 규합하여 반앗시리아 동맹을 맺고 앗시리아와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 무렵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석비에는 시리아 오른테스강 중류지역에서 반앗시리아 동맹군과 벌인 ‘카르카르’전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페니키아 두로 왕국도 팔레스타인 지역 소제국주의 강국 북이스라엘 아합왕에게 이세벨공주를 시집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합왕과 두로왕국은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상호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이익을 도모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비자리에 오른 이세벨은 페니키아에서 수많은 바알 예언자들을 초빙했다. 또한 사마리아 성 안에 바알신전과 아세라 신상을 세우고 바알종교 부흥에 박차를 가했다. 나아가 북이스라엘 전역에서 야훼 예언자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바알’이라는 이름은 주인, 특별히 땅에 대한 주인 이라는 뜻인데 가나안의 토착 신들의 주신(主神)이었다. 또 다른 신명 ‘아스다롯’은 생산의 여신인데 ‘바알’의 짝으로 숭배되었다. 이 여신의 이름은 종종 ‘아세라’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바벨론 제국에서는 ‘이슈타르’라고 불리며 전쟁의 여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두 번째 들사람, 맨 사람, 야훼 신앙 수호자 엘리야를 통한 시대상황을 살펴보자. 엘리야는 어떤 사람일까? 구약성서는 엘리야를 ‘길르앗의 디셉사람’이라고 한다. 길르앗은 요단 동쪽 북이스라엘의 변두리 지역으로서 아직 심각하게 바알종교화 되지 않은 땅이었다. 엘리야는 구약성서에서 때와 장소에 대한 언급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아합왕과 맞선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자신은 야훼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선언하며 아합왕의 악행과 우상 숭배 죄악으로 인해 앞으로 몇 해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로 인해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엘리야는 요르단 강 동쪽 광야에 위치한 그릿 시내에 숨어 지냈다. 엘리야는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들이 떨어뜨리는 식량을 주어먹고 생명을 유지한다. 한마디로 엘리야는 ‘들사람, 맨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다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섞이지 않는 ‘들사람’, ‘맨 사람’이다. 이 점에서 신약성서는 세례요한을 예수의 선구자로 내세우면서 엘리야를 들먹인다. 히브리 성서 이사야 40장의 구절들을 들어 세례요한을 신약시대의 엘리야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다. 엘리야 자신도 스스로 ‘야훼 하나님 앞에 서서, 야훼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살아계시는 야훼 하나님으로 맹세하며 예언 한다’고 선포한다. 이 후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서 북이스라엘 야훼신앙의 존망을 가르는 바알신앙과의 한판 큰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북이스라엘에 몇 해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다. 아합왕은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고 여기고 궁내 대신 오바댜를 대동하고 엘리야를 찾아 나섰다. 아합왕을 만난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서 자신과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 450명과의 희한한 종교대결을 제안한다. 이어서 벌어지는 갈멜산 위에서 야훼신과 바알신의 대결은 서로의 목숨을 건 피 말리는 대결이었다. 하지만 엘리야는 상대에 대한 조롱과 여유를 통하여 자신만만하게 대결을 이끌어 갔다. 결국 갈멜산 위에서의 세기의 종교대결은 대규모 보복학살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갈멜산의 희한한 종교대결과 그 결말로서의 피의 보복살육 사건은 히브리 성서 본문말씀의 의미를 넓히고 키우며 널리 전파 시키는 배경이야기일 뿐이다. 아마도 갈멜산 대결에서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불벼락 위세와 피의 보복살육 사건은 북이스라엘 야훼신앙인들의 위기와 절망에 대한 대중 포퓰리즘 수사(修辭)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성서는 이에 대한 뚜렷한 증언으로 ‘갈멜산 사건 이후 곧바로’ 엘리야가 만나 뵙게 되는 야훼 하나님의 실체를 소개한다. 엘리야는 갈멜산 대결이후 곧바로 열왕기상19:10-13에서 ‘폭풍과 지진과 불벼락 속에서’ 야훼 하나님의 실체를 찾았지만 야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도리어, 엘리야는 폭풍과 지진과 불벼락의 위세가 아니라, 나약하고 조용하며 부드러운 소리로 오시는 야훼 하나님을 절절하게 체험한다. 나아가 엘리야는 특별히 자신만이 야훼 신앙에 열심을 내었을 뿐이고, 다른 모든 야훼 선지자들은 칼에 맞아 죽었으며, 오직 홀로 자신만 남았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야훼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은 칠천 명의 민중 야훼 신앙인들이 남아 있다고 선언하신다.
세 번째, 갈멜산으로 몰려온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삶의 상황을 살펴보자. 이와 관련하여 야훼신앙 예언자 엘리야의 저항 신앙 투쟁의미는 오로지 ‘갈멜산으로 몰려온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야훼신앙 의지’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북이스라엘은 소제국주의 다윗왕조와 갈라서서 처음부터 야훼신앙 공동체사회 건설을 천명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건국이후 야훼신앙을 바탕으로 바알 등, 이방 신앙을 받아들이는 종교혼합주의가 성행했다. 이른바 양다리 걸치기인데,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 전통이 북이스라엘 권력자들의 소제국주의 왕정국가 건설을 거부하기 때문이었다. 야훼신앙의 지파연합 전통은 왕권으로 권력과 부가 집중하는 것을 방해했다. 특별히 야훼신앙 전통의 핵심인 토지법은 부와 권력을 사유화하며 독점하는 강력한 왕권 탄생을 원천 봉쇄해 왔다. 그렇지만 북이스라엘 건국초기의 잦은 왕권교체 시기를 지나 군사정권인 오므리왕조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해방과 자유, 사회 정의와 평등을 중시하는 야훼신앙은 억압을 받았고 부와 권력의 집중을 부추기는 바알신앙이 장려 되었다. 아합왕 시대에 이르러는 지중해 해상제국 두로 왕국출신의 왕비 이세벨을 통하여 적극적인 바알신앙 선교와 야훼신앙 탄압정책이 실행되었다. 마침내는 북이스라엘 야훼신앙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북이스라엘 시대상황 속에서 개최된 갈멜산의 종교대결 상황을 살펴보자. 이 대결사건은 북이스라엘 왕국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써 북이스라엘 사회․종교․정치․경제 정체성을 가름하는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북 이스라엘이 야훼신앙 전통에 따르는 지파동맹 및 민병제도를 통하여 야훼신앙을 회복할 것이냐? 아니면 예전의 소제국주의 다윗왕조 솔로몬왕국처럼 강력한 왕권과 지배체제에 의한 온 국민 노예화를 통하여 소제국주의 왕권국가로 갈 것이냐? 라는 절체절명의 신앙 갈림길이었다.
따라서 엘리야의 이러한 무모하고 비상식적인 종교대결 제안 배경에는 야훼신앙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야훼신앙 정체성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엘리야의 기대는 그저 개인적인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북이스라엘 대중들은 이미 야훼신앙이냐, 바알신앙이냐의 양자택일보다는 양다리 걸치기에 익숙해 있었다. 본문은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이러한 삶의 상황을 나무의 갈라진 곁가지 부분을 이용하여 만든 ‘목다리 – 세이핌’을 통하여 증언한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민중들에게 목다리를 짚고 쩔뚝이는 ‘포스힘 - 양다리 걸치기 신앙 삶’을 청산하라고 요구하였다. 엘리야는 제국주의 바알신앙과 야훼 신앙사이에서 머뭇거리다 못해 양다리를 짚고 쩔뚝이는 민중들의 모습에서 절망감을 느꼈다. 북이스라엘 대중들은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의 야훼신앙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제국주의 맘몬․바알 신앙으로 크게 치우쳐 있었다. 북 이스라엘 민중들은 야훼신앙을 배신하지도, 제국주의 바알신앙을 포기하지도 못하는 진퇴양난 신앙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21C 지구촌 제국주의와 독점자본․대기업 지배체제 아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은 감히 대놓고 맘몬․자본 권력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은 이쪽저쪽으로 쩔뚝거리는 양다리 걸치기행보가 불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야훼냐? 바알이냐?’에 대하여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제국주의 맘몬․바알 하나님을 숭배할 것이냐?’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의 야훼 하나님을 따를 것이냐?’ 21C 대부분의 대중들은 마음속으로 ‘이러한 요청이야말로 무례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그저 회피해야 할 괴로움 정도로만 여길 뿐’이다. 본문의 갈멜산 종교대결을 구경하러 왔던 북 이스라엘 민중들이나, 21C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임금노예, 채무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민중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자본 지배체제에서 맘몬․자본 권력에게 목숨 줄이 잡혀 살아가는 민중에게는 ‘침묵이 최고의 처세술’일 것이다. 갈멜산에 구름처럼 모여든 북 이스라엘 민중들은 ‘야훼신앙이냐, 바알신앙이냐’ 중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엘리야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엘리야는 야훼신앙에 대한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지만 말짱 헛일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아합왕 시대의 북 이스라엘 민중들은 이미 오래전에 야훼신앙을 내다 버렸다. 그것은 종교로써 뿐만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해방과 구원의 하나님, 정의와 평등의 하나님과 맺은 모든 삶의 언약을 버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땅에 대한 사회․공공성을 포기하고 땅을 사유화하고픈 욕망, 풍요와 다산의 바알종교와 짝짝 꿍하며 땅의 모든 소산을 독점하고픈 욕망이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삶속에 뿌리깊이 자리 잡았다.
21C 우리시대의 지구촌 제국주의와 독점자본․대기업 지배체제에서 우리시대의 교회와 교우들의 신앙과 삶의 태도도 본문의 북이스라엘 민중들과 똑 같다. 21C 교회와 교우들의 신앙 삶 속에서는 이미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은총을 계승하고, 지속적으로 체현해내려는 신앙의지와 용기와 은총을 완전히 상실했다. 도리어 우리시대의 교회와 교우들의 신앙태도는 야훼 하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며 화나게 할 뿐이다.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의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맘몬․자본을 숭배하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제국주의 맘몬․바알 하나님을 야훼 하나님이라고 거짓 선전하고, 거짓 증언하는 죄악을 저지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21C 우리시대의 대중들도 독점재벌․대기업 지배체제에서 밤낮으로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 자본주의 욕망 이데올로기를 학습한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끊임없이 자본주의 성공신화로 세뇌를 당한다. 21C 대중들과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이러한 맘몬․바알숭배 신앙과 삶의 태도로 인해 야훼 하나님께서는 당황하시고 초조해 하시지 않으실까?
이렇듯이, 본문에서 북이스라엘 민중들의 삶은 소제국주의와 바알종교에게 약탈당했다. 그것은 야훼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다. 북이스라엘 민중 스스로 소제국주의와 바알종교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1C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삶도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바알종교에게 약탈당했다. 21C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야훼신앙을 버리고 약탈자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내부자들이 되었다. 우리시대의 교회와 교우들은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바알을 숭배하며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야훼신앙의 삶을 버렸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안정과 번영과 풍요를 위해서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자본을 생활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어마어마한 착각이다. 지구촌 제국주의 맘몬․자본 숭배종교의 무한경쟁과 독점과 축적과 소비의 영역,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맘몬․자본 숭배종교의 삶의 영역에 들어선 이상, 맘몬․자본은 우리의 삶과 영혼의 주인이다. 지구촌 제국주의 맘몬․자본 숭배종교의 영역에서 노예적 삶을 사는 자라면 누구라도, 다시는 맘몬․자본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정당한 노동과 은사’가 아닌 ‘돈과 힘과 권력’을 마땅한 삶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 도리어 분에 넘치는 돈과 힘과 권력은 사람을 노예로 부릴 뿐이다.
본문에서 북이스라엘 민중들은 엘리야의 ‘야훼냐? 바알이냐?’라는 결단요구를 삶의 괴로움으로 받아들인다. 북이스라엘 민중들은 ‘야훼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북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신다’라고 발뺌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소제국주의 맘몬․바알 숭배종교에 삶의 고삐가 잡힌 북 이스라엘 민중들은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 맘몬․바알 은총을 야훼 하나님의 하늘 은총처럼 누구나 골고루 누릴 수 있겠는가?”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 맘몬․바알 세상의 성공신화 이데올로기로 야훼신앙을 덮어서 포장하려는 종교 사기꾼들의 술수에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지구촌 제국주의와 맘몬․자본 숭배제단 앞에 서서 야훼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의 괴로움을 강조하며, 교우들을 겁박하는 설교자는 야훼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야훼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고난당하는 시대의 민중들을 괴롭게 하시고 심판하신다고 히브리 성서 예언서를 읽으면 엄청난 신앙의 오류를 겪게 된다.
21C 지구촌 지배체제와 독점재벌․대기업 지배체제에서 우리에게 닥친 삶의 고난과 절망의 핵심은 맘몬․자본 숭배신앙을 쫓아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 노예적 삶을 지향하는 우리의 신앙행태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를 배반하는 삶의 자리와 돈벌이행태, 사회․정치에 대한 입장과 태도 등이 우리를 스스로 괴롭게 한다. 생명과 평화의 야훼 하나님을 배반하는 우리의 신앙행태가 우리 삶의 괴로움과 절망과 죽음의 씨앗이고 열매이다. 일찍이 성서는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 해방공동체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들, 안식년과 희년과 토지법과 이자금지법을 통해 21C 우리 시대의 사회 상황과 삶의 자리를 경고 하고 있다.
맺는 말
21C 이 땅의 청춘들은 우리시대의 사회상황을 ‘헬조선’이라고 정의한다. 지금 우리는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폐해를 고스란히 당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구촌 제국주의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실체를 직시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이제야 말로 결단의 때가 되었다. 광장과 일터와 생활 속에서 꺼지지 않는 저항신앙의 촛불을 밝혀야 한다.
백만 천만 촛불혁명 이후, 스물 스물 군사독재정권 반신반인 박정희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지구촌 제국 미국의 친절한 파시즘 정권이 이 땅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지 않은가? 이 땅의 대부분의 서민들이 1,5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에 치여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1% 독점재벌․대기업의 곳간에는 1,000조원에 가까운 현금 다발이 쌓여있지 않은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갚기 위해 생계비마저 줄이고 있다는 가계부채 한계가구 가운데 70% 이상이 가계소득만으론 빚을 갚을 수 없어 ‘빚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져야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무한경쟁하고, 독점하며, 쌓고, 낭비하는 맘몬․자본주의 삶의 방식이 그 한계에 봉착했다.
이제야 말로 결단의 때가 왔다.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 공동체 신앙 삶을 결단해야만 할 때이다. 그러할 때 야훼 신앙으로 돌아서려는 우리의 결단을 어렵게 하는 중대한 유혹이 있다. 야훼 신앙과 맘몬․자본 숭배신앙을 혼합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청산해야만 한다. 들사람, 맨 사람,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섞이지 않는, 우리 시대의 야훼 신앙인들이 나서야 할 때이다. 고난과 위기와 절망의 바닥으로부터의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들사람, 맨 사람, 야훼 신앙인이 그립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야훼신앙의 희망이 남아있다. 남겨 진이들, 이 땅에는 아직 맘몬자본 숭배 신앙에 물들지 않은 야훼 신앙인 칠천 명이 남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