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구약성서

야곱의 씨름 : 브니엘 -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맨 얼굴!

희년행동 2022. 7. 18. 10:37

야곱의 씨름 : 브니엘 -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맨 얼굴!

창세기 32:22-33

 

 

읽기

 

야곱이 그 밤에 일어나, 그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명 아들들을 데리고 얍복강 나루를 건넜다. 야곱은 그들을 데려다가 강을 건너게 한 다음, 그에게 딸린 모든 것들마저도 강을 건너보냈다. 그런 후, 야곱은 홀로 남았다.

그런데 어떤 이가 야곱과 더불어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벌였다. 그는 야곱에게 이기지 못하는 것을 겁내서 야곱의 넓적다리뼈를 쳤다. 그렇게 그가 야곱과 더불어 씨름을 벌이는 가운데, 야곱의 넓적다리뼈가 어긋나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동이 터오니 나를 놓아다오!”

야곱이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당신을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다.

야곱입니다

그가 말했다.

다시는 네 이름이 야곱이라고 말해지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이 간청하여 말했다.

제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너는 내 이름을 묻느냐?”

그리고 그는 거기서 야곱에게 복을 주었다.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 야곱은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구나! 그러고도 내 목숨이 살아났구나라고 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태양이 그에게로 솟아올랐다. 야곱은 그의 넓적다리뼈(어긋남) 때문에 절뚝거렸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사람들이 오늘날까지 넓적다리뼈의 힘줄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야곱의 넓적다리뼈 힘줄을 쳤기 때문이다.

 

낱말풀이

 

* 마아바르 얍복크 מַעֲבַר יַבֹּֽק : 얍복 나루 요단강 동쪽지류인 얍복강은 건기에는 작은 시내이었다가 우기에는 급류가 흐르는 강이 되기도 한다.

* 레바도 לְבַדֹּו : 홀로

* 베카프 예레코 בְּכַף־יְרֵכֹו : 넓적다리(윗부분 오목한 곳)

* 이스라엘 יִשְׂרָאֵל : 그가 하나님과 싸울 것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싸우시기를

* 야곱 יַעֲקֹב : 속이다, 또는 발뒤꿈치를 잡다

* 프니엘 פְּנִיאֵל : 하나님의 얼굴

* 이제라흐-יִּֽזְרַֽח־לֹו : 야곱에게로 솟아올랐다.

 

 

시작하는 말

 

1997IMF 외환위기로부터 20여 년 동안 이어져온 21C 대한민국의 사회경제 위기상황. 이 위기 상황을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만약, 21C 이 땅에서 희희낙락 나홀로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 체제의 최고 수혜자일 것이다. 이 땅의 0.01% 독점자본가이거나 그 독점자본에게 꼭뒤 잡힌 언론지식인정치꾼관료마름들이 그런 부류들이다. 실제로, 지금의 조국 법무장관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듯이, 21C 한국사회에는 독점자본의 하수처리장 머슴살이 마름계급 사이에서 처절하기 짝이 없는 계급세습 투쟁이 적나라하다. 진보든, 꼴보수든 21C 신 계급중산층, 독점자본의 머슴살이에서 떨쳐지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참으로 안쓰럽다.

이렇듯이, 21C 대한민국은 극단적인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양극화문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있다. 직업, 소득, 자산, 교육, 취업 등, 우리사회 정치경제문화종교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가 세계최고 수준에 이르러 있다. 참으로 허망하게도 IMF 이전, 너도 나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뽐내온 그 많던 중산층 가장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다. 이제, 대다수 서민들이 빈곤층인 가운데 중산층으로 오를 사다리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소수 대기업 정규직 등, 중산층이라고 말하기조차 멋쩍은 임금노예들은 상류층 계급으로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저 21C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 체제에서 자신들의 한치 앞도 장담하지 못할 운 때를 감지덕지 즐거워할 뿐이다.

그러므로 21C 오늘, 이 땅의 서민들에게는 한숨과 눈물조차 말라 비틀어진지 오래다. 눈을 비비 뜨고 있는 순간에는 단 일 분 일초도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이 땅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졸업 때까지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를 학습한다. 태어나서부터 자라고 성인이 되어 경제활동을 하는 온 생()이 생존경쟁 전쟁터이다.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에서 단 한차례라도 실패하면 평생을 가난과 채무노예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눈뜨면 일어나서 죽기 살기로 경쟁하고, 피투성이 되어서야 눕고, 피투성이로 일어나 또 싸워야 한다. 21C 오늘, 이 땅에서 발 딛고 사는 모든 이들이 삶으로 학습하고 경험하는 생의 현장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21C 대한민국 사회경제 위기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이어야 할까? 21C 한국교회는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결코 내어놓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독점재벌친일친미반공수구 기득권 지배체제의 주요한 내부자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21C 오늘에 이르러서도, 한국교회는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맨 앞장 길 놀이패다.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의 불의한 승리와 독점 권력과 부의 쟁취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선동 한다. 교회가 스스로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에 기생하여 대형화와 독점화를 이루고 종교권력과 부를 쟁취하며 이를 세습한 후 사유화하고 있다.

이렇듯이 21C 한국교회도 대한민국도 아예 싹수가 노랗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를 살면서 우리의 몫이상의 쓰임과 필요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이 모으고 쌓고 증식함으로써, 가난한 이웃들의 생명의 몫을 빼앗는 죄악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 체제 속에서 이러한 죄악들을 정당하고 여기고 당연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경쟁과 거래의 대상으로 여기고, 서로에게 빚을 지우며, 사익과 착취를 위한 종속관계를 구축하는 일에 골몰한다. 그로 인해 가난한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를 지고 절망의 나락에 빠져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시대의 불의한 빚쟁이이며장물아비로써 우리 이웃들의 쓰임과 필요를 빼앗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워, 채무노예화 하는 반인권반사회적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21C 오늘, 우리의 미래가 있을까? 미래를 다른 말로 하면 희망일 텐데, 오늘 우리의 위기와 절망과 고통이 너무 깊고 커서 일망의 희망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의 억압과 착취가 언제 끝날지, 어디로부터 희망을 찾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거기에 더해 오늘 대한민국 모든 국가권력기관들은 하나같이 마피아 시스템에 함몰되어 있다. ‘내 편 아닌 놈은 다 쫓아내자! 소수자불순분자들은 다 잡아넣어라! 좌파 없는 깨끗한 사회를 건설하자!’ 참으로 무섭기만 한 세상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21C 오늘 이 땅에서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 오라기 희망의 끈이라도 그냥 놓아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점에서 희망(希望)이란, 애초에 희소하기 때문에 희망이다. 그러므로 이제, 21C 우리시대 맘몬(자본)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서로 사랑 사회공동체 의존경제 구축을 제안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하여 사회공동체 의존경제 실천항목들을 생각한다.

- 서로의 필요와 쓰임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

- 우리의 노동과 달란트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쓰임과 필요에 참여하는 것

- 민생복지 사회공동체투쟁을 통하여 서로의 미래를 서로에게 의존하는 것

- 사회공동체 의존경제 구축을 통하여 맘몬자본권력을 해체하는 것

- 맘몬자본권력 해체방법 :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탕감하는 것.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야곱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 그 가운데서 벌어지는 야곱의 자기성찰 씨름, 야곱이 새롭게 맨 얼굴의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 등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21C 이 땅에 사는 이들이 본문을 통하여 시대의 위기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끄는 말

 

야곱은 한국교회에서 성공과 축복이라는 긍정적 이미지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야곱의 축복이라는 유명한 복음성가가 나왔다.

너는 담장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푸른 열매처럼~”

그러나 실제로, 구약성서에서 야곱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넘쳐나는 사람이다. 야곱은 고대 가부장사회에서 차남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사람이다. 야곱의 부정적인 생애는 이 차남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늘어졌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약삭빠른 사기꾼으로 살았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을 속여 장자의 권리를 사들였다. 뿐만 아니라 늙은 아버지마저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다. 청장년시절에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주술적 술수를 부리는 등, 외삼촌의 재산을 가로채는 일에 골몰했다. 야곱의 이러한 삶의 행태는 철저하고 악착스러운 사기꾼의 모습 그대로이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야곱의 부정적인 삶의 태도가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삶의 위기와 절망과 고통을 자세하게 보고한다.

이렇듯이, 야곱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부정적인 삶의 태도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위기상황 속에서 끈질기게 생존투쟁을 벌이며 삶을 이어왔다. 그러한 야곱의 생 가운데서 본문은 야곱에게 몰아닥친 가장 급박하고 절망적인 삶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동안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본가에서 쫓겨나 멀리 외삼촌 라반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한 채 살아 왔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외삼촌에게서 마저 쫓겨나 목숨을 걸고 형 에서에게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형 에서가 가병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향하여 출병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야곱은 형 에서의 출병소식을 접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과 위기감에 휩싸여 헤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야곱은 평생 사기꾼으로 살아왔던 처세술에 따라 약삭빠르게 행동한다. 먼저, 야곱은 형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들을 두 떼로 나누어 번갈아 보낸다. 그리고 형에서의 본거지와 지척인 얍복강 나루에 이르러는 아내와 자식과 온 재산을 다 건너보내고 자신만 홀로 뒤쳐져 남았다.

그렇다면, 야곱은 왜 홀로 뒤쳐져 남았을까? 상황을 살펴보다가 끝내는 혼자라도 도망쳐 목숨만이라도 보전하려고 했을까? 일부 성서해석자들은 야곱의 성품으로 보아 능히 그럴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의 앞뒤 문맥으로 미루어보아 그러한 해석은 좀 과도한 것 같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힘들고 급박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맞아 한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어떤 꼼수와 술수로도 이 위기와 절망을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야곱은 앞뒤 좌우가 전혀 보이지 않는 처절한 절망과 위기감에 휩싸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어떤 알 수 없는 신적 존재가 야곱을 덮치고, 야곱은 그와 더불어 한판 생사를 가르는 씨름을 해야만 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야곱을 덮친 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성서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가설들로 설명한다. 야곱을 덮친 이가 하나님이라거나, 또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해석하는 이가 있다. 또한 얍복강 지역을 지배하는 토지 신, 즉 땅 귀신이라는 해석도 많다. 나는 본문에서 야곱을 덮친 것은 야곱 자신의 절망과 위기, 그에 따르는 야곱의 절절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형상화라고 이해한다. 아니면 지금, ‘야곱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과 공포, 그 자체에 대한 표상으로써 마귀일수도 있다. 무엇이었든 간에 야곱에게 있어서 본문에서의 알 수 없는 신적 존재와의 씨름은 생사를 건 절체절명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이렇듯이, 야곱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 속에서 이 신비한 씨름이 얼마나 처절했던지, 야곱은 자신의 넓적다리뼈가 어긋난 상황에서도 결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끝판에 가서는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온 이가 야곱을 향하여 이렇게 통사정을 한다.

동이 터오니 나를 놓아다오!”

야곱이 대답한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당신을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그 알 수 없는 이가 묻는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이 대답한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 알 수 없는 이가 선언한다.

다시는 네 이름이 야곱이라고 말해지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야곱이 간청한다.

제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십시오!”

그 알 수 없는 이가 대답한다.

무엇 때문에 너는 내 이름을 묻느냐?”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이가 그 자리에서 야곱을 축복한다.

이렇듯이 본문에서 야곱은 자신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에 맞대응 하여 참으로 고통스러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본문에서 야곱을 덮친 이가 야곱의 위기와 절망, 그에 따르는 절절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형상화인지, 아니면 양면 모두에 대한 형상화인지알 수 없다. 야곱을 덮친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야곱은 자신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에 맞서서 고통스러운 싸움을 벌였다. 실제로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자신에게 닥친 위기와 절망과 고통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신앙에 따라 생사를 건 자기와의 싸움, 자기성찰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특별히 21C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야곱을 뛰어넘는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신앙 삶의 마당을 꾸려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에 대응하는, 생사를 건 자기와의 싸움 끝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고, 깨달아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찾게 된다.

그러나 만약, 스스로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을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피해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결말을 그려 낼 수 있을까? 생의 실패자로 전락하거나, 위기와 절망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등.. 어찌되었든 본문의 내용과는 정 반대되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야곱은 본문에서 자신에게 몰아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와 절망을 말끔하게 해소시킬 수 없었다. 야곱은 여전히 자신과 가족이 모두 살육 당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 속에 놓여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놓은 모든 재산을 속절없이 약탈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자신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 앞에서 도망가지 못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특기였던 음모와 술수에 의지하지도 못한다. 이제 야곱은 온전히 절망한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온 사기꾼 기질과 자신의 모든 능력마저 포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절망과 포기의 맨 밑바닥에서 가까스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맨 얼굴을 만난다.

그러므로 야곱은 바뀐다. 절체절명의 위기와 절망 속에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맨 얼굴을 대면한 야곱의 인생자체가 바뀌었다.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먼저, 야곱의 이름이 바뀌었다. 야곱이라는 옛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다, 속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야곱은 태어날 때 쌍둥이로 태어나면서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과 다투었다. 그 다툼에서 밀리자, 엄마뱃속에서 나올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야곱은 신체적인 조건과 가부장사회의 절대적 서열에서 뒤처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형과 경쟁을 시도했다. 그는 경쟁과 투쟁심이 지나쳐 속임수를 썼고, 그로인해 평생 목숨마저 위태로운 위기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여기서 야곱의 바뀐 이름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싸우다, 겨루다라는 의미이다. 야곱은 일생일대의 위기와 절망에 맞대응하여 인간적인 음모와 술수, 경쟁심과 투쟁심을 포기했다. 대신에 야곱은 자신에게 닥친 위기와 절망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의 씨름(싸움)을 벌였다. 이와 관련하여 야곱 이전의 옛사람들은 아무도 야곱처럼 직접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을 해본 이가 없다. 동서고금의 어떤 종교라도, 어떤 사제라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기를 싫어했다. 그저 하나님을 성전이나 교리 속에 가두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소원성취를 빌고, 제사상이나 바치면 그뿐이었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21C 우리 시대의 교회들도 하나님을 예배당과 교리와 성서 안에 가두어 둘 뿐이다. 예배와 설교와 찬양을 통하여 요란하고 화려한 종교 과소비 성찬을 차려놓고 헛된 맹신을 뽐낼 뿐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에게 몰아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와 절망과 고통 앞에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 그때에 이르러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인간적인 위기와 절망과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 또한 더 크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이라면 21C 우리시대의 폭력과 억압,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서 더 큰 의지와 용기를 갖고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할 때 예수 신앙인들은 예수의 정의와 평등, 하나님의 생명평화 세상을 이루어 가는 힘과 용기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주는 신앙은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절체절명의 위기와 절망 앞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야곱은 위기와 절망 속에서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정치종교이데올로기에 휩싸여 두려움과 절망에 떨게 된다. 그렇게 야곱은 스스로의 절망과 두려움과 씨름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야곱은 온갖 두려움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심판과 징벌의 하나님을 만나 밤새도록 투쟁을 벌였다. 야곱은 이 싸움의 결과를 통하여 스스로의 위기와 절망과 고통을 진솔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점에서 야곱은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구나, 그러고도 내 목숨이 살아났구나라고 부르짖는다. 야곱은 위기와 절망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맨 얼굴을 대했다. 고대의 가부장적 종교이데올로기, 폭력과 억압, 심판과 징벌이라는 제국주의적 종교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지고,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하나님의 맨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맨 얼굴을 만나고 나서 그 곳을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이라고 불렀다. 사실, 구약성서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맨 얼굴을 보는 순간 죽어야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정면으로 만나 교제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거나, 멀리서 받들어 모실 뿐,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독점한 종교엘리트들과 지배계층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자신의 위기와 절망 속에서 생사를 건 자기성찰을 통하여 심판과 징벌과 진노의 하나님이라는 가면을 벗겨냈다. 한마디로 야곱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위기와 절망과 고통을 사람과 더불어 겪으시고, 함께 아파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절체절명의 위기와 절망 속에서 스스로의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에 대항하여 생사를 건 싸움 끝에, 새로운 하나님의 맨 얼굴을 대하게 된 야곱의 오늘을 찬란한 아침햇살로 묘사하고 있다.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야곱의 그 찬란한 브니엘의 아침 풍경을 상상해 보라. 밤새도록 죽기 살기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야곱.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고 자신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과 고통 속에서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낸 야곱. 그 아침에 저 멀리 대지위로 점점 높게 솟아오르는 태양, 그 찬란한 태양이 야곱을 향하여 달려오는 가운데, 야곱은 따뜻한 아침햇살을 맞으며 자기 길을 간다. 그 찬란한 야곱의 브니엘의 아침을 우리의 아침으로 만들자.

그렇다면, 브니엘사건 이후의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본문말씀 이후, 야곱은 그 지긋지긋한 차남 콤플렉스에서 벗어난다. 약삭빠르고 악착스러운 성공집착의 투쟁심을 벗어던진다. 속이고 훔쳐서라도 소유하려는 탐욕에서 해방된다. 이렇듯이, 변혁된 야곱의 삶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는 성서의 장면이 있다. 야곱은 말년에 생을 의탁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내려갔다. 이집트제국 파라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는 야곱의 모습을 보라! 야곱은 아무런 두려움도 공포도 없다. 비굴하지 않고 오만하지도 않다. 아무런 지식도 명예도 없는 민중이며 촌로이지만, 파라오를 비롯한 이집트제국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다.

야곱은 이집트제국 파라오의 도움을 구하러 왔지만 도리어 파라오를 축복하는 사람이 된다. 제국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심판과 징벌과 공포의 하나님과 싸워 이긴 사람으로서, 온갖 정치종교이데올로기 가면이 벗겨내어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맨 얼굴을 대면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지혜와 겸손한 축복의 능력을 양도 받은 신앙인으로서, 야곱의 인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몸짓을 건넨다.

 

맺는 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여러 번의 위기와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와의 싸움, 자기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신앙을 발견하게 되고 그로인한 신앙의 성장을 이루게 된다.

야곱이 그랬다. 벧엘의 돌베개를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자신과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았다. 에벤에셀 광야의 돌기둥을 통하여 늘 연약한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 만났다. 그리고 마침내 본문에서 야곱은 온갖 정치종교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가면을 벗겨낸 맨 얼굴의 하나님을 대하게 되었다. 야곱은 자신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의 절망과 두려움과 증오와 공포와 싸워 이겼다. 그러면서 야곱은 자신의 삶의 위기와 절망과 고통에 참여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아침햇살처럼 빛나는 맨 얼굴의 하나님을 만났다. 야곱은 새롭게 만난 맨 얼굴의 하나님으로부터 정의로운 힘과 능력, 선한 의지와 용기를 전수 받았다.

이제 21C 오늘,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몰아닥친 위기와 절망과 고통을 정면으로 맞이해 보자. 우리 모두 다 함께, 우리시대의 위기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맨 얼굴을 뵈올 수 있게 되기를..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복을 덧입게 되기를.. 그래서 21C 우리시대의 독점자본 시장경쟁체제의 폭력과 억압과 죽음의 세상에서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21C 우리시대 아침햇살처럼 빛나는 맨 얼굴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