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구약성서

카인의 표 : 형제살인의 추억 - 21세기 지구촌 민중들의 자화상(自畵像)

희년행동 2022. 7. 18. 10:53

카인의 표 : 형제살인의 추억 - 21세기 지구촌 민중들의 자화상(自畵像)

창세기4:1-24

 

읽기

 

사람이 그의 아내 하바를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바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았다. 아이를 낳은 후, 하바가 외쳤다.

내가 야훼와 더불어 인류를 창조했다!”

이어서 하바는 카인의 동생 헤벨을 낳아서 맞이했다. 훗날 헤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땅을 일구는 농부가 되었다.

날들의 끝에 이르러, 카인은 땅의 열매 중에서 제물을 골라 가지고 야훼께 나아갔다. 헤벨도 그의 양떼의 맏배 중에서 가장 살진 놈을 이끌고 야훼께 나왔다. 그런데 야훼께서 헤벨과 그의 제물을 눈여겨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카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이 뻘개 졌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이 푹 내려앉았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얼굴을 붉히고 있니?

, 네 얼굴을 떨구고 있어?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얼굴을 쳐들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문 앞에 죄가 웅크리게 될 거다.

너에게, 죄의 갈망(渴望)이 넘쳐흐르게 될 거다.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해.

 

그 후, 카인이 그의 아우 헤벨에게 말했다.

우리가 들로 나가자!”

그래서 그들이 들에 있게 되었을 때, 카인이 일어나 그의 아우 헤벨에게 달려들어 그를 쳐 죽였다.

 

그 후,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헤벨은 어디 있느냐?”

카인이 대답했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야훼께서 따져 물으셨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 네 아우의 피의 외침이 땅으로부터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그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받은 그 땅으로부터, 너의 손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참으로, 네가 그 땅을 일구어도 곡식을 얻지(더하지) 못할 것이다. 땅이 너에게 땅의 힘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 땅에서 떠돌이, 도망자가 될 것이다.”

 

그제서,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했다.

 

나의 죄악이 너무도 큽니다, 제가 짊어지기에.

보십시오!

당신께서 나를 쫓아내셨습니다, 오늘 그 땅 표면위로부터.

그러니, 당신의 얼굴로부터

내가 숨겨질 수밖에 없겠지요.

나는 떠돌이,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 땅에서.

나를 찾는 모든 이가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요.

 

그러자 야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카인을 죽이는 모든 사람에게는 일곱 배로 보복이 일어날 것이다.”

야훼께서 카인을 찾는 모든 사람이 그를 때려죽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카인에게 표시를 하셨다. 카인은 야훼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 동쪽 쫓겨난 자(-도망자)의 땅에서살았다.

 

카인이 자기 아내를 알았다. 그의 아내가 임신하여 하노크를 낳았다. 카인이 성을 건설하고 그 성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하노크라고 불렀다. 하노크가 이라드를 낳았다. 이라드가 므후야엘을 낳았다. 무후야엘이 무투솨엘을 낳았다. 무투솨엘이 라메크를 낳았다. 라메크가 자신을 위해 두 명의 아내를 얻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두 번째 아내의 이름을 칠라였다. 아다가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천막을 짓고 사는 이의 조상이 되었다.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인데, 그는 현악기와 피리를 잡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되었다. 칠라, 그녀 또한 투발 카인을 낳았다. 그는 놋과 철로 모든 기구를 만들어 날카롭게 벼리는 자였다. 투발카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라메크가 그의 아내들에게 말했다.

 

아다와 칠라여!

내 소리를 들으시오.

라메크의 아내들이여!

귀 기울이시오, 내말에.

참으로, 내가 사람을 죽였소, 나를 때려서 상처를 입힌 사람을

나를 다치게 한 젊은이를.

참으로, 카인에게는 일곱 배로 보복이 일어나고

라메크에게는 일흔일곱 배로 보복이 일어날 것이라오.

 

 

낱말풀이

 

* 카인 קַיִן 이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창(-케노), 대장장이(날카롭게 벼리는 자 - 투발 카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창조하다’(카나)라는 동사와 발음이 비슷하다.

* 카니티 이쉬 에트 예흐바 קָנִיתִי אִישׁ אֶת־יְהוָֽה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인류(어떤 사람-아무개-인류)를 창조했다.

* 헤벨 הֶבֶל 입김, 미풍, 허무, 헛된 것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 이하르 יִּחַר 화가 나서 얼굴이 뻘개 졌다.

* 엘레카 테슈카토 אֵלֶיךָ תְּשׁוּקָתֹו 너에게, 죄의 갈망이 넘쳐흐르게 될 거다.

* 우리가 들로 나가자 - 이 문장은 지금의 히브리어 성서 원문에 빠져있다. 그러나 70인 역 헬라어 성서는 분명하게 이 문장을 기록한다.(Διεʹλθωμεν ειʹς τοʹ πεδιʹον) 그 외에 다른 히브리어 사본들과 사마리아 오경에도 이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문맥에 맞게 이 문장을 넣어서 읽었다.

* 하쇼메르 아히 아노키 הֲשֹׁמֵר אָחִי אָנֹֽכִי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 아온니 עֲוֹנִי 나의 죄악()

* 라켄 לָכֵן 그렇기 때문에, 70인 역 헬라어 성서는 Οχ οτως 그렇지 않다라고 표현한다.

* 베에레츠-노드 בְּאֶֽרֶץ־נֹוד 쫓겨난 자(도망자)의 땅에서

* 투발 카인 תּוּבַל קַיִן 카인에게 이끌리다?

 

 

시작하는 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앞서서 발전하는 분야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전쟁, 또는 전쟁 산업일 것이다. 고대 인류 문명사의 발전단계인 석기청동기철기로의 변혁도 전쟁을 통한 문명 발전사이다.

인류의 종교사 또한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종교를 거론할 필요조차도 없이 21C 기독교인들은 성서시대의 무자비한 전쟁폭력에 난감할 수밖에 없다. 성서는 21C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참혹한 전쟁과 폭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사무엘상 153절의 너희는 그 곳()에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라는 전쟁수칙이다. 물론, 21C 기독교인들은 이 전쟁수칙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전쟁수칙은 구약 성서시대 전쟁의 제의적 성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쟁수칙은 고대 사회의 약탈전쟁(재물과 전쟁노예 쟁취)에 저항하는 야훼신앙의 평화사상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전쟁수칙을 성서시대 전쟁의 실제상황에 대한 보고로 읽어서는 안 된다. 참으로, 고대시대의 전쟁이 아무리 참혹하다 해도, 현대 지구촌 전쟁보다 더 참혹하고 폭력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2차 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유대인 학살, 일제의 난징 대학살 등, 현대전쟁의 참혹성과 폭력성은 어마어마한 인명피해의 숫자로 여실히 드러난다. <1차 세계대전 군사상자 1000여만 명, 민간인 사상자 700여만 명, 부상자 2100여만 명, 실종 및 수감자 770여만 명. 2차 세계대전 사상자 6000만 명 이상(6000~ 8000여만 명 추정), 그중 민간인 사상자가 3800~5500여만 명, 1300~2000여만 명의 전쟁고아 발생.> 널리 알려져 있듯이, 지구촌제국 미국이 지구촌 전역에서 벌여온 참혹한 전쟁과 폭력성은 그 끝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무차별 융단폭격은 북한주민들을 지긋지긋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의 전쟁수칙은 전율과 공포이었다.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역시 마찬가지 이었다.

또 한편 21C 지구촌의 전쟁은 산업(전쟁경제)이다. 지구촌제국 미국 전쟁경제의 핵심은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및 월가 독점금융자본의 사익쟁취이다. 지구촌제국 미국이 지구촌 전역에서 벌여온 모든 전쟁은 군산복합체 전쟁물자 재고 소비 전쟁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중에 한반도 산하를 융단 폭격함으로써, 2차 서계대전 중 소비하지 못한 일본 본토전쟁 재고물자를 초과소비 했다. 이어서 베트남전쟁을 통해서도 남아있던 모든 재고 전쟁 물자를 초과소비 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전쟁무기를 개발하고 실험했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전쟁을 대비해 GBU-43 공중폭발대형폭탄(Massive Ordnance Air Blast bomb)을 개발하고 양산했다. 이 폭탄의 다른 이름은 MOAB(Mother Of All Bombs) 모든 폭탄의 어머니인데, 3m 상공에서 10톤의 고성능 폭약이 폭발하여 반경 500m지역을 일시에 무 산소 상태로 만들고 모든 생명체를 몰살한다고 한다. 지구촌제국 미국은 아직 이 폭탄을 실전에서 소비하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 폭탄 모두를 소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폐일언하고, 인류의 역사, 지구촌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지구촌 민중들이 서로를 죽이고 서로에게 죽임당하는 세상, 그것이 동서고금의 모든 민중들의 삶의 현실이고 역사이다. 죽임과 죽임 당함의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의 증거로써, 전쟁은 오직 인간만의 역사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모든 전쟁은 시대의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대한 증언이다. 그 한 부분으로 인간만이 사냥과 낚시, 게임 등 죽임의 놀이와 문화를 즐긴다. 인간의 죽임의 놀이와 문화는 전쟁이라는 특수상황과 함께 언제나 자발적이고 현실적이며 일상적이다.

21C 지구촌에서, 특별히 한반도에서, 죽임과 죽임 당함의 전쟁 놀이판을 벌이고 싶어 하는 인간망종들의 설레발이 드세다. 한반도에서 꼭 전쟁을 하고픈 전쟁광들, 미국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와 이익을 공유하는 정치·경제 기득권집단, 미국 월가 독점 금융자본과 동맹한 이 땅의 독점 재벌들, 이들은 지구촌제국 미국 전쟁아귀(餓鬼)들과 한통속이 되어 한반도에서 모든 전쟁 이익을 몰수하기 위하여 혈안이다. 이들은 평화거래를 통한 공동체 이익들을 아예 무시한다. 이들은 오직 지구촌 전쟁 대박을 터트리려고 안달이 나 있다.

이러한 21C 시대적 상황에서 본문을 읽으며, 나는 본문의 제목을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21C 지구촌 민중들의 자화상라고 달았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이야기는 아담의 원죄일까, ‘카인인류형제살인 추억카인의 표에 대한 갈망일까? 나아가, 카인은 아무개 그 사람일까? 민중, 대중, 다중, 공동체일까? 아니면, 지금 본문을 읽고 있는 일까?

 

이끄는 말

 

성서학자들은 창세기의 원역사의 저자 또는 편집자로 바벨론 포로기의 유대인 서기관과 제사장그룹을 이야기한다. 바벨론 포로기의 유대인 서기관 또는 제사장그룹 지식인들은 바벨론제국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동화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회개하며 바벨론제국에 대응하는 대안세상을 찾는다. 실제로 본문에서 그들은 바벨론제국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종속된 유대 민중들의 삶의 욕망과 죄악을 성토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다. 본문은 바벨론제국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내포한 죄악, 죽음과 죽임의 실체를 폭로함으로써 유대인 포로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의 생명평화세상을 꿈꾸게 한다. 이렇게, 본문이 드러내 놓은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내재된 죄악의 핵심내용은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시대의 민중의 자화상이다. 본문말씀을 따라 가며 그 실체를 밝혀보자.

하나님은 창세기 2장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는데, 본문에 의하면 그들이 카인인류’(사람아무개인류)를 낳았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야다아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우리말 성서는 이 동사를 동침하다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이 동사의 문자적 의미는 알다, 깨닫다, 관심 갖다등 다양하다. 따라서 이 동사가 성적인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쓰이고 있는 것은, 사람의 이 쾌락이나 번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강조이다. 사람의 성은 남자와 여자, 사람의 전인적인 만남, 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의 관계이다. ‘은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넘어서 형제와 형제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의 공동체관계를 창조해 내는 토대이다. ‘은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카인인류를 낳고, 카인인류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의 공동체관계를 낳는다.

이점에서 하바는 아담과의 관심과 돌봄과 연대의 관계를 통해서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친다. “내가 야훼와 더불어 인류를 창조했다!” 그래서 인류의 이름 카인카나-창조하다라는 동사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제, ‘카인인류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의 관계를 통해서 이 땅에 충만한 생명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바의 외침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생명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 삶의 공동체를 확장하고 이어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안타깝게도 야훼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 삶의 공동체를 확장하고 이어가는 일에 갈팡질팡한다. 이러한 인류의 갈팡질팡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핵심적인 것은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종속된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시대의 민중의 자화상이다.

이점에서, 카인에게 비쳐지는 형제헤벨’(הֶבֶל)의 이미지는 바람과 같은 덧없음이다.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 안에서, 카인에게 형제헤벨은 아무런 의미도 뜻도 가치도 없다. 도리어 카인에게 형제헤벨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를 되풀이 확대하는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본문에서 카인인류는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부터 스스로 자기의 생명 삶을 멀어지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종속된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를 거듭거듭 확대 재생산하려는 갈망뿐이다. 이렇게 카인에게 형제헤벨의 이미지는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대한 열망과 숭배 속에서 카인인류의 자기중심성의 상징이다. 또한 형제헤벨은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과 멀찍이 떨어진 카인의 생명과 삶의 한계를 상징한다. 카인의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숭배로 인해 처참하게 죽임당한 형제헤벨은 곧 카인인류로 되돌아온 카인이다. 그러므로 형제헤벨, 덧없음의 이름은 카인의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에 대한 나의 성찰과 반성과 회개의 상징이며, ‘카인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기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을 읽고 해석할 때,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떠들어오던 목축과 농업에 대한 종교적 의미와 상대적 가치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본문의 미케츠 야밈-날들의 끝도 고대사회의 농사절기에 맞춘 달력이었을 터인데, 아마도 추수가 끝난 후의 감사절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카인의 곡물예물(곡물제사)과 헤벨의 동물예물(피의 제사)의 가치를 따지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께서는 카인이 바친 예물과 함께 카인마저도 외면하신다. 그러시는 이유도 불분명하다. 그래서 카인은 야훼께 분노했다. 여기서 사용한 히브리어 동사가 하라-뜨거워지다, 분노가 폭발하다라는 뜻이다. 야훼는 카인에게 왜 이렇게 야박한 대우를 하실까? 야훼는 편 가르기 변덕쟁이 하나님일까? 우리는 본문에서, ‘야훼께서 카인에게 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많은 성서주석가들은 본문의 야훼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을 매우 어려워한다. 이러할 때, 본문의 카인과 아벨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야훼 하나님은 카인을 버리셨을까? 아니다, 야훼 하나님은 카인인류를 시험하신다. 카인이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차별대우, 이런 상황은 인류역사 안에서 거듭되어 왔으며 오늘의 세계에서도 비일비재로 벌어지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야훼께서 카인에게 아래 말씀을 주셨지만, 히브리어 본문에서 아래 말씀을 세세히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렇더라도 큰 뜻은 분명하다. ‘카인인류, 모든 문제는 카인에게 있다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야훼의 이러한 어투가 너무도 분명하니, 아래의 야훼 말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얼굴을 붉히고 있니?

, 네 얼굴을 떨구고 있어?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얼굴을 쳐들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문 앞에 죄가 웅크리게 될 거다.

너에게, 죄의 갈망(渴望)이 넘쳐흐르게 될 거다.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해.

 

카인인류DNA에는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가 새겨져 있을까? ’카인인류는 하나님의 생명의 원천을 물려받아 이 땅에 가득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인은 스스로의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 욕망에 종속되어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를을 몸에 새기게 되었다. 인류의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대한 욕망 실현으로써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카인인류의 숙명이다. 따라서 위 야훼의 말씀은 바벨론제국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동화되고 종속된 유대인 포로들의 제국주의 삶의 태도에 대한 경고이다. 더 나아가 현재를 사는 독자들의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시대의 민중들의 자화상에 대한 성토이다.

카인인류는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께 늘 분노해왔다.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 앞에서,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숭배로 인한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시대의 민중의 자화상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 분명한 증거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부추기는 전쟁광들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대중들에게서 넘쳐난다. 지구촌제국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은 지구촌을 향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괌 포위 사격, 서울 불바다로 대응했다. 남한의 수구 언론들과 논객, 수구정치 모리배들도 덩달아 핵무장을 주장한다. 심지어 기독교회 목사들까지 들고 일어나 핵무기로 무장해서 북한에 대비하라고 목청을 높인다. 이처럼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시대의 민중의 자화상은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로부터 자신의 생명 삶을 멀찍이 띄어온 카인인류의 속절없는 삶의 현실이다. ‘카인인류는 생명의 하나님 야훼 앞에 서 있으면서 야훼를 보지 않는다. 야훼 하나님을 찾아볼 뜻도 의지도 없다.

그런 까닭에 교회들은 본문의 엘레카 테슈카토라는 히브리어 문장을 죄의 소원이 네게 있다라고 비틀어서 읽는다. 그러나 이 문장은 본문 문맥에 맞게 너에게, 죄의 갈망이 넘쳐흐르게 될 거다라고 새겨 읽어야 한다.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은 없이 살 수 없다. 그것은 초월적인 죄의 세력이 사람을 얽매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생명 삶의 자리가 를 갈망하고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생명의 원천인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 삶을 멀찍이 떨어트려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종속되어 사는 사람들의 생명 삶의 한계이다. ‘카인인류는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종속되어 살면서 끊임없이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를 기억하고 음미하며 되풀이한다. 따라서 누구라도 카인인류의 역사가 폭력과 전쟁과 죽임의 역사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화염과 분노, 서울 불바다, 북한정권의 종말, 핵무장 대응 등, 단말마적인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의 되새김이 무섭다.

그러므로 본문말씀은 현재를 사는 카인에게 부단히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고 반성함으로써, ‘형제살인 죄의 유혹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한다. 카인은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의 자궁으로형제살인 죄의 갈망에 대해 올무를 씌우고 단단히 고삐를 매야할 의무가 있다. 현재를 사는 카인인류가 지금 형제살인 죄의 갈망에 올무와 고삐를 매지 않는 것은, 내일의 수많은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시대의 민중의 자화상의 밑그림을 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에 대한 제대로 된 올무와 고삐는 무엇일까? 본문은 그것을 형제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형제사랑의 실제내용은 형제를 향하여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카인의 형제살인의 추억에 대한 올무이고 고삐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본문의 내용에 비추어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형제와 형제의 관계로써 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를 실천하는 것이다. 형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 실천행동이 카인의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으로부터 카인인류를 해방할 수 있다. 이제 21C ‘카인-인류는 이러한 실천행동을 통하여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더 나은 인류 생명공동체를 확장하고 이어 나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시시때때로 형제헤벨에게 우리가 들로 나가자라며 형제헤벨을 유인한다. 그런데 여기서, 들이란 무엇일까?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이 보시지 못하는 외진 곳일까? 진짜 야훼 하나님 없는 세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제 카인은 야훼 하나님의 형제살인 죄의 갈망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형제헤벨을 쳐 죽임으로써, 이 땅에서 야훼 하나님 없는 죽임의 세상을 확대한다. 그럼으로써 이제 카인은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시대의 민중들의 자화상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과 반성과 회개의 기회마저 상실해 버렸다.

카인은 네 아우 헤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야훼 하나님의 생명질책을 듣고서도 뻔뻔하기만 하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내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참으로 대담한 말장난이다. 카인은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 앞에서 동생 헤벨의 직업이 목자-양을 지키는 자인 것을 빗대어 책임을 회피하는 말장난을 벌인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앞에서 형제의 생명을 빼앗은 카인인류는 아무런 죄의식조차 갖지 않는다. 카인은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 앞에서조차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을 기억하고 음미하며 즐기려 한다.

그러나 본래 사람에게는 형제(이웃)에 대한 무한책임이 있다.(신명기 15:7-11, 잠언 14:31; 19:17; 21:13)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생명 삶의 마당은 어떠한가?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숭배 속에서 우리의 생명 삶의 마당은 온통 죽임의 향연이다.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의 욕망이 우리의 삶의 동력이다. 온갖 갑 질과 죽임의 놀이와 문화를 일상으로 즐긴다. 그러므로 마침내,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께서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를 기억하고 음미하며 되풀이 하는 카인인류에게 벌을 내리신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 네 아우의 피의 외침이 땅으로부터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그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받은 그 땅으로부터, 너의 손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참으로, 네가 그 땅을 일구어도 곡식을 얻지(더하지) 못할 것이다. 땅이 너에게 땅의 힘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 땅에서 떠돌이, 도망자가 될 것이다.”

 

그제서, 카인 야훼께 하소연했다.

 

나의 죄악이 너무도 큽니다, 제가 짊어지기에.

보십시오!

당신께서 나를 쫓아내셨습니다, 오늘 그 땅 표면위로부터.

그러니, 당신의 얼굴로부터

내가 숨겨질 수밖에 없겠지요.

나는 떠돌이,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 땅에서.

나를 찾는 모든 이가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요.

 

우리말 성서는 위 본문내용 중 아온니라는 히브리어 낱말을 내 죄벌또는 내 죄의 짐이라고 번역했는데, 문자적 의미는 나의 죄악이다. 우리말 성서에서처럼 위 본문을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스스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회피하려는 말로 읽는 것은 오해이다. 도리어 카인은 야훼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듣고 나서 나의 죄악이 너무도 큽니다, 제가 짊어지기에라며 자기 죄악을 고백한다. 이 고백이 카인으로 대표되는 인류의 현실이며, 마지막 가능성이다. 이로써 카인인류는 자신이 죽여 버린 형제헤벨(형제살인의 추억)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카인은 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 삶을 멀찍이 떨쳐버린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종속된 생명 삶을 사는 카인인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사랑이다. 이점에서 본문 이야기는 제국주의 종교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 죽임의 교리로 화석화 되어진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명사랑을 새롭게 변혁하는 야훼 하나님의 생명사랑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태초에 카인을 죽일 사람들은 어디서 왔지? 이런 따위의 질문은 어리석기도 하지만, 철저한 반 신앙 태도이다. 카인과 헤벨의 사건은 옛날 옛적 단 한번만의 사건이 아니다. 도리어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되풀이 되어 벌어지고 있는 형제살인 추억의 사건이다. 형제살인 추억사건생명의 원천이신 야훼 하나님을 멀찍이 떠난 사는 카인인류의 생명 삶의 전형이다.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생명의 하나님은 카인의 형제살인의 추억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신다. 그러나 카인이 어디서 어떤 표를 받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는 왕따의 낙인이거나 심판의 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카인의 표는 죄인들을 향한 수치의 표가아니라 죄인일지라도 야훼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사랑하시고 지키시며 구원하신다는 표이다. 그러므로 카인의 표는 카인 한 사람 뿐만 아니라, ‘형제살인의 추억을 가진 모든 인류에 대한 복음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카인인류는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자비에 힘입어 산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다. 예수는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시대의 민중들의 자화상을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렇다면 이제, 카인의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가 지구촌 생명공동체에서 어떻게 확대되고 각인되어 지는가? 본문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카인이 살게 된 노드 땅쉼이 없는 땅이 어디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노드라는 땅의 이름은 카인이후 인류가 하나님이 없는 아주 먼 곳으로 추방당한 삶을 살고 있음에 대한 은유이다. ‘카인인류의 후손 라메크는 이렇게 외친다.

 

아다와 칠라여!

내 소리를 들으시오.

라메크의 아내들이여!

귀 기울이시오, 내말에.

참으로, 내가 사람을 죽였소, 나를 때려서 상처를 입힌 사람을

나를 다치게 한 젊은이를.

참으로, 카인에게는 일곱 배로 보복이 일어나고

라메크에게는 일흔일곱 배로 보복이 일어날 것이라오.

 

라메크의 외침은,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21C 지구촌 민중들의 자화상(自畵像)’ 그대로의 현실상황이다. 카인의 후손 라메크의 아들들로부터 인류의 온갖 문명과 문화가 발생한다. 그 중 투발 카인은 놋과 철로 온갖 기계들을 만든다. 특별히 전쟁무기를 만들어 날카롭게 벼린다. 본문의 시대적 상황에서, 바벨론제국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 서기관제사장그룹 지식인들의 눈에는 비친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의 모습 그대로이다.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은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음미하며 되풀이한다.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는 인류를 생명의 원천인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트림으로써, 카인의 일곱 배의 보복을 뛰어넘어 일흔일곱 배에 이르는 형제살인의 추억죽음과 죽임향연을 불러일으킨다.

21C 지구촌제국 미국, 이에 맞대응 하여 또 다른 제국으로 떠오르는 중국, 그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대한민국, 21C 지구촌 민중들에게도, 대한민국 민중들에게도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민중 자화상이 깊이, 더 깊이 새겨지고 있다.

 

맺는 말

 

그러하니, 오호라 통재라! 이 땅에서 지구촌제국 미국의 전쟁을 부추기고, 환호하며, 부화뇌동하는 전쟁광을 어찌하랴! 여의도 길 강아지 국회의원, 수구언론, 전쟁부화뇌동 세력들! 이들은 사드배치, 선제타격, 외과수술폭격 등 하루 온종일 전쟁망동(戰爭妄動)을 일삼는다, 그러나 오매불망, 이 땅의 전쟁만을 찬양하고 갈망하는 전쟁광들은 머잖아 반드시 그 죄업을 받게 될 것이다.

, 사람을 꼭 죽여야만 살인인가? 주변에 넘쳐나는 죽임의 문화, 놀이 등, 전쟁이 아니라도, 21C 지구촌민중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죽임의 놀이와 문화를 즐긴다. 산마다 케이블카, 골짜기 마다 전원택지 개발, 산과 내와 강 -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를 말살하는 마구잡이 개발사업, 힘없는 ()들을 향한 무한 (), 저항하는 ()에게 퍼붓는 무지막지한 보복 폭력, 저항하는 ()들을 사회경제적으로 파멸시키고 생명을 빼앗고 자살대열로 내모는 독점자본들의 횡포 등등.

21C 이 땅의 민중들의 자화상,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이 땅의 민중들은 제국주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 압도적 죽음과 죽임의 전쟁폭력을 경배한다. 거대한 자본에 대한 굴종과 숭배와 노예적 종속이야말로 마땅한 삶의 지혜라고 믿는다. 진보보수를 망라하고 모든 언론들은 시시때때로 지구촌제국 미국의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엄숙하게 보도한다. 빌게이츠, 워렌 버핏,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등, 그들의 세세한 근황을 보도하고 미화한다.

지구촌제국 미국에 대한 대한민국 민중들의 신드롬. 이 땅의 민중들은 제국주의 열망, 메시야대망, 영웅주의 카리스마 숭배, 자본과 지식과 권위와 권력에 대한 무한 열망과 무한숭배의 덧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보수를 떠나 이 땅에서 방귀깨나 뀌는 잘난 사람들 중 지구촌제국 미국과 삶의 관계와 연줄이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

형제살인의 추억카인의 표, 21C 지구촌 민중들의 자화상(自畵像), 본문이 21C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말씀.

 

, 너는 얼굴을 붉히고 있니?

, 네 얼굴을 떨구고 있어?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얼굴을 쳐들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문 앞에 죄가 웅크리게 될 거다.

너에게, 죄의 갈망(渴望)이 넘쳐흐르게 될 거다.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해.

 

야훼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안에서 형제사랑,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 형제살인 죄의 갈망을 다스리는 것 등. 그 모든 것들의 핵심 내용은 사람의 전인적인 만남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의 관계성 회복이다. 처음사람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의 관계를 통하여 카인인류를 낳았듯이, 21C 현재를 사는 카인들도 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과 연대의 관계를 통해서 이 땅에 충만한 생명공동체를 이루어가야만 한다. 지구촌제국주의 죽음과 죽임의 문명과 문화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숭배를 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