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하나님나라 1 예수의 복음 선포는 유대광야로부터 갈릴리로.. 그리고 또 어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1 예수의 복음 선포는 유대광야로부터 갈릴리로.. 그리고 또 어디로?
마가복음 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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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체포된 후에
예수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갈릴리로 갔다.
예수가 말하기를..
이미 때가 채워졌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소!
여러분! 회개하시오.
여러분! 복음을 신앙하시오.
낱말 풀이
* 파라도테나이 παραδοθῆναι 요한이 체포된 후에(부정사 과거수동태)
- 파라디도미 παραδίδωμι 넘겨주다
* 케류스손 κηρύσσων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현재분사)
- 케류스소 κηρύσσω 선포하다
* 페펠레오타이 호 카이로스 Πεπλήωται ὁ καιρός 이미 때가 채워졌다(현재완료 수동태)
- 플레로오 πληρόω 가득(충만)하게하다 -
- 카이로스 καιρός 때, 일반적인 시간이 아닌 ‘정해진 때, 알맞은 때’
*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하나님의 나라
- 유대관습에서는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노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 하늘의 나라’
* 엥기켄 ἤγγικεν 하나님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다(현재완료)
- 엥기조 ἐγγίζω 가까이 왔다
* 메타노에이테 μετανοεῖτε 여러분, 회개하시오
- 메타노에오 μετανοέω 회개하다, 메타 μετά 뒤 + 노에오 νοέω 성찰하다, 돌아보다
- 메타노이아 μεταάνοια 회개(명사)
* 피스튜에테 πιστεύετε 여러분, (복음을) 신앙(信仰)하시오(명령형)
- 피스튜오 πιστεύω 신앙하다 또는 믿다 >의 .
- ‘내가 신앙 한다 πιστεύω’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또는 어떤 대상에게) 내가 설복당하는 것
- 페이토 πείθω 설복시키다
- 피스토오 πιστόω 신앙하게 하다 또는 믿게하다
- 피스토스 πίστος 신실한(형용사)
- 피스티스 πίστις 신앙 또는 신뢰(명사)
- 信仰(신앙) - 신뢰하고 우러름
본문 풀이
예수의 복음 선포는 유대광야로부터 갈릴리로.. 그리고 또 어디로?
누가복음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로마제국 ‘티베리오 황제’ 15년에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눅3:1) 서기로 계산하면 27-28년이다. 그런데 유대민중은 세례요한을 메시야로 기대하기도 했고, 또 그렇게 여기기도 했던 것 같다.(요1:19-20) 왜냐하면 요한이 유대종교․사회공동체의 기득권집단과 로마제국을 향한 대한 비판과 적대적인 언행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요한은 로마제국의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을 향한 정치.사회․종교․윤리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로 인해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을 체포해서 사해 동쪽의 마켈루스 요새에 가두어 두었다가, 끝내는 처형했다.(막6:17-29,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이와 관련하여 마가복음 저자는 ‘요한이 체포되어 옥에 갇힌 이후에야 예수의 공식 활동이 시작되었다’라고 보고한다. 이것은 아마도 예수와 세례요한 공동체와의 관계로 인한 것일 터인데, 이로써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신앙공동체가 세례요한공동체 운동을 승계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요1:36-42) 따라서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는 예수가 요한의 환생인줄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었다.(막6:14,8:28) 그러나 요한의 세례운동과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복음)활동에는 너무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장소의 차이이다. 세례요한은 예루살렘과 멀지 않은 유대광야를 활동무대로 삼았다. 또한 요한의 ‘죄 탕감을 위한 회개의 세례’선포대상은 전적으로 유대민중이다. 한마디로 요한의 세례운동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유대광야로의 이동이었다. 반면에서 예수는 이스라엘 최 변방 갈릴리를 복음 선포(하나님의 나라 활동)의 무대로 삼았다. 예수는 갈릴리 민중의 아들로써, 유대종교․사회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긍심마저 가질 수 없었던 갈릴리 하층민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운동은 유대광야에서 이스라엘 최 변방 갈릴리로의 이동이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유대인의 정체성마저 모호한 변방사람들에게로 확산 되어 나간 것이다. 나아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후 1세기 예수신앙 공동체운동은 갈릴리를 넘어 이방세계로 확산되었다. 더 나아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세대를 넘어 이천여년 하나님의 나라운동역사 속에서 전 지구촌의 민중들에게로, 마침내는 21세기 한국 민중에게로 까지 전수 되었다.
그렇다면 1세기 예수신앙 공동체의 땅 끝까지 내달리려는 예수복음운동의 기세에 비유하여 오늘날 ‘복음의 땅 끝’은 어디일까? 그 것은 분명히 인종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문화와 세대의 차이를 넘어, ‘민중의 고통과 억압이 있는 모든 곳’임이 틀림없다.
두 번째, 요한의 세례운동과 예수복음운동의 차이점은 장소뿐만이 아니라, 내용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요한은 ‘죄 탕감을 위한 회개의 세례’선포함으로써 유대종교․사회공동체의 핵심인 율법과 성전체제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유대 민중을 해방시켰다. 나아가 요한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날’을 예감하고 유대 민중들에게 ‘회개하라’ 요구했다. 그렇다면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날’은 무엇일까? 그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심판’이다. 요한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날은 ‘하나님이 친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날’이다.(마3:10-12) 그러므로 요한이 보기에는 ‘하나님께 멀리 돌아서 있는 유대민중들은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서야’만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요한은 ‘유대종교․사회공동체 기득권집단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마3:7-8,눅3:7-9)) 나아가 요한은 유대민중에게 ‘각자의 신분에 맞는 회개의 열매’를 촉구했다. 요한은 유대군중들에게는 나눔을, 관료나 세관원(로마제국으로부터 위임받은 징세권자)에게는 정직을, 군인들(로마제국 분봉왕 헤롯안티파스의 군인)에게는 약탈금지를 요청한다.(눅3:10-14)
그러나 예수에게는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의 날이야말로 죄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용서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의 날’은 ‘유대민중들에게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명하게 ‘로마제국이나 유대종교·사회공동체 기득권집단의 범죄행위에 대한 시대적이고 현실적인 징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약탈과 독점과 사익의 토대를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의 근본적 내용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통치는 결코 심판일 수 없다. 그것은 오롯이 사랑이다. 혹여 그것이 징벌로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비와 용서와 사랑일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운동의 구체적인 표현과 실천행동이 ‘연대와 참여,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살롬 - 온전한 평강의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제국주의 약탈과 독점과 사익에 목말라 있는 자들에게는 공동체적 나눔과 평등이 한없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요한의 세례운동과 예수복음운동의 차이점은 내용에서뿐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의 마당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요한은 유대민중에게 설교를 했다. 요한은 유대민중에게 ‘죄 탕감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 했지만, 정작 유대민중이 그와 가까이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막1:4,6)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설교가 아니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실천의 영역으로써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문제이었다. 곧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실천적인 민중의 삶의 마당’이었다.
이를 위해 예수는 갈릴리 민중들과 하나가 되었다. 예수는 유대종교·사회공동체의 죄인, 세리, 창녀들과 함께 공동밥상을 차리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사실 고대 지중해세계에서, 특별히 피라미드식 제국주의 후원계층구조사회에서 공동밥상은 아주 친밀한 형태의 사귐이다. 따라서 상류층은 상류층끼리, 중산층은 중산층끼리, 하층민은 하층민 끼리, 끼리끼리의 밥상공동체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하층민일지라도 죄인들과 창녀들과는 밥상을 함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죄인들과 창녀들과 어울려 공동밥상을 차린 것은 유대종교·사회공동체 안에서 일대 ‘스캔들’이었다. 또한 더불어 그것은 유대종교·사회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하나의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다.
이처럼, 예수는 먹보요 술꾼이라는 놀림에다가 세리와 죄인과 창녀의 친구라는 비난을 당하면서까지 갈릴리민중들과의 공동밥상을 실천했다.(마11:19,눅7:34) 그럼으로써 예수는 그들의 고단한 삶의 마당에서 그들과 친구이었고, 이웃이었으며, 동지이었다. 그렇게 예수는 그들과 어울려 그들에게 ‘씌워진 죄인이라는 멍에를 벗기고, 낙인을 지우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일으켜 세웠다.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임을 깨닫고 행동하게 했다. 그렇게 예수는 그들을 로마제국과 유대종교·사회공동체 기득권집단의 노예적 삶에서 해방하고 구원해 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갈릴리 민중의 아들 예수가 갈릴리 민중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삶을 나누는 하나님의 나라실천운동은 참으로 유쾌하다. 또한 갈릴리 민중의 삶의 마당에서의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실천운동은 놀라운 전염성과 유전성이 있다. 실제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실천운동은 인종과 세대와 문화와 역사를 넘어 21세기 한국 민중에게 까지 전염되어지고 있다. 이점에서 21세기 한국교회는 서구 식민제국주의 종교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 맘몬‧자본세상의 온갖 슬픔과 절망과 단절의 사회구조 모순들을 깨부수어야 한다. 당당하고 힘차게 민중들의 삶의 마당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그럼으로써 21세기 한국 민중의 삶의 마당에 연대하고 참여하며 소통하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실천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제 21세기 한국교회가 한국 민중과 함께 한판 큰 삶의 대동잔치를 벌여할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