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달라서 너무도 소중한 ‘예수신앙’
너무나 달라서 너무도 소중한 ‘예수신앙’
빌립보서 2:1-12 / 누가복음 2:1-12
읽기 – 1 빌립보서 2:1-12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누군가 힘을 북돋우려는 이가 있다면
어떤 사랑의 따뜻한 말이 있다면
누군가 영의 친교를 나누려는 이가 있다면
누군가 애정과 가엾이 여김을 베푸는 이들이 있다면
여러분은 스스로에 대하여 깨달음으로써 나의 기쁨을 넘치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같은 사랑을 가진 한 생명들입니다.
여러분은 한 뜻(한마음)을 품은 이들입니다.
무엇이든지 경쟁이나 허영에 따라 하지 말고,
오히려 낮은 마음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위에 있는 지도자들이라고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들의 일들만 살피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저마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일들까지도 보살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사이에) 이 뜻(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체 안에 계시면서
결코 자기 것을 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같음을.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취하신 후에
사람들과 같게 되심으로.
곧 사람처럼 나타내지신 모양을 가지심으로
그는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되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렇기(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더 할 나위 없이 높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예수의 이름 안에서
모든 것이 무릎 꿇게 하기위하여
하늘위에 있는 것들과 땅위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
그러므로 모든 입(언어)이 스스로 고백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낱말풀이
* 엔 크리스토 ἐν χριστῷ 그리스도 안에서
* 티스 파라클레시스 τις παράκλησις 누군가 힘을 북돋우려는 이
- 파라 παρά 가까이 + 칼레오 καλέω 부르다.
-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보혜사’라는 낱말과 동의어
* 티 파라뮈티온 아가페스 τι παρμύθιον ἀγάπης 어떤 사랑의 따뜻한 말이 있다면 - 파라 παραʹ 가까이 + 뮈테오마이 μυθέομαι말하다
* 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 친교
- 코이노노스 κοινωνός ‘동무, 또는 짝, 협동’이라는 낱말에서 유래
* 스플랑크나 σπλάγχνα 애정
- 스플랑크논 σπλάγχνον 내장(심장,간장,허파 등)을 의미
- ‘애간장이 타는 마음 – 지극한 애정 또는 사랑’
- 오이크티르모이 οἰκτιρμοί 가엾이 여김
* 히나 토 아우토 프론네테 ἵνα τὸ αὐτὸ φρονήτε 스스로에 대하여 깨달음으로써(또는 생각함으로써)
- 아우토 αὐτὸ 스스로를
- 프론네테 φρονήτε = 프렌 φρήν 마음(심장) + ἀπάτη 속임 = 자기 심장(또는 욕구)을 속임 =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 같은 것을 깨달음(생각함) = 자기부정
* 쉼프쉬코이 σύμψυχοι 한 생명들(또는 마음들)
- 쉰 σύν 함께 + 프쉬케 ψυχή 생명, 영혼, 마음
* 에리테이안 έριθείαν 경쟁이나(또는 이기적인 야망으로)
* 타페이노프로쉬네 ταπεινοφροσύνῃ 낮은 마음으로
- 타페이노스 ταπεινός 비천한 + 프렌 φρήν 심장 또는 마음 + 쉰 σύν 함께
* 휘페레콘타스 ὑπερέχοντας 위에 있는
* 헤구메노이 ἡγούμενοι 지도자들이라고
* 스코픈테스 σκοποῦντες 살피는 사람들, 보살피는 사람들
* 엔 휘민 ἐν ὑμῖν 여러분 안에
*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예수 그리도 안에 있는 것
* 엔 모르페 테우 ἐν μορφῇ θεοῦ 하나님의 형체 안에, 하나님의 존재양식 안에
* 휘파르콘 ὑπάρχων 계시면서
- 휘포 ὑπό아래서 + ἄρχω시작하다, 존재하다, 되다.
* 아르파그몬 ἀρπαγμόν 자기 것을 삼다
- 아르파조 ἀρπἀζω ‘움켜쥐다, 잡아채다’라는 동사의 명사형 목적격
- ‘약탈 물을 움켜 쥠 또는 노획물을 움켜쥠’ 이라고 번역할 수 있음
* 에이나이 잇사 테오 εἶναι ἴσα θεῷ 하나님과 같음을
* 스케마티 σχήματι 모양을 가지심으로
- 스케마티는 ‘엨코 ἔχω 가지다, 입다’에서 유래한 낱말
- 어떤 유의 ‘에토스 ἔθοϛ 태도, 성정(性情)’을 가지다.
* 디오 διό 그렇기 때문에
- 디아 διά ~을 통하여 + 호 ὅ 지시 또는 관계대명사
* 카탘크톤니온 καταχθονίων 땅 아래 속한 것들
- 카타 κατά 아래 + 크톤 χθών 땅, 다른 말로 하면 ‘지옥에 속한 것들,
읽기 – 2 누가복음 2:1-12
그리고 그 날들이 지난 후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온 천하를 호적등록하게 하라’ 칙령이 내려왔다. 이 첫 번째 호구조사는 ‘퀴레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이었던 때에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등록하러 저마다 자기고향으로 길을 떠나고 있었다. 요셉도 갈릴리 지방 나사렛 동네로부터 유대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의 동네로 올라갔다. 왜냐하면 요셉은 다윗의 혈통에 속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그와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 있을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차서 그녀의 첫 아들을 낳았다. 마리아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여물통 안에 누였다. 왜냐하면 손님방에 그들이 있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지방에, 자기가 맡은 양떼를 가두어 지키느라 한밤중에 들에서 야영하는 목부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그들의 곁에 서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 떨었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자 보시오. 참으로, 내가 온 백성 누구에게나 큰 기쁨이 될 좋은 소식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오늘 다윗 동네에 여러분에게(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소. 그분은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표징이오. 여러분은 포대기에 싸여 여물통에 뉘어있는 갓난아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천사와 함께 수많은 하늘군대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외쳤다.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땅위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들이 목부들을 떠나 하늘로 물러나자, 목부들이 서로 말했다.
“자 우리가 베들레헴까지 가보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대로 일어난 이 사건을 알아보자!”
그들이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여물통에 뉘어있는 갓난아기를 찾아냈다. 목부들은 아기를 보고나서, 이 아기에 관하여 (천사가) 그들에게 한 말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러자 들은 모든 사람들이 목부들이 자기들에게 말한 것들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들을 그녀의 마음에 새겨 오래 간직했다. 목부들은 자신들에게 말해진 그대로, 듣고 보고 확인한바 모든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돌아갔다.
낱말풀이
* 그리고 그날들이 지난 후에: 그 날들이 지나는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세례요한의 출생예고/예수의 탄생예고/마리아가 세례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을 방문함/마리아의 노래/세례요한의 출생/세례요한의 아버지 늙은 예언자 즈가랴의 노래 등등.
* 카이사로스 καίσαρος 카이사르(황제) - 통치자 또는 권력자를 뜻하는 칭호
- 독일어의 '카이저'/슬라브어의 '차르'/이슬람 세계에서 쓰이는 '카이사르'
- 본문에서의 카이사르(황제)는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인데 기원전 29년부터 기원후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했다.
* 도그마 δόγμα 황제의 칙령
* 아포그라포 ἀπογράφω 호적등록 하라
- 아포 ἀπο~부터 + 그라포 γράφω 쓰다 - 호적등록 또는 호구조사
* 그녀의 첫아들 : 동정녀탄생설화 → 부계혈통부정→ 시대의 지배체제부정→ 사생아신학
* 화트네 φάτνη 구유, 여물통
- 이 낱말은 ‘파테오마이 πατέομαι 먹다’에서 왔다.
* 카탈류마 κατάλυμα 숙박 장소, 손님방
- 이 낱말은 ‘카탈뤼오 καταλύω 풀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 포이멘 ποιμήν 목동/목부
- 이 낱말은 ‘포이마이노 ποιμαίνω 양을 치다’라는 동사와 관련이 있다.
* 에페스테 ἐπέστη 곁에 서다
* 페리람포 περιλάμπω 두루 비추다
- 페리 περί 주위 또는 주변 + 람포 λάμπω 비추다
* 에포베테산 ἑφ?βήθησαν 두려워 떨다.
*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 복음
- 온 백성에게 있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
* 소테르 σωτήρ 구원자
-이 낱말의 어원은 ‘소스 σῶς 안전한’이라는 형용사인데 여기서 ‘소조 σώζω 구원하다’라는 동사가 나왔다.
* 엔 휘프시토이스 테오 ἐν ὑψίστοις θεῷ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 엔 안트로포이스 유도키아스 ἐν ἀνθρώποις εὐδοκίας 기뻐하는 사람들에게(또는 사이에)
- 유 εὐ 좋은 + 도케오 δοκέω 생각하다
* δόξα 영광 / εἱρήνη 평화
- ‘영광’이라는 헬라어 낱말은 ‘도케오 δοκέω 생각하다’에서 유래 한다.
- ‘평화’라는 낱말은 ‘에이로 εἶρω 연합하다’에서 왔다.
* 에이도 εἴδω 알다
- 에이 돈 εἶδον 봤다 + 오이다 οἶδα 알다
- 참 앎은 ‘보고 만나서 확인하는 것’에서 온다.
* 타우마조 θαυμάζω 이상히 여기다
- 이 헬라어 동사의 원형은 ‘타우마 θαῦμα 놀라움’이다.
* 쉰테레오 σύντηρέω 새기다
- 문자적 의미는 ‘함께 지키다’이다.
* 쉼발로 συμβάλλω 오래 간직하다
- 문자적 의미 ‘함께 던지다’이다.
시작하는 말
대림절은 기독교신앙과 떼어낼 수 없는 종교문화이다. 해마다 교회들은 대림절을 맞이하여 온갖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교회를 치장한다. 크리스마스는 근대 서구제국주의가 팽창하면서 전 지구촌에 전파되었고, 누구에게나 축제일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크리스마스는 한해를 마무리하는 축제의 시즌이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는 누가 무어라 해도 예수교다. 기독교는 예수를 신앙하는 종교이다. 예수를 우러러 받들고 신앙하며 예수처럼 살아가려는 것이 기독교인이고 예수 신앙인이다. 예수신앙은 그저 초월과 관념으로 꾸미고 곱게 모양낸 깃발신앙, 우상 신앙, 신전신앙이 아니다. 예수신앙은 실천신앙이고 생활신앙이며 저항과 변혁의 신앙이다.
그런데 기독교신앙 안에는 예수에 대한 두 가지 신앙진실이 교차한다. 하나는 예수의 복음, 예수 자신이 갈릴리 민중들에게 선포하시고, 함께 실천행동하며, 함께 이루어나가셨던 예수의 하나님나라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에 대한 복음, 로마제국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를 신앙하는 ‘예수부활 신앙’이다. 실제로 이천년 기독교신앙 역사 속에서 이 두 가지 예수 신앙실체의 교차는 상호 긴장과 갈등을 반복해 왔다. 교조적이고 맹목적인 예수부활 신앙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해방과 구원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지워버리는 역할을 해왔다. 나아가 교조적이고 맹목적인 예수 부활신앙은 ‘예수의 로마제국 십자가처형의 신앙의미’를 그릇되게 하고 아예 사라지게 함으로써 ‘예수부활신앙의 역사성과 밑바탕 진실을 잃게 하고 말았다.
물론,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에만 외골수로 매달려서 예수부활 신앙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한 것도 기독교회의 온전한 예수신앙에 대한 방해요소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부활 신앙을 저버리게 되면, 예수의 로마제국 십자가처형의 신앙의미를 바르게 깨달을 수 없다. 또한 예수의 로마제국 십자가처형의 신앙의미를 저버리게 되면, 예수부활신앙도 밑바탕을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도 한낱 신화가 될 뿐이다. 그 점에서 성서는 한결같이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과 로마제국 십자가처형을 통한 예수부활신앙을 하나의 복음으로, 하나의 예수신앙으로 증언해 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나름대로의 성서읽기를 통해서 예수의 하나님나라와 로마제국 십자가처형을 통한 예수부활신앙을 하나의 예수신앙으로 증언하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성서를 읽을 때마다 나름대로 성서의 하나님계시에 비추어, 우리 모두의 사람 사는 세상을 살피고, 나의 신앙 삶의 여정을 곱씹어서 성서를 대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면서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신앙의 밑바탕은 ‘시대의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세상으로써 하나님나라 - 시대의 민중세상’이라고 절절하게 깨닫는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학자들은 ‘본문 읽기–1 빌립보서 2:1-12 말씀’을 초대교회 예수부활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 찬가라고 설명한다. 본문 읽기-1은 그리스도의 본질과 됨됨이, 생의 업적과 공로를 간결하게 표현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신앙고백문이다. 그 점에서 ‘본문읽기–2 누가복음 2:1-12 말씀’은 초대교회 예수부활신앙 증언의 확장으로써 예수의 탄생설화이다. 실제로, 신약성서 4개 복음서 가운데 마태와 누가만이 서로 전혀 다른 예수탄생설화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초대교회 여러 예수부활신앙 공동체들의 다양하고 절절한 로마제국 대안세상으로써 ‘하나님나라 - 민중세상’을 향한 간절함 바람이라고 믿는다.
이제, 이러한 관점으로 ‘2개의 본문말씀 읽기’를 통하여 로마제국 대안세상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 민중세상’문을 여는 ‘너무나 달라서 너무도 소중한 - 예수신앙’의미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이끄는 말
본문 읽기-1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이다. 빌립보는 아시아를 벗어나 초대교회 예수신앙이 유럽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이다. 이 도시는 마케도니아 왕 빌립이 세운 도시로서 그의 이름을 따서 도시이름을 지었다. 로마시대에 이르러 이 도시는 로마제국 퇴역군인들을 비롯한 다양한 종족들과 그들의 종교와 문화가 함께 어울려진 국제도시가 되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49-52년경)에 실라와 디모데와 동행해서 첫 번째 유럽교회를 빌립보에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읽기–1의 첫 문단은 아마도 첫 번째 이방인 예수신앙 공동체였을 빌립보교회를 향한 ‘바울의 대안세상 - 예수의 하나님나라 - 민중세상 부추김이고 격려’였을 것이다. 바울은 본문말씀을 통하여 ‘로마제국 지배체제 - 로마황제 숭배신앙’에 대응하는 예수신앙 공동체의 실체적 생활행동의 내용들을 제안한다.
먼저, 바울은 예수신앙 공동체의 삶의 자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바울은 본문 읽기-1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지는 예수신앙 공동체의 놀라운 생활행동들을 증언한다.
“예수신앙 공동체 힘을 북돋우려는 이
사랑의 따뜻한 말을 나누는 이
영의 친교를 나누려는 이
애정과 가엾이 여김을 베푸는 이들 등”
예수신앙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다양한 공동체 생활행동은 바울시대의 ‘이방인 초대교회 삶의 자리에서 너무도 놀랍고 낯선 것’이다. 예수신앙 공동체 생활행동이야말로 두말할 나위도 없이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가부장적 구세주인 로마황제통치 세상을 향한 예수신앙 공동체만의 신앙저항행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 사회학 관점에서 로마제국황제 지배체제는 ‘피라미드 빨대착취 종속후원사회’이다. 로마제국 지배체제 맨 꼭대기에 로마황제가 군림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수직 위계질서가 로마제국을 지배한다. 로마제국황제 지배체제를 설립하고 유지하려면 반드시 피라미드 종속후원체제와 수직 위계질서를 짜고 얽어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동서고금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했던 제국들은 하나같이 ‘피라미드 착취 종속후원체제와 수직위계질서’사회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21세기 지구촌제국 미국사회도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했던 제국들과 한 치 어긋남 없이 똑같다. 지구촌제국 미국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와 월가 독점금융자본 지배체제는 21세기 지구촌의 모든 피 흘림의 전쟁과 지구촌의 모든 임금노예․채무노예 종속후원노동의 맨 꼭대기 최종 수익자이다.
그러나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신앙 행동’은 로마제국황제 지배체제 - 로마황제 통치세상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서로에게 힘을 북돋우는 이’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용어가 ‘파라클레시스 παράκλησις’인데 ‘파라 παρά 가까이 + 칼레오 καλέω 부르다’라는 의미로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보혜사’와 동의어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서로에게 ‘돌봄을 받고 은혜를 베풀며, 함께 섬기고 함께 배우는 수평적 평등관계’가 된다. 바울시대의 ‘로마제국황제 지배체제 - 로마황제 통치세상’과는 정 반대이다.
그럼으로써 초대교회 예수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의 따뜻한 말’과 ‘거룩한 영의 친교’와 서로를 향한 ‘애정과 가엾이 여김’이 넘쳐났다. 여기서 ‘친교 - 코이노니아’는 ‘코이노노스 κοινωνός 동무 또는 짝, 협동’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동무가 되고, 짝이 되어, 함께 행동하는 신앙협동 행동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영의 친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대안세상 하나님나라 - 수평적 관계의 민중세상’ 가능성에 대하여 ‘히나 토 아우토 프론네테 ἵνα τὸ αὐτὸ φρονήτε 스스로에 대하여 깨달음으로써’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깨닫는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깨닫다’라고 번역한 ‘프론네테 φρονήτε’는 ‘프렌 φρήν 마음 또는 심장’을 ‘아파테 ἀπάτη 부정하는 또는 속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깨달음으로써’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마음(심장 또는 욕구)을 속이는 것(또는 부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생각과 자기 욕망과 자기 이데올로기를 내던져버리는 것으로써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이로써 초대교회 예수신앙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쉼프쉬코이 σύμψυχοι 더불어 생명들(또는 한 생명들)로써 한 마음들’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뜻 - 한마음’을 품은 이들이 ‘로마제국황제 지배체제 - 로마황제 숭배통치’에 대한 ‘대안세상 - 민중세상 생활신앙행동’을 증언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예수신앙 생활행동증언은 경쟁이거나 또는 이기적인 야망이 아니었다. 낮은 마음(타페이노프로쉬네 ταπεινοφροσύνῃ)으로 - 스스로 평등하게 낮아짐(타페이노스 ταπεινός)으로써 - 겸손한 마음과 따뜻한 심장(프렌 φρήν)을 가지고 - 더불어(쉰 σύν)사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이들이 ‘서로를 위에 있는 이 - 지도자들’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대한다. 모든 이들이 서로에게 낮은 마음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살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스코픈테스 σκοποῦντες 보살피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빌립보의 이방인 예수신앙 공동체에게 ‘로마제국황제 지배체제 - 로마황제숭배 통치세상’과 전혀 다른 ‘대안세상 - 민중세상의 생활신앙 행동들’을 제안한다. 바울의 이러한 대안세상 - 민중세상을 향한 예수신앙 생활행동제안은 21세기 우리시대의 예수신앙인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어제와 오늘 미래의 예수신앙 공동체에게 권면한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사이에) 이 뜻(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체 안에 계시면서
결코 자기 것을 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같음을.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취하신 후에
사람들과 같게 되심으로.
곧 사람처럼 나타내지신 모양을 가지심으로
그는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되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위 바울의 권면말씀은 바울의 예수신앙 생활행동 제안의 핵심으로써 초대교회 예수신앙 공동체의 ‘그리스도 찬가’이다. 로마제국황제 지배체제 - 로마제국 황제숭배 통치세상의 대안세상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 민중세상을 여는 예수신앙 생활신앙 행동의 핵심실체이다. 이것은 예수신앙인 각 개인의 내면에서만이 아니라 예수신앙 공동체 안에 활동하는 신앙의 힘이다. 그것은 바로 ‘엔 크리스토 예수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예수 그리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엔 모르페 테우 ἐν μορφῇ θεοῦ 하나님의 형체 안에 - 하나님의 존재양식 안’에서 시작하는 예수의 존재의 위상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위상이 예수신앙 공동체 안에 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형체 안에서 예수의 존재 위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같음’이다. 바로 성서가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 ‘바닥하늘 - 민중하늘’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민중의 삶 속으로 오심 - 곧 임마누엘 신앙’이다.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하나님과 같음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제국주의 욕망이었다. 구약성서는 바벨탑 본문에서 이 인류의 아주 오래된 ‘하나님과 같음의 제국주의 욕망’을 생생히 증언한다. 이 하나님과 같음의 제국주의 욕망은 바울시대의 ‘로마제국 지배체제 - 로마황제 통치세상’속에서 여실이 나타난다. 로마제국황제 지배체제 - 세상의 구원자인 로마제국 황제통치 숭배는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다. 그 옛날 바벨론제국의 바벨탑처럼 인간의 탈을 벗고, 한계를 넘어 신의 권위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21세기 지구촌제국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월가 독점금융자본들도 - 한국의 재벌들도 - 불로소득 졸부 건물주들도 무소불위 맘몬(자본)신이 되려고 혈안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예수신앙 공동체 안에서 예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의 영의 사람 -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시는 이 땅의 아들 - 갈릴리민중의 아들 나사렛 사람 예수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임마누엘 신앙 - 이 땅의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같음의 존재위상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유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비웠다.
어떻게 비우는가? 본문말씀에서 예수의 비움은 스스로를 낮추어 이 땅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 땅의 평등한 사람 - 이 땅에 속한 가난한 사람 - 억압과 고난 속에 있는 사람 - 이 땅의 민중이 되는 것이었다. 본문은 이러한 의미를 ‘스케마티 σχήματι 모양을 가지다’로 표현하는데 이점에서 스케마티는 ‘엨코 ἔχω 가지다, 입다’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는가? 이 동사는 ‘어떤 유의 에토스 ἔθοϛ 태도, 성정’을 가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초대교회의 예수신앙 공동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같음의 본질과 그 됨됨이를 비워내 버리고 - 이 땅의 가장 낮은 민중 - 농투성이 소작농처럼 - 3D 업종 노동자처럼 - 가난하고 힘없는 저소득․소외계층처럼 된다는 것이다. 이 땅의 민중들의 생활 태도와 성정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생전에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먹보요 술꾼이며,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대안세상, 민중세상을 열기 위해 기꺼이 로마제국 십자가 처형의 고난 길을 가신다.
그렇기(그것) 때문에, 초대교회의 예수신앙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신앙반전을 일으킨다.
“그렇기(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더 할 나위 없이 높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예수의 이름 안에서 모든 것이 무릎 꿇게 하기위하여
하늘위에 있는 것들과 땅위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
그러므로 모든 입(언어)이 스스로 고백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맺는 말
본문 읽기-2 누가복음 2:1-12 예수탄생설화는 초대교회 예수신앙 공동체들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대안세상 - 민중세상 신앙고백’의 확장이다. 초대교회 예수신앙 공동체에게 ‘이 땅위에 아기 예수의 오심’은 모든 대중들이 함께 기뻐하며 고대하던 축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땅의 아기예수의 오심은 아무도 기대하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하찮은 일이었다. 굳이 놀랍고 특별한 일이었다고 강변한다 해도 도리어 이 땅에 아기예수의 오심은 비밀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비천한 몸으로 오셨고, 심지어는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문 읽기-2에서 초대교회 예수신앙 공동체가 증언하는 신앙의미는 이렇다.
첫째, 이 땅에 아기예수의 오심은 ‘하늘의 섭리에 대한 땅의 요청’이라는 신앙진리이다.
두 번째, 예수는 ‘이 세상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자’라는 신앙진리이다.
세 번째, 예수는 ‘체제변혁 대안세상 실천행동가’라는 신앙진리다. 아기 예수가 이 땅의 오심자체가 이 땅의 지배체제를 거부한다는 신앙진리이다.(사생아신학)
네 번째, 이 땅에 오신 예수는 ‘민중의 아들’이라는 신앙진리이다.
다섯 번째 아기예수의 탄생은 ‘온 땅의 민중들에게 찾아온 복음’이라는 신앙진리이다.
그러므로 21C 한국교회역시 포대기에 쌓여 외양간 짐승들의 여물통에 뉘여 있는 아기 예수를 찾아내서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아기 예수를 이 시대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영접해야한다. 특별히 오늘 우리시대의 이 땅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더욱 더 그렇다.
그러므로 과거와 오늘과 미래의 기독교 예수신앙 진리 안에서 이 땅의 해방과 자유, 구원, 이 땅의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는 이 땅의 민중들을 통하여 온다. 우리 시대의 행세깨나 하는 기득권세력들이 기독교회의 구원,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맛보고 누리려고 한다면 필연코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의 자리에 연대하고 소통하고 참여하여 함께 삶을 누릴 때에라야 비로써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