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신약성서

부자청년이 예수의 하나님나라(부의 포기)를 거부하다.

희년행동 2022. 5. 7. 21:44

부자청년이 예수의 하나님나라(부의 포기)를 거부하다

마가복음 10:17-22

 

읽기

 

예수께서 길에 나섰을 때 한 사람이 달려 나와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후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러자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왜 나를 선하다고 말하는 거요?

하나님 한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소!

당신도 일찍이 계명들을 알고 있잖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속여서 빼앗지 말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그런 모든 것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제 스스로 다 지켜왔던 것들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사람을 눈여겨보신 후, 그를 사랑스레 여기셨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에게는 한 가지가 모자라오.

당신은 가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늘에 있는 곳간을 차지하게 될 것이오.

그러고 나서 나에게 오시오!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말씀으로 인해 언짢은 얼굴을 한 후, 고통스러워하면서, 떠나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많은 자산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낱말풀이

 

* ‘에이스 ες 한사람’ : 이 사람에 대하여 예수는 플루시우스 πλούσιος 부자라고 말한다.(25) 바로 많은 자산들을 가진 사람이다.(22)

* ‘고뉘페테오 γονυπετέω 무릎을 꿇은 후’ : 이 동사는 고뉘 γόνυ 무릎’ + ‘피프토 πίπτω 고꾸라지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 ‘아가토스 γαθός 선한이라는 헬라어 낱말은 그 어원이 불분명하다. 아마도 히브리어의 토브 טוב 선한이라는 낱말에 상응하는 헬라어표현이었을 것이다.

* ‘조에 아이오니오스 ζωή αώνιος 영원한 생명’ : 유대교 전통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낯선 개념이다.

* ‘클레로노메오 κληρονομέω 물려받다’ : 이 동사는 클레로스 κλήρος ’ + ‘메노 μένω 남아 있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 ‘우데이스 ~ 에이 메 οδείς ~ εμή ~외에는 아무도 ~아니다

* ‘아포스테레오 ποστερέω 속여서 빼앗다’ : 이 동사는 아포 ποʹ ~로부터’ + ‘스테레오 στερέω빼앗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 ‘에퓔라크사멘 φυλαξάμην 제 스스로 다 지켜왔던 것들’ : ‘퓔랏소 φυλαʹσσω라는 동사의 제1부정과거 중간태-재귀동사이다.

* ‘엠블레포 μβλέπω 눈여겨보신 후’ : 이 동사는 ν ~말미암아’ + ‘블레포 βλέπω 보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 ‘휘스테레오 στερέω 모자라다’ : 이 동사는 비교급형용사 휘스테로스 στερος 둘째의에서 유래한다.

* ‘테사우로스 θησαυρός 곳간’ : 이 낱말의 어원은 θή인데 바로 티테미 τιʹθημι 넣어놓다, 두다라는 의미이다.

* 부자청년에 대한 예수의 요청 - 삼음보 문장 : 휘파게 παγέ 당신은 가서 폴레손 πώλησον 당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도스 δός 가난한 사람들에 주시오.

* ‘아콜루테오 κολουθέω 따르다, 쫓다’ : 이 동사는 ‘ἀ 결합접두어 + κέλευθος 로 이루어진 합성이다. 따라서 이 동사 길()에서 유래하는데 접두어 ‘ἀ 처음, 하나붙으면서 하나의 길, 새길이 된다.

* 부자청년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삼음보 문장 : 첫 번째 동사 - ‘스튀그나사스 στυγνάσας 분사 언짢은 얼굴을 한 후’, 이 동사는 스튀게오 στυγέω 미워하다, 싫어하다에서 유래한다.

두 번째 동사 - ‘뤼푸메노스 λυπούμενος 분사 고통스러워하면서’, 이 동사는 뤼페 λυʹπη 고통, 환란에서 유래한다.

세 번째 동사 아펠텐 πλθεν떠나갔다‘, 이 동사는 아포 πό ~으로부터 또는 ~에게서’ + ‘에르코마이 ρχομαι 가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 ‘크테마타 κτήματα 자산들’ : 이 낱말은 크타오마이 κτάομαι 쌓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시작하는 말

 

21C 한국 기독교회의 현실상황에서, 복음서는 무엇일까? 특별히 역사적 예수를 신앙하고 갈망하는 이들에게 첫 번째 복음서 마가복음은 무엇일까? 실제로, 예수 사후 1C 초대교회 안에 난무했던 신조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마가복음은 역사적 예수신앙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사후 1C 동안, 예루살렘을 비롯한 로마제국내의 모든 기독교회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선포했다. 초대교회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대속적 십자가 죽음을 증언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했다. 나아가 언제가 다시 재림하실 예수를 신앙했다.

그런데 이러한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 신조는 도리어 예수신앙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마디로 초대교회 안에서 역사적 실체로서의 갈릴리 나사렛사람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지워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역사적 실체로서 갈릴리 민중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외면한 채,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차원의 초월적 그리스도론에 집착하게 되었다.

초대교회 안에서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죄의 용서와 예수의 부활로 인한 영생의 소망만 중요하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과 그의 생애와 사상은 시나브로 잊혀지고 말았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편향된 예수신앙 행태는 로마서 4:25절의 정형화된 신앙고백으로 명백하게 증언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악들 때문에 넘겨지게 되었고 우리를 의롭게 하심 때문에 일으켜지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대교회의 어제의 예수, 오늘의 그리스도, 내일의 재림예수라는 삼차원적이고 초월적인 그리스도 신조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위험의 내용은 역사적 실체로서 갈릴리 민중의 아들 나사렛사람 예수에 대한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신앙뿌리 부정과 망각이다. 예수가 역사의 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삶을 살다가, 그 시대의 지배체제와 종교권력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며 망각이다.

두 번째 위험의 내용은 예수의 선포와 활동과 삶을 통하여 드러난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앙 배척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의 부자청년 사건은 예수사후 1C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21C 한국 기독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시나브로 잊혀져간 예수의 역사성,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실체와 신앙의 은유들을 낱낱이 드러내주고 있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찬찬히 본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끄는 말

 

본문의 첫 구절은 예수께서 길에 나섰을 때이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본문의 앞뒤 문맥으로 보아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갈릴리 군중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앞으로 예수가 만나야하는 군상들은 예루살렘의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예루살렘 유대인 대중들이다. 앞으로 예수는 과거처럼 더 이상 갈릴리 군중들과 하나님나라의 실천운동을 도모할 수 없을 것이다. 도리어 예루살렘 정치종교엘리트들과 끊임없이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논쟁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 상경 길에서 만나는 최초의 하나님나라 투쟁사건이 본문의 부자청년 사건이다. 이점에서 본문의 구성요소에는 몇 가지 갈등조건들이 드러나 있다. 먼저는, 사건의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요소들로 인한 갈등이다. 두 번째는 사건의 주제와 관련된 요소들에 내재된 갈등이다. 세 번째는 사건 상황요소들에 내재된 갈등이다.

먼저, 사건의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요소들로 인한 갈등으로부터 부자청년을 살펴보자. 이 부자청년은 예수께서 가시는 길로 달려 나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후 예수께 질문을 던진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 장면에서 부자청년의 행태가 너무나 호들갑스럽다. 부자청년이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는데, 이때 사용된 동사는 고뉘 - 무릎’ + ‘피프토 - 고꾸라지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인데, 히브리어 어감으로는 예배하다이다. 이로보아 부자청년은 예수의 예루살렘 상경 길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적대자들과 다르다. 부자청년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선포하고 이루려고 하셨던 하나님나라를 기대하는 몇 안 되는 예루살렘의 실력자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부자청년은 예수를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아가토스 - 선한이라는 낱말에 대한 예수시대의 용법은 매우 다양했다. ‘착한, 좋은, 적합한, 유용한 등형용사로 사용되기도 했고 좋은 물건, 유익한 것 등명사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이 낱말이 선/악 이라는 종교적 관념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렇더라도 유대인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삶을 속속들이 알고 주관하며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청년은 예수를 선하신 선생님이라며 호들갑스럽게 불러댄다. 그것은 예수의 호의와 환심을 사려는 부자청년의 마음의 열망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부자청년의 이러한 태도는 곧바로 180도 바뀌고 만다. 왜냐하면 예수가 부자청년에게 이렇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한 가지가 모자라오. 당신은 가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늘에 있는 곳간을 차지하게 될 것이오. 그러고 나서 나에게 오시오! 나를 쫒으시오!”

이 예수의 부자청년에 대한 요청은 삼음보 문장을 통하여 표현되는데, 예수는 부자청년을 향한 사랑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과 단호한 어투로 부자청년에게 자산 포기 예수의 하나님나라 참여를 요청한다.

당신은 가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부자청년은 예수의 이러한 요청을 받고 나서 언짢은 얼굴을 한 후, 괴로워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여기서도 본문은 세 개의 헬라어 동사를 연속해서 사용하여 부자청년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삼음보 문장에서 사용된 첫 번째 동사가 스튀그나조 언짢은 얼굴을 한 후인데 이 동사는 스튀게오 - 미워하다, 싫어하다에서 유래한다. 그런데도 우리말 성서들에서는 이 동사를 슬픈 기색을 띠고, 슬퍼하고따위로 번역한다.

두 번째 뤼푸메노스 고통스러워하면서라는 헬라어 동사도 마찬가지 인데, 이 동사는 뤼페 - 고통, 환란에서 유래한다. 우리말 성서는 이 동사를 근심하며라고 가볍게 번역했다. 세 번째 아펠텐 떠나갔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아포 ~으로부터 또는 ~에게서’ + ‘에르코마이 - 가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나에게 오시오. 나를 쫒으시오라는 예수의 요청에 대한 정 반대의 길이다.

사실, 부자청년에게 예수는 종교적으로나, 삶으로나 그 시대의 선생들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따라서 부자청년은 아주 감격적으로 아주 호들갑스럽게 예수를 맞이하고 있다. 그것으로 보아 갈릴리 나사렛 예수에 대한 부자청년의 열망과 기대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예수 역시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하여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신의 삶의 태도를 고백하는 부자청년을 사랑스레 여겼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접하게 되면서, 그의 모든 열망과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도리어 부자청년의 내면세계에는 예수에 대한 원망과 미움과 그로 인한 괴로움만 남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동사 뤼페오 괴롭게 하다뤼페 - 고통, 환란에서 유래하는 동사이다. 부자청년은 예수로부터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영원한 생명 하나님나라를 물려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자산들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를 쫓으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요청은 부자청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싫고 고통스러운 일 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와 관련하여 본문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요소들로 인한 갈등을 통하여 예수의 상황을 살펴보자. 예수는 부자청년을 처음 대면하여 부자청년으로부터 낯간지러운 칭송을 받자, 이렇게 일갈한다. “당신은 왜 나를 선하다고 말하는 거요? 하나님 한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소!” 매우 거칠고 사나우며 논쟁적인 예수의 언사이다. 예수는 처음부터 자신을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호들갑을 떠는 부자청년의 태도를 한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왜냐하면 예수는 부자청년의 질문의 핵심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다 진지한 대화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는 부자청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에 대해, 빤하다 빤한 십계명의 주요내용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속여서 빼앗지 말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한마디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유대사회 엘리트들의 위선적인 신앙태도를 꼬집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본문에서 특별히 속여서 빼앗지 말라는 계명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사용한 헬라어 동사는 아포스테레오인데, ‘아포 ~로부터 + 스테레오 빼앗다로 이어진 합성어이다. 그런데 속여서 빼앗지 말라라는 계명은 십계명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써, 예수는 신명기 24:14절에서 이 말씀을 빌려와 부자청년에게 제시한다. 한마디로 이 계명은 하루벌이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제때에 지불하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이로써 예수는 부자청년에게 하나님의 뜻이 십계명 안에 살아 있음을 경고한다. 나아가 십계명 안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참 뜻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강조한다.(12:28-34) 이점에서 예수는 십계명 가운데서 사람들이 실천행동 해야만 하는 이웃사랑에 대한 것들만 열거하고 있다.

이 때, 본문에서 부자청년은 예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모든 계명들을 모두 스스로 지켜왔다고 대답한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동사가 에퓔라크사멘 1부정과거 중간태라는 동사이다. 그런데 고대 헬라어 용법에서 중간태 동사는 일종의 재귀동사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말로 옮기기 매우 어렵다. 본문에서는 제 스스로 모두 지켜왔습니다라고 새겨서 읽을 수 있다.

예수는 이 부자청년이 십계명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얼마나 성심성의껏 순종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자청년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도 매우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이때, 본문이 사용하는 동사가 엠블레포인데 ~말미암아 + 블레포 보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부자청년의 당당하고 확신에 찬 대답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그 부자청년을 눈여겨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한눈에 그 부자청년에게서 사랑스러운 면모를 발견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부자청년에게 자신이 선포하고 이루어가려는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의 동의를 구했다.

 

당신에게는 한 가지가 모자라오.

당신은 가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늘에 있는 곳간을 차지하게 될 것이오.

그러고 나서, 나에게 오시오!

나를 쫒으시오!”

 

두 번째,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본문의 주제 요소들 안에 내재된 갈등이 드러난다. 본문에서 부자청년은 예수를 보자마자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했다. 그런데 유대교 전통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아주 낯선 개념이다. 실제로 예수시대의 유대교 제사장계급과 귀족들을 대변하는 사두개파는 영생과 부활을 믿지 않았다. 또한 서기관과 랍비 등 바리새파에서도 부활과 영생이 있느냐 없느냐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4:2, 23:6-9)

 

그렇지만 유다왕국의 멸망이후 유다공동체 안에서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이 싹터왔다.(다니엘, 에스겔 참조) 즉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인류역사에 개입하심으로써 이 세대를 끝장내시고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대를 여시리라는 기대이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희망의 결집이 바로 메시야 대망이다. 메시야 대망은 유대교 안에서 두 가지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하나는 위대한 다윗왕국을 지향하고 회복할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 대망이다. 또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은 심판받게 되고 이스라엘의 의로운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리라는 묵시적이고 초월적인 메시야 대망이다.

그런데 예수시대의 유대 군중들의 메시아 대망 안에는 이 두 가지 성향이 혼합되어 존재해 왔다. 유대 군중들은 메시야 대망으로 깨어 있는 성결한 유대인들만이 영원한 메시야의 나라를 맞이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영원한 메시아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고 찾는 유대인들에게는 옛 부터 약속된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생명이 상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본문에서 부자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클레로노메오 상속(물려)받으려고했다. 이점에서 클레로노메오라는 헬라어 동사는 클레로스 - + 메노 남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부자청년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의로운 유대인들이 앞으로 도래할 종말적 메시아의 나라에서 누려야 하는 마땅한 몫이었다. 부자청년은 의로운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이 하나님나라의 제 몫을 당연하게 상속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5:5 참조)

그러나 예수에게 있어서 영원한 생명은 곧 하나님의 통치이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나라가 곧 영원한 생명이다. 또한 그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생명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모두가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 나라였고, 누구나 들어가 누리는 평등의 나라이며, 여럿이 함께 주체적으로 실천행동 하는 나라이었다. 무엇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가난하고, 나약하며, 보잘 것 없는 작은이들의 나라이다.

그러다보니 예수의 눈에는 아직 부자청년에게 모자라는 점이 있었다. 이 부자청년이 영원한 생명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반드시 한 가지를 더 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쫒는 것인데, 그러기위해서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한다.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에서 원칙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예수가 군더더기 없는 또렷한 언어로 자신을 쫒으려는 제자들에게 재산포기를 명령 한다는 사실은 성서 곳곳에 증언되어 있다.(1:18,20 10:21,29 6:25-34 12:22-32)

이렇듯이, 예수를 쫓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돌아가는 몫이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하늘 곳간을 차지하는 것인데, 이때 사용하는 낱말이 테사우로스 - 곳간이다. 이 낱말의 어원은 인데 바로 티테미 - 넣어놓다, 두다라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전통 속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는 하늘로부터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왔다. 따라서 예수는 이 땅에서의 자산포기가 하늘나라 곳간에 보물 쌓기라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아콜루테오 예수를 따르다, 쫓다라는 동사는 켈류토스 - 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켈류토스에 접두어 - 처음, 하나가 붙으면서 하나의 길 - 새길이 된다. 따라서 예수를 쫓다라는 의미는 나의 인격, 나의 삶을 통 털어 기꺼이 예수가 가신 길 -하나의 길, 새길에 서서 예수의 길벗이 된다는 뜻이다.

끝으로, 이렇듯이 부자청년이 예수를 쫓으려 할 때, 본문의 상황요소들에 내재된 갈등이 증폭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마가복음 1025절에서는 본문 청년에 대하여 플루시오스 - 부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22절에서는 많은 자산들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이 청년을 아르콘 관원이라고 말하는데, 예수시대의 산헤드린 의원이었을 것이다. 산헤드린(공회)은 로마 식민지였던 유다 공동체의 최고 관청으로써,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는다. 구성원들은 주로 세력 있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는데, 일부 명망 있는 바리새인들과 부유한 평신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점에서 부자청년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자청년은 너무도 많은 자산들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자산들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전혀 맞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본문은 많은 자산들이라는 표현으로 크테마타’(복수형)라는 헬라어 낱말을 사용한다. 이 낱말에서 크타오마이 쌓다라는 동사가 나왔다.

이처럼 우리는 본문에서 이어지는 부자와 낙타 비유에서 보듯이, ‘예수가 왜, 그토록 잔혹하리만치 부자들의 자산포기를 요청하셨을까에 대한 이유를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금력(金力)은 곧잘 마력(魔力)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금력을 손에 쥔 사람은 어김없이 금송아지에 머리를 조아리며 물신숭배(物神崇拜)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 핵심적 반 예수신앙, 반 하나님나라 삶의 행태가 바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부의 쌓음이다. 이러한 부자들의 삶과 신앙 행태로는 도저히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근접할 수 없다.

 

맺는 말

 

마가복음 저자는 본문의 부자청년 사건뒤에 부자와 낙타비유그리고 따름과 보상에 관한 제자들의 상황과 유행어들을 묶어서 늘어놓았다. 그러나 실제로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은 이 세 가지 이야기 단락들을 따로따로 라고 여기는데, 마가복음 저자가 한자리에 모아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마가복음 저자는 세 가지 이야기 단락들이 서로 어울리도록 이야기 내용도 뜯어 고쳤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럼으로써, 초대교회와 독자들은 본문의 부자청년사건과 이어지는 부자와 낙타비유에 대한 해석에 갈팡질팡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21C 교회와 독자들의 본문읽기에서는 부자청년의 자산포기 거부, 예수의 하나님나라 거부라는 해석의 주제가 약화되거나 포기되었다. ‘부자청년의 많은 자산들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요청도 약화되거나, 무시되거나, 사라져 버렸다. 도리어 21C 교회와 독자들은 본문읽기와 해석을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라는 종교적 회개의 감성으로 치환했다. 더 나아가 심지어는 본문읽기와 해석을 통하여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럼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라는 타력구원론으로 본문해석의 물꼬를 터버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만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불가능 한 것을 해낼 수 있다.”

본문 읽기와 해석을 통하여 값싼 종교소비, 신앙 최면술 주문만을 되뇐다.

이렇듯이 참으로 21C 교회와 독자들은 본문 부자청년 사건부자와 낙타비유읽기를 제멋대로 비틀어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시대의 교회와 교우들의 신앙요소에는 깨끗한 부자론이 판을 치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교우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정, 그대들은 부자청년의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실천행동 만큼이나 스스로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당당한가? 진정 그대들은 부자청년만큼이라도 예수가 선포하고 이루어가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절절함이 있는가?

실제로, 본문의 부자청년은 물신(物神)에 사로잡혀 자신의 많은 자산들에 대한 기꺼운 포기를 결단할 수 없었다. 오늘 우리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신자유주의 시장사회에서 청빈의 삶, 무소유의 삶을 결단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