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희년신앙』 맥(脈)

희년신앙 행동계약 7. 마라의 쓴물 사건, 노예세상 정체성을 변혁하는 희년신앙 공동체규약 훈련

희년행동 2022. 9. 2. 13:12

희년신앙 행동계약

 

7. 마라의 쓴물 사건, 노예세상 정체성을 변혁하는 희년신앙 공동체규약 훈련

출애굽기 15:22-26

 

 

본문읽기

 

모세가 홍해로부터 이스라엘을 떠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수르광야로 나아갔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흘을 걸었다. 그런데 그들이 물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들이 마라에 다다랐으나, 마라로부터 물을 마시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의 물이 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다.

풀뿌리 사람들(백성)이 모세를 향하여 투덜댔다.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는 거요?”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그 물이 단 맛을 냈다. 야훼께서는 거기서 그들을 위하여 공동체 규약과 공동체 정의를 세우고, 그들을 훈련하셨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가 너희 하나님 야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래서 너희가 야훼의 눈에 옳은 일을 행한다면,

그래서 너희가 야훼의 명령에 귀 기울인다면,

그래서 너희가 야훼의 모든 규약을 지킨다면,

내가 이집트사람들에게 두었던 그 모든 질병들을 너희 위에 두지 않겠다. 참으로, 나 야훼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이다.”

 

 

본문풀이

히브리 노예들의 노예정체성을 변혁하는 희년신앙 공동체 훈련

히브리 노예들의 노예정체성

 

21세기에도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우리는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였었다, 그러나 야훼께서 우리를 파라오의 노예제국으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하셨다라고 가르친다. 실제로 본문읽기에 따르면 히브리 노예들은 자그마치 사백 삼십년 동안이나 파라오 노예제국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히브리 성서는 히브리 노예들의 사백 삽십년 노예생활 가운데 수없이 일어났을 법한 노예해방 운동에 대해 단 한건도 보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히브리 노예들이 철저하게 노예근성 또는 노예정체성에 찌들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 성서는 오롯이 모세의 투쟁만을 보도하고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모세의 투쟁이 노예근성에 찌든 히브리 형제의 밀고로 인해 끝장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은 타고난 노예일 수밖에 없는 히브리들을 해방하고 구원하셔서 가나안 노느매기 땅으로 이끄시려 한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이끌지 않으시고 갈대바다를 건너게 하셔서 광야로 나아가게 하셨다. 그리고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지내도록 하셨다.

 

야훼 하나님은 왜, 히브리 해방노예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

 

히브리 노예들은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타고난 노예였다. 그들은 사백 삼십년 노예생활 동안 철저하게 노예정체성에 찌들어 왔다. 오죽했으면 야훼 하나님께서 이렇게 염려하셨을까?

 

이 민족이 전쟁을 보게 되면 돌이켜 이집트로 돌아갈까 하노라.”

 

이제 막 갈대바다에서 야훼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체험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아직 야훼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타고난 노예들이었다. 그래서 히브리 해방 노예들에게는 야훼 하나님의 사람들로써 해방과 구원세상을 건설하고 누리고 지켜나가기 위한 희년신앙 행동훈련이 필요했다. 파라오 노예세상 사슬에서 벗어난 히브리 해방 노예들에게 40년 광야생활은 그들의 노예정체성을 씻어내는 희년신앙 행동훈련의 여정이었다. 실제로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의 꿈 희년신앙을 깨닫고 이해하며 행동할 의지가 전혀 없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해 본 경험조차 전혀 없다. 그저 현실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맹목적인 복종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 노예들은 자신들의 오랜 노예정체성을 새롭게 바꾸는 광야훈련을 시작해야만 했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인류종교문명사에서 유래가 없는 야훼하나님의 출애굽 해방과 구원사건을 체험하는 은총을 누렸다. 이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해방과 구원 세상에 걸맞은 스스로의 삶의 태도를 자기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의 마당에 새겨 넣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제 히브리들은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에 매여 사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건설하고 누려야 할 야훼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광야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성서의 중요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광야와 관계를 맺었다. 모세, 세례요한, 예수, 바울 등이 그렇다. 광야에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신앙인격을 연단하고 삶의 태도를 훈련했다.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본문읽기에는 히브리 노예들의 노예세상 정체성을 새롭게 변혁하려는 야훼 하나님의 의지가 절절하게 배어있다. 히브리들은 오랫동안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노예로 살아오면서 노예세상 정체성에 찌들어 왔다. 스스로의 생()을 가늠하지도 헤아리지도 못한 채 살아온 히브리 노예들은 지금 당장의 고통에만 반응해 왔다. 지나온 자신의 삶을 추억하지도 반성하지도 못한다. 미래를 향한 꿈도 희망도 의지도 없다. 오롯이 지금 여기서 자신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쥐락펴락 하는 주인의 말만 따를 뿐이다.

이렇듯이 히브리 노예들은 사백 삼십년을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 노예로만 살아왔다. 파라오 노예세상의 노예로 살아오면서 철저하게 노예세상 정체성에 찌들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 노예들은 새로운 해방과 자유세상, 정의와 평등세상, 생명평화세상을 스스로 건설하고 지켜내며 살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백 삼십년 동안 파라오 노예세상의 노예로 살아온 생()을 치유하고 변혁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실천행동으로써 고난과 고통이 함께하는 지루한 사회종교정치경제 공동체 생활훈련이다. 그래서 희년신앙 공동체 생활훈련은 파라오 노예세상에서 오롯이 종살이만 해왔던 히브리들에게 스스로의 노예세상 정체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마라의 쓴물,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파라오 노예세상 정체성을 변혁하다.

 

이제 본문읽기는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 노예였던 히브리들의 노예세상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변혁하는 광야 희년신앙 공동체훈련의 출발을 알린다. 이를 위해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곧바로 나가는 해변대로를 버렸다. 도리어 수르광야 길로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었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마라(מָרָֽה)의 쓴물사건과 이어지는 메추라기와 만나사건 등 광야 희년신앙 공동체 생활훈련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모든 훈련들이야말로 히브리 노예들이 펼쳐나갈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위한 주춧돌이다.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자유와 평등세상을 건설하고 누리며 지켜내려는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밑바탕이다.

그러나 히브리 노예들은 지금, 여기서 맞이하게 된 광야 희년신앙 생활훈련의 고난과 고통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들은 멋도 모른 채 자신들의 노예세상 정체성을 새롭게 변혁하는 출애굽 광야공동체 생활훈련의 길로 이끌려 나왔다.

물론 히브리 노예들도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갈망해왔다. 그들은 끊임없이 야훼 하나님께 파라오 노예세상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부르짖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파라오 노예세상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바꾸어 나가는 광야 희년신앙공동체훈련의 고통을 자세히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히브리 노예들은 광야에서 마라의 쓴물을 만났다. 히브리 노예들은 그들의 해방일꾼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투덜댔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는 거요?

 

히브리 노예들은 마라의 쓴물을 마나는 순간 그들의 노예세상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히브리 노예들은 그들의 눈앞에 들이닥친 고난과 고통에 숨이 넘어갈 듯 소리쳤다. 야훼 하나님의 해방일꾼 모세를 향해 온갖 비난과 원망을 쏟아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는 거요?”

 

실제로 이 비난과 원망은 히브리 노예들의 광야 사십년, 희년신앙 사회경제 공동체훈련 내내일어났다.

그러나 파라오 노예세상에서 타고난 노예였던 히브리들도 파라오 노예제국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갈망해 왔다. 히브리 노예들은 파라오 노예제국 종살이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며 아우성쳤다. 하나님께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마침내 히브리 노예들의 절규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종살이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히브리들의 절규가 인류종교문명사 속으로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불러냈다.

야훼 하나님께서도 몸소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과 절규에 응답하셨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들의 실패한 노예성공신화 주인공 모세를 해방과 구원일꾼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마침내 히브리 노예들을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히브리 노예들은 스스로의 노예세상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변혁해 나가야 한다. 이제야말로 새로운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꿈 곧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열어가는 일은 오롯이 히브리들의 몫이다.

실제로 성서 속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는 몇몇 뛰어난 사회종교정치 지도자들의 위대한 카리스마가 아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강제로 끌고 가시는 신정(神政)사회도 아니다. 성서 속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는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 모두의 공감과 연대와 참여다.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 모두의 신앙과 삶의 사건들이다.

왜냐하면, 히브리들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은 노예들을 다스리는 노예주인의 채찍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오롯이 하늘의 섭리와 계시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히브리들의 옳고 마땅한 희년신앙 사회종교정치경제 공동체의 신앙과 삶의 책임이며 의무다.

 

본문읽기에서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란 무엇을 의미할까?

 

히브리 노예들은 사흘동한 수르광야 길을 걷으며 심한 목마름의 고통을 겪는다. 그러던 차에 히브리 노예들이 어렵사리 우물을 찾아냈는데 그 우물은 마라-쓴물이었다. 히브리 노예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투덜댔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는 거요?’ 히브리 노예들의 원망과 투덜대는 소리를 듣게 된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다. 모세가 야훼께서 지시한 그 나무를 물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그 물에서 단 맛이 났다.

 

여기서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제, 히브리 노예들은 마라-쓴물의 고통 앞에서 노예세상의 옛 주인이었던 파라오와 결별해야만 한다.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고기 가마와 떡 광주리을 향한 노예욕망 내버려야만 한다. 광야 마라의 쓴물 고통 가운데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 노예세상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변혁해야만 한다.

실제로 히브리 노예들은 지금, 여기서, 눈앞에 닥친 삶의 고통과 고난을 향해 오롯이 복종으로만 반응하는 노예세상 삶의 태도를 벗어던져야 했다. 광야 마라의 쓴물 같은 삶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공감과 연대와 참여를 통한 희년신앙 공동체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이 본문읽기 문맥은 21세기 성서독자들에게 히브리 노예들 사이에서 서로의 삶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연대하며 참여하는 희년신앙 공동체훈련 현장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야훼께서 지시하는 나무란, 무엇을 의미할까라고 질문하게 하고 깨달아가도록 이끈다. 히브리 노예들이 세우고 누리며 지켜나가야 할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관점에서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에 주목하도록 요청한다.

 

히브리들의 노예세상 정체성 치유훈련, ‘야훼께서 지시하는 나무의 신앙은유는 무엇일까?

 

서구교회는 이천년 기독교회역사 안에서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의 신앙은유를 찾아 헤매왔다. 그리고 끝내는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야말로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이 해석은 기독교회의 핵심교리로써 구세주 예수라는 기독론의 입장에서 일면 타당한 해석이다.

하지만 본문읽기에서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의 신앙은유는 사백 삼십년 동안 파라오 노예세상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문읽기 문맥을 쫓아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의 신앙은유는 히브리들의 노예세상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변혁하는 희년신앙 투사(投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파라오 노예세상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들에게는 어떤 신앙이나 철학사상 또는 생()의 가치와 진실을 생각하고 깨닫고 판단해온 경험이 전혀 없다. 그저 현실 가운데서 고통과 절망을 몸에 새긴 채 맹목적인 복종에만 길들여져 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파라오 노예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하고 구원하신 야훼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찾아야하고 그 뜻에 따라야 한다. 이제 히브리인들은 파라오 노예세상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경험한 자유인으로서 자유 광야에서 새로운 해방공동체 생활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그 훈련을 통하여 희년신앙 공동체행동의 뜻과 의지를 스스로의 삶에 새겨 넣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에 매인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편 속에서라도 야훼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꿈꾸고 행동하는 사람들 곧 야훼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례로,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 체제에서라면 돈 중심의 모든 삶의 경험들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를 누리는 공동체세상을 꿈꾸고 세우고 지켜내야 한다. 21세기 불로소득 금융자본주의 지배체제의 무한경쟁과 독점과 쌓음과 누림이 아닌 서로살림공동체의 사회종교정치경제 생()의 가치와 질서에 주목해야한다.

 

이제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의 희년신앙 행동 은유들을 열거해보자.

 

첫 번째, 야훼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해방자유구원세상 세움과 누림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새로운 생()의 가치와 질서.

두 번째, 야훼 하나님께서 파라오 노예세상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체험한 해방노예들에게 보여주시는 정의와 평등사회 전망이다.

세 번째,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평화 세상을 향한 희망이다.

한마디로 히브리 노예들의 희년신앙행동 깨달음과 훈련을 통틀어 묶는 신앙과 삶의 전체로써 희년신앙 행동서사. 히브리 노예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공동체 깨달음과 훈련이야말로 히브리들에게 닥치는 고통과 절망, 삶의 상황을 단맛 나는 생으로 새롭게 변혁하는 비밀이다.

그러나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배고프지 않을 만큼 밥술이나 먹는 중산층 대중(大衆)들의 노예세상 정체성을 새롭게 변혁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나아가 하루살이가 걱정스러운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삶의 마당에 뿌리내린 그 밑바탕조차 알 수 없는 노예세상 정체성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쥐꼬리 임금노예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21세기 풀뿌리 사람들은 감히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 꿈조차 꾸지 못한다. 서로 빼앗고 죽이기보다는 서로를 살리는 사회종교정치경제 삶의 가치를 찾고 이해하며 행동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21세기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스스로 돈에 매여 사는 생()의 가치관과 생활경제 욕망을 청산해야할 때가 이르렀다. 이제야말로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노예정체성 사슬을 끊어내고 새로운 사회공동체 대안세상건설에 앞장서야만 한다. 이점에서 본문읽기는 21세기 풀뿌리 사람들에게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임금노예 사슬을 끊는 방법으로써 사회경제공동체 정의를 실현하는 희년신앙 공동체 생활훈련을 제안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쉽게도 우리말 성서는 본문에서 사용한 니사후 נִסָּֽהוּ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야훼께서 그들을 시험하셨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니사후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본문읽기의 문맥에 맞게 야훼께서 그들을 훈련하셨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야훼 하나님은 노예세상 정체성으로써 복종DNA만 도드라진 히브리 노예들에게 새로운 희년신앙행동 가치와 질서를 주셨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꿈꾸고 행동하도록 히브리 해방노예들을 훈련하셨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야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에게 희년신앙행동 공동체훈련요건으로 너희가 너희 하나님 야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이라고 요청하신다. 왜냐하면, 히브리 노예들은 사백 삼십년 동안 오롯이 파라오 노예세상의 주인인 파라오의 호통소리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파라오의 호통소리는 오롯이 억압과 착취, 피 흘림과 죽임, 절망과 고난을 부르는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히브리 노예들의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었던 파라오의 호통소리를 뒤엎을만한 새로운 생()의 울림소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히브리 노예들을 향해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외치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이다. 누구든 이 야훼의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만자기 안에 똬리 틀고 앉은 노예세상 정체성을 끊어내고 새로운 대안세상을 꿈꿀 수 있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개척하고 누리며 지켜낼 수 있다.

예를 들어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현재를 사는 예수신앙인들의 삶에 비추어 이야기해보자. 참으로 21세기 금융시스템 속에서 돈의 유혹, 돈의 욕망, 돈의 악마적 속삭임 떨쳐내기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제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은 희년신앙 행동진실에 눈떠야 한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꿈꾸고 행동하고 누려야 한다.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이 옛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고 구원하신 야훼 하나님의 외침을 들으며 희년신앙 행동에 나설 때 대한민국이 살고 지구촌도 산다.

이제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한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 매여서 돈의 노예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우리의 생()을 깊이 살피고 반성하며 새롭게 변혁해야 한다. 그리고 돌 떠서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고통과 절망의 삶을 사는 이들과 소통하고 연대해야한다. 그들의 고통과 절망의 자리에 참여하여 함께 짐을 나누어야 한다. 말로만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행동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