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신앙 행동서사 14. 야훼냐, 바알이냐?
희년신앙 행동서사
14. 야훼냐, 바알이냐?
열왕기상 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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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왕이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냈다. 또한 예언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았다. 그때 엘리야는 모든 풀뿌리 사람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외쳤다.
“여러분,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릴 작정이오?
만약 야훼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분 뒤를 따르시오.
반대로 바알이라면 그를 쫓으시오.”
그러나 풀뿌리 사람들은 엘리야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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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므리 왕조
기원전 9백31년 히브리 지파동맹이 북이스라엘과 다윗왕조 남유다왕국으로 나뉘었다. 북이스라엘은 히브리 지파동맹에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빼고 르우벤, 스불론, 시므온, 므낫세, 단, 잇사갈, 아셀, 에브라임, 납달리, 갓 등 열 지파가 뭉쳤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에서는 왕권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번갈아서 여러 왕조들이 들어섰다.
첫 번째 북이스라엘 왕조는 야로브암 왕조였다. 북이스라엘 히브리 지파동맹은 히브리의 옛 도시 세겜에서 히브리 지파동맹 총회를 열고 야로브암을 북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했다. 야로브암왕은 히브리 지파동맹의 옛 수도 디르사에서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야로브암왕이 죽고 왕위를 이어받은 나답왕은 2년 만에 바아사에게 왕권을 빼앗겼다.
북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조를 연 바아사왕은 24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후 엘라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러나 엘라왕 역시 2년 만에 자기군대장관 시므리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시므리의 쿠테타는 단 7일 만에 막을 내렸다. 불레셋 도시왕국 에그론과 분쟁 때문에 깁브돈에 진을 치고 있던 군사령관 오므리가 군부대의 지지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므리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디르사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성을 함락했다. 이 와중에 시므리는 궁궐에 불을 지르고 불속에서 타죽었다.
이렇듯이 오므리는 직업군인으로써 북이스라엘 상비군에 들어가 자기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엘라왕궁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을 기회로 삼아 북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그런데 히브리 성서는 오므리의 출생과 혈족관계를 전혀 밝히지 않는다. ‘오므리’라는 이름자체도 히브리들에게 아주 낮선 이름이었다. 북이스라엘 유력가문 족보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이름이다. 그가 어떤 지파에 속하는지, 부모와 가족이 누구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오므리는 아라비아 출신이었거나 토착 가나안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오므리는 북이스라엘 히브리 지파동맹 전통에 따르면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오므리는 외국인 용병으로써 야훼하나님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따르는 히브리 지파동맹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또한 오므리의 군대는 히브리 지파동맹 전통에 따르는 민병대가 아니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상비군으로써 국경 최전선을 지키는 야전부대였다. 당연히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반발로 내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오므리의 맞상대는 북이스라엘 지파동맹 민병대를 이끄는 ‘기낫의 아들 디브니’였다. 오므리와 디브니 사이에서 벌어진 북이스라엘 내전은 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차지한 사람이 오므리였다.
오므리왕조는 다윗왕조 남유다왕국으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북이스라엘에서 명맥을 이어오던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오므리왕조는 북이스라엘 땅에서 가물가물 이어져온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끝장내려고 날뛰었다. 왜냐하면 오므리왕이 이방사람으로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오므리왕은 북이스라엘 땅에서 명실상부한 자기왕조를 세우기 위해 행동했다. 오므리왕조가 북이스라엘 땅에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오므리왕의 최우선 국정과제였다. 오므리왕은 북이스라엘 땅에서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 끝장내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가나안땅 토착 바알신앙으로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 온힘을 쏟았다. 그 본보기의 하나로 오므리왕은 ‘디르사’라는 북이스라엘 히브리 지파동맹의 전통수도를 버렸다. 오므리왕은 다윗왕조의 예루살렘을 본보기 삼아 자기사비(社費)로 사마리아 산을 사들여 그 산위에 사마리아 성을 건축했다. 그런 후에 북이스라엘 수도를 사마리아 성으로 이전했다.
이로써, 북이스라엘에서 히브리 지파동맹과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은 엄청난 ‘위기의 때’를 맞이하게 되었다.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 지파동맹 사이에서 맺어진 상호관계 희년신앙 행동계약 정체성이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는 오므리왕조의 억압과 박해 속에서 음지(陰地)로 내몰렸다.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은 시나브로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을 버리고 풍요다산 바알숭배에 휩쓸렸다. 이렇게,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정체성위기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왕 때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아합왕과 이세벨
히브리 성서는 오므리왕조의 아합왕을 모든 왕들보다 악한 왕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아합왕이 북이스라엘의 국가종교정책으로 풍요다산 바알선교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북이스라엘 히브리 지파동맹 전통과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이 무력화되었다. 아합왕은 페니키아 시돈왕국의 왕 ‘에트바알 אֶתְבַּעַל(바알의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아합왕은 시돈왕국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럼으로써 시돈왕국과 동맹을 강화했다. 왜냐하면 예부터 시돈왕국이 지중해 해상무역을 통해 세력을 떨쳐왔기 때문이다. 또 한편 북이스라엘은 가나안과 페니키아와 시리아 지역에서 소제국주의 맹주위상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합왕은 시돈왕국과 결혼동맹을 맺고 지중해 해상무역에 참여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키우고 더 튼튼하게 할 수 있었다.(열왕기상 16:30-31) 왜냐하면 시돈왕국이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등 지중해 여러 곳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시돈왕국의 지중해무역 거래상품들은 자주색 옷감, 목재, 밀, 기름, 포도주 등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돈이 남는 장사는 지중해에 흩어진 섬들과 식민도시 주변에서 유인해온 약탈노예거래였다.
아합왕은 다윗왕조 솔로몬왕국을 본받아 지중해 해상왕국 시돈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부를 쌓고 소제국주의 세력을 키웠다. 소제국주의 힘을 밑바탕 삼아 주변 작은 왕국들을 정벌하거나 규합하여 가나안지역 맹주역할을 자임했다.(메사의 석주)
실제로 오므리왕조 시대의 아시리아제국 문헌에도 ‘오므리의 집’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아합왕이 가나안과 페니키아와 시리아지역 열두 왕국들과 맺은 반아시리아 동맹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반아시리아 동맹은 시리아 오른테스강 언저리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제국과 전투를 벌였다.(살만에셀 3세의 석비)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페니키아 두로 왕국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맹주인 아합왕에게 이세벨공주를 시집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합왕과 시돈왕국은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상호 정치안정과 경제이익을 도모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왕비자리에 오른 이세벨은 페니키아에서 수많은 바알예언자들을 초청했다. 또한 사마리아 성안에 바알신전과 아세라 신상을 세우고 바알종교 부흥에 박차를 가했다. 나아가 북이스라엘 곳곳에서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예언자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가나안 땅에서 ‘바알’이라는 신명(神名)은 ‘주인’이라는 뜻이다. 특별히 땅에 대한 주인이라는 뜻이 강했다. 실제로 바알은 가나안의 모든 토착신들 가운데서 주신(主神)이었다. 또 가나안 땅에서는 생산의 여신인 ‘아스다롯’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짝으로 숭배되었다.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아세라’라고 불려 지기도 하는데 바벨론에서는 ‘이슈타르’라고 불리며 전쟁의 여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지정학관점에서 시돈왕국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시리아를 거치거나 또는 요단강 동쪽지역 암몬과 모압 땅을 거쳐 오가는 대상들의 종착지였다. 대상들은 온갖 상품들을 가져와 시돈왕국에 풀어놓았다. 그 상품들은 지중해 해상무역을 통해 지중해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북이스라엘 왕국시대 대상들의 무역은 지중해세계 부와 권력을 떠받치는 불로소득의 밑바탕이었다.
시돈왕은 대상들이 시리아 다메섹을 거쳐 멀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제국 등 큰 나라들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대상들이 시돈왕국에서 상품들을 풀어놓아야만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에 가장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북이스라엘이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은 이 모든 대상들의 이동로에 영향을 미칠 만큼 소제국주의 위상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므리왕조 아합왕과 시돈왕의 결혼동맹은 서로에게 이익이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오므리왕조는 북이스라엘 히브리 지파동맹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방인 왕조였다.
이렇듯이 시돈왕국으로부터 아합왕에게 시집온 공주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바알종교 선교사를 자처했다. 히브리 지파동맹 전통과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말살하는 일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시돈왕국의 공주 이세벨은 ‘아합왕의 배우자로써 소문난 악녀’로 히브리 성서에 기록되었다.
본문풀이
야훼냐, 바알이냐?
그 땅 풀뿌리사람 예언자 엘리야
히브리 성서 열왕기에서 ‘엘리야 이야기’는 아주 도드라지고 매우 특별하다. 이와 관련하여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에 뿌리를 둔 신명기학파가 북이스라엘 멸망이후에 새롭게 고치고 편집한 역사서다. 신명기학파의 역사기술 특징가운데 하나는 역사와 인물과 사건들을 연대기로 다룬다는 점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때도 장소도 밝혀지지 않은 채 불쑥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오므리왕조 아합왕과 격렬하게 맞선다. 엘리야는 희년신앙 행동계약 전통의 예언자로 자처하며 좌충우돌 오므리왕조와 바알신앙을 향해 시비를 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의 예언자로서 야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도 분명하지 않다.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예언의 말씀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엘리야는 어떤 사람일까?
히브리 성서는 엘리야를 ‘길르앗의 디셉사람’이라고 한다. 길르앗은 요단동쪽 북이스라엘의 변두리 지역으로써 아직 심각하게 바알종교화 되지 않은 땅이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나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면서 아합왕의 악행과 우상숭배 죄악으로 인해 ‘앞으로 몇 해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로 인해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엘리야는 요르단 강 동쪽에 광야에 위치한 그릿 시내에 숨어 지냈다. 엘리야는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들이 떨어뜨리는 식량을 주어먹고 생명을 유지했다.
한마디로, 엘리야는 ‘들사람’이다. 다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섞이지 않는 ‘맨’사람이다. 또 엘리야는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아마도 엘리야 이야기는 북이스라엘 풀뿌리사람들 사이에서 떠돌던 카리스마 넘치는 ‘어떤 예언자 전설’이었을 수도 있다.
한편 엘리야시대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서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왕국 요시야왕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이 종교개혁은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왕국으로 망명한 신명기학파 신학자들이 주도했다. 성서학자들은 ‘신명기학파로써 열왕기역사서 편집자들이 카리스마 넘치는 희년신앙 예언자 엘리야전설을 열왕기역사서에 끼워 넣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엘리야이야기는 북이스라엘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을 뜨겁게 지지하는 풀뿌리사람들의 신앙표상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엘리야후 אֵלִיָּהוּ’라는 이름은 오므라왕조 아합왕 시대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엘리야후라는 이름은 아래처럼 풀어서 새길 수 있다.
“엘리 יָה ’ 나의 하나님은 ‘야אֵלי’ 야훼다”
이렇듯이 ‘엘리야’라는 이름자체가 히브리 지파동맹과 더불어 상호관계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맺으신 ‘야훼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엘리야 이야기는 북이스라엘에서 번성했던 바알신앙을 향한 히브리 지파동맹의 대항행동으로써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투쟁’이었다.
이점에서 신약성서 복음서는 세례요한을 예수의 선구자로 내세우면서 엘리야이야기를 소환한다. 히브리 성서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들어 예수시대의 엘리야로서 세례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했다. 본문에서도 엘리야 스스로 ‘야훼하나님 앞에 서서 야훼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계시는 야훼하나님으로 맹세하며 예언 한다’고 선포한다. 실제로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서 ‘북이스라엘 희년신앙 행동계약의 존폐’를 가르는 바알신앙과의 한판 큰 싸움을 벌였다.
갈멜산 대회전(大會戰)
엘리야의 행적은 그야말로 폭풍처럼 강렬하고 힘이 넘쳤다. 말 한마디로 북이스라엘 전역에서 수년 동안 비를 그치게 했다. 그 일 때문에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아합왕의 신하에게 ‘내가 여기 있으니 아합 왕에게 나를 찾아오라고 해라’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런데 사실 고대 우가릿 토판문서에 따르면 바알은 ‘구름을 타고 다니며 폭풍과 파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다. 또한 ‘메마른 대지에 풍요와 생명을 가져오는 비와 바람의 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바알신의 이미지와 권력 그리고 고유한 종교영역을 들쑤시고 들어갔다. 그러면서 북이스라엘 전역에 가뭄을 선포했다. 수년 동안 북이스라엘에서 일어날 가뭄을 빗대어 아합왕에게 ‘죄’를 물었다. 이 가뭄이야말로 아합왕이 바알을 숭배하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이라고 선전선동 했다.
이와 관련하여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땅이 잔뜩 메마른 상황에서 ‘야훼와 바알 가운데 어떤 신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줄 수 있겠느냐’라는 종교투쟁을 전개한다.(호세아 2:8) 나아가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바알신과 야훼하나님 가운데 어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목숨을 건 내기를 제안한다. 그 유명한 ‘갈멜산 대회전(大會戰)’이다. 실제로, 갈멜산 아래에는 간절하게 비를 바라는 이스르엘 평야가 놓여 있었다.
아합왕은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고 여기고 궁내대신 오바댜를 대동하고 엘리야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도리어 엘리야는 아합왕을 만나서 자신과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 4백50명과 더불어 갈멜산 위에서 종교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실제로 갈멜산 위에서 벌어진 야훼하나님 예언자 엘리야와 바알신 예언자들과의 대결은 서로의 목숨을 건 피 말리는 대결이었다. 엘리야는 바알신 예언자들을 조롱하는 여유를 보이면서 자신만만하게 대결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갈멜산 위에서의 세기의 종교대결은 대규모 보복학살로 막을 내렸다.
이렇듯이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알종교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홀로 맞서서 통쾌한 승리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엘리야의 승리의 과정에서 ‘야훼하나님이 어떻게 관여하셨는지’ 종교우열을 가리는 본문읽기와 해석 따위는 참으로 쓸데없는 짓이다. ‘바알은 평야의 폭풍과 비의 신이었던 반면 야훼는 산위 불의 신이었다’라는 신학논쟁 따위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다’라는 종교대결기준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해석논쟁도 참으로 한심하고 쓸데없는 짓이다.
다만 ‘엘리야의 갈멜산 대회전(大會戰)선동에 부화뇌동한 북이스라엘 풀뿌리사람들의 광기어린 살육’이 옳았는가? 그 살육의 피범벅 속에서 ‘야훼하나님의 참 뜻’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겠는가? 서구제국주의 교회들의 이러한 본문읽기와 해석은 21세기 지구촌 성서독자들에게 커다란 의구심만 남길 뿐이다.
이렇듯이 갈멜산의 희한(稀罕)한 종교대결과 그 결말로써 피의 보복살육은 본문읽기의 신앙의미를 넓고 크고 깊게 하는 사건배경에 불과하다. 실제로 갈멜산 대결에서 나타난 야훼하나님의 불벼락 위세와 피의 보복살육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말살을 향한 히브리 지파동맹의 분노와 절망의 표현이었고 반영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증언으로써 엘리야는 갈멜산 대결이후 곧바로 열왕기상19:10-13 본문에서 폭풍과 지진과 불벼락 속에서 야훼하나님을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도리어 엘리야는 폭풍과 지진과 불벼락의 위세가 아니라 ‘나약하고 조용하며 부드러운 소리로 오시는 야훼하나님’을 절절하게 경험한다.
나아가 엘리야는 특별히 자신만이 희년신앙 행동계약 전통에 열심을 내었을 뿐 다른 모든 희년신앙 선지자들은 칼에 맞아 죽었었다고 울부짖는다. 오롯이 홀로 자신만 남았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야훼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은 7천명의 풀뿌리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갈멜산 대회전승리는 잠시잠깐 전설 속 예언자로써 엘리야 영웅 신화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엘리야는 갈멜산의 통쾌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바알신앙으로 돌아선 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을 야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에 실패했다. 도리어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로 인해 더 악독하고 험악한 탄압이 북이스라엘 곳곳으로 몰아쳤다. 북이스라엘 모든 곳에서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위한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 말살정책이 펼쳐졌다. 바알신앙의 열렬한 수호자인 이세벨은 피흘림과 죽임의 탄압으로 엘리야의 뒤를 쫓았다. 북이스라엘 풀뿌리사람들도 시나브로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 예언자 엘리야를 배척했다.
야훼냐 바알이냐?
그렇다면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 속에서 예언자 엘리야의 불꽃같았던 갈멜산승리 신앙은유는 무엇일까?
오롯이 그 답은 갈멜산으로 몰려온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에 따른 희년행동의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 사이에서는 왕정초기부터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을 밑바탕에 깔고 바알신앙 등 이방신앙을 받아들이는 종교혼합주의가 성행했다.
이른바 양다리 걸치기인데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이 북이스라엘의 소제국주의 왕정국가를 거부하기 때문이었다. 히브리 지파동맹의 사회․종교․정치․경제 공동체자치 전통은 왕정으로 권력과 부가 집중하는 것을 막았다. 특별히 희년신앙 행동법규로써 토지공공성개념은 가나안 노느매기 땅의 독점과 사유화를 거부함으로써 강력한 왕권탄생을 원천봉쇄 해 왔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건국초기의 잦은 왕권교체시기를 지나 군사정권인 오므리왕조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꿈꾸는 희년신앙 행동서사는 철저하게 억압을 받았다. 반면에 권력과 부의 독점과 쌓음을 부추기는 바알신앙은 크게 장려되었다. 아합왕 때에 이르러는 시돈왕국출신의 왕비 이세벨을 통하여 힘 있는 바알신앙 선교정책이 실행되었다.
반면에 히브리 지파동맹의 공동체자치전통과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은 한 오라기도 남지 않을 만큼 탄압당하고 말살되었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북이스라엘 히브리 지파동맹의 공동체자치전통과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벌어진 갈멜산 대회전 사건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갈멜산 대회전사건은 북이스라엘 왕국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갈멜산 대회전사건은 북이스라엘 사회․종교․정치․경제 공동체정체성을 가르는 크고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이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과 히브리 지파동맹 자치전통을 회복할 것이냐? 아니면, 다윗왕조 솔로몬왕국처럼 힘센 왕권과 바알신앙과 특권․기득권집단의 사익을 위한 소제국주의 왕권국가로 갈 것이냐? 갈림길이었다. 엘리야는 이 갈멜산 대회전을 경험하려고 갈멜산으로 모여든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에게 ‘야훼를 따를 것인지, 바알을 따를 것인지’ 결단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실제로 엘리야의 갈멜산 대회전 종교대결제안 배경에는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을 향한 자신의 열정에 더해서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희년신앙 정체성회복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의 모든 기대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북이스라엘 풀뿌리사람들은 이미 야훼냐, 바알이냐의 양자택일보다 ‘양다리 걸치기’에 익숙해 있었다. 본문은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양다리 걸치기 삶의 상황을 ‘세이핌 סְּעִפִּים 나무의 갈라진 부분으로 만든 목다리’로 표현하고 증언한다. 따라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에게 목다리를 짚고 쩔뚝이는 ‘포스힘 פֹּסְחִים 양다리 걸치기’ 신앙과 삶을 청산하라고 요구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야훼 하나님사이에서 머뭇거리다 못해 양다리를 짚고 쩔뚝이는 풀뿌리사람들에게 절망했다.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은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의 꿈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반면에 이미 몸과 마음은 맘몬․바알신앙으로 치우쳤다.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은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배신하지도 바알신앙을 포기하지도 못하는 절뚝발이 양다리 걸치기 신앙행태에 익숙해 있었다.
참으로,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이 어정쩡한 신앙과 삶의 행태는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신앙과 삶의 행태와 똑 같다. 21세기 맘몬․자본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풀뿌리 사람들은 감히 대놓고 맘몬․자본권력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이쪽저쪽으로 쩔뚝거리는 양다리 걸치기 신앙과 삶의 행태가 불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희년신앙이냐, 바알신앙이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맘몬․자본세상에서 바알하나님을 숭배할 것이냐?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의 야훼 하나님을 따를 것이냐?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에게 ‘신앙과 삶의 행동의지를 선택하라’는 요청은 그저 회피해야 할 괴로움일 뿐이다. 본문읽기에서 갈멜산 종교대결을 경험하러 몰려나온 북이스라엘 풀뿌리사람들이나,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임금노예․채무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똑 같다. 한결같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맘몬․자본세상에서 맘몬권력에게 목숨 줄이 잡혀 살아가는 시대에는 ‘침묵이 최고의 처세술’일까?
갈멜산 대회전 체험을 위해 구름처럼 모여든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은 ‘야훼냐, 바알이냐’ 결단을 요구하는 엘리야를 외면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엘리야는 희년신앙 행동계약정체성을 향한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지만 말짱 헛일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아합왕 시대의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은 이미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배신하는 길로 들어섰다. 히브리들의 신앙과 삶의 마당에서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의 꿈 곧 야훼하나님과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의무와 책임들이 시나브로 잊혀졌다. 야훼하나님의 선물로써 가나안 노느매기 땅의 사회공공성은 사라졌고 오롯이 땅을 독점하고 사유화하고픈 욕망으로 가득했다. 풍요다산 바알신앙과 짝짝 꿍하면서 땅의 모든 생산물을 독점하고 쌓으려는 탐욕이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의 신앙과 삶의 마당에 시나브로 뿌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