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비유, 어떻게 읽어야 할까?
예수의 비유, 어떻게 읽어야 할까?
21세기 성서읽기의 핵심은 ‘비유읽기’다. 왜냐하면 비유읽기가 ‘예수의 비유들’뿐 만아니라 성서의 모든 난해한 본문들을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는, 이 문제를 깊이 다룰 생각이 없다. 그렇더라고 21세기 성서독자들이 ‘예수의 비유, 어떻게 읽을까’ 고민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앞에서 강조했듯이 21세기 기독교회의 신앙핵심은 곧 ‘예수신앙’이다. 예수신앙인들은 평생 예수를 배우고 따르며 우러러 산다. 자기 삶 속에서 예수를 받들어 모시며 사는 것이 곧 예수신앙이다. 그런데 예수신앙에는 두 가지 주요한 신앙실체가 있다. 하나는 ‘예수의 신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는 예수신앙의 진실은 ‘예수의 신앙’을 밑바탕으로 하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할 때 ‘그 예수의 신앙’은 복음서 예수의 비유이야기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한마디로 그 핵심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다. 신약성서 ‘마태, 마가, 누가 등 공관복음서’에는 적어도 36개, 많게는 40여개 예수의 비유 이야기가 드러나 있다. 예수의 비유숫자를 헤아리는 일은 성서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렇더라도, 예수가 다양하고 많은 비유들을 이야기 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비유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널리널리 알리고 펼치는 일에 몰두했다. 보다 현실성 있고 구체성을 갖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펼침으로써 지금, 여기, 이 땅에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를 이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곧 그 펼침 행동은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종말론 하나님나라 이해와 크게 어긋났다.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이야기와 비유청중들의 반응은 서로 어긋나고 맞서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이전 또 예수시대 그리고 예수 이후시대에 이르기까지 예수처럼 참되게 하나님나라 비유이야기를 한 사람은 없다. 예수처럼 아주 많이 아주 자주 온힘을 다해 하나님나라 비유이야기를 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예수의 비유 그리고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랍비와 헬라세계의 비유
예수의 비유,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복음서 속 예수의 비유와 더불어 히브리 성서의 비유전통과 유대교 랍비들과 헬라세계의 비유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 성서 안에서 비유전통은 ‘마샬 מָשָׁל’이라는 히브리어 용어로 표현된다. 이 히브리어 용어는 수동태동사로 사용되어 ‘비슷해지다’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분사로 사용되어 ‘비유로 말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한마디로 히브리 성서의 마샬은 ‘격언, 금언, 속담, 잠언, 우화, 풍자, 상징’ 등 다양한 비유표현들을 함께 아우르는 용어다. 히브리 성서 안에서 널리 알려진 상징비유로는 에스겔 17장의 ‘백향목 높은 가지와 포도나무 비유’를 예로 들 수 있다. 또 사사기 9장에서는 사사 기드온의 말째 아들 요담의 우화로써 ‘나무들의 왕 가시나무 비유’를 살펴 볼 수 있다. 나아가 사무엘하 12장에서는 다윗 왕을 향한 신앙경고로써 ‘나단 선지자의 비유’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히브리 성서 안에서는 많은 속담과 잠언들 그리고 삼손의 수수께끼 등이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서 비유들의 내용과 그 의미들은 무엇이었을까? 히브리 성서의 비유들은 유대교 전통과 신앙유산들을 후세에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지혜와 순종을 가르치려는 비유들이 많이 생겨났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사회정의와 신앙생활을 훈련하는 비유들도 많이 생겨났다.
유대교 랍비들의 비유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대교 랍비들의 비유들은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사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인격화한 동식물과 사물들의 행동과 사건들을 통해서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려는 우화’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점에서 종교학자들은 유대교 역사에 가장 유명한 세 명의 랍비로 ‘에스라, 힐렐, 가말리엘’을 이야기한다.
유대교 랍비 힐렐(Hillel)은 예수 이전 기원전 35년경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힐렐은 예수시대에 예루살렘의 유명했던 두 개의 유대교학파 가운데 하나인 ‘힐렐 학파의 창시자’였다. 바벨론출신이었던 헬렐은 유대교 율법해석에 있어서 대중적이고 개방적이며 유연한 진보학자였다. 따라서 힐렐은 가끔씩 비유를 통하여 율법해석을 했다고 한다.
힐렐학파와 경쟁했던 샴마이(Shammai)학파는 ‘부유한 제사장과 장로 집단이었던 사두개파 입장을 반영하는 율법해석’에 몰두했다. 샴마이학파는 유대교 전통을 따르고 유대교 엘리트계층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율법해석에 집착했다. 삼마이 역시 보수적인 율법해석을 위해 여러 비유들을 창작했다고 한다.
예수 이후의 유대교 랍비로써 널리 알려진 비유의 대가는 힐렐의 손자 ‘랍비 가말리엘(Gamaliel)’을 들 수 있다. 가말리엘은 사도바울의 스승으로 알려졌는데 서기25~5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가말리엘은 랍비가문출신으로서 헬라문학을 전공했으며 많은 비유들을 창작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 예수시대 이후의 비유의 대가로는 랍비 마이어(Meir)를 들 수 있다. 랍비마이어는 비유의 대가로써 여우와 관련한 우화를 3백 개나 창작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도 새와 나무와 동물들을 의인화해서 수많은 우화들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듯이 예수 이전과 예수이후의 유대교 랍비들의 비유들은 대부분 신비주의로 가득 찬 우화들이었다. 실제로 예루살렘성전 멸망이후로 유대교 랍비들은 회당에서 비유로 설교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후대 유대교 랍비들은 유대교전승과 우화 그리고 신비주의대화 등을 통해 유대교 신앙전통을 후손들에게 전수해 왔다.
고대 그리스 문명과 문학 속에서는 신화와 서사시, 우화와 만담 그리고 연극 등이 넘쳐난다. 또한 웅변적이고 수사적인 고대 그리스인들의 강연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메로스의 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있는데 온갖 신화와 우화들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문학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은 ‘이솝’이다. 이솝에 대해서는 여러 말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21세기에까지 전해져오는 ‘이솝 우화’이야기들은 로마시대에 ‘파이드로스(Phaedrus)와 바브리오스(Babrius)’가 모은 것들이다.
예수의 비유, 어떻게 다른가?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 랍비들과 헬라세계의 비유들은 초월과 추상(抽象) 그리고 종교 관념이나 철학개념들을 설명하고 실체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 지중해세계 종교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현실세계의 실체와 친숙한 사물들과 상황들에 빗대어’ 비유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이들의 비유 이야기들은 종교진리와 영의 원리 또는 제국주의 지배체제의 질서와 법치를 세뇌하고 훈련하려는 목적으로 쓰여 진 문학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는 이야기 그 자체다. 예수는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예수는 그 시대 랍비들의 비유설교와 그리스 비유문학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적(獨創的)인 ‘생활비유’를 이야기했다. 예수의 비유야말로 21세기 성서독자들이 성서 안에서 ‘예수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본문’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다양한 생활비유를 통하여 현실세계의 모순과 억압과 폐해, 그에 따른 사회구조 폭력을 낱낱이 까발린다. 그럼으로써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현실세계의 모순과 억압과 폭력을 향한 대항행동을 선동한다.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세상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나라 복음 실천행동을 선전하고 선동한다.
이렇듯이 예수의 생활비유는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을 예수의 비유 이야기 속으로 이끌어 들인다. 그럼으로써 비유이야기꾼 예수의 말투와 청중들의 반응, 더해서 이야기꾼 예수와 비유청중과 독자들 사이에서 갈등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 생생한 갈등과 긴장가운데서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은 샘솟듯이 솟구치는 다양한 비유의 은유들을 상상하고 깨닫고 경험할 수 있다.
예수의 비유,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제 필자는 복음서 예수의 비유진실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세 개의 열쇠 말을 소개하려고 한다. 첫 번째, 열쇠 말은 ‘파라볼레 παραβολη 비유’라는 헬라어 용어다.́ 이 헬라어 용어는 ‘파라발로 παραβάλλω’라는 동사에서 왔다. 그리고 ‘파라발로’라는 헬라어 동사는 ‘전치사 파라 παρά 나란히 또는 곁으로 + 발로 βάλλω 던지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따라서 ‘파라볼레-비유’란 ‘현실세계와 나란히 던져 놓은 이야기’다. 이때 현실세계와 비교되도록 꾸며낸 비유 이야기의 ‘비교-점’(比較點)이 크고 강렬할수록 비유의 은유가 뚜렷해지게 마련이다.
두 번째, 열쇠 말은 ‘알레고리 Allegory’라는 용어다. ‘알레고리’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알레고리’라는 용어는 영어다. 하지만 이 용어의 어원은 ‘알레고레오 ἀλληγορέω’라는 헬라어 동사다. 이 헬라어 동사를 풀어보면 ‘알로스 ἄλλος 다른 + 아고류오 ἀγορεύω 말하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따라서 알레고리란 ‘다른 말 또는 다른 것들을 이야기 하려는 수사(修辭)어법’이다.
실제로 예수의 비유읽기에서 ‘알레고리 해석’의 문제는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비유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난감한 문제는 ‘복음서 저자들마다 자기신앙관점에 따라 예수의 비유자체에 대해 알레고리 해석’을 했다는 점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알레고리 해석을 쫓아 ‘예수의 비유내용들을 나름대로 뜯어고치고 새롭게 꾸며서 복음서에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의 비유들을 읽어나가면서 하나하나 따져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열쇠 말은 ‘메타포 metaphor 은유’라는 용어다. 메타포(은유)의 사전적 의미는 ‘비유법의 하나로써 행동․개념․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그래서 ‘은유’라는 말을 한자로 풀면 ‘숨을 隱 + 깨우칠 喩’다.
이제 여기서, 필자는 ‘메타포-은유’라는 용어를 좀 더 자세히 풀어보려고 한다. 실제로 ‘메타포’라는 용어자체는 ‘알레고리’라는 용어처럼 ‘영어’다. 그런데 ‘메타포’의 어원을 쫓아 가다보면 헬라어 동사를 만나게 된다. 풀어서 새기면 이렇다.
메타포-은유란, ‘헬라어 전치사 메타 μετά 뒤편 또는 맞은 편 + 동사 페로 φέρω 나르다 또는 데려가다’로 이루어진 헬라어 합성어 동사에서 왔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읽기에서 ‘메타포-은유’란 단순한 ‘숨은 그림 찾기’로만 이해 할 수 없다. 도리어 예수는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비유청중과 독자들에게 비유가 비추는 현실세계의 모순과 억압과 폐해를 까발린다. 그럼으로써 청중과 독자들에게 현실세계를 향한 대항행동을 선동한다. 비유의 현실세계에 저항하고 맞서는 곳으로 청중들과 독자들을 이끌어 간다.
이렇듯이, 예수의 비유읽기에서 ‘메타포-은유’의 핵심은 비유의 현실세계 속에서 감추어진 ‘사회구조 모순과 억압과 폐해 까발리기 + 대항행동 선전선동 + 맞서는 곳으로 이끌림’이다.
그런 이후에야 비로써 예수의 비유읽기의 진짜 ‘백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까발림과 선전선동과 이끌림’뒤에 청중과 독자들에게 맡겨진 ‘예수비유 은유들의 길고 진한 여운(餘韻)’이다. 한마디도 예수의 비유에서 드러나는 온갖 은유들의 ‘뒤끝’이다. 이 여운 또는 뒤끝이야말로 21세기 예수의 비유읽기의 참 뜻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21세기 예수의 비유 읽기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의 비밀주의 또는 독점주의’를 해체해야한다.
‘예수의 비유 본문들’은 온전한 예수의 육성을 보존하고 있을까?
예수는 자기 비유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비유를 문학작품으로 창작한 일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성서독자들은 복음서 속에서 예수의 비유이야기들을 하나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만난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학자들은 예수사후에 예수의 제자그룹들과 예수신앙 공동체들 안에서 떠돌던 ‘예수의 어록’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복음서 저자들마다 자신들만의 ‘특수자료’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비유이야기들도 예수의 어록에 남겨져 있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많은 성서학자들은 ‘복음서저자들이 예수의 어록에서 비유 이야기들을 가져다가 자기 복음서에 옮기면서 자신들의 신앙관점에 맞게 고쳐 썼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복음서 저자들마다 예수의 비유에 대해 표현양식과 구조를 다르게 하고 ‘비유의 상황과 문맥을 비틀어 놓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들마다 자기 신앙관점에 따라 예수의 비유를 통해 다른 것들을 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 예수의 비유 독자들은 ‘복음서 저자들의 목회와 선교와 신앙관점에 따른 알레고리 해석과 창작’을 이해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모든 비유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핵심주제로 삼고 있다’는 신앙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예수의 비유읽기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핵심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야말로 21세기 성서독자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비유본문에 덧칠해 놓은 알레고리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한다. 비유의 인물과 사물과 사건과 행동 하나하나에 ‘종교교리와 신비와 신화 또는 영적 의미’를 부여하는 알레고리칼(Allegorical) 읽기와 해석을 단호히 물리쳐야한다.
이와 관련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예수의 비유는 ‘이야기 그 자체’다. 이야기꾼 예수와 청중들과 예수의 육성을 들으려는 독자들 사이에서 ‘소통과 교감’이 매우 중요하다. 21세기 예수의 비유 독자들은 비유의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사건의 흐름 속에서 비유의 청중들이 갖게 되는 생각과 감정과 반응들을 살펴야한다. 예수시대 사회상황 및 역사배경, 비유이야기의 상황 및 사건배경, 그것들 사이의 차이와 갈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유의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및 사건의 흐름, 청중들의 삶의 마당, 그것들 사이의 차이와 갈등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듯이 21세기 독자들이 예수의 비유이야기에서 예수의 육성을 찾고 들으려 할 때 비유이야기꾼 예수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게 된다.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비유읽기 안에서 이야기꾼 예수와 독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소통을 ‘말의 사건’(language event)이라고 표현한다. 이 말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비유의 숨은 은유들이 샘솟듯이 솟구쳐 살아나게 된다.
예수는 시대의 하나님나라 이야기꾼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예수의 신앙과 삶 또는 예수의 생(生)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21세기 성서독자들은 예수의 비유본문을 향해 거리낌 없이 질문해야 한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의 비유본문들에서 찾고, 살피고, 이해하고, 깨달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예수의 비유본문들을 읽으면서 새삼 ‘예수는 이야기꾼이다’라고 감탄한다. 그러면서 필자도 나름대로 예수의 비유본문들을 향해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꾼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야기꾼 예수는 능숙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을까? 이야기꾼 예수는 아람어라는 생활언어에 능숙했을 텐데,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도 말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꾼 예수는 비유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모든 성서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인정한다. 예수는 자신의 비유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선전하고 선동했다.
그렇다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란 무엇이었을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유대교 종말론의 하나님나라 열망과 어떻게 달랐을까? 예수시대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메시아나라 대망과 어떻게 달랐을까?
이와 관련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뚜렷한 실체와 증언으로써 예수는 ‘하나님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이야기는 한결같이 독자들에게 지금,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펼치고 누리며 확장하는 길을 제시한다. 여럿이 함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펼침과 누림과 확장을 선전하고 선동한다.
이제 끝으로 필자는 21세기 예수의 비유읽기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을 하나 더 꼽는다. 그것은 바로 21세기 예수의 비유독자로서 또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기주체성 갖기다. 이때 주체성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사람이 어떤 일을 실행할 때 보여 주는 자유롭고 자주적인 능동성”
여기서 자유란 ‘억압받거나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자주란 ‘스스로 주인 됨’이다. 능동이란 ‘스스로 함’이
다. 이 주체성의 의미를 ‘21세기 예수의 비유읽기’에 적용하면 이렇다.
“독자자신의 깜냥에 따라 질문하기 또는 의심하기 → 생각하기 → 따져보기 → 말하기 → 행동하기”
이 책이 나오도록 글쓴이의 신앙과 삶을 존중해주신 대장간 배용하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