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안내
‘루돌프 불트만’과 ‘칼 바르트’는 1-2차 세계대전 어간에 독일어 문화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이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르트의 교의학은 오늘날 까지도 모든 조직신학의 표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불트만의 신학이 교회의 언어와 교회의 모든 관심분야에서 바르트보다 더 강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불트만의 주된 관심사가 현대인을 위한 신약성경의 ‘실존적 해석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해석학에서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철학의 전용과 종교사학파들의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원용하여 ‘탈신화화’라는 독특한 주석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불트만의 탈신화론의 역사 비평적 방법들과 실존주의적 해석학의 철학적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그의 해석학의 실체를 약술하고 그의 해석학의 한계와 중요성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Ⅰ. 불트만의 탈신화화 이해
가. 배경 이해
불트만의 해석학의 근원이 되는 탈신화론은 종교사학파의 역사비평과 실존주의 철학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1-2차 세계대전 어간의 다양한 신학적 철학적 배경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불트만의 탈신화론에 대한이해를 가지려면 종교사학파와 실존주의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종교사학파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평학에 대한 비판적 경험을 통하여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이해했고, 원시 기독교의 사회 종교사적 기능과 그 공동체적 기원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세계각지의 선교사들을 통한 타 종교와의 접촉과 지식의 습득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이 학파는 다음 다섯 가지의 기독교의 종교사적 연구에 대한 전제를 제안 했다.
하나. 성서의 개념들은 도덕적, 지성적이라기보다 신비적, 종말론적이다.
둘. 종교는, 특히 초기 기독교는 성질상 ‘절충주의’적, 통합적이다.
셋. 제의와 예식이 인간들의 종교 경험의 중심이다.(문학이나 신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넷. 민담과 구전 전승들이 종교적 지식전승의 도구들이다.
다섯. 종교적 이해의 탐구는 어떤 특정한 종교나 신학의 한계들을 초월해야 한다.
불트만은 이러한 종교사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부셋’과 ‘하이트뮬러’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불트만은 그들을 통하여 바울의 종교가 ‘밀의종교’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원시기독교의 역사가 그것들에 영향 아래서 성장했음에 대하여 이해했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들의 원시기독교에 대한 그림을 실존주의 역사이해를 통하여 새로운 기독교 역사 발전의 전이해로 변경시켰다.
불트만은 이러한 시대적 종교사상적 흐름에 따라 성경에 선포된 ‘그리스도’에 대한 원시 기독교의 신화적 표현과 현대인의 과학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세계관과 사고 사이의 긴장과 회의를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목적은 성경과 현대인사이에 해석학적 다리를 놓아서 현대인들에게 이해되어 질 수 있는 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하려는데 있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종교사학파의 역사비평 방법과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철학을 병합하여 그의 탈신화론을 꾀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불트만의 탈신화론은 종교사학파의 영향뿐만 아니라, 특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과 ‘전기사상’ 그리고 그의 ‘언어이해’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 따라서 불트만은 하이데거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실존적 해석학’의 완성을 보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 신화 이해
불트만의 신화 이해에서 우리는 신화의 기능성을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의를 발견 할 수 있다.
첫째, 불트만은 신화가 저 세상의 일을 이 세상에 의해서, 즉 신들의 세계를 인간의 삶 속에서부터 유래하는 용어들을 사용해서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신화론의 언어는 유대의 묵시문학과 영지주의의 구속 신화들에서 얼마든지 발견 할 수 있다. 또한 신약의 우주론과 종말론은 그 성격과 표현의 방법상 신화적이다.
둘째, 신화의 진정한 목적은 이 세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상(像)을 사실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자기이해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으로 더 나아가 인간 실존적으로 해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불트만은 위의 정의를 토대로 신화는 세 가지의 본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신화는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의 기원과 목적이 사람들이 알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현실세계에 있지 않고 초월적 세계에서 찾아 질 수 있다는 종교성의 표현이다. 또 하나 신화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아니라는 자기이해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사람이 세계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들로부터 해방되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표현한다.
2.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에 대한 이해
가. 전이해
루돌프 불트만은 그의 모든 신학 작업에서 신화적 형이상학과 교의학적 명제들을 사용하여 작업하는 것을 거부 했다. 그리고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실존적 해석학’의 마땅한 개념들과 언술들을 찾아냈다. 그 첫 번째가 ‘전이해’이다. 물론 불트만의 전이해는 ‘슐라이마허’와 ‘틸리히’,그리고 ‘헤르만’등에게 빚진바 있다. 하지만 하이덱거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이덱거는 인간 실존 안에는 존재에 대한 성찰 이전의 ‘앎’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전이해’라고 말했다. 하이덱거의 이 전이해는 지적인 사유이기 보다는 실존적인 것이다. 그것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지식습득의 과정이기 보다는 ‘인간 실존의 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삶의 정황에서 규정되는 ‘삶의 자리’이다.
불트만은 그의 실존적 해석학에서 이와 유사한 전이해를 사용한다. 그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명제로서가 아니라 개개인들이 처해있는 삶의 상황 속에서 가장 절실한 삶의 문제들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불트만은 ‘인간 현존’의 ‘시간성’ 또는‘역사성’을 강조한다. 시간의 역사성 안에 살고 있는 인간 존재는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항상 새로운 선택에 직면한다. 물론 불트만의 이 강조점 역시 하이덱거의 영향이다. 하이덱거에게는 선택을 통한 ‘본래적 실존’과 ‘비 본래적 실존’이라는 두개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불트만은 하이덱거의 이 두개의 이중적 가능성을 그의 실존적 해석학에서 ‘신앙 이전의 실존’과 ‘신앙 아래서의 실존’으로 바꿨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하이덱거의 ‘실존론적 분석’과 ‘실존론적 이해’를 임의로 구분하여 그의 실존적 해석학에 자유롭게 전용했다. 하이덱거의 실존론적 분석은 인간의 삶의 일정한 형식적 특성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였으며, 실존적 이해는 인간의 삶의 자리에서 인간 실존의 가장 깊고 절실한 문제에 대한 이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불트만의 명백한 입장은, 철학은 내용을 줄 수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철학이 이러한 문제에서 당위성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이미 철학의 영역을 떠난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불트만은 신학만이 내용을 줄 수 있고 당위성을 주장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하이덱거의 전기 사상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그래서 불트만은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철학을 그의 실존적 해석학의 도구로 주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해석학자들은 독자가 본문에 대하여 특정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본문은 독자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석은 언제나 본문 안에 표현된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한 저자와 독자의 ‘삶의 연관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객관적이고 관찰자적인 시각에서 본문 자체의 요구를 듣는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중립적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해석이란 역사 안에서 저자와 독자의 ‘실존’의 만남을 통해서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미리 예견 할 수는 없다. 만약 그 답변을 미리 예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독자는 본문이 독자에게 알려줄 수 있는 독자의 ‘실존의 가능성’에 대하여 임의적 통제를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해석의 결정적 ‘가능성’들은 원리적이거나 교의학적인 목적에 의하여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의 독자와 본문의 ‘존재와 시간의 연관성’, 그리고 '삶의 연관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본문과 독자의 실존적 만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종교사학자들의 역사비평방법은 성경의 사건들에 대한 과학적이며 실증주의적인 의심이다. 그들의 구약성경과 복음서에 대한 분석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은 바울서신을 분석하면서 바울이전의 영지주의와 밀의종교들의 신화, 그리고 헬라의 철학과 팔레스틴 기독교의 유대적 사유들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혔는데 그것이 곧 바울서신에 나타난 ‘케리그마’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바울서신에서 케리그마는 성경의 신화적 기록들이 개념적이고 명제적 언어로 표현된 것이며 그것은 곧 ‘탈신화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계시가 잘 전달되려면 현대인들의 실존적 상황에서의 질문이 성경에 던져지고 성경이 답변할 때만이 신앙이 싹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앙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로서 탈신화화 된 케리그마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불트만은 역사적인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의 관계 사이에는 단절과 비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대기독교의 선포인 케리그마가 기독교의 신학의 근간이라고 주장하며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 관한 연구조차도 거부한다. 따라서 불트만은 역사적인 예수와 케리그마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초대 기독교의 선포 사이에 역사적 연계성과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사이의 실제적 관계성을 구별하여 따져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는 전자의 경우가 사실 자체의 문제라면, 실제적 관계성은 그 사실의 구체적 내용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동일성을 통하여 연속성을 주장 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초대 기독교의 선포 사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문제이지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역사적 사실성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초대교회 선포인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사실이기 보다는 역사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3. 불트만의 ‘전이해’와 토착화 전망
가. 전이해와 복음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은 독자와 저자가 각각의 삶의 자리에의 주제에 대한 인간 공통의 ‘삶의 맥락’을 통해 본문을 이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는 하이덱거의 전기 사상인 ‘실존론적 분석’과 독자의 ‘삶의 자리’를 통한 해석학적 통찰을 역사비평과 양식비평에 접목 시킨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하이덱거의 인간 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통하여 이해한 ‘독자의 전이해’가 ‘복음 또는 케리그마’와 접촉점을 찾았을 때 복음에 대한 ‘실존적 이해’가 생성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여기서 전이해를 독자의 ‘삶의 자리’로부터 생성되어지는 것이라고 이해 할 때 복음의 내용이 독자의 삶의 자리를 반성하게하고 변화시키며 때로는 거부하기도 한다는 긍정적인 전제와, 도리어 독자의 삶의 자리가 복음의 내용을 왜곡 시키고 또는 수정 할 것이라는 우려와 긴장에 대하여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 토착화 전망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을 토착화에 전용함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의 해석학과 그가 전용한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철학의 범주들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본문에 대한 참되고 정당한 해석에 도달 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이다.
실제로 한국 신학의 토착화 마당에서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의 입장에서 애쓰다가 스러져간 많은 토착화 신학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의 해석학이 토착화 신학에 던진 빛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토착화 신학을 모색 할 때마다 여전히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은 너무도 유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의 토착화 전망에서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을 토대로 새로운 방법론적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맺는 말
불트만에 대한 연구는 참으로 지대한 학구적 노력과 인내를 가지고 정직한 자세로 임해야한다. 왜냐하면 그의 실존적 해석학은 현대인의 실증주의적 과학주의에 대한 신학의 방법론적 대답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거꾸로 탈근대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방법론적 시사점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로부터 촉발된 구조주의 분석과 신 해석, 더 나아가 초 해석, 독자의 지평에서 본문읽기 등 현대의 해석학이 증명하는 바이다. 차후 졸업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정직한 탐구를 해 볼 것을 다짐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