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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신앙』특강 - 김철호, 김옥연 저 희년신앙을 읽고

희년행동 2024. 6. 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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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 김옥연 저 희년신앙을 읽고

이승무박사 (수도권예수살기 대표)

 

1. 성서 전체를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신앙의 사회경제적인 의미와 실천방향을 밝히려고 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특히 성서의 주요 구절들을 히브리어, 헬라어로 된 원문에 따라서 독자적으로 번역하고 기존의 공식 번역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의미들을 밝히는 데 많은 비중을 둔 것으로서 신선함을 준다.

느헤미야서 511(360)의 성경말씀을 찾아보았다. 개역성서와 한문 및 중국어, 일본어 성서에는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는 표현이 들어 있으며, 이는 영어의 Holy BibleKing James Version에 들어 있다. 그러나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들어 있지 않으며, 독일의 루터 번역에도 들어 있지 않다. 아시아권에서는 영국인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성서 번역을 주도한 영향으로 영어에서부터 잘못 번역된 것이 그대로 아시아권의 성서번역에 전해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361쪽에는 왜 이런 오역이 발생했는지를 히브리어를 분석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2. 1장에서 창세기에서는 좋은 사람으로만 서술된 요셉이 어떻게 꾀를 써서 백성들을 옭아매는 데 성공하여 채무노예제국을 건설하는 데 기여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부분들이 새롭고 알아야 할 내용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3. 기적이야기들이나 동정녀탄생, 부활이야기,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때에 맏이들에 대한 타살 내용들은 대체로 성서의 내용들을 그대로 신앙의 눈으로 수용하자는 취지이거나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독자들의 범위를 이미 기독교의 성서를 믿고 그 진실성을 불문에 부치겠다고 선언한 이들로 너무 좁게 잡은 것 같으며 이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아쉬움을 가지게 한다. (물론 책의 제목 자체가 일반 독자들을 독자로 끌어들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무리하다면 확률이 0에 가까운 사건들이라고 말하고 대체적인 개연적인 사태진행의 정황상의 설명들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4. 일반인 그리고 일반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궁금한 점은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다른 지역의 관습과 문명에 비추어 볼 때 성서에 적혀 있는 글들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아쉽게도 일반인들에게는 그런 사회경제적 측면에 관해 일반적 세계사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희년신앙에서도 이러한 비교 관점의 정보는 거의 제공되고 있지 않은 점은 아쉬운 점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처음으로 통독하면서 읽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중간에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를 해 준다.

6. 성서 자체는 자본주의 시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제시해 주는 것에 한계가 있다. 정복에 의한 강탈, 조세나 지세의 수탈에 대해 한계를 두고 약자를 보호하는 규정들이 많이 있는 편이지만 모세의 지도에 의한 탈애굽의 동기를 제공한 것은 사실상 착취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나 농민들의 부역 노동에 의해 행해지는 착취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정작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력과 자연환경의 착취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코이노니아나 공산제적 공동체는 공동 생산활동 부분을 다루지 않고 소비 부분만을 다루고 있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은 시대적인 한계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에세네인들의 경우에는 그런 단순한 소비적 공산제 사회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고 하며, 생산과 노동의 모습도 많은 역사 문헌에서 소개가 되는데 희년신앙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7. 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는 농민들에 비하면 약탈자들이고 정복자들로서 농민들의 토지를 정복하여 그 영토의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많이 있다. 유럽에서 게르만족이 그랬고, 중국에서 몽골족, 만주족이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실상 그런 점이 있다. 육식을 주로 하는 약탈자들(바이킹족, 켈트족, 게르만인 등)을 조상으로 둔 서양인들이 채식문명인 아시아 문명을 정복한 것도 크게 보면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목민을 극빈층으로 보면서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부터 유목생활을 하는 히브리인들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성서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는 농경문화를 기초로 한 문명을 가졌던 조선에서는 성서의 기록에 대해 상당한 위화감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것을 희년신앙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어떤 대목에서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의 농경사회에 대한 정복자들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p. 372 다시 야훼의 신 앞에 서다: 엘리야 앞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 열왕기상 1911-12, 비를 내리는 신의 능력 (열왕기 1845)은 가나안 정복 후 유목민의 전쟁의 신의 모습을 탈피하고 농민들의 신이면서 평화로운 모습의 신이 된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8. 히브리인들과 말하자면 갈릴리인들의 평등 문화적 특성은 암묵적 전제로서 그들의 신 때문이라거나 그들의 인종적 특성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우며, 지정학적, 풍토적인 배경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설명될 필요가 있고 그런 배경을 전제로 해서야만 성서는 인류의 고전으로서 읽힐 가치가 있을 것이다.

9. 성서와 관련하여 그 시대의 역사를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성서의 글이 쓰인 맥락을 잘 모를 뿐 아니라 학자들 간에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의문이 있는 부분은 질문으로 정직하게 두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서술하는 것보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더 바람직할 것이다. 계급 간의, 인종과 종교 간의 대립 상황에서 보통 현실은 어느 편이 선이고 어느 편이 악인지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아주 작은 단서에서 그런 것을 짐작해 낼 수 있을 뿐인 경우가 많다. 너무 단순하게 야훼 신은 선이고 바알 산은 악이라고 모든 것을 그런 구도에 따라 정리하면 별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도 힘들고 사실과도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신앙과 에토스의 과잉을 피하고 역사를 다루는 정직한 탐구의 정신과 질문, 고민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는 더 맞을 것 같다.

10. 이런 방향에서 앞으로 더 객관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지금의 모순과 갈등의 상황에서 실마리를 찾게 도와주는 작업이 계속되기를 희망하며, 이 책이 중요한 기초를 제공해 준 것이 큰 의미를 가지며, 이런 방향으로 많은 관심이 모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