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쉼이 있는 노동, 어떻게 쉬어야 할까?
안식일 쉼이 있는 노동, 어떻게 쉬어야 할까
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는 ‘안식일 쉼이 있는 노동, 어떻게 쉬어야 할까’를 제안한다.
“너는 엿새 동안 네 일들을 하라. 그러나 너는 일곱째 날에 쉬라. 왜냐하면 네 소와 나귀도 편히 누어 쉬어야 하고 네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도 숨을 돌려야하기 때문이다.”
이때 성서는 ‘야누아흐 יָנוּחַ 편히 누어 쉬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한다. 아주 편하게 푹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빈 시간’을 누려야 한다. ‘예흐바 솰롬’을 누려한다. 야훼 하나님의 복 주심과 거룩하게 하심 속에서 아무런 걱정도 탈도 없는 쉼을 누려야 한다.
더불어 성서는 ‘이나페쉬 יִנָּפֵשׁ 숨을 돌리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히브리어 동사의 명사형이 ‘네페쉬 נֶּפֶשׁ 목구멍 또는 숨구멍’이다. 따라서 ‘목구멍 또는 숨구멍의 쉼과 여유’는 21세기 그 어떤 임금노예노동이라도 마땅히 거부한다.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는 최저임금’을 뛰어넘어 ‘쉼이 있는 생명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임금’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쉼이 있는 생명노동’은 유대교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삶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종교도구’로 전락했다. 예수시대에 이르러 안식일은 유대교의 의례와 형식으로 또한 혹독한 억압의 규례로 퇴행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구별되는 종교표지’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시대의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에 대한 의례와 형식 그리고 엄격한 종교규례에 집착했다. ‘안식일을 가난하고 힘없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을 향한 억압과 착취의 종교도구로 전락’시켰다.
그럼으로써 ‘안식일, 쉼이 있는 생명노동’에 대한 크고 넓고 깊은 신앙은유들을 깡그리 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