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희년신앙』 맥(脈)

『희년신앙』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 11. 맘몬․자본세상에서 장물아비 인생을 살다.

희년행동 2024. 8. 10. 22:35

희년신앙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

 

11. 맘몬자본세상에서 장물아비 인생을 살다.

누가복음 12:16-21

 

본문읽기

 

이어서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풍성하게 열매를 냈다. 그러자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속말을 하며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내 곡식들을 모아 둘 곳이 없구나.”

 

그러다가 말했다.

 

이렇게 해야지. 내 곳간들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물건들을 모아두어야겠다. 그리고 내가 내 생명에게 말하리라. 생명아! 여러 해 동안 편히 누울 만큼 많은 물건들을 차지했으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그들이 너로부터 네 생명을 요구하리라. 그렇다면 네가 마련해 놓았던 것들을 누가 차지하게 되겠느냐?”

 

이와 같이 자신만을 위하여 쌓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부유하려 하지 않는 자와 같다.

 

 

본문 이해하기

예수의 비유, 어떻게 읽어야 할까?

 

21세기 성서읽기의 핵심은 비유읽기. 왜냐하면 비유읽기가 예수의 비유들뿐 만아니라 성서의 난해한 본문들을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성서본문들 가운데 대부분은 시대의 비유문장과 언어로 쓰여 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여기서 깊이 다룰 생각은 없다. 그렇더라고 희년신앙독자들은 예수의 비유, 어떻게 읽을까고민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회 신앙핵심은 곧 예수신앙이다. 21세기 예수신앙인들도 예수를 배우고, 따르며, 우러르며 산다. 이렇듯이 예수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예수신앙이다. 그런데 신야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신앙에는 두 가지 주요한 신앙진실이 있다.

하나는 예수의 신앙이다.

또 하나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물론, 예수신앙에 대한 두 가지 신앙진실은 따로따로가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신앙은 예수의 신앙을 밑바탕으로 하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고 그 예수의 신앙은 예수의 비유 속에 가장 잘 드러난다. 그 핵심은 한마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다. 신약성서의 마태, 마가, 누가 등 공관복음서에는 적어도 36, 많게는 40개 정도 예수의 비유가 드러나 있다. 비유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은 성서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렇더라도, 예수가 여러 차례 다양하고 많은 비유들을 이야기 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는 비유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널리널리 알리고 펼치는 일에 몰두했다. 나아가 구체적인 실천행동을 통하여 지금 여기 이 땅에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를 이루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유대교와 유대 풀뿌리 사람들이 열망하는 다윗의 후손 정치메시아 종말론으로써 하나님의 날과 전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과 유대교의 하나님의 날은 부딪치거나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시대 이전 또는 예수시대와 이후의 유대교에서는 예수처럼 하나님나라 비유를 많이 하고 자주 즐겨서 이야기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예수의 비유 그리고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랍비와 헬라세계의 비유

 

이와 관련하여 신양성서 예수의 비유 이전 히브리 성서의 비유전통과 유대교 랍비들과 헬라세계의 비유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 성서 안에서 비유전통은 마샬 מָשָׁל이라는 히브리어로 표현된다. 이때 마샬은 히브리어 동사 수동태 사용되어 비슷해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또 분사로 사용되어 비유로 말하다라는 뜻을 갖기도 한다. 한마디로 히브리 성서에서 마샬은 격언, 금언, 속담, 잠언, 우화, 풍자, 상징등 다양한 비유표현들을 함께 아우르는 용어다.

실제로 히브리 성서 안에서 유명한 상징비유로는 에스겔 17장의 백향목 높은 가지와 포도나무 비유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사기 9장에서는 여룹바알 기드온의 말째 아들 요담의 우화로써 나무들의 왕 가시나무비유를 살펴 볼 수 있다. 나아가 사무엘하 12장에서는 다윗 왕에 대한 신앙경고로써 나단 선지자의 비유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히브리 성서 안에는 수많은 속담과 잠언들 또한 삼손의 수수께끼 등이 유명하고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서의 비유내용들과 그 의미들은 무엇이었을까? 히브리 성서의 비유들은 유대교 전통 신앙유산들을 후세에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지혜와 순종을 가르치려는 비유들이 많이 생겨났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사회정의와 신앙생활을 훈련하는 비유들도 많이 생겨났다.

유대교 랍비들의 비유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대교 랍비들의 비유들은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사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우화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점에서 종교학자들은 유대교 역사에 가장 유명한 세 명의 랍비로 에스라, 힐렐, 가말리엘을 이야기한다. 유대교 랍비 힐렐(Hillel)은 예수이전 기원전 35년경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힐렐은 예수시대 예루살렘의 유명했던 두 개의 유대교 학파 가운데 하나인 힐렐(Hillel)학파의 창시자였다. 바벨론출신이었던 힐렐은 유대교 율법해석에 있어서 대중적이고 개방적이며 유연한 진보학자였다. 따라서 힐렐은 가끔씩 비유를 통하여 율법해석을 했다고 한다. 또 힐렐학파와 경쟁했던 샴마이(Shammai)학파는 부유한 사제와 장로 집단이었던 사두개파 입장을 반영하는 율법해석에 몰두했다. 샴마이학파는 유대교 전통을 따르고 유대교 엘리트계층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율법해석에 집착했다. 삼마이 역시 보수적인 율법해석을 위해 비유들을 창작했다고 한다.

예수 이후의 유대교 랍비로써 유명한 비유의 대가로써는 힐렐의 손자라고 알려진 랍비 가브리엘을 들 수 있다. 가브리엘은 사도바울의 스승으로 알려졌는데 서기25~5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그는 랍비출신으로써 헬라문학을 전공했으며 많은 비유들을 창작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의 예수시대 이후의 비유의 대가로 랍비마이어(Meir)를 들 수 있다. 랍비마이어는 비유의 대가로써 여우와 관련한 우화를 3백 개나 창작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랍비 벤 자카이도 새와 나무와 동물들을 의인화해서 수많은 우화들을 지었다고 한다.

이처럼 예수이전과 이후의 유대교 랍비들의 비유들은 대부분 신비주의로 가득 찬 우화들 이었다. 실제로 예루살렘성전 멸망이후로 랍비들은 회당에서 비유로 설교하는 것을 즐겼다. 후대 유대교랍비들은 유대교 전승과 우화 그리고 신비주의 대화 등을 통해 유대교 신앙전통을 후손들에게 전수해 왔다.

고대 그리스 문명과 문학 속에는 신화와 서사시, 우화와 만담, 연극 등이 넘쳐난다. 또한 웅변적이고 수사적인 고대 그리스인들의 강연도 아주 유명하다. 대표적으로는 호메로스 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꼽을 수 있는데 내용은 신화와 우화로 가득하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문학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은 이솝이다. 이솝에 대해서는 여러 말을 덧붙일 필요조차도 없다. 그런데 21세기에까지 전해져오는 이솝 우화이야기들은 로마시대에 파이드로스와 바브리오스가 모은 것들이다.

 

예수의 비유, 어떻게 다른가?

 

히브리 성서의 비유, 유대교 랍비들의 비유, 헬라세계의 비유들은 초월과 추상(抽象) 그리고 종교 관념과 철학개념들을 설명하고 실체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 지중해세계 종교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현실세계의 실체와 친숙한 사물들과 상황들에 빗대어비유이야기들을 지어냈다. 이들 비유 이야기들은 종교진리와 영적원리 또는 지배체제의 윤리와 교훈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려는 목적으로 쓰여 진 문학작품들이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는 이야기 그 자체다. 예수는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예수는 예수시대의 어떤 랍비들의 비유문학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생활비유를 이야기했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21세기 성서독자들이 성서 안에서 예수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본문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아주 자주 생활비유를 통하여 현실세계의 모순과 병폐를 폭로했다. 그럼으로써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현실세계의 모순과 병폐에 대한 대항행동을 선동한다. .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세상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실천하도록 선동한다.

이렇듯이 예수의 생활비유는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을 예수의 비유이야기 속으로 이끌어 들인다. 이야기꾼 예수의 말투와 청중들의 반응 그리고 이야기꾼 예수와 청중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생생하다. 그 갈등과 긴장가운데 비유의 독자들은 샘솟듯이 솟구치는 비유의 은유들을 상상하고 경험할 수 있다.

 

예수의 비유,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복음서 예수의 비유진실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세 개의 열쇠 말을 소개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파라볼레 παραβολη 비유라는 헬라어 용어다.́ 이 용어를 동사로 바꾸면 파라발로 παραβάλλω이다. 이 헬라어 동사는 전치사 파라 παρά 나란히 또는 곁으로 + 발로 βάλλω 던지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따라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현실세계와 나란히 던져 놓은 이야기. 이때 현실세계와 비교되도록 꾸며낸 비유 이야기의 비교-’(比較點)이 크고 강렬할수록 비유의 은유가 뚜렷해지게 마련이다.

두 번째 알레고리 Allegory’라는 용어다. ‘알레고리라는 용어의 사전(辭典)의미는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여기서 21세기에 사용하는 알레고리라는 용어는 영어다. 하지만 그 어원은 알레고레오 λληγορέω라는 헬라어 동사다. 이 헬라어 동사를 풀어보면 알로스 λλος 다른 + 아고류오 γορεύω 말하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따라서 알레고리란 다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의 비유에서 알레고리해석의 문제는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비유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가장 난감한 문제는 복음서 저자들마다 자신들의 신앙관점에 따라 예수의 비유자체를 알레고리로 해석 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알레고리 해석으로 예수의 비유내용들을 자기 나름대로 뜯어고치고 새롭게 꾸며서 복음서에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예수의 비유들을 읽어나가면서 하나하나 따져보려고 한다.

세 번째 메타포 metaphor 은유라는 용어다. 메타포(은유)의 사전의미는 비유법의 하나로써 행동개념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표현하거나 암시(暗示)로 나타내는 일이다. 그래서 은유라는 말을 한자로 풀면 숨을 은 + 깨우칠 유.

이제 메타포라는 용어를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 여기서 메타포라는 용어는 알레고리라는 용어처럼 영어. 그런데 이 용어의 어원을 쫓아 올라가면 헬라어 어원 만나게 된다. 풀어보면 이렇다. ‘메타포는 헬라어 전치사 메타 μετά 뒤편건너편 또는 맞은 편 + 페로 φέρω 나르다 또는 데려가다라는 합성동사에서 왔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읽기에서 메타포란 단순한 숨은 그림 찾기로만 이해 할 수 없다. 도리어 예수는 비유이야기를 통하여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비유가 비추는 현실세계의 모순과 병폐를 폭로한다. 그럼으로써 청중과 독자들의 현실세계를 향한 대항행동을 선동한다. 비유의 현실세계에 저항하고 맞서는 곳으로 청중들과 독자들을 이끌어 간다.

이처럼, 예수의 비유에서 메타포의 핵심은 비유의 현실세계 속에 숨어 있는 구조모순과 병폐에 대한 폭로 + 대항행동을 요청하는 선동 + 맞서는 곳으로 이끌림이다. 이 때 예수의 비유읽기에 따르는 진짜 백미(白眉)’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폭로와 선전선동과 이끌림뒤에 청중과 독자들에게 맡겨진 예수의 비유에서 드러난 은유의 길고 진한 여운(餘韻)’이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 예수의 비유읽기의 참 뜻이다. 이제야말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21세기 예수의 비유읽기를 통하여 복음의 비밀주의와 독점주의를 해체해야한다.

 

예수의 비유 본문들은 온전한 예수의 육성을 보존하고 있을까?

 

예수는 자신의 비유이야기를 글로 남긴 적도 없고 문학작품으로 창작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성서독자들은 예수의 비유이야기들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만난다. 성서학자들은 예수사후에 예수의 제자그룹들과 예수신앙 동아리들에서 남긴 예수의 어록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복음서 저자들마다 자신들만의 특수자료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비유이야기들도 그 어록에 남겨져 있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복음서저자들이 예수의 어록에서 비유 이야기들을 가져다가 자신의 복음서에 옮기면서 자신들의 신앙관점에 맞게 고쳐 썼다고 설명한다.

복음서 저자들마다 예수의 비유이야기의 표현양식과 구조를 다르게 하고 비유의 상황과 문맥을 비틀어 놓기도 했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들마다 자기 신앙관점에 따라 예수의 비유를 통해 다른 것들을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를 읽는 독자들은 복음서저자들의 목회와 선교와 신앙관점에 따른 알레고리 창작을 이해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모든 비유는 하나님나라라는 핵심주제를 갖는다. 예수의 비유읽기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21세기 성서독자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비유본문에 덧칠해 놓은 알레고리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한다. 비유의 인물과 사물과 사건과 행동 하나하나에 종교교리와 신비 또는 영의 의미를 부여하는 알레고리적(Allegorical)읽기와 해석을 단호히 물리쳐야만 한다.

실제로, 예수의 모든 비유는 이야기다. 이야기꾼 예수와 청중들과 예수의 육성을 찾고 들으려는 독자들 사이에서의 소통과 교감이 매우 중요하다. 21세기 예수의 비유이야기의 독자들은 비유의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또 사건의 흐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야 한다. 비유의 청중들이 갖게 되는 생각과 감정과 반응들을 살펴야한다. 예수시대의 사회상황 및 역사배경, 비유이야기의 상황 및 사건배경, 그것들 사이의 차이와 갈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유의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및 사건의 흐름, 청중들의 삶의 마당, 그것들 사이의 차이와 갈등을 주목해야 한다.

이렇듯이 21세기 독자들이 예수의 비유에서 예수의 육성을 들으려 할 때, 비유이야기꾼 예수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게 된다.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비유 안에서 이야기꾼 예수와 독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소통을 말의 사건’(language event)이라고 표현한다. 이 말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비유의 숨은 은유들이 샘솟듯이 솟구쳐 되살아나게 된다.

 

예수는 시대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이야기꾼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무엇인가? 예수의 신앙과 삶 그리고 예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21세기 성서독자들은 예수의 비유본문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의 비유에서 찾고, 살피며,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예수의 비유를 읽으면서 새삼 예수는 이야기꾼이다라고 감탄한다. 그러면서 필자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할 수밖에 없다.

비유 이야기꾼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비유 이야기꾼 예수는 능숙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을까? 비유 이야기꾼 예수는 아람어라는 생활언어에 능숙했을 텐데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도 말할 수 있었을까? 비유 이야기꾼 예수는 비유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모든 성서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인정한다.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무엇이었을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유대교 메시아 종말론 속 하나님의 날과 어떻게 달랐을까? 예수시대의 다윗의 후손 정치메시아 종말론의 나라와 어떻게 달랐을까?

이와 관련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한 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야말로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실체와 뚜렷한 증언으로 예수는 하나님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이야기는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며 함께 누리는 온전한 길을 제시한다.

끝으로 21세기 예수의 비유읽기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을 하나 더 꼽아본다. 21세기 성서독자로서 또는 신앙인으로서 자기 주체성 갖기다. 여기서 주체성이라는 말의 사전의미는 이렇다.

사람이 어떤 일을 실행할 때 보여 주는 자유롭고 자주적인 능동성

이점에서 자유란 억압받거나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자주란 스스로 주인 됨이다. 능동이란 스스로 함이다. 이 주체성의 사전의미를 ‘21세기 예수의 비유읽기에 적용하면 이렇다.

 

독자자신의 자기 깜냥에 따라 질문하기 또는 의심하기 생각하기 따져보기 말하기

 

 

본문풀이

맘몬자본세상에서 장물아비 인생을 살다.

 

당신의 인생목적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당신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마다 다양하고 멋있는 답들을 내어 놓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생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다수 풀뿌리 사람들의 진짜 인생의 목적이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만난 대다수의 신앙인들의 생활정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당신은 어쩐데? 나도 별로 할 말이 없다. 지금 당장 돈에 대한 절절한 필요가 없어서랄지, 진짜 욕심이 없어서랄지, 그냥 돈에 마음 졸이지 않고 산다. 그렇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돈 돈 돈하면서 사는 것을 마냥 비아냥대고 싶지는 않다. 21세기 우리시대의 진짜 하나님은 맘몬자본 바알신이 아니던가?

사실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우리에게 돈이란, 나와 내가족의 생명살이를 위한 튼튼한 밑바탕이다. 언제든 딛고 일어서야할 발판이다. 나와 내가족의 현재와 미래의 희망이고, 자존감이며, 행복이다.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탈출하지 않는 이상, 돈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딱히 그건 아니야라고 핑계 할 만큼 나만의 생()의 조건이나, 하늘의 부름이 따로 있지도 않다.

풀뿌리 사람들은 그렇게 따로 별난 생의 조건과 하늘의 부름도 없이 돈에 매여 인생을 산다. 매달의 카드대금 명세서에 기겁을 하지만 여전히 지갑에 겹겹이 신용카드를 챙긴다. 살만한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더 크고 좋은 집을 바란다. 그럭저럭 쓸 만 한 차를 타면서도, 더 고급스럽고 비싼 차에 눈길을 빼앗긴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보험이며 펀드, 주식, 코인 등 온갖 금융상품에 마음을 쓴다. 하다못해 가난한 이들은 로또숫자 맞추기를 해서라도 일주일의 기대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풀뿌리 사람들은 시나브로 돈에 의지하여 삶을 뽐내거나 과시하며 꾸미기 일쑤이다. 우리 자식들의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유명 학원정보에 대한 귀동냥과 발품을 아끼지 않는다. 살면서, 단 한 순간이라도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 어깃장을 놓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옛날 옛적부터 21세기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맘몬자본에게 생을 저당 잡힌 채 맘몬자본세상의 장물애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는 본문비유를 통하여 맘몬자본에게 저당 잡힌 인생의 종말(죽음)이라는 대 파국을 경고한다. 이제 본문을 자세히 읽고 해석하면서 예수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를 우리의 인생과 삶 속에서 새겨보도록 하겠다.

 

어리석은 부자비유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누가복음 저자는 자신의 특수 자료에서 본문비유를 옮겨왔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자가 본문을 비유라고 말하지만 하나의 예화처럼 편집한 것 같다. 따라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본문내용의 뜻을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자세히 읽기만 해도 그 뜻이 저절로 분명해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부와 재물은 인생의 종말 또는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독자들은 본문비유를 읽고 해석하면서 부자가 자기만을 위하여 많은 부와 재물을 쌓아놓고 인생을 즐기려고 계획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부자를 비웃으신다는 것을 쉽게 깨닫는다. 독자들은 본문에서 어떤 부자가 직면하는 인생의 종말 또는 죽음을 통하여 독자 자신에게 경고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본문비유의 내용과 신앙은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본문은 예수의 비유로써 이야기 속에 몇 가지 ()의 질퍽한 은유들을 숨겨 놓았다. 이 은유들은 본문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의 삶의 상황들 속에 숨겨져 있다. 이 숨겨진 은유들이 부자의 부와 재물의 밑바탕을 까발리고 부와 재물의 쌓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또 한편 본문비유는 예화로써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생()의 경고를 가감 없이 청중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제 본문비유내용 안에서 비유와 예화를 넘나드는 예수의 입말을 길라잡이 삼아 본문을 읽고 해석해 보자.

 

불로소득

 

먼저 본문은 예수의 비유로써 청중과 독자들에게 맘몬자본에게 저당 잡힌 어떤 부자의 생()의 은유들을 슬며시 하나둘 내어놓는다.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풍성하게 열매를 냈다. 그러자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속말을 하며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했다.”

 

이렇듯이 본문비유에서 부자의 삶의 상황은 유대 풀뿌리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갈릴리 땅의 풀뿌리 소작농들의 삶의 마당에서라면 흔히 봐왔고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갈릴리는 유대지역보다 훨씬 비옥한 땅이었고 크고 작은 지주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비유는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풍성하게 열매를 냈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비유의 첫 문장은 이 비유에서 부자의 모든 행동과 상황들을 설명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의 주어는 부자가 아니다. 부자가 소유한 코라 χώρα 이다. 여기서 , 소규모 풀뿌리 자작농들이 소유한 이 아니다. 대지주가 소유한 대규모 토지로써 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본문비유의 첫 문장이 은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자의 넉넉한 부와 재물이 불로소득이라는 은유다. 본문에서 부자는 한 가족끼리 작은 밭떼기나 부치는 자작농이 아니다. 많은 소작농들을 거느리고 많은 땅을 경작하는 대지주다. 그 부유한 대지주는 어떤 노동이나 땀 흘림도 없이 많은 부와 재물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그 부자가 소유한 이 부자에게 풍성한 열매를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말 성서는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라고 본문비유의 첫 문장을 번역했다. 문장의 주어를 구별하지 않고 뒤섞음으로써 부자의 부와 재물이 불로소득이라는 본문비유의 은유를 삭제해 버린 것이다.

물론, 본문비유에서는 부자가 불의하고 불법하게 부와 재물을 모았다고 보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본문비유에서 부자의 넉넉한 부와 재물 그리고 그 쌓음에 대한 비판을 본문해석의 주제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비유에서 부자의 불로소득 은유는 본문비유의 내용전체를 이끌어가는 밑바탕 은유다. 왜냐하면 본문비유의 부자는 대지주이고 한 해 풍년만으로 그 많은 부와 재물을 모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부자가 자신의 많은 부와 재물을 쌓는 동안 스스로 노동하고 땀 흘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문비유의 첫 문장에서 사용한 헬라어 낱말 코라는 밭이라고 번역하기보다 땅이라고 번역해만 한다. 실제로 신약성서는 코라 χώρα 이라는 헬라어 낱말보다 아그로스 γρός 밭 또는 토지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한편 땅이 풍성하게 열매를 냈다라는 본문비유의 표현은 부자가 독점 사유화한 부와 재물조차도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은유를 드러낸다. 부자의 독점 사유재산인 부와 재물은 불로소득이다. 그것은 이 내어 놓은 것으로써 부자는 아무런 노력도 힘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은 하늘의 것이다. 가난한 풀뿌리 소작농이나 자작농들의 노동과 땀 흘림을 통하여 거두어진 하늘의 열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열매조차 하늘의 은총이라고 한다면, 아무런 노동도 땀 흘림도 없이 땅이 열매 맺어 내어 놓은 부자의 부와 재물은 결코 부자가 독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로써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자는 자기 소유의 땅이 내어놓은 풍성한 열매들을 앞에 놓고 독점사유화와 쌓음의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착취와 독점과 쌓음

 

그러자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속엣말을 하며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했다.”

 

이때 본문은 디에로기제토 διελογίζετο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이 헬라어 동사는 디아 διά ~통하여 + 로기조마이 λογίζομαι 셈하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이리저리 셈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부자는 가난한 풀뿌리 소작농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으로 채워진 불로소득을 독점하고 자신만을 위한 쌓음에 골몰한다. 부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속엣말로 자신의 부와 재물들에 대한 탐욕들을 셈한다. 수많은 소작농들의 노동과 땀흘림이 배어있는 생산물들을 혼자 독점하고 쌓을 생각만 한다. 부자는 자기 마음과 뜻과 의지를 오로지 부와 재물을 독점하고 쌓는 일에 쏟아 부을 수 있다. 자기의 모든 힘과 능력을 착취와 독점과 쌓음에만 온통 펼쳐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시대마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과 부자들의 삶의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내 곡식들을 모아 둘 곳이 없구나. 그러다가 말했다. 이렇게 해야지. 내 곳간들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물건들을 모아두어야겠다.”

 

이 때 본문은 타스 아포테카스 τς ποθήκας 곳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포테카스는 신약성서 안에서 종종 창고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많은 물건들을 판매하는 대형 상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본문에서 부자는 대지주 일뿐만 아니라 대상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신약성서에서 이름 드러내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도 대지주이며 대상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부자는 부와 재물에 대한 독점사유화로 부와 재물에 대한 주인행세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맘몬자본 세상에 종속된 노예와 같다. 마찬가지로 21세기 시대상황에서도 부와 재물은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에 대한 부자들의 독점사유화와 쌓음의 증언이다.

이러한 증언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자들의 숨겨진 곳간들과 돈 저수지행태로 보아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한 사실이다. 그러니 물이 아래로 흘러넘치듯 부자들의 부와 재물이 가난한 이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으로 돌아갈 일은 전혀 없다.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가 밤낮으로 선전선동 해대는 트리클다운 효과야말로 생판 거짓말이다. 그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들통 났다. 옛날 옛적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부자들은 끊임없이 자기 곳간들을 헐고 더 큰 곳간들을 지었다. 부자들의 돈 저수지 둑은 더 높이 쌓아올려졌다. 그러는 사이 오히려 피라미드 종속관계 빨대 착취구조는 빈틈없이 촘촘해지고 단단해지며 튼튼해졌다. 그렇게 밑바닥 풀뿌리 사람들의 삶의 마당에서 빨아올린 노동과 땀 흘림의 몫으로 독점자본대기업들의 곳간이 차고 넘친다.

 

장물아비 인생

 

더 나아가 본문비유에서 부자는 땅에 매인 소작농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으로 쌓아올린 부와 재물을 장물로 삼아 자기생명을 불러낸다. 그리고 이렇게 큰소리를 친다.

 

내가 내 생명에게 말하리라. 생명아! 여러 해 동안 편히 누울 만큼 많은 물건들을 차지했으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본문에서 부자의 확신에 찬 선언은 무엇을 은유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맘몬자본이 부자의 생()을 저당 잡았다는 은유이다. 부자는 자기생명을 불러내어 맘몬자본의 저당물로 내어 주고 맘몬자본세상의 장물아비로써 황홀한 인생을 꿈꾼다. 이제 부자의 인생과 생명은 맘몬자본세상의 장물인 부와 재산에 매여 있다. 그렇게 본문비유에서 부자가 자신의 인생과 생명을 맘몬자본에게 저당 잡힌 채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으로 쌓아 올린 부와 재물로 장물아비 인생을 즐기려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부자를 비웃으신다.

여기서 본문은 예화로써 맘몬자본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부자가 맞이해야 하는 인생의 종말 또는 죽음을 드러내놓고 경고한다. 부자가 자기 인생을 맡긴 맘몬자본권력은 인생의 종말과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다.

이때에 본문은 퓌쉬케 ψυχῇ’라는 낱말을 사용하는데 생명, 목숨, , 마음등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프쉬케는 동사 퓌쉬코 ψύχω 호흡하다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인생의 모든 계획과 뜻과 의지들은 사람이 숨 쉬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인생이란 나와 너, 우리의 삶의 관계와 교제와 소통 안에서만 유의미하다. 특별하게 불노장생과 부귀영화를 꿈꾸는 것은 그저 사람의 욕망이요 탐욕일 뿐이다.

이점에서 사람이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모든 인생살이는 사람과 사람의 생명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이 모든 인생살이는 나와 너 우리의 생명관계 속에서, 서로의 삶의 교제와 소통 안에서만 복되고 행복할 수 있다. 나 혼자서만 또는 나만의 인생을 위한 행복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부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그럴싸한 인생계획과 뜻과 의지를 나타내 보였으나,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자는 자신의 생명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실존과 한계를 진지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다.

이렇듯이 예수는 본문내용을 예화로 삼아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조롱한다. 이때 사용한 헬라어 낱말이 앞흐론 φρον인데 부정접두어 + 프렌 φρήν 마음(횡경막)’으로 이루어진 합성어다. 따라서 앞흐론이라는 헬라어 낱말의 문자의미는 마음 없음, 심장 없음, 생각 없음이다.

실제로 본문읽기는 예화로써 맘몬자본에게 자기인생을 저당 잡힌 채 자기만족과 탐욕 속에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그려낸다. 부자의 인생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이 없다. 배고픔과 고통의 눈물이 없다.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없다. 맘몬자본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부자에게는 사람의 심장 또는 마음이 없다.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린 부자의 인생계획과 뜻과 의지 속에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관용만 가득하다.

그러므로 본문읽기는 예화로써 분명하고 뚜렷하게 부자의 자기만족 인생계획과 뜻과 의지를 향해 인생의 종말 또는 죽음으로써 슬프고 끔찍한 결말을 선언한다.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그들이 너로부터 네 생명을 요구하리라. 그렇다면 네가 마련해 놓았던 것들을 누가 차지하게 되겠느냐?”

 

자기만을 위하여 부와 재물을 쌓아놓고 즐기려는 부자의 인생계획과 뜻과 의지를 하나님께서 허물어 버리신다. 여기서 독자들은 본문읽기의 예화로써 부자의 인생종말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경고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런데 왜 위 본문문장에서 이 밤에 그들이 너로부터 네 생명을 요구하리라3인칭 복수주어가 사용되었을까? 도대체, 부자의 생명을 요구하는 그들은 누구일까? 하나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구인가?

이때 본문은 아파이투신 παιτοσιν이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헬라어 동사는 아포 πό ~로부터 + 아이테오 ατέω 요청하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여기서 본문은 다시 예화의 언저리를 넘어서 비유의 은유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이렇게 또 다시 비유로써 본문읽기의 숨은 문맥을 쫓아 추측한다면 그들이란 부자의 자기만족 인생계획과 뜻과 의지의 바깥에서 따돌려져 있는 사람들이다. 부자의 땅에 매여 있는 가난한 소작농들과 농노들이다. 자기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을 찾으려는 시대의 가난한 풀뿌리 사람들이다. 그들이 맘몬자본세상에서 장물아비인생을 사는 부자의 손에서 그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을 되찾으려 한다.

 

맘몬자본세상을 향한 대항행동 은유

 

그러다보니 본문비유에서 부자는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과 자기노동과 땀 흘림의 몫을 빼앗긴 소작농노들로부터 생명을 요구당할 수밖에 없다. 이때 본문비유에서 사용한 프쉬케라는 헬라어 낱말의 의미는 생명을 호흡하며 쌓아가는 삶의 내용들이다. 왜냐하면 부자의 자기만족 인생계획과 뜻과 의지의 내용들이 부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가난한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필요와 쓰임에 대한 독점사유화이며 쌓음이기 때문이다.

앞서서 예수는 본문비유 첫 문장의 숨은 은유를 통해서 부자의 넉넉한 부와 재물 그리고 쌓음을 불로소득이라고 밝혀 놓았다. 이제 부자의 불로소득은 필연코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에 대한 독점사유화이며 쌓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문비유에서 부자의 넉넉한 부와 재물은 맘몬자본세상의 장물아비인 부자가 불법 취득한 장물일 뿐이다. 본문은 비유로써 이러한 부자들의 부와 재물에 대한 은유를 신랄하게 까발린다. 본문비유에서 부자의 넉넉한 부와 재물은 맘몬자본에게 자기 생을 저당 잡히고 얻어 낸 장물로써 의심여지 없이 뚜렷하게 부자의 인생과 생명의 실체내용물이다.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그들이 너로부터 네 생명을 요구하리라. 그렇다면 네가 마련해 놓았던 것들을 누가 차지하게 되겠느냐?”

 

본문읽기의 이 문장은 예화의 언저리를 한참이나 벗어난다. 이 문장은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맘몬자본세상을 향한 반역과 대항행동을 선동한다. 자기노동과 땀 흘림의 몫을 속속들이 빼앗기는 맘몬자본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여 억세고 사나운 대항행동으로써 대안세상 은유들을 쏟아놓는다.

 

부자의 부와 재물은 너희의 노동과 땀 흘림을 도적질한 맘몬자본세상 장물이다. 맘몬자본세상의 장물아비인 부자의 곳간들과 장물들로부터, 부자의 나홀로 인생계획과 뜻과 의지로부터 너희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을 요구하라. 부자의 인생계획 안에 넘쳐나는 부와 재물이야말로 너희가 도적질 당한 너희의 노동과 땀 흘림의 몫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누가복음저자는 본문을 비유라고 말하면서도 예화처럼 부드럽게 고치고 꾸몄다. 저자는 부자의 많은 부와 재물도 인생의 종말인 죽음 앞에서 그저 무가치할 뿐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여기서 독자들은 어떤 부자의 인생종말 또는 죽음에 대한 본문 예화를 통하여 독자자신에게 경고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렇듯이, 비유로 말해지고 예화로 들려지는 본문읽기의 내용은 여기에서 끝을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본문 저자는 21절에 마지막 한 문장을 덧 붙였다.

 

이와 같이 자신만을 위하여 쌓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부유하려하지 않는 자와 같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본문저자가 덧붙인 예화로써 마지막 문장의 의미는 다양한 신앙은유들로 넘쳐난다. 본문예화의 청중과 독자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쌓는 자하나님 안에서 부유하려 하지 않는 자를 연계해서 다양한 묵상의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다. 독자들의 삶의 마당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신앙은유들을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할 때 하나님 안에서 부유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본문저자는 자기복음서안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많이 남겨 놓았다. 찾아서 살펴보면 본문의 마지막 문장의 숨겨진 은유를 깨달을 수 있다.

 

여러분의 소유를 팔아 자선을 베푸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헤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시오”(누가복음 12: 33)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오.”(누가복음 18: 22)

 

누가복음 저자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서 부요한 사람이란 자신의 소유를 헐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다. 반면에 하나님 안에서 부유하려 하지 않는 자는 자신만을 위하여 쌓는 자이다. 또한 본문읽기 예화의 부자처럼 맘몬자본에게 자기인생과 자기생명을 저당 잡힌 자다. 나아가 예수는 비유로써 본문읽기 내용 안에 생()의 은유들을 숨겼다. 맘몬자본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자들에게 조만간 들이닥칠 인생종말 또는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며 생()의 뜻을 가르친다. 그 슬프고 끔찍한 결말들을 은유로 드러내어 경고한다.

 

무관심 무감각 무의식 무관용

 

얼마 전 대형교회에 다닌다는 어떤 교우를 만났다. 그 교우는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했지만 사업을 통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희년빚탕감상담소가 하는 일들을 안내하고 설명했다. 그런데 도무지 그는 희년빚탕감상담소가 하는 개인파산면책 및 개인회생무료상담사역을 이해하지 못했다. 1% 최 상위 부자가 아니더라도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삶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알게 되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의 고통과 절망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관용했다. 그럭저럭 제 밥벌이나 하며 부자 흉내 내기에 바쁜 맘몬자본세상 해바라기 인생들이 쥐뿔만큼이라도 가진 것을 내놓아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마찬가지 이 땅 풀뿌리 사람들도 맘몬자본숭배로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삶의 터전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일지라도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 무한경쟁 이데올로기를 벗어 던지기가 녹녹치 않다. 누구라도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상 무한경쟁독점쌓음소비의 올무에서 놓여나기 어렵다. 우리 모두는 시나브로 맘몬자본에게 자기 삶을 저당 잡힌 장물아비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신앙인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외면할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모르는 척 계속해서 맘몬자본에게 저당 잡힌 인생을 살아 갈수 없다. 이제 21세기에 이르러 우리 눈앞에 생명말살, 인생의 종말, 죽임 당함의 대 파국이 들이닥쳐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맘몬자본에게 자기 삶을 저당 잡힌 인생들이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심장 또는 마음 없음 그리고 생명 없음인생계획과 뜻과 의지를 깨트려야 한다. 새로운 삶의 변혁을 도모해야 할 때다.

21세기 예수신앙인들에게는 그 실천행동이 무엇인지의심할 여지없이 뚜렷하다. 나만의 독점사유재산을 헐어 가난한 이웃들의 필요와 쓰임을 채우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를 여는 것이다. 이 책의 주제로 바꾸어 말하면 ‘21세기 희년신앙 행동서사 잇기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실천행동이 작든 크든 그 행동들이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부유해지려고 하는 예수신앙운동 몸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