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구약성서

성서 속, 희년신앙 삶의 자리를 찾아서

희년행동 2024. 11. 6. 10:54

성서 속, 희년신앙 삶의 자리를 찾아서

출애굽기 24:3-4

 

모세가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야훼의 모든 말씀들과 모든 공의로운 법규들을 낱낱이 보고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응답하여 말했다.

 

야훼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들을 우리가 실행하겠습니다.”

 

모세가 야훼의 모든 말씀들을 기록했다. 그리고 모세가 아침 일찍 일어나 그 산 아래 제단을 지었는데 이스라엘 열두지파에 따라 열두 개 돌기둥을 세웠다.

 

 

들어가는 말

 

20241027일은 507주년 종교개혁주일이다. 21세기에 이르러 굳이 되짚어 보지 않아도 그 시대 로마교회는 성직매매와 면죄부 등 종교타락이 마구잡이로 나타났다. 이제 한국교회는 507주년 종교개혁주일 맞아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내세우는 행사표어도 요란스럽고 억셌다.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다.

성경만이 세상의 유일한 기준이다.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한국교회가 이렇게선언할 자격이 있나?

실제로 이 땅 풀뿌리 사람들은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21세기 한국대형교회를 중산층의 종교사교클럽이라고 치부한다. 왜냐하면 지난 IMF 외환위기 속에서 중산층의 질펀한 생활경제 마당이 말끔하게 정리정돈 되었기 때문이다. IMF외환위기 이전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자칭 타 칭 우리사회 중산층은 80~85%였다. 그러나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나라 중산층은 10~15% 맘몬자본의 마름계층으로 졸아붙었다. 그러니 21세기 맘몬자본 마름계층이 똬리를 틀고 독점한 한국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참으로 세상의 온갖 아픔과 고난을 위로하고 이겨내는 성서읽기진심을 보여줄 수 있을까?

덧붙여서, 한국대형교회 교우들은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참 좋아한다. 정보화혁명 온라인 네트워크에는 동영상과 유튜브 등 참 좋은 설교들이 넘쳐난다. 따라서 ‘21세기 성서읽기진심이니 어쩌니 따지는 것은 시대상황에 맞지 않는다.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21세기 성서읽기진심 따위는 꼴사납다, 참 너 잘났다!?

 

이렇듯이 21세기에서 가름하는 종교개혁주일 의미 가운데 첫째를 오직 성서라고 한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성서를 읽고 있을까?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유별나게 큐티(Quiet Time)로 성서읽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큐티로 성서읽기를 해서 어떤 좋은 이로움이 있을까? 굳이 큐티로 성서읽기의 이로운 점을 따진다면 성서에서 하나의 호감(好感)문장 또는 낱말들을 끄집어내어 묵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묵상은 열에 아홉 자기만족 성찰과 반성 또는 자학적 회개를 통한 종교 카타르시스로 마무리된다. 자기 직관에만 의지해서 초월의 세계를 경험하는 종교 카타르시스는 중독성이 강하다.

무엇보다도 큐티로 성서읽기의 단점은 성서에서 하나님의 뜻 찾기보다 생활 속 자기생각과 느낌과 관념들을 성서에 투사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성서 도구주의다.

또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교리로 성서읽기를 좋아한다.

성서의 모든 내용들을 죄와 구원으로 단순화한다. 그러나 성서는 단순하게 기독교교리를 설명하고 강요하는 교리학습서가 아니다. 죄와 벌 그리고 구원이라는 교리로만 성서읽기를 한다면 성서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제자리에 되돌리지 놓지 못할 만큼 크게 왜곡할 수 있다.

또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자주의 성서읽기를 좋아한다.

성서의 문장들과 문맥을 자기취향에 맞게 비틀어서 읽는다. 문자주의 성서읽기를 고집함으로써 온갖 상징과 비밀스럽고 신비한 해석언어들을 찾거나 상상한다. 무엇보다도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에 따라 성서를 읽고 해석하면서 상징과 암시로 성서본문 내용들을 꿰어 맞춘다. 제멋대로 성서본문 내용들을 헤아리고 판단한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개혁이후 서구교회는 수백 년에 거쳐 성서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성서에 대한 역사와 사회배경 이해, 성서 고고학, 성서 밖의 고대문서들에 대한 비교연구, 성서 안에 나타난 자료연구 등 수많은 성서신학 업적을 쌓아왔다. 이제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성서읽기와 관련하여 서구교회의 성서신학 연구업적들은 참으로 쓸모 있고 이롭다.

무엇보다 성서는 유구한 인류종교문명사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삶의 교감을 통한 사회경제정치공동체 신앙고백이. 성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예수신앙인들과 성서독자들의 공동체 삶의 자리에서 연대와 교류를 요청한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삶의 연대와 소통을 통한 바른 성서읽기와 해석, 적용과 실천행동만이 맘몬·자본 숭배에 빠져든 한국교회를 다시 바르게 세울 수 있으리라.

따라서 필자는 507주년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성서 속 희년신앙 삶의 자리를 찾아서라는 새로운 성서읽기 주제를 제안한다.

 

이끄는 말

 

2024년 대한민국은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온통 들떠 있다.

그런데 한강작가의 작품들은 오늘을 사는 이 땅 풀뿌리 사람들과 가부장주의 또는 국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은 광주 5.18 국가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작품은 제주 4.3 국가폭력의 광기를 폭로한다. 나아가 채식주의자라는 작품도 21세기 가부장주의 폭력문제를 고민한다. 문학평론가들은 한강작가의 작품세계를 폭력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인간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이라고 평한다. 무엇보다도 노벨문학상 선정소식을 듣고 한강작가가 보여준 태도가 놀랍다.

전쟁이 치열해서 사람들이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나.

이 비극적인 일들을 보면서 즐기지 말아 달라.

스웨덴 한림원에서 상을 준 것은 즐기란 게 아니라 더 냉철해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필자는 성서 속, 희년신앙 삶의 자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성서읽기를 제안하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인간은 본래부터 폭력적인가? 실제로 고대 성서주변 문명세계는 끊임없이 제국주의 폭력과 전쟁과 피 흘림의 역사로 이어졌다. 성서주변 지중해 문명세계에서 폭력은 언제나 제국주의 노예세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성서는 성서주변세계의 오랜 종교문명사 속에서 쓰여 진 참되고 바른 하나님의 뜻이다.

성서는 성서주변 고대 문명세계의 제국주의 노예세상 억압과 폭력에 대항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세상을 꿈꾼다. 한마디로 그것은 성서 속에서 드러나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삶의 자리이다. 성서 속에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새로운 성서읽기의 핵심내용이다.

그러할 때 히브리 성서의 핵심은 출애굽기이다. 히브리 성서에서 출애굽기 이외는 책들은 출애굽기의 연장일 뿐이다. 출애굽기 이외의 책들은 출애굽기에 붙여진 책들, 곧 출애굽기의 주석이다. 그렇다면, 출애굽기의 핵심내용은 무엇일까?

출애굽기의 핵심내용은 옛 히브리 노예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이다.

또 그렇다면, 옛 히브리 노예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실체는 무엇일까?

히브리 성서에서 드러나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실체를 찾아서 정리하면 이렇다.

첫 번째,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께서 나타나셨다.(출애굽기 3)

두 번째,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께서 파라오 노예제국으로부터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고 구원하셨다.(출애굽기 1:1 - 1521)

세 번째,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지파동맹과 함께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주셨다.(19:1-5, 20:1-17, 24:1-11)

네 번째,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지파동맹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노느매기 땅을 선물로 주셨다.(출애굽기 3:7-8)

다섯 번째,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에게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건설하고 누리며 살게 하셨다.(히브리 성서 전체)

 

이렇듯이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께서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밑바탕을 놓으셨다.

이를 위해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께서 히브리 지파동맹과 함께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맺으셨다.(출애굽기 19:1-5, 20:1~17, 24:1-11) 야훼 하나님이 희년신앙 행동계약 조건들로써 히브리 지파동맹에게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주셨다.

야훼 하나님은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밑바탕으로써 히브리 지파동맹과 더불어 시나이산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맺으셨다. 서구교회와 유대교는 이 계약을 모세의 계약으로 축소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참으로 야훼께서 히브리 지파동맹(쉐베트 שֵׁבֶט 지파 또는 가지줄기)과 더불어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맺으셨다. 이때 히브리 지파동맹은 파라오 노예제국으로부터 탈출해 나 온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여러 씨족 또는 종족공동체이다.

따라서 히브리 지파동맹이 시나이 산 희년신앙 행동계약의 당사자이다.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들 가운데 칠십 명을 히브리 지파동맹의 대표들로 소개한다. 출애굽기18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장로들 가운데 칠십 명은 히브리 지파동맹에서 대표로 뽑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자기 지파들에서 행정과 정치 분야의 공공(公共)역할을 감당해왔다. 그들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당사자로써 열두 개의 돌기둥을 세워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기념하였다.

그렇다면, 희년신앙 행동계약이란 무엇인가?

성서에서 희년은 마땅히 히브리들이 건설하고 누리며 살아가야 할 해방과 구원세상이다. 그것은 곧 야훼하나님의 출애굽 해방과 구원사건을 밑바탕삼아 자기 생을 살아가는 히브리들의 해방과 구원세상 삶이다. 마땅히 히브리들이 건설하고 누리며 지켜내야 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이다.

이를 위해 야훼 하나님은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통하여 스스로 감당할 계약의무와 책임들을 정하셨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들의 해방과 구원세상을 보장하실 것이다. 또 히브리들이 들어가 살아가야 할 가나안 노느매기 땅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나아가 그 땅에서 히브리 후손들이 번성하는 복을 주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희년신앙 행동계약의 당사자로서 히브리 지파동맹에게도 희년신앙 행동계약 조건으로써 행동법규들이 주어졌다. 히브리 지파동맹에게 주어진 희년신앙 행동법규 총칙이 십계명이다. 출애굽기 21장에서 23장에는 히브리 지파동맹에게 주어지는 계약조건들로써 행동법규들이 하나하나 자세히 나열되었다.

히브리 지파동맹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의식으로써 화목제’(和睦祭)를 올렸다.

화목제 계약의식 속에서 모세는 야훼 하나님이 명령하신 -하데바림 כָּל־הַדְּבָרִים 모든 말씀-함미슈파팀 כָּל־הַמִּשְׁפָּטִים 모든 공의로운 행동법규들을 낱낱이 보고했다. 히브리 지파동맹이 한목소리로 야훼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들을 실천행동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런 후에 히브리 지파동맹 대표들은 야훼하나님 앞에서 화목제 제물을 함께 먹고 마셨다.

 

이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조건들로써 행동법규들을 살펴보자.(출애굽기 21장에서 23장까지)

먼저, 야훼하나님은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통해서 스스로 감당할 계약의무와 책임을 정하셨다.

그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 총칙 십계명전문(前文)이다.

나는 네 하나님 야훼다. 곧 노예들의 집으로부터, 이집트 땅으로부터 너를 이끌어 낸 네 하나님 야훼다.”

첫째, 야훼하나님께서 히브리들의 해방과 구원세상을 보장하실 것이다.

둘째,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에게 가나안 노느매기 땅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셋째,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후손들이 번성하는 복을 주실 것이다.

이어서, 히브리 지파동맹이 지켜야한 계약조건들로써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주셨다.

서구교회와 유대교는 이 행동법규들을 모세의 율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은 희년신앙 행동계약의 의무와 책임으로써 옛 히브리들에게 주어진 계약조건들이다. 계약의 조건들로써 법적효력이 발생하는 희년신앙 행동계약의 의무와 책임들이다.

이제,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 주요 내용 다섯 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첫 번째,빚 탕감과 채무노예해방(출애굽기 21:1-11, 신명기 15:1-18)

어떤 히브리사람이 다른 히브리사람을 노예로 삼는다면 육년 동안만 종으로 부려야 한다. 육년이 지나 칠년 째에는 아무런 몸값도 없이 해방되어 나가야 한다. 신명기15장의 야훼의 빚 탕감의 해에서도 똑같다. 또 레위기 25장 희년본문에서는 외국사람에게 노예로 팔려간 형제자매들을 몸값을 주고 물러서 해방시키라고 명령한다.

두 번째,이자금지와 사회경제 약자보호(22:21-27, 25:35-38)

히브리들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이자의 짐을 지워서도 안 된다. 도리어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아야 한다. 어떤 형제가 가난해져서 내 생활경제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 처진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고 함께 살아야 한다.

세 번째,정의로운 재판과 사회공동체 규약(출애굽기 23:1-9)

거짓증인을 내세워 죄 없는 사람을 해코지 하면 안 된다. 서로 원수가 된 사람이라도 사회공동체 규약을 통해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 나그네를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

네 번째,안식일과 안식년의 쉼이 있는 노동(출애굽기 20:8-11, 23:10-13)

안식일에는 모두가 쉬어야 한다.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가축들까지 푹 쉬어야한다. 내 집에 있는 나그네도 노동을 하지 말아야한다. 또 안식년에 이르러는, 땅도 푹 쉬어야 한다. 안식년에 저절로 자란 생산물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들짐승들까지도 함께 먹어야 한다.

다섯 번째,토지공공성(토지공개념)’(레위기 25:23-34)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누구라도 땅의 소유권을 아주 팔아넘길 수 없다. 만약에 토지의 이용권 또는 수익권을 팔았다면 산 사람은 언제든 땅 무르기를 허락해야 한다. 희년에 이르면 모든 땅들은 처음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듯이 야훼 하나님은 희년신앙 행동법규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형제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쓰임과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에게는 자기 손이 닿는 모든 일을 통해서 복 주실 것이다. 이때 히브리 성서는 솰라흐 שָׁלַח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손을 펴다 또는 뻗치다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손이 닿는 모든 것에서 만사형통(萬事亨通)의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복을 내리실까?

그 땅 가운데서 -예흐달 에브욘 - 가난한 사람이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은 그 땅 지배체제의 억압과 착취 속에서 풀뿌리 사람들이 끊임없이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아셨다. 야훼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쓰임과 필요를 채워주라고 그 누군가에게 부와 재물을 주셨다.

실제로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은 그 땅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의 신앙의지와 실천행동을 요구한다.

부유한 사람들이라야 빚을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부자들은 야훼의 빚 탕감의 해를 행동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야훼의 기쁨의 해를 선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은 이 땅의 부자들에게 내리는 하늘은총이다.

그러나 옛 히브리들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이제 야훼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새 계약의 약속을 주셨다.(예레미야 31: 33-34)

나 야훼가 말한다. 참으로 이것은 그날들 후에 이스라엘 집과 맺을 계약이다. 내가 그들 가운데 토라를 주고 그들 마음에 내가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이웃끼리 형제끼리 서로 야훼를 알아라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그들 모두가 나를 알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야훼가 말한다.

 

예레미야의 이 놀라운 새 계약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재구성되었다.

예수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시대의 유대교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난하고 힘없는 풀뿌리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옥죄는 신정사회(神政社會)613개 생활율법조항으로 도구화시켰다. 613개 생활율법조항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풀뿌리 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예수는 유대교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의 이러한 위선(僞善)을 거칠고 사납게 비판했다.

이렇듯이 예수는 마태복음 5:17-20에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의 완성을 선언한다.

내가 율법과 예언자들을 뒤집어엎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뒤집어엎으려고 온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려고 왔다. 아멘,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 까지는 율법의 작은 뿔 하나,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 전 까지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려 질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려 질 것이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의 정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보다 더 넘치지 않는다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는 마태복음 22:37-40에서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의 완성으로써 사랑의 이중계명을 선포한다.

너의 온 맘으로, 너의 온 생명으로, 너의 온 뜻으로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그런데 두 번째도 그와 똑같다.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온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 두 계명에 매여 있다.

예수는 노모스 νόμος 율법엔톨레 ντολη 계명으로 바꾼다.

이때 엔텔로 ντέλλω라는 헬라어 동사의 뜻은 책임과 의무를 명령하다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에게 주신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로써 하데바림 또는 함미슈파팀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하나님 사랑이란,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 야훼 하나님을 깨닫고 체험하고 신앙하는 것이다.

또한 이웃 사랑이란,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꿈꾸고 행동하며 누리는 것이다. 곧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의 완성으로써 하나님나라 복음운동대헌장을 선포했다.

마태복음 5-7장 상산보훈과 누가복음 6장 평지설교야말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대헌장이다. 그 핵심내용은 팔복선언행복선언 그리고 주기도문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표상으로써 오병이어 밥상공동체를 베푸셨다.

이후, 예루살렘 예수부활신앙 공동체는 예수의 오병이어 밥상공동체를 이어서 서로의존 공유경제공동체를 열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라고 증언한다. 또한 바울은 초대교회 안에 연보(捐補)신앙 공동체 네트워크를 튼튼하게 세웠다. 또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삶 곧 서로사랑 공동체 삶의 연결망을 강조했다. 바울은 옛 히브리들의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게,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라는 하늘양식일용할 양식 만나사건에 잇대어 초대교회 희년세상을 선포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천년 서구교회는 시대마다 모든 신앙문제의 해결방법을 로마서에 찾았다.

그러나 이제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복음서의 팔복선언과 행복선언 그리고 주기도문에서 새로운 신앙가치와 신앙행동 지침을 찾을 수 있다. 바야흐로 21세기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대헌장과 예수의 비유 속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진실을 찾아야한다.

 

나가는 말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이해서 이제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다시 성서로 돌아가자라고 외쳐야 한다.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시대와 삶의 언어로 성서읽기를 해야 한다.

21세기 시대의 언어로, 생활영성의 언어로, 영적 휴머니스트의 언어로 성서 읽고 이해하며 해석해야 한다.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나홀로 등 따시고 배부르고 행복한 10% 중산층욕망의 언어로 성서읽기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춥고 배고프고 슬프고 고달푸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땅 풀뿌리 사람들의 삶의 언어로 성서읽기를 배워야한다. 불안과 피 흘림과 죽임의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3세계 풀뿌리 사람들의 울부짖음 속으로 울려 퍼지는 성서읽기를 해야 한다. 90%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언어로 성서를 잃고 이해하고 해석하며 적용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21세기 희년신앙 행동서사 잇기에 나서야 한다. 21세기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2를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