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신앙의 태동, 모세의 탄생설화-나일강가의 세 여인
본문풀이
히브리노예 성공신화 모세이야기, 히브리노예들의 고난서사를 쓰다.
모세의 탄생설화, 나일강가의 세 여인
본문읽기에서 ‘레위가문’은 아직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읽기1.(출2:1-10)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탄생설화’다. 그리고 이후 유대교 안에서 ‘레위가문’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본문읽기1.에서 모세의 탄생이야기는 ‘위기와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증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 가운데서는 여성들의 역할과 행동만 드러날 뿐이다. 단 한명의 남성도 등장하지 않고 아무런 역할도 없다. 나아가 하나님의 직접개입도 없다.
왜 그럴까? 본문읽기1.에서 모세의 탄생설화는 히브리 노예들의 성공신화로써 ‘모세의 영웅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본문은 모세의 탄생설화를 통하여 히브리 노예들의 고난의 현장을 기록하려고 한다. 앞선 출애굽기1장에서 히브리 노예들이 처한 참혹한 상황이 모세의 탄생설화를 통하여 낱낱이 까발려 진다. 곧 히브리 노예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히브리노예 사내아기 살해정책 실제상황’이 생생하게 다 드러난다.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 안에는 히브리노예들의 하나님 따위는 아예 발붙일 여지가 전혀 없다. 따라서 히브리 노예들이 겪어야만 하는 참혹한 고난의 현장이 여자들만의 삶의 현실상황으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점에서 모세의 탄생설화는 ‘하이쏴 הָאִשָּׁה 그 여자’라는 주어로 출발하고 ‘그 아기엄마’ 라는 주어로 끝을 맺는다.
“그 여자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엄마가 아기를 보니 참 아기가 사랑스러웠다. 아기엄마는 석 달 동안이나 아이를 숨겨서 길렀다”
우리말 성서는 본문에서 사용된 ‘키 토브 כִּי־טֹוב’라는 히브리어 문구를 ‘준수하다 또는 잘생겼다’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히브리어 낱말 ‘토브’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형용사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실 보도에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형용사이다. 따라서 본문읽기에서 ‘토브’는 아기를 낳은 엄마가 아기를 바라보는 절절하고 속절없는 ‘사랑스러움’이다. 히브리노예 사내아기 살해라는 참혹하고 무지막지한 파라오 지배체제의 폭력통치 아래서 아기엄마의 고통과 절망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문구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명의 출생은 기쁘고 귀한 일이다. 그러나 모세탄생 설화에서 아기엄마는 아기의 출생을 숨기고 감추어야만 했다. 이러한 현실상황은 아기엄마의 고통과 절망을 히브리 노예공동체의 일상적 삶의 고통과 절망으로 확장한다.
그러나 이제 아기엄마는 더 이상 아기를 숨길 수가 없었다. 아기엄마는 갈대상자를 얻어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었다. 그리고 나일강 둔치 갈대 사이에 두었다. 이때 본문이 사용한 히브리어 낱말 ‘예오르 יְאֹֽר’는 보통 나일강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본문에서 나일강은 농사를 짓기 위해 나일강물을 끌어오는 큰 수로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수프 סּוּף’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보통 ‘갈대바다’라고 번역하는데 여기서는 나일강 수로에서 자라는 갈대밭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수프’라는 히브리어 낱말이 ‘끝장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라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아기엄마의 ‘포기 또는 내버림’의 고통과 절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고통과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반전은 있게 마련이다. 아기의 누이가 ‘그 아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알아보려고 멀찍이 서있었다.
아기의 누이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희망은 ‘누군가가 개입하고 수고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결과가 아닐까?
아기누이의 한갓되고 부질없어 보이는 행동이 기적을 가져왔다. 그 때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가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공주의 시녀들이 강가를 경계하면서 갈대밭을 휘젓고 헤쳐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공주는 갈대숲 가운데 있는 상자를 보았다. 공주가 시녀 하나를 보내서 상자를 가져왔다. 공주가 상자를 열고 한 아기를 보았다.
“보라, 한 사내아이가 울고 있지 않은가.”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겨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히브리 아기들 가운데 한 아이로구나”
파라오의 딸이 상자 속에서 발견한 히브리 사내아이를 보고 나타내는 태도는 모두 감탄문으로 표현된다. 우리말 성서는 이 감탄문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번역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감탄문들은 독립적이다. 또한 이 감탄문들은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히브리노예 사내아기 살해상황 속에서 쓰여 진 ‘모세 탄생설화의 극적인 반전’을 표현한다. 나아가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기의 누이가 파라오의 딸에게 소리쳤다.
“제가 가서, 당신을 위해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그 아기에게 젖을 먹일 여자를 부를까요?”
이 외침은 아기누이에게 솟구치는 용기였을까? 아니다. 절절한 고통이고 절망이며 가없는 두려움의 외침이다.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공주가 ‘히브리노예 사내아기살해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아기누이의 이 외침이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을 불러 온 것일까? 히브리노예 아기누이가 외치는 절절한 고통과 절망과 두려움의 외침이 희망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파라오의 딸이 그 아기누이에게 대답했다.
“너는 가서, 젊은 아기엄마를 데려 오너라”
공주의 허락을 받은 아기의 누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아기의 친엄마를 불러왔다. 파라오의 딸이 아기엄마에게 부탁했다.
“이 아기를 데려가서 나를 위해 젖을 먹여다오. 내가 삯을 주겠다.”
고통과 절망 끝에서 모든 것을 포기했던 아기 엄마에게 도리어 공주가 부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아기 엄마가 아기를 데려와 젖을 먹여 키웠다. 아기가 자라자, 아기 엄마는 그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리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