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의 이런 저런 만남과 인연을 봅니다.(07.09.05)
벗들의 이런 저런 만남과 인연을 봅니다.
-새로운 만남과 인연들 또는 이미 있었던 만남과 인연들의 발전-
저 역시 이리저리 이왕의 만남과 인연들에 잇대어
새로운 만남들을 갖곤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만남과 인연들을 가만히 살펴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만남과 인연에는
인격적인 것과 비인인격적인 것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은 만남과 인연들은 대부분 서로의 이익을 위한 것들입니다.
서로의 이익이 공유되면 언제든 모이고
이익이 소멸되면 곧바로 흩어져 서로 잊고 마는 비인격적인 만남과 인연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만남들이라고 해서 인격적인 접점이 아주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요.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만남들은 그저 하루살이 인연일 뿐입니다.
일이 마무리 되고, 이익이 소멸하고 나면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만남과 인연이 되고 말지요.
이렇듯, 현대인의 사회와 일터와 학교는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소비의 신자유주의 시장질서에 지배당한지 오래.
서로 배려하고 나누고 돌보는 공동체적 만남과 인연을 꿈꾸는 것은 헛된 망상일 뿐이지요.
따라서 종교적 삶의 마당에서도 비인격적인 만남과 인연이 판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사랑과 은혜 안에서 서로 만나고 인연을 맺지요.
사람들은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종교적인 구원과 믿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만남과 구원과 믿음이
우리의 삶의 마당에 실천되고 이웃과 벗들 사이에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낱 허깨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구한 기독교회의 역사 안에서
경천동지할만한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더 할 나위없는 종교적 신비를 맛본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은혜와 신비를 자신의 삶의 마당에서 체현내고
이웃과 벗들에게 실천함으로써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의 마당에서, 이 땅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현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과 구원은
허깨비 놀음에 다름 아니지요.
이아침
어제의 허깨비놀음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과 나, 나와 너, 우리의 인격적인 만남과 인연을 갈망하며
조용히 잠자리를 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