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본문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의 곁으로 제일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 엘리트․기득권세력인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유대사회․종교․정치 공동체 계급관계의 꼭대기에 위치한다.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에서 거룩함의 표상으로써 유대풀뿌리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히 구별된 사람’이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비유이야기 속에서 제사장은 강도만난 사람을 못 본 체 멀찍이 피해서 지나간다. 제사장의 이러한 행태는 율법사나 유대청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사람이나 들짐승이나 그 시체를 만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사장성결 법에 따르면 제사장은 죽은 시체에 4큐빗(2.2m) 이내로 접근하면 부정을 탄다. 또한 제사장의 그림자가 시체를 덮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 혹여 바위나 나무그림자가 시체를 덮고 있을 경우 그 그림자 안으로 들어서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
이와 관련하여 비유이야기꾼 예수는 ‘강도들이 그 사람을 벗기고 때려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가운데 ‘제사장이 그를 돌봐주는 동안에 그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제사장은 부정을 타게 되고 그 부정함을 씻는 기간 동안 제사장 직무를 수행 할 수 없다. 따라서 제사장은 유대사회․종교․정치 공동체의 ‘정결의무를 저버린 불의한 제사장’이 되고 말 것이다.
또 한편으로 예수의 비유이야기 청중들은 ‘이렇게 의심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강도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강도질 하려고 그 사람을 미끼로 남겨놓고 간 것’이 아닐까?
제사장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변에서 머뭇거리다가는 ‘제사장조차 제2의 강도만난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게 사건이 확대된다면 유대사회․종교․정치 공동체 안에서 그야말로 정말 큰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이야기 속에서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을 대하는 제사장의 행태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에 대한 현실은유’이다. 예수는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을 대하는 제사장의 행태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성결 법을 조롱’한다. 배타적이고 퇴행적인 종교규범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의 사람다움을 외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를 상징하는 제사장의 행태를 통하여 유대사회․종교․정치 공동체의 헛된 종교율법과 종교윤리를 조롱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사람 본연의 양심을 저버리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를 매섭고 세차게 꾸짖는다.
그렇더라도, 예수의 비유이야기 청중들은 아직 예수의 비유이야기의 참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도리어 강도만난 사람의 흐리멍덩한 정체성과 더불어 ‘비유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예수의 행태에 대해 의심하고 분노하며 불평불만’이 거세게 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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