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는 서로를 공평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연보는 ‘얼마를 내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연보는 없는 것을 억지로 내게 하는 강요’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주변 채무노예세상에서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성전제물의 빚을 지우고 이자와 이윤을 쥐어짜는 착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와 벌과 심판이라는 ‘종교교리로 협박해서 뜯어내는 헌금 또는 성전제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의심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돕는 다는 뜻으로 ‘내가 괴로움을 당하거나 부담을 져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다. 도리어 바울은 ‘연보야말로 서로를 공평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때 본문이 사용하는 ‘이소테스 ἰσότης’라는 헬라어 낱말의 뜻은 ‘공평하게 또는 동등하게’이다. 이 낱말은 ‘이소스’라는 헬라어 형용사에서 왔는데 ‘동등한 또는 같은’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내가 넉넉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되어서 나의 모자라는 것을 채워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그렇게 ‘모두가 공평하게 되는 것’이 연보의 참 뜻이다.
바울은 이러한 ‘초대교회의 연보신앙 밑바탕을 옛 히브리들의 만나사건’에서 찾는다. 히브리 성서 출애굽기 16:17-18절 본문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그들이 많이 거두어 모으기도 하고 적게 거두어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멜로 되어 많이 거두어 모은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다. 또 적게 거두어 모은 사람도 모자라게 하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의 먹을 식구수대로 거두어 들였다.”
고대 파라오의 노예제국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들은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체험했다. 이 신앙체험을 밑바탕으로 히브리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야훼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양식 만나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했다. 야훼 하나님이 주신 하늘양식 만나를 거두고 모아들이는 가운데 불평등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 성서 만나사건 본문은 ‘그들이 많이 거두어 모으기도 하고 적게 거두어 모으기도 했다’라고 증언한다. 하늘로부터 내린 양식인 만나를 거두었는데 어떤 이는 많이 거두어 모으고 어떤 이는 적게 거두는 불평등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옛 히브리들은 하늘양식 만나사건에서 일어난 거두어들임의 불평등을 통해서 ‘바울의 연보신앙의 참뜻과 결과들’을 완벽하게 예시(例示)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멜로 되어 많이 거두어 모은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다. 또 적게 거두어 모은 사람도 모자라게 하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많이 거둔 사람이 있고 적게 거둔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이 서로가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얻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냈다. 모두의 필요를 채우고 만족하게 하는 놀라운 ‘분배의 평등’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기적일까? ‘아, 놀라운 하늘양식의 신비여’라고 얼버무려야만 할까? 아니다. 옛 히브리들의 만나사건에서는 많이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 사이에 분명한 불평등이 발생했다. 그러나 옛 히브리들은 ‘야훼하나님이 주신 하늘양식을 서로의 식구수대로 평등하게 분배’했다. 거두어 모은 것들을 오멜에 담아서 많이 거둔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다. 또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했다.
실제로 옛 히브리들의 하늘양식으로써 만나사건은 기적이 아니다. 종교 신비도 아니다. 옛 히브리들의 하늘양식 만나사건은 ‘신앙과 생활경제영성 훈련’이다. 옛 히브리들이 야훼하나님과 더불어 맺어야할 ‘희년신앙 행동계약법규들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우는 신앙행동 훈련’이었다. 따라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세상을 세우고 누리려는 예수신앙인들’도 옛 히브리들처럼 부단한 신앙행동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도 본문읽기에서 초대교회의 ‘연보’를 히브리 성서 ‘만나사건’에 직접 비유한다. 연보야말로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게 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하는’ 신앙행동이라고 선언한다. 옛 히브리들이 경험한 하늘양식 만나사건에서처럼 ‘연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공평하게 하는 신앙행동’이라고 선언한다.
이렇듯이 연보야말로 ‘넉넉한 이들이 자기 재물들을 내어놓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부족한 쓰임과 필요를 채우는 신앙행동’이다. 이로써 바울은 연보를 통해서 ‘서로의 삶이 평등해지는 신앙은총’에 큰 뜻을 부여한다. 자기소유물에서 넘치는 것들로 이웃의 모자람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초대교회 연보신앙의 핵심’이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연보할 때에 자기 마음과 뜻에 이끌리는 대로 내어놓으면서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사실 초대교회 교우들은 많은 연보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소유물을 탕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교우들은 ‘연보신앙행동을 통해서 현세나 내세에서 받을 복과 혹시 모를 액땜 방지’를 빌지 않았다. 초대교회 교우들에게 연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해방과 구원은총’에 대한 감사였을 뿐이다. 참으로 연보는 ‘예수신앙인들의 진심어린 이웃사랑과 관심과 염려’로만 가능할 수 있는 신앙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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