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예수의 십자가 행동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순교의 길’
예수는 진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위해 순교했을까? 그렇다면 예수는 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행동’을 여러 차례 예고했다. 구체적인 내용들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야기’속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세 차례나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요한복음11장에서는 ‘예수가 유대 땅으로 올라가는 상황과 그 위험성을 실감나게 증언’한다. 이때 예수의 제자가운데 도마라는 사람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가자’라고 외친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도 ‘예수가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순교의 길을 가기 위해 행동한 것처럼’ 증언한다. 예수는 여러 차례에 거쳐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십자가행동을’ 예고했다. 또 ‘자신의 십자가행동을 막아서는 베드로에게는 사탄이라는 막말’까지 퍼부었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마다 예루살렘성전 철폐사건을 일으켰다. 또 로마제국황제에게 바치는 세금논쟁 사건에 휘말렸다. 예수는 로마제국 황제권력과 유대 풀뿌리사람들 사이를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갈라치기’했다. 실제로 복음서들마다 ‘예루살렘성전 멸망예고, 십자가행동을 앞둔 처절한 기도,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의 자기변론 포기 등’을 증언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행동 순교를’ 스스로 불러 일으켜야만 했을까? 예수가 스스로 불러일으킨 예루살렘에서 자기 십자가행동 순교는 정말 수수께끼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에게는 꼭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있다.
“참으로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물리적으로 성공’이었을까?”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물리적으로 실패라는 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복음서들은 세례요한의 죽음과 연계해서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억압하는 내용들’을 증언한다. 마가복음6장에서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전해 듣고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다’라고 의심한다. 예수도 누가복음13장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여기서 떠나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합니다’라는 경고를 전해 듣는다.
이후에 마가복음7장과 마태복음15장에서 예수일행을 두 차례에 거쳐 ‘갈릴리 땅을 벗어나 외국으로 피난여행’을 떠난다. 첫 번째 외국피난여행은 갈릴리 호숫가마을 가버나움을 출발해서 지중해로 나가는 길을 따라 갈릴리 땅을 벗어났다. 예수일행은 ‘바울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키스칼라를 지나서 두로와 시돈’까지 외국피난여행을 이어갔다. 다시 예수일행은 시돈으로부터 두로로 내려왔다. 그런 후에는 ‘높이가 2,814m에 이르는 헬몬산 기슭을 가로질러 시리아 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남쪽으로 ‘요르단 골란고원지역 데카폴리스(열개의 헬라도시)가운데서 가다라 마을로’ 갔다. 그런 후에 ‘갈릴리호수 남쪽지역을 통해서 다시 갈릴리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갈릴리 내륙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예수일행은 첫 번째 외국피난여행에 이어서 곧바로 두 번째 짧은 외국피난여행을 떠났다. 예수일행은 가버나움 맞은편 벳세대 마을을 떠나서 ‘헬몬산 끝자락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페트로-반석이라는 뜻)를 방문한다. 예수일행은 가이사랴 빌립보로부터 가버나움으로 되돌아온 후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자기 십자가행동 순교를 당한다.
이렇듯이 왜, 예수는 갈릴리 땅을 벗어나 외국피난여행을 떠나야만 했을까? 예수는 왜, 이 외국피난여행 이후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자기 십자가행동 순교를 스스로 불러 일으켰을까? 무엇보다도 예수는 이 외국피난여행을 기점으로 제자들에게 거듭 거듭 ‘자기 십자가행동 순교’를 예고했다. 이때 예수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예수의 십자가행동 순교를 향한 이 모든 의문들은 ‘예수대속제물(代贖祭物)교리’를 통해 해석하면 간단하게 풀린다. 그리고 예수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외국피난여행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예수의 외국피난여행을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위험성과 물리적 실패로’ 연결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예수는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물리적 실패를 만회하고 새로운 활로를 여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예수는 ‘마지막 온힘 다해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큰 신앙행동사건’을 결단해야만 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곧 ‘예수의 십자가행동’이었다.

'21세기 성서읽기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 예수는 왜, 다윗왕조신학의 내림메시야 신앙을 거부했을까? (0) | 2025.12.11 |
|---|---|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은 ‘시대의 메시아’인가? (0) | 2025.11.27 |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 이집트제국 경계 이 끝으로부터 저 끝으로 까지 (1) | 2025.11.03 |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사법정의’ (0) | 202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