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이집트제국 경계 이 끝으로부터 저 끝으로 까지
그렇다고 해도 그 땅의 가난하고 힘없는 풀뿌리 농부들이 끝없이 무너지기만 할까? 넘어지고 엎어지기만 할까?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이 다시 한 번 더 힘을 내어 요셉에게 ‘자신들의 마땅한 요구들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당신이 씨앗을 주십시오.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지 않아야만 ‘땅도 황무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위 히브리어 문장 안에 흐르는 속뜻은 오롯이 ‘땅에만 기대어 살아온 농투성이들의 속절없는 생명저항 의지’다.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수많은 세월동안 ‘그 땅에 기대어, 그 땅을 가꾸고, 그 땅을 믿고, 그 땅을 의지하여’ 살아왔다.
“우리에게 씨앗을 주시오.”
이 요청은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끝판 생의 자존심이며 밑바탕 삶의 의지’다. 그러나 본문에서 꿈의 사람 요셉은 ‘너무도 놀랍고, 두렵고, 참혹하게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생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들의 밑바탕 ‘삶의 의지와 숨통’을 끊었다.
“요셉이 이집트제국 경계 이 끝으로부터 저 끝으로까지 도시들로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옮겼다.”
인류종교․문명사에서 ‘꿈의 사람 요셉처럼 잔인하고 가혹하게 일처리를 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본문읽기에서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자기 땅을 빼앗기고 온 가족이 함께 파라오의 채무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땅으로부터 뿌리 뽑혀 쫓겨나야만’ 했다. 이제는 속절없이 ‘떠돌이 농노신세’로 떨어졌다.
이집트제국 경계 이 끝으로부터 저 끝으로 까지
모르면 몰라도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가 ‘온통 생난리를 쳐야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이 ‘그 땅에서 뿌리 뽑혀 자기 삶을 해체 당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 땅에서 뿌리 뽑혀 쫓겨난 농투성이들에게 남은 것은 ‘떠돌이 농노인생’뿐이다. 실제로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에서 ‘꿈의 사람 요셉이 끝판까지 숨겨놓았다가 내어놓은 음모와 술수’가 바로 이것이다. 오롯이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떠돌이 농노로 만드는 것’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끝판 생의 저항의지와 숨통을 끊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노동하는 노예인간’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이토록 참혹하게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떠돌이 농노집단’은 없었다. 성서 속에서 사례를 찾는다면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의 경우’이다.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후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시리아 땅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물론 한국의 성서독자들이라면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민족역사’을 기억할 것이다. 구소련 스탈린 지배체제에서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참혹한 역사상황’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독자들은 요셉이야기를 통해서 고대 이집트 문명의 ‘피라미드 불가사의(不可思議)’를 너끈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땅으로부터 뿌리 뽑혀 나온 떠돌이 농노들’은 언제어디서든 ‘파라오의 욕망에 따라 쓰이는 노동기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원전 2천6백 년대 이집트 파라오 쿠푸는 ‘매일 2만5천명을 동원해서 20여 년 동안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두말할 필요도 없이 본문읽기에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은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가장 참혹한 노예세상’이었음이 틀림없다.

'21세기 성서읽기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 예수는 왜, 다윗왕조신학의 내림메시야 신앙을 거부했을까? (0) | 2025.12.11 |
|---|---|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은 ‘시대의 메시아’인가? (0) | 2025.11.27 |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 예수의 십자가 행동 (0) | 2025.10.13 |
| 성서, 어제와 다르게 읽기 -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사법정의’ (0) | 202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