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신앙』/희년신앙 읽기

초대받은 사람들의 잔치참여 거부와 얼토당토않은 핑계거리들

희년행동 2025. 8. 15. 15:12

초대받은 사람들의 잔치참여 거부와 얼토당토않은 핑계거리들

 

이와 관련하여 비유이야기꾼 예수는 비유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이 늘어놓는 말도 안 되는 잔치참여거부의 변명들을 하나하나 까발린다. 예수가 초대받은 사람들의 큰잔치참여 거부의 속내를 까발리는 말을 내 뱉을 때마다 청중들 사이에서는 탄식과 웅성거림의 속엣 말들이 들끓어 올랐을 것이다.

 

첫 번째 사람이 그 종에게 말했다. ‘나는 밭을 샀소. 그러니 그 밭을 보러 가지 않을 수 없구려. 청컨대 당신은 나를 용서하시오.’”

 

이미 밭을 샀는데, 그 밭을 보러가지 않을 수 없다니? 고대 농경사회에서 모든 생산수단의 밑바탕은 오로지 땅 뿐이었다. 누구든지 남의 밭을 사들이면서 그 밭에 대해 이모저모 따져보고 판단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큰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의 잔치참여 거부 핑계꺼리야말로 큰잔치비유 청중들을 크게 놀라게 했을 것이다. 어이없어서 혀를 끌끌 차게 했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 때문에 큰잔치에 초대 받은 첫 번째 사람의 입을 빌려서 어이없는 잔치참여 거부의 핑계거리를 늘어놓아야 했을까?

이때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은 이런 질문을 통해서 얼마든지 큰잔치비유에 숨겨진 신앙은유들을 찾아내거나 상상할 수 있다. 사실 유대인들의 옛 조상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전통에서 땅은 결코 개인이 사고 팔수없었다. 왜냐하면 땅은 야훼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서의 밑바탕은 이집트 파라오 노예제국으로부터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이다.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는 히브리들의 정의와 평등 공동체사회에서 신앙과 삶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나아가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로써 정의와 평등 공동체세상의 밑바탕은 오롯이 땅은 야훼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옛 히브리의 후손으로써 희년신앙 토지정의에 따라 땅을 사유재산처럼마음대로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라도 땅 없이는 하나님과 하나로 창조생명생태계의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대사회에서는 직접 땅을 가꾸는 농부로 살아가든, 떠돌이 목축을 하든, 도시 소상공인으로 살아가든 땅에 기대지 않고는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사회에서는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토지정의가 더욱 더 귀하다. 땅이 있어서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온전한 생명살이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땅은 거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문명도, 물건도, 상품도 아니다. 그래서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는 사유재산이 아니다. 땅은 세세토록 인류가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지 공공성제도야말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핵심내용이다.

이렇듯이 예수는 큰잔치비유에서 초대받은 첫 번째 사람의 입말을 빌려 천만 뜻밖의 만찬참여 거부와 터무니없는 핑계거리를 늘어놓는다. 그럼으로써 로마제국체제에 기생해서 기득권을 누려온 유대종교사회경제 엘리트계층의 반 희년신앙 행태를 꾸짖는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야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볼모로 삼아서 부와 권력을 누려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계층의 삶의 태도를 꼬집고 조롱한다. 예루살렘성에 거주하면서 갈릴리와 유대 온 땅에서 상업영농 또는 기업영농으로 부를 쌓아올리는 대지주들의 삶을 트집 잡고 따진다. 예수는 큰잔치에 초대받은 첫 번째 사람의 잔치참여 거부와 핑계를 통하여 로마제국체제 1%내부자들이 땅을 독점하고 부를 쌓는 피라미드 약탈경제의 실체를 은근슬쩍 까발린다.

이제 비유이야기꾼 예수는 내친김에 큰잔치에 초대받은 두 번째 사람의 입을 빌려서 비유의 청중들이 듣기에도 허풍스러운 잔치참여 거부의 두 번째 핑계거리를 늘어놓는다.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소.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청컨대 당신은 나를 용서하시오

 

두 번째 사람은 큰잔치참여 거부에 대해 핑계를 대면서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소라고 허풍을 떤다. 겨릿소 다섯 쌍을 샀다는 말은 당장에라도 밭을 갈 수 있는 일소 열 마리를 한꺼번에 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이미 부리고 있는 겨릿소들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큰잔치참여를 거부한 두 번째 사람은 대지주였음이 분명하다.

이렇듯이 대지주로써 두 번째 사람이 굳이 새로 산 겨릿소들을 손수 부려 보러 가야겠다며 잔치참여를 거부하는 것은 큰잔치 주인을 모욕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만찬은 저녁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큰 잔치에 초대받은 두 번째 사람은 낮에 자기 할 일을 하면 그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시대 유대 땅에서라면 대다수의 자유농민들이 겨릿소 한 쌍을 부리는 것으로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이 자유농민들에 의한 자작영농이야말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정의평등 공동체에 딱 걸맞은 영농행위였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큰잔치비유에서 세 번째 사람은 장가들었다는 핑계를 대며 아예 미안하다 또는 용서해 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장가들어 아내를 맞이했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갈수 없소.”

 

예수의 비유이야기의 유대인 청중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결혼하고 일 년이 지나지 않은 남자들을 전쟁터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지역 소제국주의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 히브리들의 정의평등 공동체세상을 건설하고 확장해 나가기 위한 사회공동체 배려였다. 왜냐하면 히브리들의 정의평등 공동체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가정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내는 것이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이야기의 청중들은 장가를 갔기에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세 번째 사람의 얼토당토 않는 핑계거리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