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예수의 비유』

한 밤에 찾아온 친구비유 -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세상,서로에게 빚지는 세상,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세상,민중 정의 세상,민중 생활 네트워크, 대안공동체를 위하여!

희년행동 2022. 7. 11. 22:00

한 밤에 찾아온 친구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세상,

서로에게 빚지는 세상,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세상,

민중 정의 세상,

민중 생활 네트워크, 대안공동체를 위하여!

누가복음 11:5-8

 

읽기-1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친구를 두었는데, 그 사람이 한밤중에 친구에게 가서 예컨대, 그 사람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치자.

친구야, 내게 빵 세 개만 빌려 주게나.

내 친구가 길을 가다가 내게 들렀기 때문일세.

하지만 나는 길을 가던 그에게 내어놓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네!“

그 친구가 집 안에서 대답하여 말할 것이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이 잠겨 졌다네.

더군다나 내 아이들도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내가 자네에게 빵을 주려고 일어날 수는 없네그려.“

 

읽기 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만약 집 안에 누워있는 그 사람이 자기 친구라는 것 때문에 일어나서

친구에게 주지 않을 거라 해도,

친구의 부끄러워하지 않는 떳떳함 때문에라도,

그 사람이 일어나서,

친구가 필요로 하는 만큼,

친구에게 내어 줄 것이다.“

 

 

낱말풀이

 

* 예컨대(가정하여) 이렇게 말했다 치자 : 에이페 επ가정법

* 빌려 주게나 : 크레손 χρσόν → 크라오 χράω 빌리다 크라오마이 χράομαι 필요하다 크레마(단수) χρμα 필요와 쓰임 크레마타(복수) χρήματα 재산, 자본

* 나를 괴롭히지 말게 : 메 모이 코푸스 파레케 Μή μοι κόπους πάρεχε

* 부끄러워하지 않는 떳떳함 : 아나이데이안 ναίδειαν

* 친구가 필요로 하는 만큼 : 호손 크레제이 σον χρζει

 

들어가는 말

 

지난 2017IMF 구제금융 20주년이 되는 때에 “IMF 키즈의 생애라는 책이 나왔다. 기자출신 안은별 작가가 IMF 외환위기를 전후해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회초년생 일곱 명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일곱 명이 모두 집안형편도 다르고,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살아온 삶의 내용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공통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삶에 대한 불안이다. 그런데 그들이 느끼는 삶에 대한 불안은 그들 자신의 인생과 그들의 가족에게 전이되고, 우리시대의 사회공동체에 고스란히 투영 된다.

실제로 IMF 구제금융체제는 우리사회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IMF 구제금융 이후, 우리사회는 속절없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 독점 금융자본경제 체제로 전환 되었다. 21C 대한민국은 완전한 신자유주의 시장국가이고, 기업국가이며, 독점재벌·독점관료경제 국가이다. 이렇듯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체제에서는 단 하나의 경제모토(motto)만 있을 뿐이다.

모든 이익을 사유화하고 모든 손해를 사회화 하라!”

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사회의 모토는 지금 우리가 생생하고 처절하게 겪고 있는 현실상황그대로이다. IMF 외환위기 이전, 우리사회의 대부분의 가구들에서는 많든 적든 형편에 따라 은행예금적금들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기업들은 대부분 부채를 지고 있었다. 삼성 등, 재벌기업이라도 부채가 많았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이후에는, 몇몇 독점재벌대기업들이 우리사회의 모든 부를 몰아서 쌓아놓고 있다. 손에 꼽을 만한 몇몇 독점재벌대기업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천문학적인 돈을 쌓아놓고, 이 돈들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서민 가계들은 1,500조원이 넘는 감당할 수없는 가계부채를 지고, 너나없이 채무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가 해결해야만 하는 핵심과제는 양극화문제이다. 우리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양극화문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있다. 직업, 소득, 자산, 교육, 취업 등, 우리사회의 정치경제문화종교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가 세계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너도 나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으스대던, 수많은 중산층 가장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다. 이제, 대다수 서민들은 빈곤층이다. 서민들이 붙잡고 오를 중산층을 향한 사다리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몇몇 독점재벌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등,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말하기조차 멋쩍은 임금노예들은 상류계층으로 오르려는 욕구를 포기한지 오래이다. 그저 21C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에서 자신들의 한치 앞도 장담하지 못하는 고액 임금노예로써의 운 때를 감지덕지할 뿐이다.

IMF 외환위기 2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의 서민들에게는 한숨과 눈물조차 말라 비틀어진지 오래다. 눈을 비벼 뜨고 있는 순간에는 단 일분일초도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이 땅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졸업 때까지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를 학습한다. 태어나서부터 자라고, 성인이 되어 경제활동을 하는 온 생()이 생존경쟁 전쟁터이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체제에서는 단 한차례라도 실패하면 평생을 가난과 채무노예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눈뜨면 일어나서 죽기 살기로 경쟁하고, 피투성이 되어서야 눕고, 피투성이로 일어나, 또 싸워야 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 이 땅에서 발 딛고 사는 모든 이들이 삶으로 학습하고 경험하는 생()의 현장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이어야 할까? 21C 우리 시대 상황에서 교회는 결코 긍정적인 답을 내어 놓지 못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교회는 태생부터 친일재벌친미군사독재 지배체제의 내부자였다. 21C 이르러서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의 맨 앞장 길 놀이패를 자처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의 승리자로써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독단하는 행태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선동 한다. 교회가 스스로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체제에 기생하여 대형화와 독점화를 이루고, 부와 권력을 쟁취하며, 이를 세습한 후 사유화한다.

그러나 이제, 21C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체제로는 우리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가 없다.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 이데올로기로는 사회 양극화에 더해서 생태환경 파괴, 노령화와 노인빈곤, 인구절벽 문제 등, 우리사회 미래의 절망들을 양산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변혁해야 할 것인가? 지금의 독점재벌독점대기업독점관료 기득권세력들이 선전선동 하는 우리 다시 한 번 힘을 냅시다따위로는 새로운 변혁이 불가능하다. 무한성장무한개발무한소비의 자본주의 탐욕경제정복경제로는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이루어낼 수 없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체제의 대안세상,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우리의 삶의 마당을 옮겨가야 한다. 너와 나 우리가 서로 기대어 사는 공동체세상,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의 변혁이 절실하다. 그러나 21C 한국교회 신앙 행태로는 아예 싹수가 노랗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제, 예수의 한 밤에 찾아온 친구비유에 기대어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본문비유를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길을 찾아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세상,

서로에게 빚지는 세상,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세상,

민중 정의 세상,

민중의 생활 네트워크, 대안 공동체세상을 위하여!

 

이끄는 말

 

본문비유는 유대종교사회 전통으로써 환대(歡待)신앙을 주제로 한 비유일 텐데,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저자는 본문비유를 예수가 가르쳐준 주기도문 본문에 덧붙여서 기도에 대한 예화로 사용했다. 이렇게, 누가복음 저자는 본문비유를 기도에 대한 예화로 사용하면서 비유의 끝부분에 길게 기도에 대한 설명까지 늘어놓았다.

구하라. 그러면 그가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리하면 그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물론, 예수는 제자들에게 구하고 찾는 기도를 늘 강조해 왔으리라. 실제로, 구하고 찾는 기도에 대한 너무도 유명한 누가복음의 위 문장은 마태복음 77절에서도 간결한 단절어로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구하고 찾는 기도는 복음서 안에서 여러 가지 다양하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예수는 한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를 구하고 찾는 기도의 예화로 이야기 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누가복음 저자와 누가복음 신앙공동체, 또한 초대교회의 비유읽기와 해석일 뿐이다. 예수의 한 밤에 찾아온 친구비유구하고 찾는 기도의 예화로만 읽고 해석하는 것은 비유를 통하여 예수가 드러내고자 하는 신앙은유를 하찮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예수는 본문비유에서 유대인 청중들을 비유의 실제상황 속으로 끌어들여서 청중들을 모욕하고 화나게 한다. 그럼으로써, 비유 이야기꾼인 예수 자신과 비유의 청중들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이 일어나게 만든다. 그 갈등과 긴장이 본문비유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비유 이야기의 끝맺음을 매끄럽지 않게 만든다. 그로인해 비유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청중들 사이의 갈등과 긴장의 여운은 가시지를 않는다. 이렇게 예수의 비유 이야기의 흐름과 상황 속에서 예수의 한 밤에 찾아온 친구비유가 불러일으키는 신앙은유가 세차게 솟아 흐른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비유의 청중과 갈등하고 긴장하며 부자연스럽고 매끄럽지 않는 비유를 이야기해야 했을까? 예수는 유대 종교사회공동체 안에서 야훼신앙의 핵심내용인 환대신앙이 시나브로 사라져 메말라가고 있음을 비유의 청중들에게 경고하려고 한다. 예수는 본문비유에서 날카롭고 익살맞은 입말로 야훼신앙 핵심전통인 환대신앙의 현실을 증언한다. 그러기위해 예수는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비유에 대한 진실증명으로써 청중들의 현실적인 삶의 상황을 비유로 꾸며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청중들의 현실세계에 맞서는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신앙은유를 전달한다.

이점에서 예수의 한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에는 구하고 찾는 기도의 예화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은유들이 사무쳐 있다. 그것은 바로 본문 비유이야기의 흐름과 사건 상황으로 인해 예수와 청중사이에서 생겨난, 좀처럼 가셔지지 않는 갈등과 긴장의 여운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세상, 서로에게 빚지는 세상, 그래서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세상, 민중정의 세상, 민중 생활네트워크 세상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가능성이다.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 일으켜온 새로운 환대신앙 은유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분비유의 전통적인 현실배경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 전통으로써 환대신앙이다. 환대신앙은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를 중심으로 마음을 쓰고, 친절을 베푸는 유대 종교사회공동체의 행동신앙이다. 환대는 나그네가 주인의 집 그늘에서 나그네 자신의 필요와 쓰임을 발견하도록 배려하는집주인의 생활실천 신앙이다. 나그네의 외로움과 고통을 함께 공유하는 주인의 공감과 참여와 연대의 신앙이다. 나아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환대신앙은 나그네와 주인, 친구와 친구, 사람과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에서 이루어지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신앙이다.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 공유하며, 서로의 삶에 기여함으로써 서로의 사이를 너그럽게 잇고 엮어 나가는 생활관계 신앙이다.

사실, 환대는 메소포타미아문명 지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생활문화이기도 하다. 또한 환대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치공동체의 핵심내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세상, 서로에게 빚지는 세상그럼으로써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세상은 고대 그리스의 민중봉기 전통 안에서 아주 오래 된 민중 정의(正義)’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환대야말로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정의와 평등세상을 위한 야훼신앙의 핵심내용이다.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신앙 안에서, 환대는 매우 중요한 신앙실천 덕목이었다.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환대하고 보살피는 것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해방과 자유, 정의 평등, 생명평화 야훼신앙에 걸맞은 신앙실천 행동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본문비유를 통하여 유대 종교사회공동체 안에서 환대신앙이 시나브로 잊혀져가는 상황에 맞서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환대신앙 은유를 드러내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본문비유의 이야기의 흐름은 유대인 청중들에게도, 21C 우리시대의 예수신앙인들에게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마음을 껄끄럽고 불편하게 하며 생각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이라면 여행 중에 먹을 것이 떨어져서 비록 한 밤중이지만 친구를 찾아가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한낮에 여행을 다닐 수 없을 만큼 해가 뜨겁다. 그러니 한낮의 뜨거운 해를 피하여 밤에 여행을 다니는 일이 흔하다. 또한 그렇게 한 밤에 여행하는 가운데 찾아온 친구에게 나눠줄 빵이 없어서 다른 친구에게가 가서 빵을 구하는 것도 크게 거리낄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오랜 신앙역사 속에서 환대신앙은 야훼신앙 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환대야 말로 생활 속에서 크게 장려해야할 신앙실천 행동이었다.

그런데 본문비유 이야기의 흐름은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환대신앙 전통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청중들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한다. 비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이유를 찾아보자.

이와 관련하여 본문비유에서는 어떤 사람이 여행 중에 먹을 것이 떨어져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나눠줄 빵이 없었던 터라, 미안하고 쑥스럽지만 다른 친구에게 찾아가 빵 세 개를 달라고 요청한다.

친구야, 내게 빵 세 개만 빌려 주게나. 내 친구가 길을 가던 중에 내게 들렀기 때문일세. 하지만 나는 길 가던 그에게 내놓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네.”

이것이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환대신앙의 핵심이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빚지고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서로에게 빚지는 세상, 그래서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세상이 민중 정의 세상이다. 민중네트워크 대안 공동체세상의 핵심내용이다. 본문비유의 유대인 청중들도 마땅히 그럴 수 있다. 여행길에 양식이 떨어져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또 다른 친구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누구든 그 사람의 친구라면 빵 세 개를 내어주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비유에서 유대인 청중들의 이러한 뜻은 무시당하고 짓밟힌다. 본문비유에서는 한 밤에 친구를 찾아간 사람이 문전박대를 당한다. 집주인인 친구가 집안에서 문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문 밖에 있는 친구를 향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이 잠겨 졌다네. 더군다나 내 아이들도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내가 자네에게 빵을 주려고 일어날 수는 없네그려.”

이러한 예수의 비유이야기의 흐름은 유대인 청중들의 환대신앙 전통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다. 환대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절대로 잠겨 있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의 환대신앙은 종교교리가 아니라 생활신앙이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 핵심내용으로써 대대로 학습하고 실천해야 할 신앙실천 덕목이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다면 깨워서라도 환대신앙의 전통을 학습시켜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여행을 하다가 먹을 것이 떨어져 자기를 찾아온 친구를 위해 한 밤중이지만 다른 친구를 찾아 나선 어떤 사람을 매몰차게 문전박대 시킨다. 그러면서 아무런 결말도 없이 비유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이렇듯이, 예수가 비유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감으로써, 의도적으로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마음 불편하게 하고 화나게 했으리라. 또한 그럼으로써 예수는 이러한 비유 이야기의 흐름을 통하여 스스로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증명했으리라. 실제로, 예수는 본문비유 이야기를 처음시작부터 끝맺음까지 촌철살인 가정법문장으로 이어간다.

 

예컨대, 그 사람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치자.

친구야, 내게 빵 세 개만 빌려 주게나.

내 친구가 길을 가다가 내게 들렀기 때문일세.

하지만 나는 길을 가던 그에게 내어놓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네!“

그 친구가 집 안에서 대답하여 말할 것이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이 잠겨 졌다네.

더군다나 내 아이들도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내가 자네에게 빵을 주려고 일어날 수는 없네그려.“

 

이렇게, 예수는 가정하여 비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으로써, 예수시대의 유대 종교사회공동체 안에서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환대신앙의 현실을 꼬집고, 비꼬며, 조롱한다. 예수는 익살맞고 날카로우며 매우 현실적인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아예, ‘당신들 사이에서 환대신앙은 끝장난 것 아니었어라고 비유이야기를 끝맺는다.

이러한 예수의 한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 이야기의 끝맺음은 청중들을 실망과 분노로 들끓게 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냐, 아냐, 그거 아니란 말이오! 우리 친구들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단 말이오.”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흥분하여 일제히 소리쳤을 것이다. 실제로, ‘잃은 양 비유에서처럼 예수의 비유 어법상 너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라고 말문을 트는 문장 끝에는 항상 ‘~ 하지 않았겠느냐라는 물음으로 끝을 내게 마련이다. 그럼으로써 청중들의 아니오, 아니오또는 옳소, 옳소라는 결의와 여운을 남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본문비유에서 예수는 비유의 청중들을 의도적으로 모욕하고 화나게 하는 말들만 늘어놓고 아무 결론도 없이 짧은 비유를 끝맺는다. 그럼으로써, 이야기꾼인 예수자신과 청중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갈등과 긴장의 여운이 청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들의 삶의 마당을 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 현장을 주목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예수의 한 밤에 찾아온 친구비유의 환대신앙 은유들을 새롭게 확대 재생산하여 널리 퍼뜨린다.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세상, 서로에게 빚지는 세상,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세상, 민중 정의 세상, 민중네트워크 대안 공동체를 위하여!”

이점에서, 누가복음 저자가 본문비유에 덧붙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읽기-2’의 내용도 다시 새롭게 재해석 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만약, 집 안에 누워있는 그 사람이 자기 친구라는 것 때문에 일어나서

친구에게 주지 않을 거라 해도,

친구의 부끄러워하지 않는 떳떳함 때문에라도,

그 사람이 일어나서,

친구가 필요로 하는 만큼,

친구에게 내어 줄 것이다.“

 

누가복음 저자는 친구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고 예수의 비유이야기가 끝난 이후에까지 붙들어 놓는다. 그러고는 친구의 부끄러워하지 않는 떳떳함 때문에라도 친구가 필요로 하는 만큼, 그 사람이 친구에 내어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제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기득권세상에서는 친구라는 것 때문에 이웃과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는 떳떳함으로 요구해야 한다.

친구야, 내게 빵 세 개만 빌려주게나. 내 친구가 길을 가다가 내게 들렸기 때문일세.”

나아가, 이제 21C 우리 시대에 이르러는 이 요구가 폭력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기를... 이 요구에 대해 폭력으로 거부하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맺는 말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는 무한경쟁무한독점무한축적무한소비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 속에서 우리의 몫이상의 양식을 허비함으로써,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상을 쌓음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생명의 몫을 빼앗는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우리는 우리시대의 불의한 장물아비로써 우리 이웃들의 쓰임과 필요를 빼앗아 그들에게 빚을 지우는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경쟁과 거래의 대상으로 여기고, 서로에게 빚을 지우며, 사익과 착취를 위한 종속관계를 구조화하는 일에 골몰한다. 그로 인해 가난한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를 지고 절망의 나락에 빠져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의 곳간에 쌓여 넘치는 장물들, 곧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나의 쓰임과 필요를 되돌려주지 않고 쌓아놓으면, 그것이 사유재산, 독점자본이 된다. 한마디로, ‘재물 사유자산 - 독점자본의 실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쓰임과 필요를 되돌려주지 않고 쌓아서 독점사유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 민중들은, ‘- 다른 사람의 쓰임과 필요을 되돌려주지 않고 쌓아놓는 것이 불의(不義) -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고대 그리스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깨달음은 고스란히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으로 전이(轉移) 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죄 사함이라는 헬라어 용어는 빚 탕감과 동의어이다. 주기도문은 이러한 신앙진실을 명명백백하게 증언한다.

당신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빚들을 탕감하소서!”

이점에서 주기도문의 핵심내용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에게 빚 탕감을 해준 것처럼이다. 주기도문은 -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쓰임을 끌어 모아 쌓아둔 우리의 불의한 사유재산을 모두에게 되돌려 주었으니,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워 그들을 채무노예로 만들었던 우리의 죄악을 용서 하소서 - 라고 비는 기도이다.

이렇듯이,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세상, 서로에게 빚지는 세상,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세상서로에게 진 빚을 되돌려 주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이야말로 민중의 정의세상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민중네트워크 대안세상이다. 그러므로 21C를 사는 우리도 언제든, 우리의 빚, 우리의 쓰임과 필요를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며 산다. 우리의 노동을 통해서, 우리의 직업과 우리의 달란트를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 빚, 우리의 쓰임과 필요를 되갚아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