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예수, 자화상을 그리다.
주류세상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발칙한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10: 25-36
읽기 -1
그런데 보라. 어떤 율법학자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말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행해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했다.
“율법에 뭐라고 쓰여 있소?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시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너는 너의 온 마음을 다하고, 너의 온 생(生)을 다하며, 너의 온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또한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옳게 답했소. 그것을 행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살 것이오.”
그런데 율법학자는 스스로 의로운 체 하고 싶어서 예수에게 말했다.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읽기 – 2
예수가 되받아서 말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를 벗기고 때려서 반쯤 죽여서 내버려 두고 갔다.
그때 마침 우연히 어떤 제사장이 그길로 내려오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어떤 레위인도 그곳에 가까이 이르러 와서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에게로 와서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가까이 곁에 와서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강도만난 사람의 상처들을 싸맸다. 그런 후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자기 가축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 이튿날에 사마리아 사람이 두 데나리온을 꺼내서 여관주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만일 얼마라도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당신에게 갚겠소.“
읽기 – 3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일 거라고 생각하시오?”
그러자 율법학자가 말했다.
“강도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가 율법학자에게 말했다.
“가시오. 당신도 그렇게 하시오.”
낱말풀이
* 상속하다 : 클레로노메소 κληρονομήσω
*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 티스 에스틴 무 플레시온 τίς ἐστίν μου πλησίον
* 어떤 사람이 강도들을 만났다 : 페리에페센 περιέπεσεν, 페리 περί 주위에 + 핍프토 πίπτω 떨어지다
* 반쯤 죽여서 : 헤미타네 ἡμιθανῆ, 접두어 헤미 ἡμι 반쯤 + 트네스코 θνήσκω 죽다
* 피하여 지나갔다 : 안티파렐텐 ἀντιπαρῆλθεν, 안티 ἀντί 건너편 + 파렐코마이 παρέρχομαι 지나가다
* 불쌍히 여겼다 : 에스플랑크니스테 ἐσπλαγχνίσθη
* 돌보아 주었다 : 에페멜레테 ἐπεμελήθη, 에피 ἐπί 위에 + 멜로이 μέλομαι 관심 갖다
* 당신도 그렇게 하시오 : 쉬 포이에이 호모이오스 σύ ποίει ὁμοίως
들어가는 말
수면제 모으던 철수씨, 지금은 어떻게 됐나?
6월 중순 초여름, 철수씨(가명)는 고개를 떨 구고 온갖 상념에 잠겨 대전역으로 가는 인도를 걸었다. 오늘이 디데이, 철수씨는 걸어가면서 수시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비닐봉지에 담긴 수면제를 움켜쥐곤 했다. 철수씨는 역 앞 큰 도로를 건너 교외로 나가는 511번 시내버스를 탈 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초여름 한낮 햇살이 너무나 따갑다. 철수씨는 어떨 결에 역 앞 지하도로 들어가 지하철광장으로 내려섰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지하철광장으로 내려온 그는 뚫어져라 한곳을 바라보았다. 철수씨가 눈길 주고 있는 곳에서는 여러 민간단체들의 활동들을 홍보하는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 철수씨의 눈에 들어와 꽂힌 것은 ‘사회적협동조합민생네트워크새벽’(이하‘새벽’)의 파산면책 무료상담 홍보포스터였다. 철수씨는 가던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이튼 날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운 철수씨는 집을 나서자마자 새벽 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철수씨는 상담센터 민생상담 활동가와 마주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철수씨는 어린 시절 수도권의 한 작은 도시에서 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일찍이 어린 나이였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고, 그는 홀어머니 품에서 외톨이로 자랐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재혼했다. 그러면서 철수씨는 의붓아버지네 집에서 의붓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하지만 철수씨는 의붓아버지와 형제들 사이에서 애틋한 가족애를 느끼지 못했다. 또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의붓형제들은 그를 따돌리고 백안시했다.
그러던 중 철수씨가 중학생일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는 어린 나이에 주변에서 아무런 피붙이도 찾아 볼 수 없는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 무렵에 철수씨는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다. 그러면서 의붓 식구들과의 모든 가족관계가 단절되었고, 외톨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용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가게 점원 노릇도 하고, 식당 잔심부름 일도 하며, 부평초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철수씨는 어깨 너머로 자동차정비 일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철수씨는 전국을 떠돌며 작은 카센터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흘러 흘러서 부산까지 내려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부산에서 자동차정비공장의 정식직원으로 취업을 했다. 그는 자동차정비공장 차량도장 부서에서 전문적으로 차량도장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철수씨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기술도 배우고 돈도 좀 모으게 되었다. 나아가 미래를 약속한 여자 친구도 만났다. 그러면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철수씨는 자기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동안 모아 놓은 저축과 카드대출 등 여기저기서 작은 빚들을 내어 자동차 도색 업체를 차렸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여자 친구도 삼천 여 만원을 투자했다.
철수씨는 부산지역의 작은 카센터를 돌며 영업을 했다. 그에게는 생전 처음해보는 영업활동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자기 사업이었다. 철수씨는 나름대로 친절하고 진정성 있는 영업활동을 했고, 온 힘을 다 쏟아 사업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업은 처음부터 잘 되었다. 오래지 않아 단골거래처가 생겨났고, 굳이 영업활동을 하지 않아도 일감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았던 시절은 잠시뿐이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 한파가 몰아치면서 철수씨의 사업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카센터 업계 관행상 외상거래가 많은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여러 거래처 카센터들이 문을 닫고 소식을 끊었다. 그 바람에 일감도 끊기고, 외상으로 깔아놓은 차량도색 대금도 떼이곤 했다. 그런 일들은 한 달, 두 달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횟수가 늘어나고 손해도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큰 밑천 없이 사업을 시작한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동차 도색공장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철수씨가 자동차 도색공장 사업을 접고 남은 돈으로 빚을 정리하고 보니, 자신과 여자 친구의 투자금은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자 친구와의 관계도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내 여자 친구마저 그의 곁을 떠났다. 철수씨는 또다시 혈혈단신으로 전국을 떠도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길로 철수씨는 반 노숙생활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어쩌다 일용노동을 하기도 하고 구걸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몇몇 중한 질환들을 앓게 되었다. 하지만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낸 채, 제때 치료 받아야 할 시기를 놓쳤다. 그러는 중에 그는 우연히 대전으로 와서 머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수씨는 길거리에서 쓰러졌다. 119 구조차량이 달려와서 철수씨를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어가 입원을 시켰다. 그렇게 철수씨는 충남대학병원에서 수술 및 여러 가지 치료들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1,000만 원이 넘는 병원비가 발생했고, 추후 계속 통원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철수씨는 급한 대로 신용카드 대출을 받아 병원비로 충당했다. 앞으로 몸이 나아지면 건축노동이라도 해서 카드빚을 메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철수씨의 질환은 몇 번의 수술과 오랜 병원치료에도 불구하고 별 차도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예전처럼 건축현장 노동 등 힘든 일용노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카드빚만 늘어났다. 철수씨는 당장의 생계마저 막막한 가운데 극심한 카드빚 독촉에 시달렸다. 그는 불안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가운데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다.
도저히 살아갈 길을 찾지 못한 철수씨는 자살을 결심했다. 자살을 결심한 그는 두 달여 동안 병원과 약국을 드나들며 수면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충분한 수면제가 모아졌고, 자살을 결행할 날짜까지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 되어, 그는 511번 시내버스를 타고 미리 봐둔 교외 한적한 장소로 가려고 대전역 앞을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철수씨는 운명처럼 ‘새벽’의 상담활동 홍보부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수면제를 모으던 철수씨는 ‘새벽’의 상담을 통하여 먼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안내 받았다. 철수씨는 주민자치센터에 수급자신청을 하게 되었고 지자체의 실사를 거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법원에 개인파산면책을 신청한 후 파산면책을 받았다. 현재, 철수씨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금융자본경제 체제에서
개인파산․면책은 도덕적 해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이고 생존 권리이며 새로운 출발로써
사회․공동체경제 기술(技術)의 문제이다.
IMF이후, 금융자본경제 체제에서 기업은 생존이 걸린 상황에 처해 회생도 하고 파산도 한다. 우리는 법적 인격을 부여받은 기업들이 회생을 하거나 파산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과 피를 가진 진짜사람은 삶과 죽음이 갈리는 상황에서 파산을 하거나 회생신청 하는 것을 도덕적 해이라고 욕할까? 살고 죽는 위기상황에서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빚이 삼사 대 후손들에게까지 상속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마땅한 일일까?
금융자본경제 체제에서 경제활동을 하다 빚을 지게 되고 파산에 이르게 되는 상황은 기업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니,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가난한 서민들 일수록 국가경제 위기와 사회 환경변화의 어려움과 개인의 불행을 버텨내기가 더더욱 힘들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일상적인 구조조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거나 하루벌이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들 중 일부는 영세 자영업자가 되어 거대기업 상권과 피 터지는 생존경쟁에 내몰린다. 이렇게 소득과 경제상황의 양극화상황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IMF와 같은 사회․경제위기를 만나면 속절없이 파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적 문제이거나 개인의 무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21C 독점금융자본이 불러들이는 지구촌 금융위기 속에서 수많은 기업들의 파산이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는 것처럼, 개인의 파산상황 역시 사회적 책임의 문제이다.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치여 절망과 고통의 나락에서 허덕이는 개인채무자에게 공권력과 사법권을 동원하여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열하고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이끄는 말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예수의 비유이야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인터넷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검색하면 줄줄이 이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딸려 나온다. 하나같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착한행실을 본받자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교회에서나, 세상 속에서나 이웃사랑의 아주 좋은 예화이다. 나아가 주류사회 언론들은 때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비교될 만한 사회․정치적 의인․영웅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용감하고 착한 행동들을 선전선동 한다. 왜냐하면,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이들이 ‘의롭고 영웅적인 행동을 용감무쌍하게 실천해내는 이야기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우리시대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야말로 모든 이들에게 매우 감동적이고 훌륭한 삶의 예화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도 그 시대의 주류사회의 이야기꾼들처럼 사회․정치적 의인․영웅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소개한 것일까? 예수는 진짜로 유대 종교․사회의 이웃사랑의 예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이야기했을까? 물론, 예수는 지중해 세계의 수많은 제국주의 의인․영웅이야기들을 마음속에 헤아리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중해 세계의 손꼽을 만한 종교들과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이르기까지 무슨 종교적 자비와 선행으로, 영성에 대한 본보기로 비유를 이야기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유의 등장인물들과 사건과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이 예수의 비유이야기에 전혀 감동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동보다는 도리어 커다란 반발을 불러 왔을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유대인 청중들에게 전혀 감동을 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 스스로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대한 유대인 청중들의 분노와 반발, 시끄러운 따짐을 충분히 예상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이야기해야 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을 통하여 약탈과 착취와 폭력이 마구잡이로 벌어지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신을 증언하려는 것 아니었을까? 또한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하여 종교․사회 기득권을 누려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배제와 차별을 트집 잡고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에게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맞서는 새로운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럼으로써, 예수는 비유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증언, 주류세상 지배체제에 대한 꾸짖음, 주류세상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대안세상 제안’으로써 예수 스스로의 자화상을 그려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21C 독자들은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읽고 해석할 때 ‘비유 이야기꾼 예수, 강도만난 사람, 강도만난 사람을 지나쳐가는 제사장과 레위인,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 등’ 예수의 비유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분노하고, 반발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을 ‘유대인 청중들의 감정과 생각들’을 헤아려야 한다.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상황과 비유의 청중들의 분노와 반발과 시끄럽게 떠드는 외침을 넉넉히 상상하고, 듣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는 비유의 숨겨진 신앙은유 찾기 제목으로 ‘예수, 자화상을 그리다. 강도 만난 사람을 통하여 주류세상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발칙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비유는 누가복음 저자에 의해 아주 자연스러운 ‘이웃 사랑 본보기 예화’로 꾸며지고 쓰여 졌다. 성서학자들은 본문비유를 누가 자신만의 특수한 문서자료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누가복음 저자는 자신의 신앙의지에 따라 본문비유를 ‘예수의 사랑의 이중계명 가르침’단락 안에서 ‘이웃사랑 본보기 예화’로 사용했다. 나아가 초대교회와 서구 중세교회는 본문비유를 종말론적 메시아 재림신앙 알레고리로 읽고 확대해석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따라서 이제, 21C 독자들로서는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이야기를 예수의 입말 그대로 되살려 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21C 독자들은 누가복음 저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하며, 비유의 참 뜻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할 때, 착한 사마리아 사람비유는 누가복음 신앙공동체와 초대교회의 이웃사랑 본보기 예화로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본문 읽기-1에서 율법사가 예수에게 던지는 질문, ‘선생님, 제가 무엇을 행해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할 수 있겠습니까’이다. 누가복음 저자는 ‘어떤 율법사가 자신의 율법지식과 신학사상으로 예수를 시험하면서 자신을 뽐내려고 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물론, 율법사 내심으로는 이 질문의 정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으로써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따르며, 언제나 정결하고 의로운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날에, 또는 메시아의 날에 모든 죄인들이 심판받고 멸망 받는 가운데 스스로 영광스럽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영접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사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정통신앙이고, 무한한 자부심이며, 자랑이었다.
그래서 도리어, 예수는 율법사의 첫 번째 질문을 통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쳐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실한 하나님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다.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추상적이며 개인적인 신앙독백이 아니다.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되고 증명되어 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이중계명은 교회의 겉모습을 꾸미거나 바깥세상에 교회의 행태를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다. 또한 교회가 갖추어야 할 사회정의와 윤리도덕의 문제만도 아니다.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이중계명은 교회가 바깥세상을 위해 몸으로 봉사하고 물질을 나누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생명의 문제이다. 바로 우리 자신과 교회와 우리의 이웃들의 생명과 구원, 삶의 해방과 자유, 평등과 평화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본문 ‘읽기 –1’에서 사랑의 이중계명을 입으로만 외워대는 율법사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당신이 옳게 답했소. 그것을 행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살 것이오.”
예수의 이 선언을 표현한 헬라어 문장은 ‘이중 명령형’ 혹은 ‘조건 명령형’이라고 한다. “~ 해라. 그래야만 ~ 할 것이다”
이렇듯이, 교회가 이웃사랑을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수 신앙인으로써 우리의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자신의 신앙체험’이 먼저다. 그래야만 온전한 하나님 사랑과 참된 이웃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랑 안에 우리 자신과 교회와 모든 신앙인들의 생명길이 있다. 우리 이웃들의 생명길이 있다. 참으로 그 사랑 안에 우리 모두의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다.
이때 본문 ‘읽기-1’ 끝머리에서 율법사는 퉁명스럽게 두 번째 질문을 한다.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실제로 우리가 섬기고,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이웃이 누구일까? 우리가 참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는 늙으신 부모인가?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부모보다는 자식들을 더 사랑하지 않을까? 아무랬거나, 우리는 가족을 사랑한다. 또한 친족들이나 친척들을 사랑한다. 만약 우리가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나와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우들에게 관심을 갖거나, 그분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을 사람, 같은 직장 동료, 같은 학교 동창 등, 자주 만나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을 좋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율법사는 스스로 의로운 체 하고 싶어서 이 질문을 했다‘고 한다. 사실, 예수시대의 율법사들은 바리새파 출신으로써 유대인들 가운데서 뛰어나게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율법대로 살았다. 매일 세 차례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 안식일을 온전하게 지키고 온갖 절기를 지켰다. 십일조와 또 매 삼 년마다 구제의 십일조를 드렸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도 의롭다고 생각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의롭다고 구별되어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처럼 죄인이나 세리나 창녀,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지도 않고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칭, 타 칭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율법사와 그 율법사의 이웃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뿐이었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이웃들이 많았기에, 율법사는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의 친구임을 내세우는 예수에게 으스대며 질문한다.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저자는 이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화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본문 읽기-2를 꾸며놓았다.
물론,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에 답하는 이웃사랑의 본보기 예화’로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상황과 그 상황에 대응하는 등장인물들의 행태를 통하여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맞서는 대안세상 행동양식을 제안하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을 통하여 로마제국 지배체제 안에서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민중들의 삶의 고통과 절망을 까발린다. 더불어 강도만난 사람의 상황을 피해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태를 통하여 로마제국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체제의 거짓 정의와 거짓 이웃사랑을 낱낱이 꼬집어 들춰낸다.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매여 자기 양심에 벗어난 삶을 사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에 맞서는 대안세상, 새로운 신앙과 삶의 가치관을 제안한다. 이제 이러한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비유 안에 숨겨진 신앙은유를 헤아리며 더 자세히 비유를 읽어보자.
“예수가 되받아서 말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를 벗기고 때려서 반쯤 죽여서 내버려 두고 갔다.”
여기서 예수의 비유이야기는 너무도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예수의 비유의 문맥에 맞게 강도만난 사람의 상황을 풀어서 새기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강도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강도들은 그를 에워싸고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몽땅 빼앗았다. 그리고 그를 마구 때렸다. 그래서 그 사람이 반쯤 죽게 되자 그냥 버려두고 가버렸다.”
이렇듯이, 예수의 비유가 누가복음 저자가 의도한 이웃사랑 본보기 예화가 아니라고 한다면,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메시아 재림신앙 알레고리 해석을 거부한다면,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은 마땅히 예수시대의 유대 민중들의 삶의 상황에 대한 현실 은유이다. 예수시대의 유대 민중들은 로마제국 식민지 주민으로써 당연히 로마제국 지배체제로부터 약탈과 착취와 억압을 당해왔다. 실제로, 예수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만큼 큰 위기 상황에 빠졌던 마가복음 12장에서의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세금논쟁’이야말로 유대 민중들이 당하는 삶의 고통에 대한 현실증언이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제국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을 가져온 AD 70년 예루살렘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세거부’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시대의 유대 민중들은 예루살렘 성전제사 종교로부터 수많은 약탈과 착취와 억압을 당해 왔다. 십일조와 성전세, 예루살렘 성전제사에 바쳐지는 무수한 제물들, 이것들은 예루살렘 종교 엘리트들이 유대 민중들의 삶을 약탈하고 착취하며 억압하는 도구들이다. 심지어 유대 고대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제들이 자기 종들을 동원하여 농부들의 타작마당에서 십일조를 강제징수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본문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은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로마제국과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맞서는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선전선동이다.
이제 비유의 실제상황 속으로 가보자.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까지 거리는 대략 25km라고 하는데, 이 길은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이 여리고 길은 높은 고지대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낮은 요단강가에 자리 잡은 여리고를 향한 내리막길이다. 이 길의 한쪽 언덕에는 수많은 석회암 동굴이 있어서, 그곳에서 강도들이 숨어 쉬면서, 강도질 할 대상을 기다릴 수 있었다. 본문비유에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이 길을 지나다가 강도를 만난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 청중들은 실제와 경험으로부터 오는 의문을 가졌으리라. 도대체 비유에서 여리고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은 누구일까? 유대인이었을까, 아니면 이방인이었을까? 강도를 만난 사람은 왜, 미련하게 혼자서 여리고 길에 나서게 되었을까? 여리고 길은 매우 위험하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이 자주 다닐 수밖에 없는 길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서 여행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여리고 길로 내려가 요단강 골짜기를 따라 갈릴리로 여행을 했다. 또한 더 멀리 다메섹으로까지 여행을 다녔다. 그러나 물론, 예수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사마리아 지역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속으로 ‘유대인이라면 혼자서 여리고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청중들은 비유의 등장인물들과 잇따르는 사건상황이 주는 충격 속에서 강도만난 사람이 유대인 인지, 이방인 인지, 끝까지 궁금증을 버리지 못했으리라. 나아가 만약, 본문 읽기2가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에 답하는 ‘예수의 이웃사랑에 대한 본보기 예화’라고 한다면, 더욱 더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 종교․사회공동체 이웃관계에는 너무도 뚜렷한 계급위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장 → 레위인 →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 오로지 이들 집단만이 온전한 유대 종교․사회공동체로써 참된 이웃관계를 맺을 수 있고, 올바른 혈연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이들 집단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으로써의 자격이 애매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만약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면, 예수의 비유이야기는 유대인 청중들을 일부러 모욕하고 화나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예수는 비유에서 이러한 유대인 청중들의 의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예수는 재빠르게 비유의 청중들이 도저히 이해하거나, 동의할 수 없으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상야릇한 사건상황으로 비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아마도, 예수는 비유의 강도 만난 사람의 정체성을 일부러 흐리멍덩하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윽박지르듯 질문하는 율법사에게, 또한 유대인 청중들에게 ‘온전한 유대인 종교․사회공동체의 이웃관계‘에 대해 대놓고 트집을 잡으며 조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 종교․사회 이데올로기 속에서 율법사와 어울릴만한 이웃은 사제와 레위인과 완전한 이스라엘사람들 뿐이다. 그들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죄인과 창녀와 사마리아인과 이방인과는 완전히 구별된 온전한 유대인들이다. 율법사에게 있어서 예수의 친구들은 그저 적당히 선행이나 베풀고 외면해야 할 대상이지 결코, 이웃이 될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정체성을 흐리멍덩하게 함으로써, 예수 자신에 대한 유대종교․사회 지배체제의 이미지를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흐리멍덩한 정체성 안에 던져 넣어 드러낸다.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에게 강도만난 사람의 흐리멍덩한 정체성과 더불어 예수의 복음운동 공동체군상에 대한 낯설음과 따돌림과 터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율법사나 유대인 청중들이 생각하는 이웃관계와 철저하게 맞서며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나아가 예수는 아예 강도만난 사람의 정체성을 밝히지도 않은 채, 강도만난 사람의 참혹한 상황에 대응하는 ‘유대인 종교․사회 이웃관계’의 차별과 배타성을 공격한다. ‘강도를 만나서 죽어 가는 사람의 참혹한 상황을 통하여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끼리끼리 이웃사랑 행태를 꼬집고 나무란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의 곁으로 제일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체제의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유대인 종교․사회공동체 계급관계의 꼭대기이다. 유대인들의 종교성과 거룩함의 상징으로써 아주 특별히 구별된 사람이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비유에서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 체 멀찍이 피해서 지나간다. 제사장의 이러한 행동은 율법사나 유대인 청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사람이나 들짐승이나 그 시체를 만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사장 성결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죽은 시체에 4큐빗(2.2m) 이내로 접근하면 부정을 탄다. 또한 제사장의 그림자가 시체를 덮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 혹여 바위나 나무그림자가 시체를 덮고 있을 경우 그 그림자 안으로 들어서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비유에서 ‘강도들이 그 사람을 벗기고 반쯤 죽여 놓고 갔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강도 만난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가운데 제사장이 그를 돌봐주는 동안에 그가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제사장은 부정을 타게 되고, 그 부정함을 씻는 기간 동안 제사장 직무를 수행 할 수 없다. 따라서 제사장은 유대인 종교․사회공동체의 정결의무를 저버린 불의한 제사장이 되고 만다. 또 한편으로 비유의 청중들은 이렇게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강도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강도질 하려고 그 사람을 미끼로 남겨놓고 간 것이 아닐까? 제사장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변에서 머뭇거리다가는 제사장조차 제 2의 강도만난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런 사건이 벌어진다면 유대 종교․사회공동체 안에서 정말 큰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을 대하는 제사장의 행태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에 대한 현실 은유이다. 예수는 비유의 강도 만난 사람을 대하는 제사장의 행태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성결법을 조롱한다. 배타적이고 퇴행적인 종교규범으로 인해 사람이 사람다움을 외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를 상징하는 제사장의 행태를 통하여 예루살렘 종교․사회공동체의 헛된 종교율법과 종교윤리를 조롱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람 본연의 양심을 저버리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를 매섭고 세차게 꾸짖는다. 그렇더라도,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아직 예수의 비유의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도리어 강도만난 사람의 흐리멍덩한 정체성과 더불어 비유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예수의 태도에 대해 의심하고 분노하며 불평불만 만 거세게 일었으리라.
두 번째로 강도 만난 사람의 곁을 지나간 사람도 레위인 이다. 레위인 역시 유대인 종교․사회공동체 계급관계의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도록 선택받은 가문이고, 그들 가운데서 제사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도 마땅히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율법과 제사법에 따라 정결한 생활을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레위인도 제사장과 다를 바 없이 강도만난 사람의 곁을 멀찍이 피해서 달아나고 만다.
이쯤에서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유대인 청중들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예수의 비유이야기의 흐름과 사건진행 상황으로 보아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마음에는 불평불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을 저렇게 불의한 사람으로 만들다니, 그리고 레위인 까지.”
그러면서 그들의 불편한 마음을 씻어줄 세 번째 인물의 등장을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유의 청중들은 세 번째 강도만난 사람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누가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당연히 어떤 착한 유대인이다.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유대인 청중들은 다음 등장인물이야말로 마땅히 ‘어떤 착한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세 번째 등장인물이 어떤 착한 유대인이라면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흐리멍덩한 정체성과 더불어 거반 죽어가는 그의 생존문제 마저도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착한 유대인이 와서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을 돌보고 치료해 준다면, 율법사와 유대인 청중들은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될 터였다.
그러나 예수는 비유의 청중들의 이러한 열망을 철저하게 짓밟는다. 그러면서 예수는 놀랍게도 세 번째 등장인물로 사마리아 사람을 내세운다. 어떤 착한 유대인 대신에 유대인들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짐승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킨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율법사와 유대인 청중들은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사마리아 사람은 앞서 등장한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체 지나치지 않는다. 도리어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와서, 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올리브기름을 바른 후 그 상처를 싸맸다. 그런 후에 자기 짐승에 태우고 주막으로 데려가서 돌봐주었다.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경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여기서,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에 대응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공동체에 대한 현실 은유이다. 이와 관련하여 ‘불쌍히 여겼다’라는 표현은 신약성서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splagchnizomai σπλαγχνίζομαι)라고 한다. 이 헬라어 동사를 우리말로 실감나게 옮기면 ‘애간장이 타다’이다. 신약성서에서 이 헬라어 동사는 의례적으로 ‘삶의 고난과 절망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예수는 비유에서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사마리아 사람의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자신과 하나로 여긴다. 그럼으로써 유대 종교․사회 공동체의 차별적이고 배타적이며 퇴행적인 종교규범에 맞선다. 이러한 예수의 이웃사랑 앞에서는 율법도, 제사의 규칙도, 세상의 모든 종교적 가치도, 체면도 다 쓸데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이렇게 비유이야기를 이끌어 갈까? 사실,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반 야훼신앙 폐해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엘리트 기득권세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반 야훼신앙 폐해는 ‘죄와 벌, 성전제사와 죄 사함’이라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이데올로기’에 매여 사는 유대 민중들의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수는 비유에서 유대 종교․사회 공동체의 배타적이고 차별적이며 퇴행적인 종교율법과 거기에 휩쓸리는 유대 민중들의 삶의 행태를 꾸짖는다.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체제의 반 야훼신앙 종교이데올로기에 찌들어 사는 예루살렘 군중들, 비유의 청중들, 그리고 독자들에게, 예수는 ‘야훼신앙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유를 철저히 밝혀서 낱낱이 드러내려고 한다. 그 점에서 비록, 본문비유가 누가복음 저자에 의해 아주 자연스럽게 이웃사랑 본보기 예화로 꾸며졌지만, 예수의 비유의 육성을 아주 말끔히 지워내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직접 예수의 비유이야기를 듣는 유대인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너무도 어이가 없고, 실망스러우며, 놀라운 일이라서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예수의 무차별적인 이웃사랑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에게 이끌린 일부 청중들은 예수의 무차별적인 이웃사랑 앞에서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율법과 규범과 가치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허탈함을 맛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유의 대다수 청중들은 이야기꾼 예수를 향하여 분노하고, 반발하며, 시끄럽게 항의 했을 것이다.
“어떻게 저 짐승만도 못한 사마리아 사람이 제사장과 레위인과 유대인을 제칠 수 있단 말이오? 저 짐승만도 못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저런 착한 일을 맡기는 것이 옳소?”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끝끝내 예수의 비유 이야기를 옳다고 인정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여기서,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이야기는 유대인 청중들의 마음에 온갖 불평불만과 찜찜함만 남긴 채 끝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청중들의 마음에 남은 온갖 불평과 그 찜찜함이야말로 예수가 바라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핵심 신앙은유이다.
“강도 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과 흐리멍덩한 정체성,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정의롭지 못함을 증언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비인간적인 행태, 거기에 맞서는 발칙한 사마리아사람의 착하디착한 행동들, 비유의 등장인물들과 사건의 상황과 비유이야기의 흐름에 대해 분노하고 반발하며 거칠게 항의하는 유대인 청중들.”
이 모든 갈등과 불협화음과 찜찜함 속에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로마제국과 유대 종교․사회 지배이데올로기로써 차별과 배제에 맞서는 사마리아사람의 발칙한 삶의 태도, 발칙한 삶의 가치관’에 대한 신앙은유가 숨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누가복음 저자가 꾸며놓은 초대교회의 ‘이웃 사랑 본보기 예화’로써 본문비유를 끝까지 읽어나가기로 한다. 이제, 본문 ‘읽기–3’에서 예수는 자신과 자신의 이웃들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뽐내려고,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으스대던 율법사에게, 천둥 같은 세 번째 질문을 들이댄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일 거라고 생각하시오?”
자신과 자신의 이웃들의 의로움을 뽐내며 끼리끼리의 사귐과 선행을 자랑하고픈 율법사에게, 도리어 예수는 이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하여 ‘누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겠느냐’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21C 우리시대의 신자유주의 금융자본경제에서, 세상은 온통 강도 만난 사람들뿐이다.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분야의 꼭지에는 맘몬․자본이 있다. 21C 우리시대의 사탄인 맘몬․자본이 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삶과 생각과 마음을 짓 눌러 온갖 상처를 입히고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어떤 사람은 맘몬․자본의 탄압을 받아 감옥에 간다. 어떤 이는 굶주림을 당한다. 어떤 이는 위중한 질병치료를 포기한다. 또 다른 누구는 맘몬․자본의 유혹을 받아 영혼과 육체가 피폐해 진다.
“그러니 오늘 누가, 우리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맺는 말
참으로,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자신과 사마리아 사람을 동일시했을까? 만약, 본문비유를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메시아 재림신앙 알레고리로 읽고 해석하려는 의도 아니라면, 예수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본문비유를 누가복음저자의 이웃사랑 본보기 예화로 읽고 해석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언제나 비유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죽임․전쟁․피흘림의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맞서는 발칙한 신앙인이었다. 스스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발칙한 신앙 삶을 살았으며, 자기 제자들에게도 발칙한 신앙과 삶의 가치관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숨겨진 은유는 ‘비유 이야기꾼인 예수 자신’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십자가를 지기 바로 전 최후의 만찬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말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천년 기독교역사 속에서 수많은 교회들이 본문비유를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예수의 사랑의 이중계명’ 가르침 속에서 ‘이웃사랑 본보기 예화’로 읽고 해석해 왔다. 그렇게라도 읽혀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가 우리시대의 교회들을 새롭게 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힙 입은 사람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자기신앙을 증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비유의 강도만난 사람의 처참한 상황을 통하여 전쟁과 죽임과 피흘림의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맞서는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은유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차별과 배제에 맞서는 발칙한 신앙, 불의한 지배체제에 맞서는 발칙한 삶의 행태, 발칙한 삶의 가치관’에 대한 신앙은유를 깨닫고 실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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