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왕년에는 내로라하는 공무원이었소
가난은 빚을 낳고.
저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가난뿐입니다. 이제 어느덧 60을 바라보는 저는 전라도 시골 가난한 농가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내 땅이라곤 한 뙤기도 가져 보지 못한 소작농으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막내였던 저는 어렵사리 실업계 고등학교라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떻게든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공무원 시험을 보았습니다. 물론 요즈음은 공무원 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이지만, 그 시절에 말단공무원이 되는 일은 마냥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뜻한 바대로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초, 토목 직 지방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공직생활 중에 어여쁜 여성을 만나 결혼도 하게 되었고, 슬하에 두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빚은 가난을 대물림한다.
이렇게, 저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20여 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형제자매는 물론 주변 친지들까지 이런저런 빚보증을 서 달라고 조르는 일이 많았습니다. 저는 가급적 빚보증을 자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IMF 무렵에 이르기까지 이런 저런 연유로 몇몇 친지들의 빚보증을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저는 손아래 처제의 카드 빚 대환 대출에 보증을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제는 제때에 카드빚을 상환하지 못했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극심한 빚 독촉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심하게는 추심원이 직장에까지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밖에 다른 친지들에게 서 준 빚보증도 IMF 경제위기로 인해 상환불능 상태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빚을 진 친지들이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길거리로 나앉거나,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모든 채무들이 고스란히 저의 채무로 떠넘겨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다가 IMF경제체제 하에서 이자제한법이 폐지되면서 갑자기 이율이 높아졌습니다. 모든 채무들이 하루아침에 고리채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채 이자는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시중은행 이자마저도 30~35%까지 치솟았습니다. 그러면서 친지들로부터 저에게 떠넘겨진 보증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자신마저도 패가망신할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명예퇴직을 해서 빚을 청산하는 길뿐이었습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
저는 이참에 명예퇴직을 해서 친지들의 빚보증을 청산한 후, 내 사업을 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무원 생활 만 20년이 되는 시점에서 명예퇴직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퇴직금과 명예퇴직보상금을 합쳐 약 1억 원의 목돈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중 7000여만 원을 친지들의 보증 채무를 갚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3000만 원으로 작은 건설업체를 차렸습니다. 솔직히 저는 오매불망 내 사업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공무원으로 봉직하면서 큰 탈 없이 정년퇴임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IMF이후 우여곡절 끝에, 제가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름대로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저는 첫 공사로 교외에 짖는 대규모 LPG주유소 건설 토목공사를 수주했습니다. 그런데 한창 토목공사가 진행 중일 때, 주변 마을 사람들과 민원시비가 붙었습니다. 주민들은 LPG주유소가 주거 생활의 위험이 된다며 관공서에 공사 중지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접수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사가 1년 넘게 중단되었습니다.
그렇게 공사가 중단되고, 저는 기왕에 해 놓은 토목공사 대금을 제때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무런 여윳돈도 없이 건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건비와 자재비 그리고 장비 사용료 등, 모든 비용을 사채를 빌리거나 신용카드 대출을 통하여 충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빚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1년여 만에, 건설주가 마을 사람들과 보상협상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저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첫 공사에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저의 건설 사업은 시작부터 망조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저는 사업을 계속하면서 위기를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만 했습니다. 그 리고 그 길은 누가무어라 해도 새로운 일감들을 수주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청주시 시설관리공단이 발주한 시설물 건축공사를 수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는 건축 분야의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또한 저는 어떻게든 자금을 돌려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건축 시공단가를 너무 낮게 책정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고, 어렵사리 수주한 시설물 건축공사는 큰 손해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건설 사업은 두 번의 공사에서 거푸 쓴맛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건설 사업은 속절없이 망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빚은 가정 파괴범
이후, 저는 신용카드 대금 및 사채 빚으로 인해 극심한 추심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디든 취업을 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신용불량자 신세인 처지에서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일용 막노동이라도 하며 생계를 꾸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벌이 막노동으로는 막대한 채무를 갚아 나가며 생활을 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저축은행, 새마을금고, 신협 등에서 소액 대출을 받아 기존채무의 이자를 내거나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빚으로 빚을 갚는 것은 점점 더 빚을 키우는 일밖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나마도 제때에 빚 돌려막기가 되지 않다보니, 날이면 날마다 빚 독촉전화며 문자들이 날아들었습니다. 일부 사채업자들은 집으로 쫓아와 행패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통에 어린 자녀들이 무서워서 집에 들어오기를 꺼렸습니다. 그러면서 아내와도 빚 문제로 인한 다툼이 빈번해 졌습니다. 결국, 아내는 저에게 집을 나가든지 차라리 이혼을 하자고 통고 했습니다. 사실 저로서도 빚 문제로 인해 가정생활이 황폐해져 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만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아내와 합의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혼 이후, 아내는 과일 장사, 배추 장사, 두부 장사 등 험한 일을 해 가며 아이들과 생계를 꾸렸습니다. 저는 멀찍이서 그 참담한 모습을 바라만 보았을 뿐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저는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스러웠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내로라하는 공무원이었소
저는 이혼 이후 하루벌이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러는 중에 당뇨병이 찾아 왔습니다.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머리칼이 빠지고 몸도 약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길거리를 지나다가 저혈당 쇼크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이 저를 병원으로 업고 가서 저를 살려 냈습니다. 저는 지금도 “차라리 그때 그렇게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후, 저는 막노동도 못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상황에서 노숙자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저는 기차역 주변과 지하철역 지하도에서 노숙을 했습니다. 끼니는 역 주변 무료 급식소에서 해결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아무런 희망도 의지도 없이 무력하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지난날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나는 모범공무원이 아니었다 해도, 나름 한길로 20년을 봉직한 공무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루아침에 거리의 노숙자 신세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었습니다.
직장 생활 파탄, 가정 파괴, 죽음의 종결 자 '빚'
저는 오랜 노숙자 생활에서 몸을 빼서 다시 하루벌이 막노동을 시작했습니다. 집을 얻을 형편이 아니라서 여관 장기월세 방에 기거하며 몸이 견딜만한 일거리를 찾곤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무런 욕망도 바람도 없이 하루살이에 목을 매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2010년 어느 날, 저는 건설 현장에서 잡부 일을 하는 중에 추락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저는 팔과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고, 여러 달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그 후 오래도록 물리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지체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체장애자가 된 저는 도저히 먹고살 길이 없어서 동사무소에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 공무원의 생활실태 조사를 거쳐 수급자로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지자체에서 매월 지급하는 생계비 40여만 원으로 하루하루를 생존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삶의 상황 속에서도 극심한 빚 독촉은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법적 절차 진행’이라는 협박성 독촉장이 날아들었습니다. 당뇨, 고혈압, 간질환에다 지체장애인 저는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지고 더는 살아야 할 낙이 없었습니다. 저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 하루 온 날을 자살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목숨을 끊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저는 이웃의 소개로 '새벽'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후 저는 법원의 파산면책결정을 받아 오랜 채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조금씩이라도 건강이 회복된다면 아직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미래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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