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저는 충청도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6남매 중 세 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농사지을 땅이 없었던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 대도시로 이주를 하시고 일용노동으로 생계를 꾸리셨습니다. 저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모든 학업을 마쳤습니다. 이후 저는 건설현장에서 목수일, 전기일 등 온갖 분야의 일을 배우며 생활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는 분의 소개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배우자를 소개한 분은 교회 집사님이었고 배우자역시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 역시 아내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저희 부부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월세 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저희부부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아이들이 다 큰 후에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부부는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서로 아껴주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저는 한평생 건축노동현장에 온갖 일용 노동일 하면서 일들을 하면서 1990년 경 겨우겨우 다가구 지하주택을 하나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커가고 집이 너무 작고 불편해서 조금 더 큰집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농협에서 2000만원을 대출받아서 3800만원에 빌라 한 채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994년 무렵, 집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사무실을 열고 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전기, 보일러, 목수, 미장 등 여러 건축분야 일에 능숙해 있어서 집수리 업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의 집수리 사업은 처음부터 호황이었습니다. 저는 집수리와 잡다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기술도 있었고 일머리도 잘 아는데다가 일거리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진즉부터 내 사업을 시작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집수리사업의 호황은 잠시뿐이었습니다. 1997년 느닷없는 IMF 외환위기가 들이 닥치면서 건설경기도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일거리가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습니다. 어렵사리 일을 맡아 죽어라 일을 해도 공사수주 단가가 너무 낮아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습니다. 공사 자재비와 일꾼들 품삯을 계산하고 나면 저에게 돌아오는 몫은 아예 없거나 잘못하면 손해를 보기 일쑤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일을 하면 할수록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업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저의 노력과 기대도 잠간이었고 저는 2002년 무렵 집수리사업을 정리 해야만 했습니다.
빚으로 빚을 늘리는 악순환에 빠지다
저는 집수리 사업을 접고 다른 직종의 일자리를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IMF 경제 한파 속에서 학벌도 없고, 나이도 많다보니 다른 직종에 취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건축노동현장에서 일용노동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에 저는 다른 이들도 그랬듯이 길거리 아무데서나 발급해 주던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건축현장에서 일용노동을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재기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가을 무렵, 다시 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을 새로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집수리만으로는 살아남기가 힘들겠다고 여기고 보일러설비에 중점을 두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재 창업을 하면서 일만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의 재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도 하나둘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들쑥날쑥한 수입으로 인해 가정경제는 별로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다가 아이들이 커가고, 지출이 늘다보니, 신용카드사용 횟수도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월말이면 카드대금을 막고 대출금 이자를 내느라 곤욕을 치르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정경제생활 속에서도, 세월이 흘러 2009년 무렵에 이르렀습니다. 그 무렵에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소상공인지원프로그램을 운용했습니다. 저도 소상공인지원 프로그램을 통하여 농협에서 싼 이자로 500만원을 대출받았습니다. 저는 그 돈으로 작업공구도 사고, 밀린 카드대금과 월세를 내는 등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우선 이자만 내고 원금은 나중에 갚아도 되니까, 목돈이 들어오면 그 때 갚아도 되겠지 하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2011년, 저에게 갑자기 ‘메니에르’라는 희귀한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일어나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평소에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갑자기 생긴 어지럼증은 쉽게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강했던 저에게 불면증에다 우울증까지 찾아와 병행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2012년 3월에 이르러, 저는 수술까지 받았지만 차도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도리어 저는 시력과 청력까지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게 월세며 거래처 물품대금과 병원비 등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밀린 신용카드대금을 이러 저리 돌려막기 하는 등, 점점 더 빚이 늘어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앞날이 캄캄한 가운데 신장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라도 해서 빚을 청산하고 사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고민 고민하다가 신장매매 브로커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울 모병원에서 브로커에게 병원검사비용이라며 200만원이라는 돈만 뜯기고 말았습니다.
이후 2013년 들어, 사업실적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러 카드 빛 채권자들로부터 극심한 빚 독촉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채권자들 중 한두 군데만 남기면 빚이 줄어들까 싶어, 대부업체 돈을 빌려 빚을 갚기로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는지 알지 못해서 대출알선브로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군데 대부업체서 소액대출을 받았는데, 브로커의 말이 3개월 후에 통합해서 이자가 싼 대출을 알선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브로커는 소식을 끊고 연락도 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비싼 이자로 대부업체의 빚을 얻어 다른 빚을 갚는 꼴이 되다보니 빚만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제때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저의 네 식구가 오래 동안 몸 부대끼면 살아왔던 경매로 처분되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저의 가족은 갈 곳이 없어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천사처럼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분은 저의 가족이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시었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가족이 살아 수 있도록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5만원 살집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2013년 여름, 저는 무릎통증이 심해서 병원을 찾았는데 무릎연골이 파열되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꺼번에 여러 질환이 찾아와 너무나도 속상한 가운데 또다시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목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저는 이미 올해 초 5급 청각장애인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꺼번에 몰아닥친 여러 질병으로 인해 평생을 해오던 집수리 사업을 폐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모든 근로능력을 상실한 채, 감당할 수 없는 채무독촉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고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독촉전화에 채권자들이 집으로 찾아오니 견딜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앞날이 캄캄하기만 한 상황에서, 고민 끝에 파산면책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법원의 파산면책결정을 받았습니다.
헤어날 길 없는 고난의 날들
현재, 저는 근로능력을 상실한 채 아무런 소득활동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건강상태로 보아 앞으로도 소득활동을 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현재, 저희 네 식구는 아내가 식당일을 하며 버는 소득 150여만 원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식구가 살고 있는 집은 500만원 보증금에 월세가 35만원 주택 2층입니다. 보즘금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가족은 2013년 가을부터 수급자로 지정되어 작은 금액의 수급비와 의료급여와 교육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제 명의로 오래도록 유지해온 건강보험을 하나를 여동생이 인수해서 보험금을 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의 건강이 얼마나 더 악활 될지 모른다며 여동생이 대신 보험료를 내주시기로 했습니다. 제가 몸이 더 아파서 반신불수라도 되면 형제들에게 더 큰 부담이 올까 걱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저의 자녀들 중 큰아들은 대학에 재학 중입니다. 일부 저소득계층 장학금과 일부 학자금 융자를 받아 학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막내아들은 아직 고등학생입니다. 딸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객지에 나가 삽니다. 아직은 정식직장을 잡지 아르바이를 하며 살길을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딸아이는 핸드폰대리점 등에서 알바로 일하는 것 같은데 객지에서 겨우 자기밥벌이나 하는 형편입니다.
이제, 저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저희 가족은 앞날에는 희망이 있을까요? 물론, 저는 오늘도 저의 자녀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처지기 한탄스럽습니다. 부디, 우리사회가 경제적 활력을 되찾고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사회기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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