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구약성서

아브라함의 자아도취 강박.자폐신앙 - 이삭을 제물로 바치다 - 하나님이 시험에 빠지다.

희년행동 2022. 7. 24. 22:24

아브라함의 자아도취 강박.자폐신앙

이삭을 제물로 바치다

하나님이 시험에 빠지다.

창세기 22:1-19

 

읽기

 

그런 일들 후에, 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명령했다.

“너는 진실로 네가 사랑하는 하나뿐인 너의 아들, 이삭을 취해라! 그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라! 그런 후에 내가 너에게 일러줄 산들 중 한 곳, 거기서 그를 번제로 바쳐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의 당나귀에 안장을 얹어 묵었다 그리고 그의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함께 불러내서 번제에 쓸 나무장작을 쪼갰다. 그런 후에 일어나, 하나님의 그에게 말한 장소로 갔다.

사흘 날에, 아브라함은 그의 눈을 들어 멀리 그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그의 종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라! 나와 아이는 저기 까지 가서 예배를 드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장작을 취해서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웠다. 그리고 자신은 손에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이렇게 그들 두 사람이 함께 갔다. 그때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듣고 있다.”

이삭이 물었다.

“보세요. 불과 나무장작은 있어요. 그런데 번제로 드릴 새끼 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번제로 드릴 양을 봐놓으셨을 거다!”

그렇게 그들은 둘이서 함께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한 그 장소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나무장작들을 벌려놓았다. 그런 후에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묶어서 제단 위에 벌려놓은 나무장작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손을 뻗어서 칼을 움켜쥐고 그의 아들을 도살하려고 했다. 그때, 하늘로부터 야훼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소리쳤다. 야훼의 사자가 아브람을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얼른 대답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야훼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마라! 그 아이에게 어떤 짓도 하지 마라! 참으로 이제, 나는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겠다. 너는 하나뿐인 네 아들마저 나에게 거절하지 않는구나!”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았다. 그런데 보라! 뒤편에 뿔이 덤불숲에 걸려 허우적대는 숫양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뛰어가서 그 숫양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대신 그 숫양을 번제로 바쳤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그 곳의 이름을 ‘야훼 이르에’라고 불렀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야훼의 산에서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 후, 야훼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다시 아브라함을 불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를 두고 맹세할 테다! 야훼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네가 이 일을 벌였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뿐인 네 아들마저 거절하지 않았다. 꼭 나는 너에게 복을 주겠다! 내가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그래서 너의 후손은 자신의 적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땅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따라, 자신들도 복 받기를 갈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네가 내 목소리를 들은 대가(보상)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하인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일어나서 다함께 ‘브에르쉐바’로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브에르쉐바에서 살았다.

 

시작하는 말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류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깨닫고 이해하며 관계를 맺는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이어가며, 깊게 만드는가? 이와 관련하여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어떤 친구는 하루에 일곱 시간씩 기도하고, 매월 초하루는 반드시 금식한다고 자랑을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떻게 기도를 하나 보았더니 왁자지껄, 횡설수설, 무아지경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래, 그런 자아도취와 열광하는 기도가 너의 신앙 갈증 해소로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아도취, 열광, 카타르시스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도리어 자아도취와 열광의 카타르시스 기도는 사람의 육체와 정서에 중독 증상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렇듯이 지금 한국교회에 만연한 자아도취와 열광의 카타르시스 기도가 교회와 교우들을 올바른 신앙실천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 이 점은 경배와 찬양에 열광하는 청소년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또 어떤 친구는 밤낮없이 성서를 읽었다.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등하교 길 버스 안에서도 성서를 읽었다. 물론,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성서를 많이 자주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즈음은 도리어 일반 교우들보다 성서를 더 안 읽는 신학생, 목사들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신학생이든, 목사든, 교우들이든 성서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례로, 한국교회는 전통교리와 교회절기에 따라 성서읽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성서읽기를 ‘죄-구원’으로 단순화시킨다. 그러나 성서는 단순하게 기독교교리를 설명하고 강요하는 교리서가 아니다. 주요 기독교 절기와 행사, 교회문화와 역사, 전통들 역시도 결코 무조건적인 신앙진리는 아니다.

더불어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문자주의로 성서읽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께서 한 자 한 자 불러주신 것’이라는 축자영감설을 신봉한다. 물론, 신앙인들의 성서읽기는 성서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대한 독해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종교개혁이후 서구교회는 수백 년에 거쳐 성서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성서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이해, 성서 고고학과 성서 바깥의 문서들에 대한 비교연구, 성서 안에서의 자료연구 등 업적을 쌓아왔고, 교회 안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성서신학의 결과물들을 받아들여서 꼼꼼하게 성서의 문장들을 읽고 뜻을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나아가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성서를 신비주의와 상징으로 읽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서는 토정비결이나 정감록 같은 비결책이 아니다. 무슨 주문주술서도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성서는 시대의 신앙인들의 신앙과 삶의 기록이며, 그들이 경험한 신앙사건에 대한 고백이다. 성서는 유구한 인류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오간 다양한 신앙과 삶의 교감을 사회공동체 고백으로 증언하는 책이다.

따라서 성서는 21C 우리시대의 신앙인들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 삶의 자리에서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소통과 연대와 교류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경험, 그 삶의 자리에서 오는 질문들을 가지고 성서를 읽어야한다. 특별이 지금, 한국사회의 삶의 자리에서는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읽기가 절실하다.

이처럼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자리에서의 성서읽기와 해석, 그것을 통한 진솔한 삶의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삶의 연대와 소통과 교류를 튼실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삶의 연대와 소통과 교류가 단절되어 발생하는 우리시대의 온갖 사회적 모순들과 삶의 절망을 치유한다. 하나님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신앙진리를 저버리고 맘몬․자본숭배에 빠져든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삶을 다시 바르게 세울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 본문읽기와 해석의 제목을 ‘아브라함의 강박․자폐신앙, 하나님이 시험에 빠지다’라고 새겼다.

 

이끄는 말

 

본문은 ‘그런 일들 후에’라는 문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첫 번째, 아브라함은 씨받이 여종 ‘하갈’과 그녀에게서 난 서출 ‘이스마엘’을 단 한명의 하인도 딸리지 않은 채, 양식과 물도 충분히 주지 않은 상황에서 죽음의 광야로 쫓아냈다. 본처 사라가 ‘이삭’을 낳은 후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 존재위치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 분란의 화근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서출인 이스마엘에게 넘어갈 뻔 했던 고대 이스라엘 부족사회의 장자상속 우선권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었고, 가정의 화평도 회복되었다.(창 21:8-10)

두 번째, 그즈음에 오래도록 아브라함을 괴롭히던 가나안 토착군주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로써 오랜 떠돌이 나그네였던 아브라함은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아브라함의 내면의 세계는 어떠했을까? 한량없이 감사하고 은혜로우며 행복했을까? 아니면, 죽음의 광야로 쫓아낸 큰아들의 생사가 걱정되어 마음이 녹아내렸을까?

어째든, 이 일들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서출인 큰아들 이스마엘을 죽음의 광야로 쫓아낸 후, 남아 있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된 것 것이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점에서 본문은 ‘나사’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이 동사의 의미는 ‘하나님이 사람을 훈련하다, 또는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다’이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삶의 안정과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 이삭 → 사라 등’을 하나씩 버리는 신앙훈련을 해야만 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본문은 ‘아브라함의 처절하고 혹독한 내버림의 훈련’에 대한 독자들의 경악과 당혹스러움을 해소하기 위해, ‘처음부터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시험이었음’을 밝히려고 애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이제 가까스로 먹고살만해진 아브라함을 훈련하느라 큰 아들 이스마엘을 죽음의 광야로 쫓아내라고 했을까? 진실로,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했을까? 참고로, 성서에서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는 개인적 시험이야기는 이곳 한번 뿐이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신다’라고 증언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본문을 읽을 때, ‘너는 진실로 네가 사랑하는 하나뿐인 너의 아들, 이삭을 취해라’라는 문장이 매우 어색하다. 이 문장에서 사용 된 ‘카흐-나’라는 히브리어 문구는 말뜻의 긴급성을 강조하는 ‘불변화사 - 나’의 수식을 받는 명령어이다.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제발 취해라’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 ‘불변화사 - 나’는 청원이나 권유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조차도 매우 간절함을 내포하는 명령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의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 낮선 표현이다. 나아가 ‘카흐’의 원형동사 ‘라카흐’는 ‘붙잡다, 데려가다’라는 가벼운 뜻으로도 많이 쓰이는데, 여기서는 ‘제물을 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이러한 표현은 ‘맑은 하늘의 날벼락 같은,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접한 아브라함의 혼돈과 절망’을 절절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시다니!’ 이로써, 아브라함은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절벽 끝, 시험대위에 올라서야만 했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 성서시대의 독자들로부터 21C 우리시대의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자기 믿음 또는 신앙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을 수 있다’라고 억지를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혹독하고, 절망적이며, 비인간적인 시험이 참으로 하나님의 계시였을까? 혹시, 가까운 시기에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두 개의 반대되는 큰 사건들, 그 사건들로 인한 불협화음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큰 아들 이스마엘을 죽음의 광야로 쫓아낸 사건과 가나안 토착군주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게 된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큰마음의 상처와 영적인 방황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큰아들을 죽음의 길로 쫓아낸 후, 이제 먹고살만해진 삶의 환경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심리적이고 영적인 갈등이 찾아올 것은 빤한 이치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온 터무니없는 인간생명제사 계시야말로 아브라함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갈등 속에서 빚어진 강박과 자폐 증세에 따른 자기암시였을 수 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아도취적인 강박과 자폐증세 속에서 자기암시에 따라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했다면, 이 처절하고 혹독한 시험의 대상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다. 실제로, 21C 우리시대의 목회자와 교우들도 자기욕망과 아집을 쫓아 수없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와 기도, 성서말씀의 참뜻을 헤아려 볼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제멋대로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해 내기 일쑤이다.

이렇듯이, 아브라함은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튿날, 그 계시를 실행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면서, 자기 당나귀에 안장을 얹어 단단하게 묶는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낱말 ‘하바쉬’는 문자적으로 ‘묶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낱말이 암시하는 문맥상의 의미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꽁꽁 묶었다’라는 의미이다.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번제의 현장 모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사흘 길을 가는 동안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내면의 문을 닫아걸고 외부세계로부터 그 문고리를 꽁꽁 묶어 놓은 채, 혹독하고 절망스러운 자기만의 강박․자폐적 침묵의 신앙여정을 내달린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하나님의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서 함께 온 종들에게 자신과 아들, 둘이만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서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을 예배하곤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려고’한다. 아브라함은 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하나님의 시험에 대하여 ‘어떻게든 하나님을 찾아뵙고 그분께 탄원을 드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우리가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한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간곡한 탄원’의 뜻을 담은 것일까? 아니면, 어떤 방식이든 하나님이 자기 아들, 이삭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신뢰일까? 아브라함은 묵묵히 아들에게 번제의 쓸 장작을 지우고 자신은 불씨와 칼을 들고 모리아 산에 오른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칼은 ‘마아켈레트’라고 하는데, 이 칼은 짐승을 도살하는 칼이다. 이 칼은 예리하고 날카로워서 짐승의 각을 뜰 때 사용한다. 따라서 이 칼의 용도를 잘 아는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아버지, 불씨와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드릴 새끼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은 마음의 고통과 절망을 억누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하나님이 봐놓으셨을 거다.”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문구가 ‘엘로힘 이르에’이다.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보실 것이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이 봐놓으셨을 거다’라고 새겼다. 이런 의미에서 ‘야훼 이르에, 또는 야훼 이레, 또는 여호와 이레 → 야훼가 준비하신다’라는 말이 나왔다.

여기서 ‘이르에’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하나님이 봐 놓으셨을 거다’라는 뜻이지만, 또 한편 본문전체의 문맥으로는 ‘절망과 고통과 낙심 속에서 허덕이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보셨을 것이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제발, 자신의 고통과 절망, 자포자기 상황을 살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는 ‘강박적이고 자폐적인 사색에 몰입한 채’, 하나님을 향해 자기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절망과 체념과 자포자기 상황 속에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묶어서 번제 단 위에 제물로 올려놓는다. 그리고 지금 막, 짐승을 잡을 때에 쓰는 칼을 손에 움켜쥐고 아들, 이삭을 도살하려고 한다.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낱말이 ‘아케다 - 묶다’이다. 이 히브리어 낱말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끝판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아브라함의 시험 이야기’를 ‘아케다 – 묶다’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은 창세기 21장에서 큰아들 ‘이스마엘’과 22장에서 작은 아들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내버림의 훈련을 하나로 묶어서 읽고 묵상한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인간한계를 뛰어넘는 순종과 믿음이 ‘아브라함과 하나님사이의 관계를 굳게 묶었다’라고 해석한다. 본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이천년 기독교역사로 이어져 왔고, 21C 한국교회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해석이 본문사건들의 신앙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을까? 21C 우리시대의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상황과 정서, 삶의 환경에 비추어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무지비한 성서해석이 옳을까? 아니다. 이러한 해석은 본문사건의 신앙진실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엉뚱한 해석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다 세밀하게 본문을 읽어보자. 이때, 하나님께서 두 번 연거푸 하늘로부터 아브라함을 향하여 소리치신다. 너무도 다급하고 절박하게 아브라함을 부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히브리 성서와 신약성서 전체에서 이토록 절박하고 다급하게 두 번 연거푸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신 예는 없다. 이처럼 실제로,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자아도취적인 강박과 자폐증세 속에서 자기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인간생명제사에 대하여 다급해지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야말로 천만다행인 것은 자아도취적인 강박과 자폐증세 속에서 인간생명제사에 몰두하던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평생을 거친 신앙과 삶의 영성이 실낱처럼 살아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떨쳐 울리는 하나님의 외침을 듣는다. 벼락같은 하늘 얼차려를 통하여 제 정신을 차린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자식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더 많은 복을 쟁취하려는 성서 주변세계의 인간생명제사 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21C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인간생명제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정의와 자유 부르짖으며, 수천, 수만의 인간생명 제물들이 전쟁제단에 바쳐지고 있다. 지금, 이 땅에서는, 지구촌 군수산업과 제국주의와 종교가 함께 손을 맞잡고 전쟁과 죽음의 굿판을 음모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세상 건설을 훼방하며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웃들을 외면한 채, 탐욕으로만 채워진 거대한 예배당들이 우후죽순 세워지고 있는 것을 보라! 그러나 결코, 사람이 하나님을 부릴 수는 없다. 어떠한 제물로도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도록 강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은 은혜이며 선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은 복에 대한 사람의 마땅한 감사로써, 받은 복을 서로 베풀고 서로 나누라고 요구하실 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 ‘제가 여기 있습니다’이다. 이 말은 본문 1절에서 처음 사용 된 이후, 7절과 11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본문 1절 이후 7절 상황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은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한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아브라함의 침묵을 ‘위대한 순종과 믿음의 침묵’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아브라함의 침묵은 자아도취적인 강박과 자폐신앙의 증세일 뿐이다. 강박과 자폐신앙 속에서 하나님과의 소통과 교류를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고통과 공포와 절망의 침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할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의 실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성서시대의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오늘 21C 우리시대의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21C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불러내어 ‘알 타아씨 로 메우마 - 그 아이에게 어떤 짓도 행하지 마라’라고 소리친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이 하나님의 외침이 들려지기를 소망한다. 이 하나님의 외침을 듣고 응답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 안에서 우리는 우리시대의 전쟁과 죽임,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폭력적 개발과 환경파괴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1C 우리시대의 탐욕적이고 자아도취적이며 자학적인 온갖 ‘생명제사’를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시 가까스로 아브라함과 소통의 길을 찾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을 한다. “니쉐바아티 비 -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겠다.” 사실 이 히브리어 문구도 매우 어색하다. 히브리 성서에서 간혹 사람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맹세한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의 목숨과 자신의 온 삶과 영혼을 걸었다. 그에 걸맞게 하나님도 자신의 존재를 걸고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맹세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본문에 열거된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은 이전에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들이다.(창세기12장 참조) 그런데 본문에서의 이 약속들은 예전의 하나님의 약속들과 다른 점이 있다. 본문의 약속 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갈등요소와 문제점이 드러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복을 받아 강대해져서 적들의 성문을 쳐부수고, 적들의 성들을 차지 할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등 따습고 배부르게 된 아브라함의 소제국주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본문은 ‘그 땅의 모든 민족들이 덩달아, 아브라함 자손들처럼 복을 받기를 갈구하게 될 것’라고 한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낱말은 ‘히트바라쿠’라고 하는데, 재귀형 동사이다. ‘그들 자신도 복 받기를 갈망 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이야 말로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받게 될 복의 부작용이다. 실제로, 아브람함의 자손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윗왕조시대에 잠시잠깐 소제국주의 패권을 뽐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의 세력이 잠시잠깐 시들해 졌을 때, 뿐이었다. 나아가 주변의 모든 민족들도 이스라엘을 따라 소제국주의 복을 누리게 되기를 갈구했다. 그래서 항상, 이스라엘은 주변왕국들의 소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휘말리며 전전긍긍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중해세계 제국들의 영구 식민지 주민으로, 디아스포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이,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아도취적 강박과 자폐신앙으로 인해, 도리어 하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다. 까딱 잘못했더라면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은 인류종교․문명사 안에서 대표적인 인간생명제사 종교의 하나님이 될 뻔 했다. 실제로,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인간생명제사와 관련된 우여곡절 끝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아브라함이 획득한 소제국주의 복은 유대 다윗왕조에게 상속되었다. 그리고 이천년 서구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복은 서구제국주의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소제국주의 복은 21C 한국 기독교회 안에서 신자유주의 독점자본 경제체재의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소비 맘몬․자본 이데올로기로 상속되었다. 아브라함의 인간생명제사와 관련한 보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 소제국주의 복은 한국교회 대형화의 밑바탕이다. 나아가, 한국교회 세습을 옹호하는 종교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획득한 이 소제국주의 복을 ‘헤세드 - 하나님의 은총, 선물’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에케브 아쉐르 - ~ 한 결과, 또는 보상, 대가’라고 표현 한다.

 

맺는 말

 

본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류하며, 바른 관계를 정립해 나갈 수 있을까’라는 신앙의 숙제를 던진다. 우리는 그 해답을 우리의 신앙과 삶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삶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과 삶을 가꾸고 북돋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 삶으로 성서읽기가 절실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21C 한국 사회는 고대 히브리 성서시대도, 이천년 전 신약성서 시대도, 초대교회 시대도, 근대 서구제국주의 시대도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아도취적인 강박과 자폐신앙 증세 속에서 자기암시 따른 하나님계시에 홀려서 자학적 인간생명제사 신앙에 몰두한다. 본문에서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시험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진실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절실하고 다급한 외침을 들어야만 한다. 이 하나님의 절절한 외침이 우리의 자아도취 강박과 자폐신앙을 뚫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떨쳐 울리도록 소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