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산업역군 강노인의 고통스러운 노년을 구하라.
현재, 팔순 나이의 갈길수(가명) 어르신은 이 땅의 산업역군이십니다. 강노인은 70년대 이 땅에 산업화가 활발할 무렵부터 가내공업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공장을 세웠고 이내 대형공장으로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강노인은 나름대로 열심히 사업을 운영했으나 철저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는 아예 빚더미에 나앉게 되고 말았습니다.
강길수씨는 경상도 시골마을에서 5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강길수씨는 일찍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군 생활을 하다가 제대를 한 후, 이어서 군무원생활을 했습니다. 그사이 강길수씨는 결혼도 하고 슬하에 세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늙으신 부모님까지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박봉의 군무원생활로는 여러 식구의 호구지책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아이들은 커가고 생활비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1970년 강길수씨는 군무원생활을 정리하고 도시로 와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가내공업을 했습니다. 강길수씨 부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때는 생산과 납품, 그리고 대급결제 등 모든 사업과정이 안정적이었고 저축도 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듯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외에 작은 공장도 짓고 짐짓 사장님소리를 들으면서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성장이 없는 자본은 죽은 자본이다
그렇게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도시 주변 중소읍면 지역에 농공단지건설 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강길수씨는 친지로부터 도시 주변 한 읍에 건설되는 농공단지에서 파격적인 조건에 입주업체를 모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친구의 말은 농공단지에 입주하는 업체에게는 저리로 사업자금 융자를 알선 주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강길수씨에게 이제야말로 규모 있는 공장을 짓고 제대로 사업을 키워보라고 부추겼습니다.
강길수씨는 친구의 말을 믿고 본격적인 사업 확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새로 조성되고 있는 농공단지에 규모있는 공장을 짓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강길수씨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과 작은 공장을 정리하여 마려한 4억여원을 밑천으로 삼아 일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89년 경, 농공단지에 870평의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특수사 및 특수직물’ 공장신축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12월, 강길수씨는 ‘종흥산업(주)’라는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공장건설을 시작했습니다. 공장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1992년 여름에는 공장일부가 완공되어 생산 설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일부 공장을 가동하여 제품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첫 생산 제품은 대부분 어구들이었는데 인천, 군산, 여수, 목포 등 여러 곳에 제품을 납품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공장을 가동하면서부터 운전자금이 달리 시작했습니다. 납품한 물품대금은 대부분 어음이었고 현찰이 돌지 않았습니다. 원자재 대금과 직원들 월급 등을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은행으로부터 공장운전자금을 대출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길수사장은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외환은행에서 2억 4천만원을 융자받아서 공장 부대시설 건설과 운전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고도 또 다시 외환은행으로부터 9천 9백만원을 대출받아 기계설비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무렵에 또한 강길수씨는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하기위하여 읍에 짓고 있던 근로자아파트 다섯 채를 주택은행(현 국민은행)에 담보 대출을 통하여 분양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행융자를 받을 때마다 강길수씨는 회사 대표이사로써 회사에 대해 ‘연대보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강길수사장은 부인마저도 회사의 이사로 등재한 후 은행융자 시 연대 보증인으로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장성한 큰아들마저도 몇몇 채무에 연대보증을 세웠습니다. 그 바람에 강길수사장 가족 중 성인 모두가 여러 은행융자에 연대 보증인으로 얽히게 되고 말았습니다.
흑자도산이란 이런 것이구나
강길수씨의 사업은 처음부터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제품생산과 거래가 막힘없이 활발했습니다. 하지만 짧은 자기자본으로 분에 넘치는 큰 사업을 벌인 것이 탈이었습니다. 특수사 및 특수직물 업계의 거래관행상 어음거래가 주 거래의 관행이었습니다. 강길수사장은 사업을 진행하면서 늘 자급압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기술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신한은행과 충청은행에서 5000만원씩 거푸 융자를 받아 회사운전자금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강길수사장의 이러한 외줄타기 자금조달은 얼마 못가 막을 내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1993년 8 월 12일, 김영삼정부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공표했습니다. 1982년 말에 제정되어 그동안 전면실시가 유보되어 왔던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음할인 시장과 사채시장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어음할인비용이 천정부지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주거래은행으로부터 자금줄이 끊기고 알음알음의 돈줄도 막혔습니다. 어음들은 몇 단계 할인을 거치면서 액면가의 반 토막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업초기부터 고락을 같이해온 직원들을 해고하고 공장 문을 닫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기계와 공장을 돌려 제품을 생산해서 판매를 하면 할수록 걷잡을 수 없는 부도의 위기가 몰아쳤습니다.
그렇게 1994년 7월, 마침내 강길수사장은 평생을 바쳐 일구어온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채권자들이 공장부지와 건물, 기계시설들을 경매로 처분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헐값으로 경매 처분되는 바람에 부채상환에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습니다. 이후 강길수사장은 남은 채무를 변제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 강길수 사장에게 남은 것은 노년의 고난 뿐
엎친대 덮친다고 1999년 경, 강길수사장은 직장암선고를 받았습니다. 암 선고 후, 강길수사장은 여느 사람들처럼 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강길수사장은 정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목숨이었습니다. 강길수사장은 고통스러운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다가 그해 10월 수술을 했습니다. 다행히 수술결과가 좋아서 강길수사장은 모진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언제 다시 암이 재발하지나 않을까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더구나 2002년 경 부터는 협심증마저 발병해서 계속 투약을 하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근로자아파트들이 경매로 처분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던 그 아파트들은 강길수사장이 개인적으로 처음 소유했던 집들이었기에 더욱 가슴 아팠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채권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강길수사장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사랑하는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처음부터 강길수사장의 사업 확장을 극구 말렸답니다. 강길수사장의 사업 확장 욕심을 나무라며 그저 두 내외가 열심히 일해서 분수껏 살자고 사정했답니다. 그러나 강길수사장은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업을 시작했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빚꾸러기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강길수 사장 부부는 인생말년에 빚꾸러기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마침내 부인마저도 심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강길수 사장의 큰아들도 신용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이미 결혼을 했고 제 식구를 건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다행스럽게도 집안어르신들이 십시일반으로 큰아들의 연대보증만은 해소시켰습니다. 그 덕분에 큰아들은 빚쟁이의 멍에를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강길수 사장부부는 큰아들에게는 늘 죄를 지은 기분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산업역군 강노인의 고통스러운 노년을 구하라.
이제 강길수사장부부는 늙고 병들었습니다. 두 노인부부는 시집간 딸네 집에 얹혀살면서 두 아들이 보태주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약값과 일용잡비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역전의 사업역군 강길수사장은 이제 옛일이었고 오래 채무독촉에 치여 자신명의의 통장하나 만들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그저 어찌해볼 도리조차 없는 막대한 부채들에 세 자녀와 후손에게 대물림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노인은 ‘새벽’의 한 자원봉사활동가에게서 개인파산면책에 관한 아내를 받았습니다. 강노인 반신반의 하면서 부인과 자식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러자 자녀들도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느냐”며 강 노인부부에게 너무 엄한데 마음 쓰지 마시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강노인은 그 후 몇 차례 더 새벽 자원봉사활동가로부터 새벽의 상담활동을 소개받은 후 새벽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새벽상담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파산면책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강노인의 채무가 십수억원으로 너무 컷 던 탓인지 법원의 파산면책결정이 늦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강노인과 주변 가족친지들은 물론 새벽상담활동가들마저도 강노인의 파산면책을 반신반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년여 동안 뜸만 들이던 법원이 마침내 강노인의 파산면책결정을 내렸습니다. 새벽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역전의 산업역군 강노인의 고통스러운 노년구하기”가 결실을 보았습니다. 역전의 산업역군 강노인의 고통스러운 노년의 삶을 헤아려주신 법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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