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한 집안을 수장하는 물귀신
이순자씨(가명)는 경기도 중소도시에서 운수사업을 하시는 부모님슬하의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운수업을 하시는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고를 졸업한 후 가정살림을 도우며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중매로 공무원생활을 하는 배우자를 만나 혼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평범하면서도 별 근심걱정 없이 여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순자씨의 아버지는 오랜 운수사업가로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역의 유지로 지역민들의 어려운 고충을 해결하고 많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지역민들의 민원을 자비를 들여가면서 도와주었고, 지역민들 사이의 어려운 사정과 문제들을 상담하고 중재하는 역할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순자씨의 손아래 제부 길철민(가명)이 가족으로 편입되면서 그녀의 집안은 불행이 시작 되었습니다.
친정아버지의 촉망받는 사업가 사위가 집안의 우환덩어리로 변하다.
김순자씨의 손아래 제부 김철민은 지역에서 임대아파트건설 사업을 하는 유망한 청년사업가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창 잘나가던 김철민의 사업이 암초를 만났습니다. 젊은 혈기가 들끓어 오른 김철민은 사업 확장에 열을 올렸고 지역을 벗어나 타지에서까지 아파트건설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김철민은 회사내부의 준법질서와 경영투명성을 제대로 다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끝내는 김철민이 운영하던 회사 전무가 거액의 현금사기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회사는 부도를 맞았습니다. 부도이후 김철민은 재기를 꿈꾸며 김순자씨의 형제가족들 몰래 친정아버지에게 소유건물에 대한 담보성정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후, 김철민의 사업구상이 틀어져 건물이 경매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서 친정 아버지소유건물에 세 들어 있던 세입자들이 보증금 반환 받기위해 김순자씨의 친정 부모님을 무지막지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순자씨는 할 수 없이 거래하던 신협에서 5천만 원을 대출받아 세입자들의 보증금을 반환해야 했습니다. 이후 김순자씨는 신협에 2,000만원을 상환했으나 3,000만원이 빚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신협의 빚 독촉을 받게 되자, 김순자씨는 은행을 통해 신협 채무에 대한 전환대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공무원인 김순자씨의 배우자가 은행대출의 주 채무자가 되면서 배우자마저 채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결국 김순자씨의 친정아버지 소유 건물은 경매절차를 거쳐 외지인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후일, 지역주민들의 입담에 따르면 경매물건이 지역 요지에 자리 잡은 알짜배기라서 서로 욕심은 났지만 김순자씨의 친정아버지 체면 때문에 감히 입찰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건물은 타 지역사람에게 헐값으로 낙찰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김순자씨의 제부 김철민은 새로운 건설회사를 설립하고 다시 사업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김철민은 2000년 초 김순자씨 부부와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도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김철민은 김순자씨 부부와 가족들에게 예전에 거래했던 은행지점장들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을 했다며 자신감 있게 자신의 사업플랜을 설명했습니다. 김순자씨는 잘 알지 듣지도 못할 전문 사업플랜이었는데 다만 “장인 어르신의 명예를 꼭 회복해 드리겠다”라는 결의만은 확고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김철민은 본인이 신용불량자이기 때문에 김순자씨 부부가 여러 가지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거듭거듭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김순자씨는 제부 김철민의 재기를 돕는 것이야말로 친정아버지의 명예와 재산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용불량자이었던 김철민은 친지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회사의 임직원으로 등기를 했습니다. 김순자씨 와 배우자도 새로운 회사의 이사로 등기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김순자씨 가족들은 새로 설립한 회사가 사업자금을 대출할 때마다 시나브로 보증을 서거나 채무자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김철민은 사업을 시작하려면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으로부터 보증서를 받아 제일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철민의 이러한 요구에 따라 김순자씨 부부는 부득불 제일은행 대출 보증인으로 참여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로도 김순자씨는 김철민의 요구에 따라 아파트구입에 명의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김순자씨는 여러 은행대출에 대한 보증인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철민의 요청으로 김순자씨는 배우자 명의의 제일은행 신용대출 1억 원을 받을 때 보증을 섰습니다.
그 무렵, 김철민은 고속도로 일부 구간공사를 시행 한다고 했습니다. 김순자씨와 가족 모두는 김철민의 말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모두들 회사가 돌아가려면 자금이 필요할 것이고, 정부 시행공사를 하기 때문에 공사대금을 떼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고속도로 일부구간 공사건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김순자씨는 제부 김철민의 회사에서 자동차 구입하려고 하는데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증을 서주었습니다. 또한 그 무렵 김철민은 서류작성 할 것이 있다며 아예 김순자씨의 도장을 회사로 가져갔습니다. 그런 후에 김철민은 김순자씨의 명의로 경기도 지역에 소재한 임야 및 부동산 등 여러 건을 경매물건을 경락받았습니다. 김철민과 회사사람들은 당시 감정가 27억짜리 부동산을 7억여 원에 경락받았다며 흥분했습니다. 김순자씨는 경매물건 내용을 잘 알지도 못했고 마치 부동산투기처럼 여겨져 속으로 매우 언짢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조건이 아주 좋다며 흥분하는 터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김철민은 경락부동산을 담보로 농협 등으로부터 7여원의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순자씨의 제부 김철민의 이러한 모든 사업구상은 모래성과 같았습니다. 빚을 얻어서 회사 자산을 늘리고 그 자산을 담보로 또 빚을 내서 자산을 늘리는 과정에서 사고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한순간에 모든 재기의 꿈이 날아갔습니다. 이후 회사 경영이 파탄나면서 경락받은 토지며 부동산 등 모든 자산들이 다시 경매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는 김순자씨 명의의 5원 정도의 채무만 남았습니다.
그 와중에서 김순자씨의 배우자 역시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김순자씨의 배우자는 비록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지금까지 대과없이 잘 봉직해 왔습니다. 하지만 한 가족이었던 손아래동서의 탐욕적인 불장난으로 인해 공무원에서 퇴직을 해야만 했습니다. 김순자씨의 배우자는 퇴직이라는 마지막 방법을 동원하여 목돈을 마련한 후 그 돈을 모두 털어넣어 채무를 변제했습니다. 하지만 김순자씨 부부의 채무가 너무 커서 겨우 배우자만 빚더미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과중채무자의 저승사자 빚쟁이
이제, 김순자씨에게는 신용불량자란딱지가 붙었습니다. 그 즈음 신요불량자딱지는 이 땅에서 아무런 경제활동도 할 수 없다는 사회적 낙인과 같았습니다. 김순자씨는 망가 질대로 망가진 가정경제를 위해 무언가 돈벌이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신용불량자 처지인 김순자씨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실 IMF경제위기 이후 너도나도 대한민국가정주부들이라면 한번쯤은 해보았을 보험설계사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용노동뿐이었는데, 그조차도 은행통장이 압류되다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김순자씨는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없는 가운데,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채무금액을 알아보는 것조차 무서웠습니다. 김순자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는 빚 독촉을 당하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는 중 2010년경에는 김순자씨 가족의 살림살이에까지 경매가 붙었습니다. 하지만 살림살이 감정가가 34만 원이다보니 2번이나 경매가 유찰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들이 알까봐, 아이들이 얼마나 절망할까싶어서, 김순자씨 부부는 전전긍긍해야만 했습니다. 자식들에게만은 이런 아프고 쓰라린 경험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순자씨 부부는 자식들이 중, 고교를 다니는 동안 학원 한번 보내지 못했습니다. 김순자씨는 첫아이가 대학에 합격 했을 때, 비로써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학금대출 신청하러 갔다가 부모가 신용불량자라서 안 된다는 말에 김순자씨는 혼자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신용불량 부모를 둔 자식들은 학교도 못 보내는 가 싶어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결국에 아들은 친지들로부터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 갚는다는 조건으로 학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그 후 아들은 졸업을 하고 취업이 되어 지금까지 그 빚을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둘째 아이도 똑 같은 상황으로 대학을 다녔습니다.
또한 아이들도 대학을 다니며 남는 시간에 알바를 해야 했고, 온가족이 힘들게 살았습니다. 김순자씨는 식당을 전전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김순자씨는 가급적 교통비 들지 않는 곳을 찾다보니 작고 옹색한 식당만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식당들이 갑자기 망해 문을 닫는다든지, 제대로 급여를 주지 못하던지 해서, 여러 식당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순자씨는 마트에서도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신용불량자 처지라서 일용직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침9시부터 밤12시까지 일을 했으나 수입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발이 너무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잠든 중에도 몇 번씩 깨어 수면부족으로 항상 피곤하게 살았습니다. 김순자씨는 사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했고, 병원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김순자씨는 ‘족저 근막염’이라는 질환을 앓게 되었습니다.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발목과 종아리 근육까지 손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는 최소 8개월 정도 최소로 움직이고, 소염제 먹으면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순자씨는 식당, 마트 등 힘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물리치료비 5천원도 한 달이면 15만원이고, 식구들의 한 달 식품비와 같았습니다. 김순자씨는 일단 집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쉬다보니 어깨근육도, 팔꿈치도, 위험수위를 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서 헤어나기
김순자씨는 이대로 신용불량자인 채로 세월이 가면 자식들에게 또 다른 멍에를 지우게 될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또한 아무런 노후대책이 없는 빈곤 노인가구가 되어 사회의 짐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김순자씨는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개인파산면책이라는 법제도에 호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현재 김순자씨 가족의 소득은 본인과 배우자의 일용노동 소득을 합해 150만원 정도가 전부입니다. 이 소득으로는 김순자씨 부부가 한 달 생계를 꾸리는 것조차 부족합니다. 자녀들도 장성해서 결혼도 하고 각각의 살림을 살고 있으나 부모를 부양할 만큼 소득이 많지 않습니다. 현재, 김순자씨 부부가 살고 있는 집도 보증금 없는 월세 단칸방 집입니다.
이제, 김순자씨는 도저히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김순자씨는 하루속히 파산면책을 받아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서 벗어나 노후를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김순자씨는 젊은 날 가족이라는 인정에 끌려 잘못된 판단을 했고, 통한의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빚 없는 세상에서 살면서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봉사하는 노후의 삶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 부디 김순자씨의 이러한 꿈과 미래가 법원의 파산면책 결정을 통하여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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