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전쟁
저는 경상도 시골마을에서 어렵게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 슬하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난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정형편을 고려하여 인문계고등학교를 포기하고 공업계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저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전자통신 분야 공부를 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무렵 저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태권도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또한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나가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학교 생활을 하며 기독교신앙을 키워왔습니다. 하지만 가족들 중에는 아무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안에서는 저 혼자만이 외롭게 기독교신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목회자의 소명을 확신하고 신학대학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가족들은 저의 신학대학 진학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대학 입학의 뜻을 굽히지 않자 가족들은 대학등록금을 한 푼도 도와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저는 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신학대학 등록금은 제가 다니던 교회의 도움과 여러 교우들이 십시일반후원으로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신학대학 학자금과 생활비등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업장학금 및 근로장학금 그리고 아르바이트 등으로 겨우겨우 대학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저는 그렇게 신학대학 2년을 마친 후 도피하듯이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제대 후에 다시 신학대학에 복학을 했습니다.
빚을 내서 공부하다.
저는 제대 후 신학대학에 복학하면서 심하게 학자금과 생활비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자라는 학자금과 생활비를 대출을 통해서 마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는 세상물정에 어두워 정부학자금대출제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매양 저축은행과 대부업체로부터 고리의 일반대출을 받아 학자금 및 생활비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부생활 2녀여 동안 산와머니, 진흥저축은행 등 대부업체와 저축은행으로부터 고리의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후에야 한국장학재단에서 저리로 학자금대출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2005년 이후 신학대학원생 때부터 저는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대출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을 하고 나서 전도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도시의 큰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집안의 오랜 신앙뿌리를 가지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도회지 변두리나 시골 작은 교회를 전전하며 전도사로 사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통비이외는 아예 사례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 이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대부업체의 학자금대출을 상환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정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저의 목회진로를 심각하게 질문한 후, 개척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도시 변두리 주택가 지역에서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5만원 지하상가를 빌려 개척교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총각이었고 함께 개척교회를 돕겠다는 교우들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저의 처지에서 여기저기 큰 교회에 줄을 대고 후원을 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교회 운영비와 생활비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도 병행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오랜 태권도수련을 통하여 사범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태권도수련과정에 알게 된 지인들이 운영하는 태권도체육관이나 학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저는 학원생들을 지도하는 태권도사범 또는 학원생들을 위한 차량운행 등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끼고 절약해서 고리의 대부업체의 이자와 상환금을 냈습니다. 또한 저는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학원의 학생들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선교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우들이 한분도 없는 상태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몇몇의 아동과 중․고학생들 중심의 목회활동은 저의 소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생계와 교회운영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1년 2년 나홀로 개척교회를 하면서 심신이 지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정적으로 목회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젊은 나이에 개척교회를 하며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던 은사님과 지인들이 저에게 계속 공부할 것을 채근하셨습니다. 또한 저 역시도 기독교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소망으로 삼아왔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영성신학에 관련한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평소 존경하던 은사님의 추천을 받아 서강대신학대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영성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아직 우리나라에 영성신학 전공자들이 희소했기에 공부를 해볼만 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선 500-600만원이나 하는 사립대학의 학자금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모든 과정을 이수한 후, 기독교대학들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면 학자금을 갚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정부학자금대출’을 통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2-3일을 서울로 통학하면서 막대한 교통비와 생활비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차에, 저는 길거리 신용카드발급 영업사원으로부터 몇 개의 신용카드발급 받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발급받은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급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카드대출을 받아 기존의 대부업체 대출금 이자나 상환금을 갚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제가 영성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기존채무에 더해 카드채무까지 더해서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이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늘리고 더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채무가 생각만큼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막대한 학자금과 생활비 지출로 인해 고민에 빠져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동안 휴학을 해야만 했고, 영성신학공부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이미 시작한 공부이니 박사과정은 나중 일이고, 석사학위는 받아야한다고 성화를 댔습니다. 저는 다시 정부학자금대출을 받으며 2011년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석사학위만으로 기독교대학들에서 강의를 맡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빚을 갚기 위한 전쟁
현재, 저는 태권도체육관에서 태권도사범 및 차량운행을 하면서 월 13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살고 있는 집은 지하교회에 딸린 단칸방입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가 조금 올라 30만원입니다. 현재 저는 어떻게든 당면한 채무를 정리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목회사역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채무 상당부분이 고리의 대부업체대출이다 보니, 도저히 이자를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비싼 이자를 내고 나면 좀처럼 원금이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이자만 내고 원금채무는 연장 받는 일을 계속 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카드채무, 대부업체와 학자금대출 등은 저의 채무변제의 한계점을 넘어섰습니다. 저는 그동안 소위 카드돌려막기라는 것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이마저도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채무를 증대시키고, 채권자에게 더 큰 피해만 줄 뿐이라고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 최선의 방법으로써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했습니다. 공동선을 실천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아야 할 목회자로써 원치 않게 채권사와 사회에 피해를 주게 되어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판사님께서 저의 상황과 처지를 이해주시고 선처해 주시기를 바랄뿐입니다. 제가 미래의 목회의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저의 앞으로의 삶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공동의 유익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두 손 모아 간곡하게 청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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