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이야기
저는 서울에서 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은 섬유계통의 사업을 하셨는데, 저는 장차 아버님의 사업을 돕기 위해 공업전문대 기계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기계과는 저의 적성에 맞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버님은 섬유산업관련 특허를 취득하신 후, 충청도의 작은 도시로 내려와 특허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도 아버님과 충청도로 내려와 아버님의 사업을 도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슬하에 1녀1남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신청인의 아들은 지적장애1급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후 저는 여러 가지 심적인 고통과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지적장애1급인 아들을 양육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1980년 중반 아버님의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그 충격으로 아버님이 중풍을 맞아 쓰러지시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그 후, 부모님들은 도회지 살림을 정리하시고 충청도 깊은 시골에 집을 얻어 요양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버님의 사업이 부도가 난 후, 저는 아내와 함께 대도시로 나와 재래시장에서 화장품 및 속옷을 판매하는 가게를 냈습니다. 그 이후 가게가 자리 잡히면서 가게 운영을 아내에게 맡기고 저는 여행사에 취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작은 빌라 한 채를 내 집으로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버님의 사업부도 이후 어수선했던 저의 가정도 삶의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온 가족들의 먹거리 새로운 사업을 찾아
그러던 1992년 경, 서울에서 문구류 중도매상을 하던 남동생과 직장생활을 하던 다른 가족들이 힘을 합해 충청지역에서 손꼽히는 큰 문구점을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역시 가족들과 함께 문구도매업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남동생과 가족들은 각자의 전세금 및 퇴직금을 내어놓았습니다. 저 역시 아내가 운영하던 재래시장의 가게를 정리했습니다. 그러고도 자금이 모자라서 저의 집을 인수할 문구점 사장에게 근저당 설정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 후, 저의 집에 대한 저당권설정은 제가 인수한 문구점 전 사장과 채무관계가 있었던 동아교재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족 3남매는 다함께 문구도매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족 3남매는 상호도 새롭게 고쳐 달고 희망찬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문구점을 인수인계할 때, 전 사장은 재고물품들을 신제품으로 교환하는 문제와 원할 한 영업승계에 협조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전 사장은 곧바로 지역의 다른 여러 문구점을 합쳐서 주식회사 형태의 대형문구회사를 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 사주는 저와의 처음 약속을 모두 저버렸습니다.
그러는 통에 저희 삼남매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시작한 문구점은 졸지에 초라한 중소도매문구로 전락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영업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희 문구점은 기존의 고객이었던 소형문구점을 통하여 새로운 거래처를 소개받아 더 크게 성장하는 것을 경영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전 사장의 배신으로 인해 기존의 고객문구점마저 주식회사형태로 설립된 전 사장의 대형문구점에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인수한 재고물품들도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들에 밀려 전혀 판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저희 가족 3남매가 모든 것을 걸고 시작한 문구점은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치게 되고 말았습니다. 저희 문구점은 초대형 문구도매상에 대응하기 위한 계속 투자압력과 재고물품 누적으로 인한 영업 손실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에 이르러 저희 가족 삼남매는 문구점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구점을 정리하면서 저는 모든 재고물품들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에 허름한 창고를 얻어 재고물품들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중고 봉고차를 구입해서 지방의 작은 문구점들을 상대로 방문판매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장사를 해도 매출이 보잘 것 없었고 남는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할 수 없이 다른 문구점에서 판매원으로 취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휴일에는 시골 작은 문구점을 돌면서 문구 및 문구점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잡화들을 판매 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시도는 더 큰 채무를 낳고
그러다보니 아내는 저의 수입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을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아내는 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0년 대학가 근처에 호프집을 차렸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여러 지인들을 통하여 호프집 개업비용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지적장애1급인 아들만 홀로 남겨둔 채,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아내와 자주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가계에 큰 도움이 될 만큼 호프집영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무렵, 문구점을 정리하고 택시운전, 건축노동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오던 남동생이 전자타운 영업사원으로 취업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생은 컴퓨터관련회사를 창업했습니다. 그때 남동생은 신협에서 대출을 받았고 저는 남동생의 요청으로 대출보증을 섰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제가 남동생의 신협대출에 보증서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남동생은 문구점을 정리하면서 모든 생활기반을 잃은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한 가족의 장남으로써 남동생의 새로운 출발에 보증으로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 저의 책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로 인해 저희부부는 더 많은 갈등을 겪게 되었고, 관계도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남동생은 영업을 통하여 지방 대학교와 컴퓨터관리 업무협약을 맺었고,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렇게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자, 남동생은 문구점을 정리하면서 잃었던 것들을 한꺼번에 복구할 욕심으로 부동산에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동생은 욕심으로 눈이 어두웠는지 계획부동산업자들에게 걸려들어 부동산투자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남동생은 경기도에 임야를 매입해서 아파트를 짓겠다는 부동산기회투자업자에 속아 거액을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기이었고 남동생의 부동산대박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채무의 끝은
그렇게 남동생으로부터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된 신협은 저의 집을 가압류했습니다. 그리고 2003년 9월 법원으로부터 강제경매 개시결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집은 이미 1992년 문구점을 인수하면서 동아교제주식회사에 근저당이 설정되었습니다. 또한 2002년 에는 저와 거래가 있던 문구류포장지 영업소에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협은 경매 배당금으로 채권액 중 일부만을 회수했습니다. 현재 저에게는 원금과 이자포함 38,218,722원이라는 신협대출보증채무가 남겨져 있습니다. 또한 희망모아에 구LG카드 채무 1,509,096원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던 집을 경매로 날린 후, 저는 한동안 충청도 시골 부모님 집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저는 아내와 합의 이혼을 했습니다. 사실, 아내와 저는 이미 아내가 저의 반대에 불구하고 호프집을 열 때부터 사이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잃고 아내와 이혼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무엇이든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2006년 도심을 벗어난 변두리에 월세 방을 얻어 지적장애1급인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용직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 왔습니다. 그러는 와중에서 집주인은 저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겨왔던 것 같습니다. 집주인은 동사무소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지적장애1급아들과 함께 뚜렷한 직장도 없이 어렵게 사는 저의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2008년 동사무소 사회복지공무원이 실태조사를 나왔고 저와 자녀는 수급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지적장애1급인 아들과 함께 수급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들은 장애아동들이 다니는 장애인학교에 재학 중입니다. 딸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렵게 대학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를 마치고 휴학 중입니다. 딸아이는 나름대로는 알바 일을 하면서 제 손으로 학비를 벌어 복학하기를 꿈꾸었으나 매우 어려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현재는 단칸 월세방에 딸아이와 함께 살수가 없는 처지라서 따로 살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택배회사 물류센터에서 일용직으로 야간물품 분류작업을 하면서 한 달에 100만원을 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저는 오십 중반의 나이에다 허리통증과 관절통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는 터라, 얼마나 더 이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늦게나마 평생교육원 등에 등록하여 사회복지사자격 얻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적장애1급인 아들을 돌보며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신용불량자에다 채무자신세이지만 아직 자립이 요원한 딸과 지적장애1급인 아들이 있습니다. 또한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모셔야만 하는 한 집안의 가장입니다. 저는 아직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의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며 자립할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의지도, 바람도 신용불량자라는 굴레를 쓰고 극심한 빚 독촉에 시달리다보면 한낱 물거품이 아닐까 생각되기 일쑤입니다. 부디 법원이 한 집안의 가장인 저의 이러한 의지와 바람을 헤아려 주기를 고대합니다. 제가 신용불량자라라는 굴레를 벗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추가: 위 내담자분은 바라던 대로 법원으로부터 파산면책결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평생교육원학습을 통하여 사회복지사자격도 얻었습니다. 비록 늦은 나이지만 사회복지분야에서 일을 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 내담자 분에게 채무의 끝은 파산면책을 넘어 새로운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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