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것들을 카이사르에게 : 예수의 하나님나라 갈라치기 - 민중들의 반란을 선동하다!
마가복음 1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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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말로 예수를 옭아매기 위하여’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 사람들 중 몇몇을 예수에게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에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진실하시고 어느 누구라도 당신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사람의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진리 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합당합니까, 아니면 합당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쳤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바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의 음모를 알아채신 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너희가 나를 시험하느냐? 너희는 내가 볼 수 있도록 데나리온 한 잎을 나에게 가져오라!”
곧바로 그들이 가져왔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하셨다.
“이 초상과 새긴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그러자 그들이 예수께 대답했다.
“카이사르(황제)의 것입니다.”
되받아,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카이사르의 것들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어라!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 때문에 깜짝 놀랐다.
낱말풀이
* 아그류소신 ἀγρεύσωσιν 옭아매다. 아그라 ἄγρα ‘사냥’이라는 명사에서 왔다.
* τινας τῶν Φαρισαίων καὶ τῶν Ἡρῳδιανῶν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 사람들 중 몇몇을
* ἔξεστιν δοῦναι κῆνσον Καίσαρι ἢ οὔ; 카이사르(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합당합니까, 아니면 합당하지 않습니까?
* εἰδὼς αὐτῶν τήν ὑπόκρισιν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의 음모를 알아채신 후
* 휘포크리신 ὑπόκρισιν 음모(가장-假裝),
* 데나리온 δηνάριον 로마제국황제가 발행하는 화폐(황제의 권력을 상징)
* 카이사로스 Καίσαρος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소유격
* 에크세타우마존 ἐξεθαύμαζον 미완료동사 깜짝 놀랐다.
시작하는 말
21세기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 대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는 무엇일까? 분노와 저항, 해방과 자유에 대한 갈망, 반란일까?
아니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경외와 숭배, 순종과 욕망이다. 실제로 21세기 대한민국의 모든 청소년들은 초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맘몬․자본권력에 대한 순응, 순종, 욕망을 학습한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질서와 이데올로기를 배우고 익힌다. 온 몸과 마음으로 철저하게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훈련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학교를 나와서는 일생동안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의 싸움터를 배회한다. 경쟁에서 지면 안 된다. 지면 끝장이고 죽음이다. 그러다보니 모두 다 지는 싸움을 하면서도, 자신이 지고 있다는 사실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피투성이로 눕고, 피투성이로 일어나,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다. 하나같이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좀비들이다.
실제로 솔직하게 대한민국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피라미드를 그려보자. 우리의 위치와 지위는 어디쯤인가?
맨 꼭대기에 1% 부자들이 있다. 실제로는 0.1% 재벌들이 군림한다. 대한민국 재벌들은 사람과 노동,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인터넷 네트워크 수준만도 못하다. 그들에게 사람이나 노동은 돈 주고 얼마든지 사면되는 것이고, 언제든 사서 부리다 아무렇게나 버리면 그만이다.
그 재벌과 부자들 밑으로 2%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내부자들이 자본을 대리해서 민중들에게 위세를 부린다. 고급관료들이 맨 앞잡이로 나서고, 종교․정치․사법․언론․교육․문화 등 우리사회 엘리트․기득권 세력들이 뒤이어 맘몬․자본권력에 대한 충성경쟁을 벌인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 핵심세력이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지시를 받들어 권력을 행사하는 공적·사적 도구들이다. 오직 그들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게만 책임과 충성을 다할 뿐이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폐해와 무거운 짐과 고된 노동은 모두 민중들에게 떠넘긴다.
그들은 룸살롱이나 고급식당, 또는 골프장을 드나들며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를 위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음습한 음모와 술수를 논의한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를 위해 여론과 시류를 조작한다. 정부와 공공기관 등 모든 권력체계를 통하여 조작된 여론과 시류를 민중들에게 전파하고 확대한다.
그 고급관료들과 사회엘리트․기득권세력 밑으로 10% 남짓, 고액 임금노예이거나 소액자산가들이 좋은 때를 만난 듯 여유롭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이거나 전문직업인, 또는 성공한 자영업자들이다. 그들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외부 수혜자들로써 지배체제에 의해 조작된 여론과 시류에 맹종한다. 양극화와 불평등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하는 민중들 위에서 자기들의 운(運) 때를 자랑하고 즐거워한다. 그들은 시나브로 맘몬․자본권력 지배이데올로기에 순응해온 자신들의 삶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언제든, 어디서든 지배체제가 퍼트리는 여론과 시류에 편승하고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이고 삶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마지막,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외부 수혜자 밑으로 90% 나머지 사람들이다. 너나 나나 그저 그렇고 그런 무지렁이들이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피라미드에서 자신의 위치나 지위를 재보고 따질 것도 없는 소시민들이다. 그래서 다 같이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내부자들로부터 개․돼지 취급을 받는 민중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제 앞에 놓인 작은 이익과 권리를 쫓아 서로 간에 피투성이 싸움을 멈추지 못한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가 던져주는 떡 한 덩이, 고기 한 점을 따라 이리저리로 날뛰다가 기진맥진하기 일쑤다. 아무도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 대해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는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억압과 착취, 음모와 술수가 명백히 드러난 상황에서도 감히 분노하지 못한다. 언감생심 저항과 반란을 꿈꾸지도 못한다.
그러다보니 민중들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내부자들로부터 개․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속으로 절망하고 낙담할 뿐이다. 화병으로 한이 맺힐 뿐이다. 그러다가 죽을 자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써 개인적인 일탈과 폭력으로 스스로를 학대한다. 누구는 도가 지나쳐 자신과 가족, 또는 이웃들의 생명을 해치기도 한다. 온 가족동반 자살, 묻지 마 칼부림,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왕따․희생양 만들기 등, 자신과 사회공동체에 대한 자해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21세기 시대 상황에서 본문사건의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나라 갈라치기 - 민중들의 반란'을 선동한다. 본문사건은 로마제국 지배체제 내부자들과 예루살렘 민중들 사이를 하나님 나라로 갈라치기하는 맹렬 예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님나라 갈라치기, 예루살렘 민중의 반란을 선동하는 예수의 육성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끄는 말
본문사건 서두에서 ‘그들은’ 누구일까? 바로 11장 27절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한통속으로 묶여도 아무런 이의를 달 필요가 없는 유대종교․사회의 핵심기득권세력이다. 예수시대의 대제사장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핵심 내부자이다. 서기관들도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주요 기득권세력이다. 이들은 로마제국 지배체제 안에서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예수시대 유대교 율법학자로, 로마제국 지배체제 관료로 행세했다. 장로들도 로마제국 지배체제 안에서 유력한 유대가문들의 가부장들로서 대토지주 들이었다. 성서는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체제의 주요 기득권 세력들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말씀은 예수시대에 서로 적대적인 두 당파 이름을 한 패거리로 언급하고 있다. 먼저는, 바리새파인데 ‘구별된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바벨론제국에 의해 유대왕국이 멸망한 이후, 율법과 전통을 굳게 지켜나가고자 하는 유대교 신앙결사체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율법과 전통을 철저히 지키고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며 십일조를 바쳤다. 그렇기에 이들 공동체 일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일정한 시험기간을 거쳐야만 했다. 이후 율법과 전통을 지키기로 맹세해야만 그들의 공동체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보니 바리새파 사람들은 외세에 대하여 적극적인 저항과 투쟁을 벌여 왔다. 이들의 신앙열정과 전투력에 힘입어 기원전 164년부터 63년까지 100년간 유대인들의 마지막 왕조(마카비왕조)가 건설되기도 했다. 예수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유대민족 안에서 2%정도 소수이지만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집단이었다. 나아가 이들 바리새파로부터 유명한 율법사나 랍비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본문말씀에서 언급되는 헤롯당은 유대민족의 매국노집단이다. 헤롯당은 로마제국에 빌붙어 권력을 쟁취한 헤롯 왕가와 더불어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헤롯 왕가에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가 탄생하던 무렵에 헤롯대왕이 죽고 그의 큰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헤롯 아켈라오는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고, 로마제국에 의해 왕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유대지역은 로마총독의 관할 하에 편입되었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하던 ‘헤롯 안티파스’만 왕권을 유지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의 왕권의 안정을 위해 팔레스타인 전역에 헤롯당을 파견하여 정치․종교․사회소요를 진압하는 일에 앞장섰다. 혹시라도 팔레스타인지역에 민란이 일어나 로마군대가 개입하게 되면, 자신의 왕권마저 잃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본문사건에서 유대인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던 바리새파와 헤롯당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함께 예수의 말꼬리를 트집 잡아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를 꾸몄다. 도대체, 바리새파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민족 반역자집단인 헤롯당과 손을 잡았을까? 예수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서, 바리새파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반역자 헤롯당과 손을 잡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 과부와 고아, 억압받고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심지어 유대종교․사회에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혀 아무도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 세리와 창녀들까지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하며 특권․기득권을 누려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는 물론, 전통 유대종교를 뿌리부터 해체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빤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사람으로써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벌여 왔다. 이제 예수는 자신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정점을 찍는 사역으로 예루살렘 입성을 결행했다. 그것은 곧 예수의 로마제국 십자가처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인해 예루살렘 도성 전체가 큰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복음서들은 이러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장면을 열광적이며 소란스러운 민중들의 외침으로 서술하고 있다.
복음서들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감람산 베다니를 출발해서 예루살렘성전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한다. 그 행진 대열에서 민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갈채가 있었다. 수많은 민중들이 예수의 가시는 길 앞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펼쳤다.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고,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유대민중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축복받으소서!”라고 외쳤다.
이렇게,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때가 유대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다. 예루살렘 도성은 지중해세계 전 지역에서 순례를 온 유대인 디아스포라로 넘쳐났다. 온 도시가 들떠서 '이분이 누구냐'라고 물었다. 또 온 도시 안에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언자 예수다'라고 소문이 났다.
그런데 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언자 예수는 예루살렘 기득권자들 그 누구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했다. 도리어 환영받기는커녕, 처음부터 예수는 예루살렘 기득권계층으로부터 살해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예루살렘 최고 종교지도자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루살렘 기득권 계층들의 집회석상에서 노골적으로 '예수를 살해하자'고 선동했다.
“예수를 그대로 두면 예루살렘 온 민중들이 예수를 따를 것이다. 그렇게 되어 로마제국 군대가 예루살렘에 투입되면 우리가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 한 사람을 죽이면 유대민족도 살고 너희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예루살렘 종교․정치․사회․경제 기득권자들은 왜 이토록 예수를 죽이려고 안달을 했을까?
이제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종교․사회 엘리트이며 민족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파가 매국노집단 헤롯당과 손을 잡고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음모를 꾸며야 했던 이유를 찾아가 보자.
이와 관련하여 복음서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과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 놓고 있다. 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두 가지 성격 때문이다. 먼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본문말씀 사건 역시 로마제국의 폭력과 전쟁, 피와 죽음, 약탈과 착취와 억압에 대한 분명한 저항을 표현한다.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비폭력저항을 통하여 대안세상을 지향함으로써, 로마제국 지배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 사회변혁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점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로마군대의 폭력과 전쟁, 피와 죽음으로 이룩한 팍스로마나(로마제국의 평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약탈과 착취와 억압의 독점경제를 따르지 않는다. 맨 밑바닥에는 노예와 농노, 소작농, 하층민이 있고 맨 꼭대기 층에 황제와 극소수 기득권계층이 군림하는 피라미드식 빨대경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거대한 피라미드 기계구조와 같은 제국주의 사회구조를 그 토대부터 부정한다. 또 하나,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예루살렘 성전제사 종교의 기득권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로마제국에 빌붙어 민중들의 진액을 빨아먹고 생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 종교권력에 대한 거부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로마제국의 권력과 힘과 부에 빌붙어 있는 예루살렘종교 기득권계층들의 모든 사익을 부정한다.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사람들이 가난한 민중들에게 종교적 죄의식을 쇠뇌하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종교행태를 맹렬하게 규탄한다. 부자들이 로마제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 가난한 농노들과 소작인들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것을 죄악이라고 성토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예전의 유대 민중항쟁처럼 지금 당장 피와 죽음과 전쟁을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체제의 토대를 흔적도 없이 무너트리게 될 것이 빤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예루살렘의 최고 종교지도들인 제사장과 바리새파사람들의 위선과 오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불행하도다. 너희 위선자 율사와 바리새인들아!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나라의 문을 잠가 버렸다. 너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않을뿐더러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도록 가만두지 않는구나! 불행하도다. 너희 율사와 바리사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온천지를 쏘다니다가 개종자가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아들을 만드는 도다. 불행하도다. 너희 눈먼 길잡이들아!”
이처럼 예수는 틈만 나면 제자들에게 율법학자와 서기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사람들의 위선과 오만을 경계하셨다.
“바리새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종교적 짐들을 꾸려서 가난한 민중들의 어깨에 메운다. 그러고도 자기들은 그것들에 대해 손가락 하나로도 움직이려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사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민중들과 자신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고 차별지음으로써 종교․사회․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이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오직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는 세상이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 세상이며, 박해받는 사람들이 해방과 자유와 구원을 얻는 세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이 땅의 하나님나라운동의 출사표를 던지면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이는 주님이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보내셨다. 가나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라고, 또한 눈먼 자들에게 다시 봄을 선포하라고
억눌린 이들을 해방하여 보내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라고.”
이러한 예수시대의 상황 속에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민중들의 열광과 동요는 로마제국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에 빌붙어 살아온 예루살렘 종교기득권 계층들에게도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 왔다. 나아가 유대인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마저도 유대민중들 사이에서 자기들의 종교․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이익을 상실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리낌도 없이 매국노집단인 헤롯당과 손을 잡고 예수를 함정에 빠뜨릴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예수께 로마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합당 하냐, 아니냐? 라는 질문을 던져 예수를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만들려고 획책한다.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예수가 대중 집회를 이끌고 있을 때, 많은 청중들의 면전에서 이 질문을 던진다. 만약, 예수가 ‘로마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말한다면 예수는 유대 민중들에게 돌을 맞을 것이다. 또 만약, ‘로마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예수는 그 즉시 로마제국의 반역자가 되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이처럼,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은 예수의 목에 건 올무를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해 예수를 다그치는 질문 한 가지를 더 보탠다.
“우리가 바쳤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바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도멘 δῶμεν'은 과거가정법 동사이다. 우리말 성서는 이 문장을 현재형으로 해석했다.
“우리가 바칠까요, 말까요?”
그러나 이 헬라어 동사는 문자 그대로 '과거 시상에 따라 번역'해야만 본문말씀의 문맥이 살아난다.
“우리가 바쳤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바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이로써 본문사건 핵심논쟁은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에까지 통 털어 로마제국 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로 확대 되었다.
이제 예수는 빼도 박도 못하고, 어디로도 도망칠수 없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과 예수의 청중들마저 모두 숨을 죽이고 예수의 입만 바라보았다. 지금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의 사악한 음모에 걸려들고 말았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이 예수께 늘어놓은 찬사들을 보면 그들이 정말 악랄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그 어떤 예수의 추종자들보다 더욱더 예수를 찬양한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진실하시고 어느 누구라도 당신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사람의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진리 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두말할 필요 없는 진지하고 멋있는 예수신앙고백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러한 음모와 술수는 평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위선과 오만을 그대로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를 함정에 몰아넣고 로마제국의 반역자라는 올가미를 씌워 예수를 처단하려는 음모와 술수를 가지고 예수에게 왔다. 그들은 그러한 음모와 술수를 감쪽같이 숨긴 채 낯간지러운 예수찬양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음모를 알아채셨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말씀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들의 ‘음모’를 '휘파크리신 ὑπόκρισιν'이라고 표현한다. 그리스 전통에서 이 낱말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읽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시대에 이르러 이 낱말은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욕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따라서 이 낱말로부터 '휘포크리노마이 ὑποκρίνομαι 연극하다’라는 동사가 나왔다. 어떻게든 이 땅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기수, 시대의 진리와 진실의 사람 예수를 사냥하려는 유대 성전제사종교 권력․기득권계층의 사악함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사실, 이러한 종교권력의 사악함은 예수시대 뿐만은 아니었다. 인류 종교역사 안에서 주구장창 있어왔던 일이다. 또한 오늘 21세기 한국 기독교회와 여타 유수한 종교들 안에서도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21세기 종교엘리트 기득권세력은 맘몬․재벌권력 지배체제의 가장 효율적이고 유능한 지배도구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에게 엉뚱한 것을 요구하신다.
“무엇 때문에, 너희가 나를 시험하느냐? 너희는 내가 볼 수 있도록 데나리온 한 잎을 나에게 가져오라!”
그러자 곧바로 그들이 로마제국의 화폐 한 데나리온을 가져와 예수께 내밀었다. 유대민중들이 온갖 고생 끝에 손에 넣은 후, 치를 떨며 로마제국 황제에게 인두세로 바쳐야만 했을 로마화폐 한 데나리온이었다. 아마도 헤롯당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이 로마제국의 화폐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곧바로 그들의 전대에서 한 데나리온을 꺼내 예수께 내밀 수 있었다.
그러자 대뜸 예수가 그들에게 물었다.
“이 초상과 새긴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예수께 대답했다.
“카이사르 - 황제의 것입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화폐이다. 당연히 로마황제가 발행한다. 거기에는 황제의 초상과 황제를 찬양하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예수시대 로마황제 티베리우스 데나리온 한쪽 면에는 황제의 흉상과 ‘티베리우스 황제, 지존한 신의 지존한 아들’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또 다른 면에는 황제의 또 다른 존칭인 ‘대제관’이라는 명문과 함께 황제의 모친 ‘리비아’의 좌상을 새겼다.
이렇듯 예수는 로마황제의 데나리온을 예수의 눈앞으로 들이대며 의기양양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 나아가 유대인 청중들을 향하여 일갈한다.
“너희는 카이사르의 것들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어라!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의 사악한 음모를 파악하시고 도리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신다. 예수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려 로마제국의 반역자라는 올무를 씌우려고 몰려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 그리고 예수의 청중사이를 ‘하나님나라로 갈라치기’하셨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예루살렘 민중들에게 반란을 선동한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자신들과 예루살렘 민중들 사이를 ‘하나님나라로 갈라치기' 하는 예수의 선동으로 인해 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21세기 교회들은 본문사건의 이 극적인 대역전 상황을 너무나 엉터리로, 너무나 엉뚱하게 해석한다.
"예수께서 지혜롭고 재치 있는 답변으로 위기를 모면하셨다."
사실 이런 엉터리 해석은 서구기독교회의 왜곡된 예수신앙에서 기인한다. 서구기독교회는 본문말씀을 ‘교회가 세속정치․경제 권력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이라고 믿어왔다. 더 말할 것도 없이 21세기 한국교회도 본문사건을 ‘교회가 시대의 사회․정치․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불의에 침묵하도록 강요하는 근거’로 오용하고 있다.
참으로, 본문사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참일까? 아니다. 본문사건에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의 음모를 눈치 채시고도 전혀 동요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볼까 머리를 쓰거나 몸 달아 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의 사악한 음모를 꿰뚫어보시고,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유대청중들을 꾸짖으신다.
“너희는 카이사르의 것들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어라!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이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을 아예 도외시 해버린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와 로마제국 지배체제를 갈라치기’하신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예루살렘 민중들에게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대한 반란을 선동한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와 로마제국 지배체제를 적당히 얼버무려 살면서 제국주의 욕망을 추구하는 예루살렘 유대인 청중들을 소리 높여 야단치신다. 예루살렘 유대인 청중들에게 ‘하나님나라냐 로마제국이냐’ 선택하라고 윽박지르신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의 구별된 자들’이라고 떠들어 대면서 로마제국의 지배체제에 휘둘려 살아가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난한다. 아니, 조롱하신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실제로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포악무도한 통치를 받아들이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앙과 양심의 번민을 적절히 버무려 누리 것은 사이비신앙 카타르시스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말성서 번역은 본문사건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우리말성서 번역은 이 문장에서 주어를 삭제했다. 그러고는 ‘가이사의 것들’이라는 목적어를 주어로 바꿔치기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갈라치기’, 예루살렘 민중들에게 반란을 선동하는 열혈예수를 본문사건에서 지워버렸다. ‘로마제국황제의 통치를 받아드릴 것이냐, 하나님나라를 살 것이냐’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주체를 삭제해 버린 것이다.
또한 본문사건에서 사용된 14절의 ‘바치다’와 17절의 ‘되돌려주다’(우리말성서는 두곳 다 ‘바치다’라고 번역)는 분명하게 서로 다른 동사이다. 앞선 14절에서 ‘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사는 '디도미 δίδωμι'라는 동사이고, 뒤에 17절에서 ‘되돌려주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동사는 '아포디도미 ἀποδίδωμι'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되돌려야 드려야 하는 ‘하나님의 것들’은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의 필요와 쓰임’에 넘치게 끌어 모은 우리의 ‘부’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필요와 쓰임’에 넘치게 끌어 모은 우리의 ‘부’는 다른 이들의 ‘쓰임과 필요’를 빼앗아 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사건을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를 살아가는 약삭빠른 처세술’로 해석할 수 없다면, 우리말 성서의 위와 같은 번역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순교자로서 각오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예수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반란자로 몰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의 모함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작당하여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고 로마제국의 반역자라는 올가미를 씌우려는 음모 앞에서 당당하셨다.
도리어 예수는 이들의 음모를 통하여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갈라치기 하셨다. 그럼으로써 예루살렘 히브리 민중들의 삶의 반란을 선동하신다. 너희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빌붙어 얻은 모든 이익과 기득권들을 로마황제에게 되돌려 주어라! 로마제국의 피와 죽음과 전쟁, 약탈과 착취와 독점 지배체제에 대하여 과감하게 반란하라!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세상으로 탈출하라!
이것이 예루살렘 유대민중들에 대한 예수의 강력한 요청이다. 그러므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갈라치기, 예루살렘 민중들에 대한 반란선동에 깜짝 놀라 자빠지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깜짝 놀라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에크세타우마존 ἐξεθαύμαζον'이라는 미완료동사이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의 ‘놀람’은 잠시잠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놀람의 여진이 그들의 삶으로 전이되었다. 예수에게 로마제국의 반역자 죄목을 뒤집어 씌워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이후에도 여전히 안절부절 이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유대민중들을 향한 로마제국과 하나님나라 ‘갈라치기’는 예루살렘 모든 기득권자들의 사익을 끝장내는 위험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맺는 말
21세기 대한민국의 맘몬․재벌권력 지배체제 내부자들, 사회엘리트 기득권세력들은 사익과 시류를 따라 언제라도 불의와 불법을 망설이지 않는다. 이러한 세태야말로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사이비(似而非)권력들이 제 세상인양 나댈 수 있는 밑바탕이다. 그들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다. 옛부터 우리사회 엘리트 구성원들은 사익과 시류 앞에서 언제든 불의와 불법에 부화뇌동해 왔었다는 것이 그들의 사회적 경험이다.
참으로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지배체제가 조작하는 여론과 시류를 옳다고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21세기 모든 사람들이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생활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학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배체제의 불의와 불법을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리어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반사회적이고 반인간적인 여론과 시류를 아무생각도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참으로 우리는 시나브로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노예기계로 화석화해 가고 있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구조에 의지하여 불의와․불법을 통한 성공을 욕망한다. 지배체제의 불의와 불법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인간적인 동료애와 호의로 호도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누구도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고 맞서서 반란을 꿈꾸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은 매우 불순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우리는 시대의 진리와 진실을 그냥 덮어두고 외면할 수 없다. 시대의 진리와 진실 앞에서 여실히 자신의 뜻과 의지를 표명하고 물러서거나 타협하지 않은 것이 참된 예수신앙인의 숙명이다. 시대의 진리와 진실 앞에서 물러서거나 불의와 불법에 부화뇌동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리와 진실 앞에 서있는 참된 예수신앙인이 아니다. 시대의 진리와 진실 앞에 선 신앙인들이 진리와 진실을 외면하거나, 그 앞에서 물러서거나, 뒤돌아 불의와 불법에 부화뇌동하는 행태는, 진리와 진실에 대한 신앙 도적질이다.
이제 우리가 21세기 우리시대의 예수신앙인 임을 자처한다면 본문말씀에서처럼 예수의 하나님나라 갈라치기를 통하여 우리시대의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 대한 신앙반란을 선동하고 조직해야 한다. 헬조선, 삼포․오포․칠포․달관세대, 금수저․흙수저, 청년실신 등 우리 사회상황에 대한 저항의 봉화를 올려야 한다. 4.16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처벌을 요구해야한다. 사드배치 한반도 전쟁위기 등에 국민주권 철퇴로 맞서야 한다.
지금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로 인한 고난과 절망이 온 누리에 사무치는 때라 더욱 그렇다. 참으로, 우리시대의 예수 신앙이라면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를 거슬러 스스로 고난과 탄압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억압과 착취, 음모와 술수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폭로해야 하지 않을까? 시대의 진실과 진리 앞에 스스로를 세우고 날마다 예수신앙으로 자신의 삶의 행동을 결단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값싼 은총을 받아 누리며 희희낙락 ‘청부론’이나 노래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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