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운동의 태동 1 새로운 민중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11
마가복음 안내
마가복음의 저자는 정말 마가일까? 실제로 복음서를 집필한 저자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밝힌바가 없다. 나아가 대부분의 성서시대의 민중이야기는 공동체 자신들의 이야기로써 작자미상이다. 다만 시대가 변하면서 여러 복음서들이 저술되기 시작했고,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또한 그 복음서의 진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권위 있는 이름을 빌려 썼을 뿐이다.
그렇지만 마가복음의 집필시기와 그 공동체독자들을 밝히는 것은 마가복음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점에서 모든 성서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집필시기를 주후70년경으로 인정한다. 주후66-70년,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전쟁은 유대인에게 참혹한 파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유대인 예수신앙공동체’에게도 다시없는 비극이었다. 반면 로마제국에게는 이 전쟁이야말로 동방의 모든 식민지민족들에게 보내는 공포와 전율의 경고로써 위대한 승리이었다.
이렇게 마가복음의 집필시기를 70년경으로 볼 때,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로마제국 동방지역에 있었던 ‘비유대계 예수신앙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궤멸된 예루살렘 유대인 예수신앙공동체의 역사적 예수의 전승들을 자신들의 신앙전승으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의 신앙 삶에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대에 전수해야 할 책임까지 스스로 떠안았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의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 1세기 예수신앙 공동체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믿었고 선포했다. 특별히 바울은 로마제국의 비 유대인들에게 이 진리를 선포하는데 전심전력했다. 그러는 와중에서 로마제국의 아주 보잘 것 없는 변방 갈릴리일대에서 일어난 역사적 예수운동의 실체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유대계 예수신앙공동체 안에는 예수의 죽음을 통한 죄 씻음과 그의 부활로 인한 영생의 소망만 남게 되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적 예수의 삶과 말씀과 사상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후의 초월적 세계와 영생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러는 통에 예수신앙공동체 안에서 역사적 예수는 사라지고,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예수만이 선포되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1세기 예수공동체의 신앙행태 속에서, 마가복음저자는 십자가에 처형된 역사적 예수의 전 생애를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부활과 재림과 영생의 예수를 선포할 수 없다고 믿었다. 저자는 역사적 실체로써 인간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로 섬기며, 갈릴리 민중을 형제로 사랑하다가, 처절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복음서작업을 수행했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오늘도 은밀하게 민중들의 삶속에 현존하시는,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의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이시대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고 삶에 새겨나간 역사적이고 실체적인 예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예수운동의 태동 - 새로운 민중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읽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예언자 이사야에 기록된 것처럼,
보라 ! 내가 나의 사자를 너의 앞서 보낸다.
그가 너의 길을 닦을 것이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너희는 그의 오솔길들을 손질하라!
세례요한이 ‘죄 탕감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광야에 나타났다.
그러자 유다의 온 마을과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들을 고백하면서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고
그의 허리에는 가죽 띠를 매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그가 이렇게 선포 하곤 했다.
“나보다 더 힘이 있는 분이 내 뒤에 오시오.
나는 꾸부려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소.
나는 물로 당신들에게 세례를 주었소.
그러나 그분은 거룩한 영으로 여러분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오.“
그리고 마침내 그날에 이르러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왔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예수가 물에서 나아오자, 곧바로
하늘이 열리면서 영이 비둘기처럼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 낱말 풀이
* 유앙겔린 εὐαγγέλιν 복음 또는 좋은 소식
- 유 εὖ 좋은 + 앙겔리아 ἀγγελία
* 포네 보오토스 엔 테 에레모 φωνή βοῶτος ἐν τῄ ἐρήμῳ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 타스 트리부스 τὰς τρίβους 오솔길들
- ‘트리보스 τρίβος 오솔길’은 그저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다니면서 밟아지고 다져진 길’이다.
*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죄
- ‘하마르타노 ἁμαρτάνω 과녁을 맞히지 못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
*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회개
- ‘메타노에오 μετανοέω 마음이나 목적을 바꾸다’라는 동사에서 파생
- 메타 μετά 뒤 + 노에오 νοέω 성찰하다
* 에크소몰레오 ἐξομολγέω 고백하다
- 에크 ἐξ 바깥으로 + 호몰레오 ὁμολγέω 드러내고 말하다
*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고, 그의 허리에는 가죽 띠를 매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 북이스라엘의 ‘민중예언자 엘리야’를 은유하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왔다.
-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사람이다.
* 스키조메누스 σχιζομένους 분사수동태 - 하늘이 열리면서
- 문자적으로는 ‘세케조 σχέζω 하늘을 찢다’라는 의미이다.
* 유도케사 εὐδόκησα 어여삐 여겼노라.
- 유 εὖ 좋게 또는 좋은 + 도케오 δοκέω 생각하다
본문 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복음'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유대종교․사회공동체 속에서 복음은? 이집트의 노예이었던 히브리을 향한, 끊임없이 약탈당하던 히브리해방노예 평등공동체을 향한, 바벨론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그리고 도우심이다.(출4:30,사52:7-10, 40:9-11)
두 번째, 마가복음의 예수신앙 공동체 속에서 복음은? 역사적 예수와 그의 선포와 행동과 삶을 통하여 바야흐로 동터오는,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취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무엇보다도 억압과 착취 속에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사회․종교적으로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절망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나라’이다.(막:14-15,마5:2-12,눅 4:18-19, 6:20-26)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마가복음의 신앙언표이다. 실제로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이 말을 매우 현실적으로 듣고 느끼고 받아들였을 터인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엄연히 1세기 로마제국에는 ‘소테르 아우구스토스 σωτήρ, αὔγουστος 살아있는 구세주’이며 ‘퀴리오스 κύριος 주님’인 로마황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신앙언표야말로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의 언어로써 로마제국에 대하여 매우 불경스럽다. 또한 그래서 마가복음의 신앙언표는 철저히 민중의 언어일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언비어이며 괴담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저자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복음의 언표를 ‘메시아비밀사상’이라는 수사학으로 위장한다.
하지만 진리는 드러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일부러 진실을 감추려고 한다면 그것이 언젠가 폭로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당국자에게는 ‘예수의 복음’이 유언비어이며 괴담이지만, 1세기 예수신앙 공동체에게는 해방과 구원의 진리로써 마땅히 영접하고 실천해야 할 신앙 삶인 것이다.
이점에서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복음’이야말로 구약성서에 약속된 궁극적 복음의 성취로써 ‘하나님의 오심’이라고 선포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사자’(출23:20,말3:1)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사40:3)가 ‘하나님의 오심’(복음)에 대한 예고이다. 마가복음저자는 ‘예수의 복음’이 하나님의 약속으로써 예수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성취에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오심 -복음의 사건’이 광야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궁극적 복음이 성취되는 무대가 예루살렘성이나 성전이아니라 광야라는 것이다.(물론 로마는 더 더욱 아님) 실제로 광야는 억압받고 쫓기는 자들의 은신처이다.(삼하21:13~14) 광야의 외진 은신처는 도망친 노예들,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도피처이다. 따라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민중의 소리’, ‘민중의 열망과 분노소리’이다. 또 한편 본문에서 광야는 여리고 언저리의 요단골짜기가 분명할 터인데, 이는 이집트의 노예이었던 히브리들을 이끌어내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활동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 해방과 구원의 하나님이 오시는 길은 어디일까?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 복음’은 고난당하는 민중의 아픔과 슬픔, 분노와 열망으로 다져지고 손질된 광야의 작은 오솔길들을 통하여 온다. 넓고 곧은 ‘왕의 대로 king,s highway’로, ‘제국의 대로 Via Maris’로 오는 자들은 제국의 군대와 대상인들이다. 그들이 오는 목적은 오직 죽이고 빼앗고 파괴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