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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이끄는 예루살렘 사회․종교․정치․경제 개혁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이끄는 예루살렘 사회․종교․정치․경제 개혁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서로 힘을 모아 예루살렘 사회․종교․정치․경제 개혁에 힘을 쏟았다. 개혁의 주요내용은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 속에서 모세의 율법을 되살려 내는 것이었다. 나아가 유대인들의 혈통과 유대인들의 종교전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주변 이방인과 통혼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 일들을 위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토라 תֹורָה 모세의 율법 또는 모세오경’의 저술․편집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에 이어서 다윗왕조 유다왕국과 예루살렘성전이 멸망당한 후 ‘토라’가 유대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해졌다. 토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랑과 열정이 더욱 더 깊어졌다. 따라서 바벨론포로기의 유대서기관 등 지식인들은 열정..

바벨론포로 예루살렘귀환 시대

바벨론포로 예루살렘귀환 시대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바벨론제국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페르시아제국은 사회․종교․문화 관용정책을 펼쳤다. 바벨론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도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바벨론포로 유대인들은 네 차례에 거쳐 바빌론으로부터 고향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다윗왕조 유다왕국멸망 이후 50여년이 흘러 기원전 5백37년에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이끄는 1차 바벨론포로귀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1차 포로귀환 유대인 숫자는 약 5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성전 재건임무를 가지고 귀향했다. 그 뒤로 기원전 4백58년 두 번째 포로귀환은 유대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스라가 이끌었다. 함께 온 유대인 숫자는 1천8백 명 뿐이었지만 금1백 달란트와 은7백50달란트 등..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끝판 왕 시드기야, 빚탕감과 채무노예해방 선포를 뒤집다.

본문이해하기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끝판 왕 시드기야, 빚탕감과 채무노예해방 선포를 뒤집다.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마지막 왕은 ‘유다왕국 종교개혁의 깃발 요시야왕의 셋째 아들’이었던 시드기야였다. 그는 바벨론제국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있는 위기상황 속에서 마지못해 ‘빚탕감과 채무노예해방’을 선포했다. 야훼 하나님은 시드기야왕과 귀족들과 부자들의 빚탕감과 채무노예해방 선포를 매우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반 희년신앙으로써 다윗왕조신학과 시온궁정계약 이데올로기가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윗왕조신학과 시온궁정계약 이후에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빚탕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