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구약성서

희년신앙의 맥, 히브리 노예들의 성공신화 ‘모세이야기’ 3. 모세가 히브리 노예들의 권리투쟁에 나서다.

희년행동 2022. 8. 31. 08:42

희년신앙의 맥 : 히브리 노예들의 성공신화 ‘모세이야기’ 3

모세가 히브리 노예들의 권리투쟁에 나서다.

 

 

 

 

본문읽기-2 (출애굽기 2:11-15)

세월이 흘러 모세가 장성했다. 모세는 그의 형제들에게 나아갔다. 모세는 형제들의 노역(奴役)을 보았다. 그런데 모세가 어떤 이집트 사내가 그의 형제들 중 한 사람을 때려눕히는 것을 목격했다. 모세는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는 그 이집트 사내를 쳐 죽였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모래 속에 숨겼다.

이튿날 모세가 다시 (형제들에게) 나아갔다.

“그런데 이것 좀 봐! 히브리 남자 두 사람이 싸우고 있지 않은가!”

모세가 잘못한 사람을 나무랐다.

“당신은 왜 동무를 때리오?”

그러자 그 사내가 (모세에게) 대들었다.

“누가, 우리위에 우두머리와 재판관으로 당신의 이름을 세웠소? 당신이 이집트인을 살육했던 것처럼 나도 쳐 죽일 셈이오?”

모세가 두려워 떨며 탄식했다.

“아하! 일이 탄로 났구나!”

파라오가 이일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파라오는 모세를 잡아 죽이기 위하여 모세를 찾았다.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 도망쳐 나와 미디안 땅에 웅크렸다. 모세는 (그곳) 한 우물가에 주물러 앉았다.

 

낱말풀이

 

* 예히 바야밈 하헴 바이그달 모쉐 바예체 엘-에하브

יְהִי ׀ בַּיָּמִים הָהֵם וַיִּגְדַּל מֹשֶׁה וַיֵּצֵא אֶלאֶחָיו

세월이 흘러 모세가 장성했다. 그래서 모세는 그의 형제들에게 나아갔다.

* 야크 에트-함미츠리 바이트메네후 바홀 יַּךְ אֶת־הַמִּצְרִי וַֽיִּטְמְנֵהוּ בַּחֹֽול

그 이집트 사내를 쳐 죽였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모래 속에 숨겼다.

* 예바케쉬 라하로그 에트-모쉐 יְבַקֵּשׁ לַהֲרֹג אֶת־מֹשֶׁה

파라오는 모세를 잡아 죽이기 위하여 모세를 찾았다.

 

 

 

본문풀이 : 모세가 히브리 농예들의 권리투쟁에 나서다.

 

본문읽기 2는 히브리 노예들의 권리투쟁 지도자 모세의 인간적인 투쟁과 실패를 증언한다. 이 모세의 권리투쟁 이야기 역시 모세탄생설화 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럽다.

“세월이 흘러 모세가 장성했다. 모세는 그의 형제들에게 나아갔다. 모세는 형제들의 노역(奴役)을 보았다.”

여기서 ‘가돌 - 자라다’라는 의미는 신체가 자라고 용모가 출중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불어 지혜와 능력과 함께 부와 힘이 커졌음 말한다. ‘야차아 – 나아갔다’라는 의미도 그렇다. 모세는 파라오의 궁궐 바깥나들이를 하다가 우연히 동족들과 만나게 된 것이 아니다. 이제 모세는 보무도 당당하게 그리고 은밀하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히브리 동족들 앞에 나섰다. 또한 모세가 은밀히 벌여나가는 권리투쟁내용에서 보듯이 모세는 비록 파라오의 궁전에서 양육되고 교육받았지만 히브리 노예들에게 강한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 무렵 모세의 형제 히브리 노예들은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성서 고고학 발굴결과에 따르면 출애굽기 1장에서 히브리 노예들이 겪었던 노역과 똑 같은 내용을 그린 그림이 이집트 18왕조시대의 무덤벽화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히브리 동족들의 이익과 권리를 키우고 보호하기 위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세가 할 수 있는 권리투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듯이 모세가 형제들의 노역을 보고 느끼는 부끄러움과 무력감은 모세의 돌발 살인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모세가 어떤 이집트 사내가 그의 형제들 중 한 사람을 때려눕히는 것을 목격했다. 모세는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는 그 이집트 사내를 쳐 죽였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모래 속에 숨겼다.”

여기서 이집트 사내가 히브리 노예를 ‘나카 – 때려눕히는’ 현장은 친구사이에서 벌어지는 가벼운 다툼이 아니다. 주인으로써 노예에게 가하는 가혹하고 일방적인 폭력이다. 이 경우 주인은 노예를 때려서 큰 상처를 입히거나 혹 죽이거나 할 만큼의 무거운 폭력을 사용하기 일쑤이다. 한마디로 이 폭력은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에서 노예감독관들이 파라오의 이름으로 히브리 노예들에게 가하는 사회구조적인 폭력이다.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무한폭력이다. 따라서 이제 히브리 노예들의 지도자로 자처하고 나선 장성한 모세로서는 도저히 이 폭력을 묵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세는 처절한 삶의 고통을 겪고 있는 히브리 형제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무력감 속에서 돌발적인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모세의 돌발적인 살인사건의 여파는 거기서 그냥 그대로 그치지 않는다. 이튿날 모세가 다시 형제들에게 나아갔다.

“그런데 이것 좀 봐! 히브리 남자 두 사람이 싸우고 있지 않은가!”

모세가 잘못한 사람을 나무랐다.

“당신은 왜 동무를 때리오?”

여기서 ‘나차 - 다투다 또는 싸우다’라는 의미는 주인으로서 노예감독관들이 히브리 노예들을 때려죽이는 무한폭력이 아니다. 그저 히브리 동족끼리 서로 멱살을 잡거나 부둥켜안고 얼러대는 정도의 다툼일 뿐이다. 그러나 히브리 노예들은 다 같은 노예의 처지였지만 각자의 능력·직책·세력의 크기가 달랐다. 히브리 노예들은 주인인 파라오로부터 주어지는 작은 이익과 권리들을 쟁취하려는 하루하루의 생활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이러한 생활경쟁으로 인해 히브리 노예들 사이에서는 잦은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히브리 노예들 사이에서 주인인 파라오가 던져주는 떡 한 덩이 또는 고기 한 조각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아귀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모세는 그러한 히브리 형제들의 다툼을 말리고 잘잘못을 따지고 판단하는 자리에 나서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싸우든 아니면 다투든’ 아무리 작은 이익과 권리다툼일지라도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상대로 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따라서 다툼과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이익과 권리를 나누어야만 한다. 하지만 본문읽기 2에서나 현실세계에서 ‘야훼 하나님 없는 노예세상에서의 생활투쟁’은 너나없이 죽기 살기 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야훼 하나님 없는 노예세상의 생활투쟁은 바르고 마땅한 중재자가 없다. 따라서 모세가 파라오 노예세상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성공신화’이며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히브리들의 작은 이익과 권리다툼에 개입하는 순간 모두에게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탈이 났다. 그 히브리 사내가 모세에게 대들었다.

“누가 우리위에 우두머리와 재판관으로 당신의 이름을 세웠소? 당신이 이집트인을 살육했던 것처럼 나도 쳐 죽일 셈이오?”

모세가 두려워 떨며 탄식했다.

“아하! 일이 탄로 났구나!”

파라오가 이일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파라오는 모세를 잡아 죽이기 위하여 모세를 찾았다.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 도망쳐 나와 미디안 땅에 웅크렸다. 모세는 그 곳 한 우물가에 주물러 앉았다. 여기서 히브리 형제가 모세를 고발할 때 사용하는 동사 ‘하라그 – 살육하다’라는 표현은 매우 엄중하다.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는 ‘히브리 노예들의 성공신화이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모세에게 반역의 죄를 덮어 씌웠다.

그렇다면 실제로 모세의 투쟁은 ‘히브리 노예들의 권리투쟁’이 아닌 ‘해방투쟁’이었을까? 어찌되었든 히브리 형제인 고발자가 사용하는 동사로 보아 모세의 투쟁은 처음부터 과격하고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파라오를 대리하는 노예감독관들이 히브리 노예들에게 막무가내로 쏟아 붓는 ‘죽임의 폭력을 향한 대응폭력’이었을 것이다.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 안에서 모세의 권리투쟁이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위험이며 한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의 ‘작은 이익과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모든 투쟁’은 또 다른 대응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세의 권리투쟁 가운데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우발적이고 비밀스러운 사건이었던 반면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보복은 공개적이고 구조적이며 전면적이었다. 모세는 자신의 비밀투쟁이 발각된 후 보복이 두려워 미디안광야로 도망쳤다. 그 후 모세는 자신을 박해하던 파라오가 죽고 새로운 파라오가 집권하기까지 이집트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아마도 라암세스 2세가 아닐까? 출애굽기 2:23; 4:18-20참조) 결국 야훼 하나님 없는 노예세상에서의 모세의 권리투쟁은 피의 보복을 부르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이렇듯이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에서 종살이 하는 히브리 노예로서 파라오 황실의 왕자가 된 모세의 성공신화는 모세의 권리투쟁 실패와 함께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히브리 노예로써 노예제국 파라오 지배체제의 왕자가 된 ‘모세의 성공신화’는 이제 전설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야훼 하나님 없는 노예세상에서 모세의 투쟁실패는 모세뿐만 아니라 모든 히브리들의 실패이며 절망이다. 이점에서 모세는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투쟁 영웅이 아니다. 모세이야기는 앞선 요셉이야기와 다르다.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외부인 성공신화로 보기도 어렵다. 본문읽기 2에서 모세의 성공신화 결말은 실패와 도망자 신세일 뿐이다. 실제로 모세의 120여년 인생 속에서 80여년 대부분의 세월은 실패와 고난과 나약함의 세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