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쓴물 -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노예정체성을 바꾸는 야훼신앙 공동체훈련
출애굽기 15: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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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홍해로부터 이스라엘을 떠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수르광야로 나아갔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흘을 걸었다. 그런데 그들이 물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들이 마라에 다다랐으나, 마라로부터 물을 마시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의 물이 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다.
백성이 모세를 향하여 투덜댔다.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는 거요?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다. 모세가 그 물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그 물이 단 맛이 났다. 야훼께서는 거기서 그들을 위하여 공동체 규약과 공동체 정의를 세우고, 그들을 시험하셨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가 너희 하나님 야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래서 너희가 야훼의 눈에 옳은 일을 행한다면,
그래서 너희가 야훼의 명령(지시)에 귀 기울인다면,
그래서 너희가 야훼의 모든 규약을 지킨다면,
내가 이집트사람들에게 두었던(놓았던) 그 모든 질병들을 너희 위에 두지 않겠다. 참으로, 나 야훼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이다.”
낱말풀이
* 엘 미드바르 수르 אֶל־מִדְבַּר־שׁוּר : 수르 광야로.
* 마라 מָרָֽה : 쓴, 쓴 맛. 아마도 여기서 쓴물이란 육지 소금물이었지 않을까?
- ‘마라’는 동사로 ‘거역하다, 완강하다’라는 뜻이 있고, 분사 ‘모라’는 ‘비탄, 원한’이라는 의미를 쓰인다.
* 요레후 יֹּורֵהוּ : 야훼께서 그(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다.
- ‘가르치다, 보이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 이무테쿠 יִּמְתְּקוּ : 그 물이 단 맛이 났다.
- 먹기 좋은 물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 호크 부 미쓰파트 חֹק וּמִשְׁפָּט : 공동체 규약과 공동체 정의
* 니사후 נִסָּֽהוּ : 그가 (그들을) 훈련하셨다.
* 임 솨모아 티쉐마아 레콜 אִם־שָׁמֹועַ תִּשְׁמַע לְקֹול : 진실로, 너희가 (너희 하나님 야훼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면
* 하야솨르 הַיָּשָׁר : 옳은 일을 행한다면
* 하아잔타 הַֽאֲזַנְתָּ : 너희가 (야훼의 명령)에 귀 기울인다면
* 야훼 로프에카 : יְהוָה רֹפְאֶֽךָ :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
시작하는 말
기독교회는 매년 사순절이라는 종교절기를 기념하고 지킨다. 사순절시기에는 기독교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고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모든 이들이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딱딱하고 굳어진 삶의 태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삶의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타고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 공동체가 나를 보는 눈이 있다. 또 공동체가 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있고, 나를 인정해주는 바도 있다. 그러면서 결국 나는 나를 만들고 다듬어가게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의 삶의 태도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삶의 태도는 시대정신에 따라 다듬고 바꾸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사람의 삶의 태도는 그 사람의 생(生)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최소한 어린 시절의 성장기, 장성해서라도 오랜 세월 자기 나름의 삶의 상황에 매이면서, 자기만의 삶의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어린 시절을 동무들 중에는 가난을 이기고, 착실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 동무가 있다. 초등학교도 못나오고 머슴살이에 온갖 고생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땅에 욕심을 부리더니,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듣는 소리는 가정의 파탄이다. 또 다른 존경스러울 만큼 자신의 삶에 참되고 철저했던 동무는 인생을 매조지 할 시기에 주식투자를 하겠다고 한다. 심심풀이 재미삼아라고 하는데, 어린 시절의 가난이 만들어 낸 돈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보다.
한편 한 사회 - 하나의 공동체에게도 두루 해당하는 삶의 태도가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 - 공동체의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돈에 대한 무한 욕망이 아닐까? 이렇게, 돈에 대한 우리사회의 무한욕망 - 돈에 대한 노예 정체성을 여실 증명하는 사건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지난 MB정부 시절, 우리는 누구나 ‘부자 되세요’라고 덕담을 하다가, 지금은 모두 빚꾸러기들이 되었다. 돈을 향한 한국사회의 노예 정체성이 세월호참사를 불러왔다. 세월호참사의 진실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불법 사익추구이다. 돈을 향한 무한욕망을 은폐하기 위하여 거짓말들을 쏟아내던 박근혜정부는 국민주권 촛불혁명의 심판을 받았다. MB는 불법으로 거대한 돈 저수지를 만들고 검은 돈을 마구 모아두었다가 혼쭐이 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독점자본․독점대기업․부자들을 위한 기업국가 - 사적국가권력 체제가 시작되었다. 벌써부터 일부사람들은 그 사적국가권력 체제에 굴종하는 삶의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한 사람의 노예정체성을 바꾸려면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의 생(生)을 바꾸어야 한다. 또한 한 공동체의 노예 정체성을 바꾸려면 그 공동체의 규약과 공동체 정의(公義) 세우고 훈련해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 한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의 생(生)을 바꾸고, 공동체 정의를 세워서 훈련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지금까지 시나브로 딱딱하게 굳어져온 삶의 태도와 충돌하는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어서 더욱 그렇다.
이끄는 말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삶의 태도를 새롭게 바꾸려는 야훼하나님의 의지가 절절하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오랫동안 이집트노예제국 파라오의 노예로 살아오면서 노예 정체성에 찌들어 왔다. 스스로의 생(生)의 앞뒤를 전혀 가늠하지 못한 채 살아온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지금 당장의 고통에만 반응한다. 지금까지의 생(生)에 대한 추억과 반성도 없고, 미래에 대한 의지와 희망도 없다. 오직 지금, 자신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주인의 말만 따를 밖에 없다.
이렇게 히브리들은 사백 삼십년을 이집트 파라오제국의 노예로 살면서 철저하게 노예적 삶의 태도에 찌들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새로운 해방세상, 정의와 평등세상, 생명평화세상을 스스로 건설하고 살아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백 삼십년 동안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의 노예로 살아온 생(生)을 치유하고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실천행동이고 반복적인 생활훈련이다. 그러니 이 실천행동과 훈련은 사백 삼십년 동안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의 노예로 살아온 히브리들에게 옛 노예 정체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이제 본문은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의 노예이었던 히브리들의 노예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바꾸는 고된 광야훈련의 시작을 알린다. 이를 위해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 향해 곧바로 나가는 대로로 인도하지 않고, 수르광야로 이끌어 나아갔다. 본문의 마라의 쓴물, 메추라기와 만나 등,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광야의 훈련과 체험들은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히브리 야훼신앙의 꿈을 펼치는 대서사의 주춧돌이다.
그러나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지금 맞이하게 될 광야의 고난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그들의 노예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는 광야의 훈련 길로 이끌려 나왔다. 사실, 히브리 노예들도 노예서의 해방과 구원을 갈망했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께 노예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노예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바꾸어 나가는 삶의 고통을 자세히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광야에서 마라의 쓴물을 만났다. 히브리들은 그들의 해방일꾼 모세를 향하여 투덜댔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는 거요?’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노예 정체성에 따라 마라의 쓴물을 마나는 순간, 자신들의 눈앞에 닥친 고통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 반응은 모세와 야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는 거요?’ 실제로 이러한 원망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광야 사십년 야훼신앙 공동체훈련 내내 일어났던 원망이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들은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의 노예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갈망하며 야훼 하나님을 불러냈다. 이에,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들 중에서 모세를 해방일꾼으로 내세워 히브리들을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의 노예로부터 해방하시고 구원하셨다. 이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노예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바꾸어 나가야 한다. 이제 야훼신앙의 새로운 정의․평등세상, 생명․평화세상을 열어가는 일은 그들 자신들의 몫이다. 몇몇 특출한 지도자나 야훼 하나님의 일방적 이끌음이 아니라, 히브리 해방공동체 모두의 공감과 연대와 참여이다. 정의․평등세상, 생명․평화세상은 노예를 다스리는 주인의 채찍도, 하늘의 계시도 아닌,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당연한 사회․공동체 책임이고 의무이다.
그러나 히브리 노예들은 누군가에게 원망을 퍼붓거나 야훼 하나님께 변병을 늘어놓곤 하지만, 스스로 당면한 삶의 현실과 고난을 헤쳐 나갈 줄을 모른다. 실제로 이것은 지금까지의 한국사회를 흔들어 놓았던 수많은 대중저항 행동들이 반복해 왔던 한계이다. 이제 그 한계를 넘어, 시대의 지배체제로부터의 얽매임을 넘어, 새로운 대안세상을 꿈꿀 때이다. 21세기 맘몬(자본)권력체제 안에서의 기득권세력들의 대중 선전선동, 노예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는 사회․공동체 저항운동이 필요한 때이다.
그 점에서 우리 사회․공동체는 백만․천만 국민주권혁명 촛불을 밝혔고, 이어진 박근혜대통령 탄핵을 거치면서, 사회․공동체 저항행동의 승리 경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제2의 국민주권혁명 ‘미 투 및 위드 유’ 사회․공동체 저항운동을 맞이하고 있다. 21세기 맘몬(자본)권력체제 안에서 고통당하고 절망해온 수많은 성추행․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생(生)의 절망과 고통을 떨치고 일어나, 제2의 국민주권혁명의 봉화를 올렸다. 이 제2의 국민주권혁명, ‘미투 및 위드유’ 사회․공동체 저항운동이 맘몬(자본)권력체제 안에서의 가부장적 마초(macho)권력 폐해를 온전하게 치유하고 새로운 대안세상을 열어갈 것이라 기대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사흘동한 수르광야 길을 걷으며 심한 목마름의 고통을 겪는다. 그러던 중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어렵사리 우물을 찾아 냈는데, 그 우물은 마라-쓴물이었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모세를 향하여 투덜댔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는 거요?’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원망과 투덜대는 소리를 듣게 된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다. 모세가 야훼께서 지시한 그 나무를 물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그 물에서 단 맛이 났다.
여기서 ‘야훼가 지시하는 나무’란 어떤 의미일까? 이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마라 쓴 물의 고통 앞에서 옛 주인이었던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와 결별해야만 했다.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의 고기 가마와 떡 광주리에 대한 노예적 욕망을 버려야만 했다. 광야의 고통 속에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이집트 노예제국 파라오의 노예 정체성을 치유하고 새롭게 바꾸어야만 했다.
눈앞에 닥친 삶의 고통과 고난에 대하여 곧바로 복종으로만 반응하는 노예 정체성을 벗어던져야 한다. 삶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공감과 연대와 참여를 통하여 사회․공동체 저항이 조직되어야 한다. 삶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공감과 연대와 참여의 사회․공동체 저항을 조직하는 속에서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야훼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나무에 주목’해야 한다.
이점에서 본문의 ‘야훼께서 지시하는 나무’의 진실은 무엇일까? 기독교회는 이천년 기독교역사 안에서 본문의 ‘야훼께서 지시하는 나무’의 의미를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 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기독교회의 핵심교리 ‘구세주 예수’라는 기독론의 입장에서의 일면 타당한 해석이다. 하지만 본문 문맥 속에서는 ‘사백 삼십년 이집트노예제국 파라오지배체제에 종속되었던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노예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는 야훼신앙 공동체의 신앙투사이다.
이집트노예제국 파라오지배체제의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신앙이나 철학사상, 가치와 진실에 대한 이해와 판단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저 현실적 고통과 절망에 대한 맹목적 복종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자신들의 오랜 노예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는 고난의 광양 삶의 훈련에서 자신들이 불러낸 야훼신앙 공동정신을 자신들의 삶에 새겨야 한다. 이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이집트노예제국 파라지배체제에 맹목적으로 종속된 노예들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편 속에서라도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대안세상을 꿈꾸는 해방 자들이다.
21세기 맘몬(자본)권력체제 속에서라면 ‘돈 중심의 모든 삶의 경험들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생명과 평화, 정의와 평등,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세상, 죽임이 아닌 살림의 정치․경제․종교․문화․삶의 가치에 주목해야한다. 이점에서 본문의 ‘야훼께서 모세에게 지시하는 나무‘의 의미는 야훼께서 가르치시는, 보여주시는,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야훼신앙 깨달음을 통틀어 묶은 신앙전부이다. 이 히브리들의 야훼신앙 깨달음이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고통과 절망의 삶의 상황을 단 맛 나는 생(生)으로 새롭게 바꾸는 비밀이다.
그러나 21세기 맘몬(자본)권력체제에서 배고프지 않을 만큼 밥술이나 먹는 중산층 대중들의 노예정체성은 새롭게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아가 하루살이가 걱정인 빈곤층 노인들의 그 바탕을 알 수 없는 노예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돈의 노예, 임금노예로 살아가는 21세기 대중민초들이 생명과 평화, 정의와 평등 대안세상, 죽임이 아닌 살림의 정치․경제․종교․문화․삶의 가치를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대중민초들이 스스로 돈에 매인 노예적 삶의 사슬을 끊어야, 사회․공동체가 새롭게 바꾸어질 수 있다. 본문은 21세기 대중민초들에게 맘몬(자본)권력체제의 돈의 노예, 임금노예 사슬을 끊는 방법으로 공동체 규약, 공동체 정의 삶의 훈련을 제안한다. 여기서 우리말 성서는 본문의 ‘니사후‘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시험하셨다‘라고 번역하는데 문맥에 맞는 번역은 ’훈련하셨다‘이다. 야훼 하나님은 노예적 복종 DNA만 있는 히브리들에게 공동체 규약, 공동체 정의를 세워 야훼신앙 대안세상을 꿈꾸도록 그들을 훈련하셨다.
그 훈련의 전제로 야훼는 이집트노예제국 파라오의 음성만 들어오던 히브리들에게 ‘너희가 너희 하나님 야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이라고 요청하신다. 히브리 노예들의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는 이집트노예제국 파라오의 호통소리를 뒤엎을만한 생(生)의 울림소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히브리 노예들을 향한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외치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 야훼의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만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노예 정체성을 새롭게 바꿀 수 있다.
21세기 우리시대의 맘몬(자본)권력 체제에서 이 땅의 민중들의 삶에 비추어 이야기하면, 돈의 유혹, 돈의 욕망, 돈의 악마적 속삭임 떨쳐내고 자유와 해방, 정의평등, 생명평화 야훼신앙 진실에 눈뜨고 그 외침에 귀기우릴 수 있어야 대한민국이 산다.
지난 세월호 참사, 이어진 백만 천만 국민주권 촛불혁명, 지금의 ‘미 투 및 위드 유’ 사회․공동체 저항운동을 통하여, 우리시대의 우리의 삶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우리자신에게 물어야한다. 우리 모두가 돈의 노예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우리 자신의 삶을 깊이 살피고 반성하며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돌 떠서 우리시대의 맘몬(자본)권력체제 속에서 고통과 절망의 삶을 사는 이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며 사회․공동체 저항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 행동으로.
맺는 말
요즈음 필자는 새롭게 희년빚탕감상담소 및 희년경제연구소 활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을 통하여 희년빚탕감활동을 통하여 기독교 핵심신앙으로써 희년신앙을 증언하려고 한다. 필자는 21세기 우리시대의 희년빚탕감활동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21세기 빚꾸러기들은 우리시대의 강도만난 사람이다.
21세기 희년빚탕감활동은 우리시대의 ‘출애굽 운동’이다.
21세기 희년빚탕감활동은 우리시대의 희년선포이다.
이와 관련하여 ‘희년 빚 탕감 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태도는 마태복음18장 21-35절 ‘용서하지 못하는 종’의 태도와 같다. 그러한 태도야 말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희년선포를 훼방하고 물거품으로 만드는 암초이다. 하나님은 맘몬·자본세상의 모든 빚을 탕감하는 거룩한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희년을 성취’하려고 하신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종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희년은총’이 산산이 흩어져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 희년빚탕감활동은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새로운 회개운동이며 부흥운동으로 발전할 것이다. 교회와 교우들의 예배와 신앙 삶의 자리를 교회바깥으로 확장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21세기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이다. 희년빚탕감활동이 교회와 교우들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변혁할 것이다. 교회와 교우들의 사회경제적 책임과 의무를 일깨울 것이다.
필자는 21세기 희년빚탕감활동이 우리시대의 대중들의 고통과 절망의 삶의 태도를 새롭게 바꾸어내는데 큰 힘이 되리라고 믿는다. 돈이 주인이었던 우리의 삶을 자유와 해방,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의 삶으로 이끄는 길잡이역할을 수행하리고 믿는다. 희년빚탕감상담소 및 희년경제연구소가 시대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때까지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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