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신앙 행동서사의 거친 숨결
20. 남은 자 신앙 그리고 그루터기 신앙
열왕기상 19:1-18, 이사야 11:1-9, 6:13
본문읽기 1. 남은 자 신앙 열왕기상 19:1-18
아합왕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벌인 모든 일들과 그가 칼로 바알의 모든 예언자들을 도살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경고했다.
“이와 같이, 신들이 행동하시고 또 이렇게 더하시리라. 참으로 내일 이맘때까지, 내가 네 목숨을 바알예언자들 중 한사람의 목숨과 같게 하리라.”
엘리야가 상황을 알고 일어나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쳤다. 그는 유대 땅에 속한 브엘세바로 들어가 거기에 자기 시종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는 광야로 들어가서 하루 길을 달려 한 로템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의 목숨 줄을 끊어달라고 간청하며, 외쳤다.
“야훼여, 이제 충분합니다. 제 목숨을 거둬주십시오. 참으로,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엘리야는 홀로 로템나무 아래 누워 잠이 들었다. 자, 그런데 보라.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속삭였다.
“일어나 먹어라.”
엘리야가 퍼뜩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보라, 그의 머리맡에 불에 달군 돌 위에서 구워낸 떡과 물이 있지 않은가. 엘리야는 떡을 먹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주저앉아 누웠다. 그러자 야훼의 사자가 다시 돌아와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일어나 먹어라. 참으로 너의 길이 멀다.”
엘리야가 일어나 먹고 마셨다. 그리고 그 먹은 힘으로 밤낮 사십일 동안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걸어갔다. 엘리야가 한 동굴에 들어가 거기서 밤을 샜다. 그런데 보라, 야훼의 말씀이 그에게 들려왔다. 야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했다.
“저는 만군의 하나님 야훼를 열렬히 옹호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나만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들이 내 생명마저 취하려 쫓아옵니다.”
다시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가서 야훼 앞, 산에 서라.”
그런데 보라.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일어나 야훼 앞에 있는 산들을 쪼개고 바위들을 부수었다. 그러나 바람 속에 야훼가 계시지 않았다. 또한 바람 후에 지진이 일어났으나 지진 속에 야훼께서 계시지 않았다. 이어서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불속에도 야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 불 뒤에 잔잔하고 여린 소리가 있었다. 엘리야가 듣고 그의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보라, 엘리야에게 한 소리가 들려와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왜, 네가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말했다.
“저는 만군의 하나님 야훼를 열렬이 옹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후손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나만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들이 내 생명마저 취하려고 쫓아옵니다.”
야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네 길을 광야로 돌이켜 다메섹으로 가라. 너는 가서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위에 왕으로 세워라. 또한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 사파트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하자엘의 칼로부터 살아난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로부터 살아난 자는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안에 칠천 사람을 남겨 놓았다. 그 모든 무릎들이 바알을 향하여 꿇지 않은 무릎들이다. 그 모든 입술이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은 입술이다.”
본문읽기 2. 그루터기 신앙 이사야 11: 1-9
이새의 그루터기로부터 새싹이 나온다.
그루터기의 뿌리들로부터 나온 가지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리신다.
지혜와 통찰의 영
연대와 힘의 영
지식과 야훼를 경외(敬畏)하게 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야훼의 즐거움은 야훼를 경외하는 것 안에 있다.
야훼께서는 그의 눈에 보이게 하는 것만을 따라서 재판하지 않으신다.
그의 귀에 들리게 하는 것만을 따라서 편들지 않으신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신다.
땅의 비천한 이들을 진실하게 재판하신다.
그의 입술에 물린 막대기만으로도 땅을 때려 부수신다.
그의 입김만으로도 악인을 죽이신다.
정의가 그의 허리띠이다.
진실이 그의 무장(武裝)의 띠이다.
그때에,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자리 잡고 살며
표범이 새끼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가축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함께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그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는 독사 굴에서 장난질 하며
젖 뗀 아이는 독사 굴에 그의 손을 넣으리라.
그들이 서로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 망하게 하지도 않으리라
나의 모든 거룩한 산에서.
참으로 이것은,
그 땅이 야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다를 덮는 물처럼.
본문읽기 3. 그루터기 이사야 6:13
아직 그 땅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해도 도리어 그것이 돌이켜 불쏘시개가 될 것이
다. 그러나 잘려 넘어진 밤나무와 상수리나무처럼 나무들의 그루터기는 남아 있을 것
이다. 그 땅의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다.
본문풀이
남은 자 신앙, 다시 야훼의 산 앞에 서다.
갈멜산 대회전의 승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야훼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의 잠시잠깐 영웅담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엘리야는 갈멜산 대결의 통쾌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바알신앙으로 돌아선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을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으로 돌이키는 일에 실패했다. 도리어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로 인해 더 악독하고 험악한 탄압이 북이스라엘 곳곳으로 몰아쳤다. 바알신앙의 열렬한 수호자인 이세벨은 폭력과 죽임과 탄압으로 엘리야의 뒤를 쫓았다.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도 하나같이 엘리야를 거부하였다.
불꽃같은 야훼의 예언자 엘리야의 번아웃 증후군
갈멜산 대회전(大會戰)이후의 엘리야 이야기는 본문에서 놀라운 반전을 맞이한다. 갈멜산 대결이후 엘리야의 상황을 다룬 본문이야기는 열왕기상 17-18장의 ‘엘리야 이야기’와 사뭇 다르다. ‘갈멜산 대회전’에서 카리스마 넘치던 영웅엘리야는 간데없고 너무도 낯선 엘리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런 상황변화 때문에 본문이야기를 ‘신명기학파 역사편집자들의 창작’으로 이해하는 성서학자들도 많다. 따라서 본문은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던 엘리야 영웅설화에 대한 신학수정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풀뿌리 사람들의 영웅주의 예언신앙설화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반성이며 깨달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본문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갈멜산 대회전 이후 엘리야는 두려움과 절망에 휩싸여 북이스라엘 땅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남유다왕국에 속한 땅 브엘세바로 들어가 숨었다. 그러고도 엘리야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엘리야는 자신의 시종을 브엘세바에 남겨서 북이스라엘 상황을 살피게 한 후 다시 광야로 도망을 쳤다. 엘리야는 하루 온종일 광야 길을 내달아 어떤 외진 곳 로템나무 아래서 지쳐 쓰러졌다. 두려움과 절망에 지친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께 죽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야훼 하나님, 이제 저는 할만 큼 했고 살만큼 살았습니다.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다른 누구보다도 잘난 것 없는 무지렁이입니다. 이제 저는 지쳤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에게 당신의 천사를 보내서 어루만지며 힘을 내게 하셨다. 엘리야는 두려움과 절망의 자리에서 야훼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의 손길을 통해 새 힘을 얻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갔다. 마침내 엘리야는 옛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야훼 하나님과 함께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맺었던 ‘호레브 חׄרֵב 호렙 산’에 이르렀다. 여기서 호렙산은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던 곳이다.(출애굽기 3장) 그래서 계명(誡命)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성서학자들은 시나이 산과 호렙 산을 같은 산이라고 이해한다.
다시 야훼의 산 앞에 서다.
엘리야는 마침내 호렙산에서 히브리 지파동맹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열고 지키시는 야훼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나 갈멜산 대회전의 영웅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희년신앙 예언자 엘리야가 만난 야훼 하나님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너무도 낯선 분이었다. 그래서 더욱 더 놀랍고 신비했다. 엘리야는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는 폭풍 속에서 야훼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땅을 가르는 지진 속에서도,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강렬한 불길 속에서도 야훼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폭풍과 지진과 불길 뒤에 ‘콜 데마마 닼카 קוׄל דְּמָמָה דַקָּה 잔잔하고 여린 소리’가 있었다. 이때 본문이 사용한 ‘데마마’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잔잔함, 속삭임, 살랑거림’이라는 뜻이다. 또 ‘닼카’라는 낱말은 ‘보드랍게 빻은, 연한, 여린’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21세기 성서독자들에게도 이러한 이미지의 야훼 하나님은 상상 밖일 것이다. 사실, 어떤 성서독자라도 성서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통틀어서 단한 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엘리야는 너무도 낯선 그 소리를 따라 머물던 동굴을 나와서 동굴어귀에 섰다. 참으로 엘리야는 거기서 지금까지 상상해보지도 깨닫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야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실제로 엘리야는 카리스마 넘치는 희년신앙 예언자였고 영웅이었다. 그런 엘리야에게 야훼 하나님께서 크고 강한 힘으로 힘차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너무도 놀라운 체험이었다. 무엇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아주 잔잔하고 여린 소리로 엘리야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이다. 엘리야는 폭풍 같은 열정과 카리스마로 바알신앙에 맞서서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세상을 여는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을 지켜왔다. 엘리야에게는 잔잔하고 여린 소리로 찾아오시는 야훼 하나님이 너무도 낯설었다. 엘리야는 너무도 낯설고 놀라운 상황 속에서 깜짝 놀라 자신의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야훼 하나님 앞에 나섰다. 그때 야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부드럽고 연한 소리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엘리야야. 왜, 네가 여기 있느냐?”
그 연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야훼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묻는 물음은 도리어 사람의 존재근원을 묻는 묵직한 질문이었다. 태초에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말씀 ‘사람아, 너는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과 무겁게 교차한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엘리야야, 왜, 네가 여기 있느냐’라고 묻는 야훼 하나님의 물음은 어떤 의미일까? 엘리야는 스스로의 낙심과 절망감을 더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만군의 하나님 야훼를 열렬히 옹호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후손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저만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들이 내 생명마저 취하려 쫓아옵니다.”
필자는 여기서 불꽃같았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 지킴이 엘리야의 ‘번아웃 이유’를 세 가지 정도로 꼽아서 설명하려고 한다. 첫 번째, 엘리야가 아주 열렬하게 야훼 하나님을 편들고 두둔해왔다는 점이다. 이때 본문은 ‘칸노 키네티 קַנּׄא קִנֵּאתִי 나는 열렬히 편들고 두둔했습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한다. 본문은 똑같은 동사를 연거푸 사용함으로써 엘리아의 신앙열정을 크게 강조하는 표현으로 본문동사를 이용했다. 그런데 본문이 사용한 ‘카나’라는 동사는 ‘질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야훼 하나님을 향한 엘리야의 열정이 지나쳐서 마치 질투하는 것처럼 보여 질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엘리야의 질투하는 열정은 스스로의 욕망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했을 수도 있다.
두 번째, 엘리야의 번아웃 이유는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이 야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본문은 ‘아제부 베리테카 עָזְבוּ בְרִֽיתְךָ 그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잊었습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구를 사용한다. 어떤 계약일까? 옛 히브리 지파동맹과 야훼 하나님이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이다. 엘리야시대의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이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예 내버렸다. 이때 본문이 사용한 ‘아자브’라는 동사는 ‘잊다 또는 내버리다’라는 뜻이다.
세 번째, 엘리야의 번아웃 이유는 ‘북이스라엘 바알숭배자들 곧 아합왕과 이세벨이 북이스라엘 야훼제단을 헐고 야훼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기’ 때문이다. 그 탄압과 학살이 얼마나 크고 집요했을까?
엘리야는 ‘이바테르 아니 레받디 אִוָּתֵר אֲנִי לְבַדִּי 야훼 예언자들 가운데 오직 나만 홀로 남았다’라고 울먹였다. 여기서 본문이 사용한 ‘바드’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부분, 조각’이라는 뜻이다. 불꽃같은 열정의 희년신앙 예언자 엘리야조차도 ‘스스로를 조각이거나 부분이라고 느끼는 고립과 고독감’을 참고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제 아합왕과 이세벨은 오롯이 자신의 생명만을 빼앗으려고 쫓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은 자 신앙 열왕기상 19:1-18
“너는 네 길을 광야로 돌이켜 다메섹으로 가라. 너는 가서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위에 왕으로 세워라. 또한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 사파트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하자엘의 칼로부터 살아난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로부터 살아난 자는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야훼 하나님은 두려움과 절망에 쌓여 있는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주신 말씀은 기대한 것과 달리 엉뚱한 것들이었다. 야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죽음의 메신저가 되라’고 하신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으라는 것 외에는 긍정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물론 엘리야의 갈멜산 대회전도 끔찍한 살상으로 막을 내렸다. 또한 그 때문에 북이스라엘 곳곳에서 야훼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보복살육을 당하는 참상이 빚어졌다. 엘리야의 말대로라면 북이스라엘에서는 단 한명의 희년신앙 예언자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실망하는 엘리야에게 ‘남은 자 신앙’을 밝히신다. 참으로 남은 자 신앙이야말로 시대의 모든 야훼의 종들을 온갖 두려움과 절망과 낙심 속에서라도 마침내 깨닫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신앙은총이다.
남은 자 ‘쉬브아트 알라핌 שִׁבְעַת אֲלָפִים 칠천 명’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안에 칠천 사람을 남겨 놓았다. 그 모든 무릎들이 바알을 향하여 꿇지 않은 무릎들이다. 그 모든 입술이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은 입술이다.”
한때 카리스마 넘치는 희년신앙 예언자였으나 지금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엘리야의 넋두리에 야훼 하나님께서 답하셨다.
남은 자 칠 천명,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은 숫자일까? 칠천 명이라면 무엇이라도 해볼 수 있는 힘 있는 숫자일까?
이제라도 엘리야는 뒤돌아서 칠천 명을 만날 수 있을까? 그들과 함께 바알신앙 숭배 악당 오므리왕조 아합왕을 끝장낼 수 있을까? 침체되었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을 되살려서 위대하고 힘 있는 희년신앙행동 대사건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러나 남은 자 칠천 명은 야훼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숫자다. 이제라도 엘리야를 다시 한 번 더 폭풍 같은 희년신앙 예언자로 불꽃처럼 일어서게 하는 도구로써 남겨진 숫자가 아니다. 남은 자 칠천 명은 시대마다 야훼 하나님의 때를 위해서 그 시대 안에 숨겨진 숫자다. 시대에 따라 희년신앙 행동서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도록 남겨진 숫자다.
한마디로 남은 자 칠천 명은 희년신앙 행동서사 이음의 역사 안에 숨어있는 잠재적(潛在的)숫자다. 시대에 따라 희년신앙 행동서사들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한 사람 한사람 다시 세워지는 숫자다. 넘어지고 밟히고 쓰러지는 시대의 모든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다시 세우기 위해 예비 된 숫자다. 그러므로 남은 자 칠천 명은 시대마다 오롯이 ‘야훼 하나님께로 숨은 위대하고 힘 있는 시대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들의 실체’다.
그렇다면, 시대의 억압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희년신앙 행동서사 이음이로 남은 자들’은 누구일까? 바로 시대마다 자기 삶에 충실한 그 시대 그 땅의 풀뿌리 사람들이다. 왜, 그 시대 그 땅의 풀뿌리 사람들이 남은 자들인가?
시대마다 꿋꿋하게 그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풀뿌리 사람들은 시대의 억압과 절망을 버텨내며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그 땅의 지배체제 바깥에서 끊임없이 대항세상을 열고 누리고 지키며 살아가는 대항자들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풀뿌리 사람들은 시대의 지배체제로부터 얻어먹을 떡고물조차 없다. 왜냐하면 시대의 풀뿌리 사람들은 시대의 지배체제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든 시대의 지배체제를 향한 대항세상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1세기 대한민국사회에서 엘리트 사회․종교․정치 기득권세력들은 ‘독점재벌․맘몬권력 지배체제’를 개혁할 수 없다. 독점재벌․맘몬권력의 돈주머니 은혜를 기대할 수조차 없는 풀뿌리 사람들이라야 한국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 오롯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풀뿌리 사람들만이 이 땅을 새롭게 변혁하고 가꾸며 지켜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로-카르우 라바알 לׄא־כָרְעוּ לַבּעַל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라는 히브리어 문장을 사용한다. 여기서 ‘카라아’라는 동사의 관용 의미는 ‘무릎을 꿇어 경배하다’라는 뜻이다. 또 이 때 본문은 ‘로-나솨크 로 לׄא־נָשַׁק לוׄ 그 입술이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았다’라는 문장도 사용한다. 이때 본문읽기에서 사용한 ‘나솨크’라는 동사는 ‘서로 입 맞추다 또는 손으로 만져서 우상에게 입맞춤을 보내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남은 자 칠천 명은 바알신전을 찾아가서 바알우상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거나 입맞춤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오므리왕조 아합왕국에서는 온 세상이 다 바알세상이었다. 어떻게 ‘그 모든 무릎들이 바알을 향하여 꿇지 않은’ 칠천 사람이 남았을까? 어떻게 ‘그 모든 입술로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실제로, 남은 자 칠천 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경우와 상황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남은 자 칠천 명은 드러내놓고 희년신앙 예언자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자기 삶의 마당에서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희년신앙 행동법규에 따라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남은 자 칠천 명은 철저하게 희년신앙 행동법규를 따라 살면서 바알세상체제와 무관하게 사는 그 땅의 풀뿌리 사람들이다. 그 뚜렷한 예로 열왕기21장의 이즈레엘 사람 ‘나봇’을 들 수 있다. 나봇은 철저하게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법규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야훼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으로서 철저하게 희년신앙 토지공공성 행동법규를 지켜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합왕과 이세벨 그리고 귀족들과 장로들의 사법농단 ․ 사법살인 사악한 음모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물론, 엘리야는 몰아치는 폭풍과 지진과 화산처럼 불붙는 희년신앙 영웅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희년신앙 예언자였다. 그러나 바알세상 또는 맘몬․자본세상에서 희년신앙 행동서사는 한 순간에 폭발하는 퍼포먼스 투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한 개인의 놀라운 카리스마와 영웅행동만으로는 부족하다. 얼마 못가서 지치고 낙망한다. 그렇게 지치고 낙심한 사람은 두려움과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도 시대의 영웅으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퍼포먼스 투쟁은 풀뿌리 사람들을 ‘친절한 파시즘’에 이끌리게 할 위험이 크다.
그러므로 올바른 희년신앙 행동서사는 시대의 깨어있는 희년신앙인들의 네트워크다.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에 대한 깨달음과 소통 그리고 참여와 연대다. 실제로 누군가는 시대의 고난과 억압 속에서 낙망하고 절망하겠지만 남은 자 칠천 명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통하여 새 힘을 얻을 수 있다. 남은 자 칠천 명이 있으므로 누군가는 시대의 고난과 억압을 버텨내며 낙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참으로, 야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위해 바알종교에 무릎 꿇지 않은 그리고 시대의 맘몬․자본에게 빌어먹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셨다. 희년신앙 행동법규에 따라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함께 이끌어 갈 희년신앙동지들을 남겨 놓으셨다.
그루터기 신앙 이사야 11:1-9, 6:13
히브리 성서의 역사는 파라오 노예제국로부터 해방된 히브리 노예들의 희년신앙 행동역사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세우고 누리며 살았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해방과 구원세상 밑바탕은 야훼 하나님과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이었다. 야훼 하나님은 파라오 노예제국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들을 해방하고 구원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에 따라 해방과 구원세상을 이루어 살도록 부추기셨다. 그 생생하고 또렷한 희년신앙 행동서사 기록들이 히브리 성서의 역사다.
예를 들면, 히브리 성서 사사시대는 희년신앙 행동법규에 따라 살도록 은총을 입은 히브리 지파동맹의 공동체자치체제였다. 물론 엄청난 반동이 있었다.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은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은 권력야심가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훼손하거나 폐기하지 않고는 히브리들의 왕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훼손해서 왕조신학으로 퇴행시키려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권력야심가들은 풍요다산과 권력욕망을 부추기는 바알신앙으로 히브리들을 끊임없이 유혹했다. 그럼으로써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의 꿈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배신하도록 부추겼다.
본문읽기의 시대상황에서 북이스라엘 풀뿌리 사람들은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배신하고 풍요다산 바알숭배에 몰두했다. 다윗왕조 남유다왕국은 아예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세상을 꿈꾸던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폐기처분했다. 그 빈자리를 다윗왕조신학과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 이데올로기로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에서는 희년신앙 행동계약 예언자전통 속에서 ‘남은 자 신앙’이 싹텄다. 또한 다윗왕조 남유다왕국에서도 ‘그루터기 신앙’이 나타났다.
‘남은 자 신앙’과 ‘그루터기 신앙’은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야훼 하나님의 풀뿌리 사람들이 밝힌 희년신앙촛불이다. 너나없이 바알을 숭배하는 상황에서 바알에 무릎 꿇지도 입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 희년신앙 지킴이들이 남았다. 큰 나무가 둥치까지 베어 넘어지듯 다윗왕조가 끝장난 상황에서 그루터기 희년신앙희망이 나타났다.
따라서 남은 자 신앙과 그루터기신앙은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꿈꾸는 풀뿌리 사람들의 신앙의지다. 히브리 성서는 바알에게 빌붙어 볼 엄두조차 못 내고 빌붙어봤자 떡고물조차 기대할 수 없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을 주목한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을 ‘암 하아레츠 עַם הָאאָרֶץ 그 땅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속절없이 그 땅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하늘바라기 사람들을 말한다.
실제로 다윗왕조신학에 따른 유다왕국에서는 아무런 몫도 찾을 수 없었던 그 땅의 사람들은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을 열망했다. 이렇듯이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 신앙과 남유다왕국의 그루터기신앙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야훼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곧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깨닫는 희년신앙희망이고 의지로써 신앙투사(投射)였다.
특별히 다윗왕조 유다왕국 풀뿌리 사람들의 그루터기 희년신앙의지와 신앙투사는 예언자 이사야의 출신배경 때문에 더욱 새롭다. 이사야는 다른 풀뿌리 예언자와 달리 대표적인 다윗왕조 궁정예언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다윗왕조신학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심판과 징벌을 선포한다. 더불어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풀뿌리 사람들이 꿈꾸는 희년신앙열망과 뜻을 증언한다. 이제 그루터기신앙 본문을 자세히 읽고 살펴서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피워낸 희년신앙촛불의 의미와 내용들을 살펴보자.
야훼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신학을 폐기하다.
본문읽기2.에서 야훼 하나님은 다윗왕조를 끝장내려고 하신다. 야훼 하나님께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에 대한 배신으로써 다윗왕조신학을 심판하시려고 한다. 히브리 지파동맹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세상을 훼손하고 말살해온 다윗왕조를 끝장내려고 하신다. 왜냐하면 야훼는 히브리 노예들을 파라오 노예제국으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하신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왕조는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를 소제국주의 지배체제의 하나님으로 왜곡했다. 다윗왕조는 왕실 사유지 예루살렘에 야훼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온갖 제사의식을 통해서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를 탈취했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다윗왕조신학에 따른 시온계약과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 이데올로기를 선동했다. 그럼으로써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곧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하나님 야훼를 다윗왕조의 수호신으로 독점하고 사유화했다. 그러나 이제 야훼 하나님은 ‘다윗과 다윗후손들에게 대대로 왕권을 주셨다’는 다윗왕조신학을 해체하신다. 본문읽기2.는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이 사실을 증언한다.
“이새의 그루터기로부터 새싹이 나온다. 그루터기의 뿌리들로부터 나온 가지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때 본문은 ‘믹게자아 이솨이 מִגֵּזַע יִשָׁי 이새의 그루터기’라는 히브리어 문구를 사용한다. 이 문구는 소제국주의 다윗왕조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아니다. 나무가 밑동까지 싹둑 잘려나가 넘어진 후 하릴없이 남겨진 그루터기이다. 다윗왕조의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을 의미한다. 이새의 그루터기는 다윗왕조가 터를 잡은 유대와 베냐민지파 풀뿌리 사람들이다. 더 또렷한 실체로써 그루터기는 이스라엘 열두지파 곧 히브리 지파동맹이다. 따라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호테르 חׄטֶר 새싹’은 소제국주의 다윗왕조신학의 완전한 해체를 의미한다. 옛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로부터 출발한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새로운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시작을 선언한다. 이점에서 ‘호테르’의 또 다른 뜻은 ‘회초리’다.(잠언 14:3)
나아가 본문읽기2.는 명토 박아서 ‘그루터기의 뿌리들로부터 나온 가지와 열매’를 선포한다. 이때 본문은 ‘솨레쉐 שָׁרְשֵׁי 뿌리들’이라는 히브리어 낱말을 사용한다. 여기서 이새의 그루터기의 뿌리들은 ‘이새의 줄기와 가지와 열매로써 다윗왕조’가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이새의 그루터기의 뿌리들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에 속한 그 땅의 풀뿌리 사람들이다.
이제 본문읽기에서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세상을 꿈꾸던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배신한 다윗왕조는 밑동까지 잘려 넘어졌다. 이제 오롯이 남은 그루터기의 뿌리들은 바로 옛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밑동까지 잘려나간 ‘이새의 그루터기 뿌리들로부터 새롭게 자라나온 새싹들’이 새로운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이어갈 것이다. 새롭게 희년신앙 행동서사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어떤 신학자는 이새의 그루터기 뿌리들에서 자라난 ‘네체르 נֵצֶר 가지’에 대한 말놀이로 ‘나자렛 Ναζαρέτ’을 연결 짓기도 한다. 그러면서 예수가 이새의 그루터기 뿌리들로부터 나온 가지이며 열매라고 해석한다.
이 점에서 그루터기신앙은 남은 자 신앙과 더불어 새로운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출발점이다. 히브리 해방노예들과 야훼 하나님이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에 따른 새로운 행동의지다.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을 헤치고 나오는 풀뿌리 사람들의 희년신앙 희망이고 촛불이다.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을 물리치기기 위해 밝히는 시대의 풀뿌리 사람들의 희년신앙촛불이다. 어둠과 절망과 고난을 뚫고 솟구치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희년신앙 깨달음이고 의지이며 투사(投射)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의 밑바탕으로써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이음열망(異音熱望)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루터기신앙은 다윗왕조 궁정예언자였던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선포되었다. 그럼으로써 그루터기신앙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곧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뜻이다.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내려진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 은총이며 깨달음이다. 또 한편으로는 다윗왕조신학과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에 짓눌려온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신앙과 삶의 열망이고 투사(投射)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리신다.
참으로 남은 자 신앙과 그루터기 신앙은 철저하게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세상을 꿈꾸던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에 뿌리내려져 있다. 본문은 이러한 신앙진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증언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리신다. 지혜와 통찰의 영, 연대와 힘의 영, 지식과 야훼를 경외(敬畏)하게 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야훼의 즐거움은 야훼를 경외하는 것 안에 있다.”
실제로 ‘루아흐 예흐바 רוּחַ יְהוָה 야훼의 영’은 히브리들의 집단영성과 집단지성을 위해 지혜와 통찰을 이끄신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야훼의 영을 통하여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을 ‘빈나 בִינָה 통찰’하고 이해한다. 그럼으로써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에 저항하고 그것들을 물리치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야훼의 영을 통하여 깨닫는 다양한 지식과 지혜와 통찰이 모여서 ‘에체 부게부라 עֵצָה וּגְבּרָה 연대하고 세력을 키우면’ 그것이 곧 집단영성 또는 집단지성이다. 그러한 희년신앙공동체 연대야말로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곧 ‘이르하트 예흐바 יִרְאַת יְהוָה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의 즐거움은 ‘야훼를 경외하는 것’안에 있다.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은 언제든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위한 희년신앙촛불’을 밝힌다. 그것이 곧 야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다. 그럼으로써 야훼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
이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문구 ‘하리호 הֲרִיחוׄ 야훼의 즐거움이란, 야훼께서 제물냄새를 흠향하셨다’는 제의(祭儀)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세상을 꿈꾸며 희년신앙 행동계약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야훼께 드리는 모든 제사행위를 대체한다.
야훼 하나님은 ‘땅의 비천한 이들을 편애’하신다.
그렇다면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희년신앙행동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의 현장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의와 불법들을 뒤집어 행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훼께서는 그의 눈에 보이게 하는 것만을 따라서 재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야훼는 어둠의 세력이 ‘야훼의 눈에 보이게 하는 것’만을 따라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리지 않으신다. 야훼 하나님은 감추어진 어둠의 세력과 온갖 불의와 불법들을 꿰뚫어 보시고 심판하신다.
또한 야훼 하나님은 ‘그의 귀에 들리게 하는 것들만을 따라서’ 편들지 않으신다. 어둠과 절망과 고난 현장에서 야훼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들이 들려주는 모든 음모와 술수들을 분쇄하신다. 따라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은 희년신앙 실천행동을 통해서 시대의 불의와 불법들 그리고 음모와 술수들을 파헤치고 폭로해야 한다.
“야훼께서는 그의 눈에 보이게 하는 것만을 따라서 재판하지 않으신다.
그의 귀에 들리게 하는 것만을 따라서 편들지 않으신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신다.
땅의 비천한 이들을 진실하게 재판하신다.
그의 입술에 물린 막대기만으로도 땅을 때려 부수신다.
그의 입김만으로도 악인을 죽이신다.
정의가 그의 허리띠이다.
진실이 그의 무장(武裝)의 띠이다.”
그럼으로써 야훼 하나님은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신다. 땅의 비천한 이들을 진실하게 편드신다. 야훼 하나님은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힘없는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법과 질서를 쳐부수신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으로 힘없는 이들을 이끌어 들이신다. 야훼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땅에서 ‘땅의 비천한 이들을 오롯이 편드시는 분’이다. 야훼 하나님은 ‘땅의 비천한 이들을 편애’하신다. 이 땅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그리고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땅의 비천한 이들을 오롯이 편드는 것’이야말로 야훼 하나님의 ‘정의’이다.
이제 야훼 하나님은 땅의 비천한 이들을 오롯이 편드시는 당신의 정의로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땅을 심판하신다. 야훼 하나님은 그의 입술에 물린 막대기만으로도 땅을 때려 부수신다. 그의 입김만으로도 악인을 죽이신다. 야훼 하나님은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허덕이는 땅의 비천한 이들을 오롯이 편드시는 정의로 허리를 질끈 동여매신다. 그리고 마침내 야훼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땅으로 쳐들어오신다. 정의가 그의 허리띠이며 진실이 그의 무장(武裝)의 띠다. 야훼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의한 법과 질서 따위는 깡그리 걷어차 버리신다. 어둠속에서 꾸미는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쳐부수신다. 야훼 하나님은 어둠과 절망과 고난 속에서 땅의 비천한 이들이 밝혀 든 희년신앙행동 촛불만을 ‘에조르 마테나브 אֵזוׄר מָתְנָיו 당신의 무장의 띠’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절망과 고난의 현장에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의 생명평화세상을 꿈꾸며 노래 할 수 있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할 수 있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그때에,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자리 잡고 살며
표범이 새끼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가축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함께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그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는 독사 굴에서 장난질 하며
젖 뗀 아이는 독사 굴에 그의 손을 넣으리라.
그들이 서로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 망하게 하지도 않으리라
나의 모든 거룩한 산에서.
참으로 이것은,
그 땅이 야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다를 덮는 물처럼.
이렇듯이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꿈꾸는 새로운 희년세상 도래의 밑바탕은 무엇일까? 그 땅이 ‘데아 에트-예흐바 דֵּעָה אֵת־יְהוָה 야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기 야훼를 아는 지식이란 유대인들에게 ‘율법’이다. 그런데 율법의 밑바탕은 히브리 지파동맹과 야훼 하나님이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예수신앙들은 ‘옛 히브리 지파동맹이 꿈꾸던 해방과 자유세상’을 여는 희년신앙 행동법규 실천행동으로 연대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이 땅의 어둠 세력들을 몰아내야 한다. 마치 ‘바다를 덮은 물처럼’ 이 땅 풀뿌리 신앙인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가 이 땅 위로 넘쳐흐르게 해야 할 것이다.
남은 자 신앙과 그루터기 신앙 - 실천행동을 위하여
“아직 그 땅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해도 도리어 그것이 돌이켜 불쏘시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잘려 넘어진 밤나무와 상수리나무처럼 나무들의 그루터기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땅의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다.”
21세기에 이르러 희년신앙 행동서사는 나 홀로의 영웅적인 행동일 수 없다. 언제나 끝판에 이르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풀뿌리 사람들과 소통과 연대와 참여일 수밖에 없다. 여럿이 함께 시대의 어둠과 절망과 고난을 통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집단지혜와 집단영성을 찾고 쫓아서 깨달아야한다. 이 땅 풀뿌리 사람들의 고난과 절망은 나와 너와 우리 모두의 고난과 절망이다. 나만 힘들지 않았구나. 너도 그랬구나. 서로의 삶의 고난과 고통 그리고 부끄러움에 대하여 소통하고 공감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한다. 함께 분노하고 연대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희년신앙 행동의지와 힘을 모아야한다. 서로의 삶의 고난과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21세기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실체를 깨닫고 들춰내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렴풋이 말로만 듣고 느끼며 경험하던 21세기 지구촌 제국주의 사악한 지배체제를 고발하고 분쇄하며 새로운 희년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사악한 어둠의 세력들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풀뿌리 신앙인들이 깨닫는 희년신앙 행동서사가 함께 모여서 소통하고 연대해야한다. 그럼으로써 희년세상 여는 더 넓고 깊은 공동체 힘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21세기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집단영성이고 집단지성이다. 이 땅 풀뿌리 신앙인들이 피워 올리는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집단영성과 집단지성이 이 땅의 어둠과 절망을 몰아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이루어 내고야 말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옛 히브리들이 꿈꾸었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과 같을 것이다. 그러할 때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남은 자 신앙과 그루터기 신앙의 뿌리이고 밑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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