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희년신앙』 맥(脈)

초대교회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20. 연보(捐補)신앙 공동체 네트워크

희년행동 2024. 8. 12. 16:39

초대교회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20. 연보(捐補)신앙 공동체 네트워크

고린도전서 16:1-4, 고린도후서 8:12-15, 8:2

 

본문읽기 1. 고린도전서 16:1-4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지시한 것처럼 여러분도 그와 같이 하시오. 주일(안식일 첫날)마다 여러분 각자 얼마씩이든 형편에 따라서(좋은 대로) 자기 곁에 비축해 두시오. 내가 갔을 때에 그때서야 모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도착할 때에, 여러분이 인정할 만한 이들에게 편지를 주어 여러분의 성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도록 이 사람들을 보낼 것이오. 만약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들은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

 

본문읽기 2. 고린도후서 8:2

 

환난(억압)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기쁨이 넘쳤다. 그들의 쪼들리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순수한 많은 연보로 넘쳤다.

 

본문읽기 3. 고린도후서 8:12-15

 

참으로 만일 기꺼이 내려는 마음이 정해졌다면, 가진 것에 따라 내키는 만큼 내시오. 가진 것이 없는데도 억지로 내면 안 됩니다. 참으로 다른 이들에게 편안함을 주려고 여러분에게 괴로움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공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때(지금) 여러분의 넉넉함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메워준 후에 그들 스스로 넉넉하게 되어서 여러분의 부족함을 메워주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는 스스로 공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본문 이해하기

IMF 외환위기 비망록

 

대한민국의 21세기는 IMF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종교정치 체제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속절없이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로 전환 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완전한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 국가이고, 기업국가이며, 독점재벌·맘몬권력 지배체제 국가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 국가에서는 단 하나의 경제 모토(motto)만 있을 뿐이다.

 

모든 이익을 사유화하고 모든 손해를 사회화하라.”

 

이러한 경제모토(motto)는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생생하고 처절하게 겪고 있는 현실상황과 똑같다. IMF 외환위기 이전 한국사회는 가계저축이 많았고 기업들은 대부분 부채를 가지고 있었다. 삼성 등 재벌기업이라도 부채가 많았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0.01% 독점재벌대기업들이 우리사회의 모든 부를 몰아서 쌓아놓았다. 독점재벌대기업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많은 돈을 쌓아놓고도 이 돈들을 어찌할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이 땅의 풀뿌리 사람들은 18백조 원을 넘겨 감당할 수없는 가계부채를 지고 너나없이 채무노예로 살아간다. 더해서, 대한민국 정부조차도 가계부채에 못지않은 공공채무를 지고 허덕인다.

이제 IMF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사회가 해결해야만 하는 핵심과제는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다.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직업, 소득, 자산, 교육, 취업 등 양극화와 불평등이 세계최고 수준이다. IMF 외환위기 이전 너도 나도 중산층이라고 뽐내온 그 많던 중산층 가장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다. 이제 대다수 풀뿌리 사람들이 빈곤층인 가운데 중산층으로 오를 사다리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소수 대기업 정규직 등 중산층이라고 말하기조차 멋쩍은 임금노예들은 상류층으로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저 21세기 자신들의 한치 앞도 장담하지 못할 운 때를 감지덕지 즐거워할 뿐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21세기 이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는 한숨과 눈물조차 말라 비틀어진지 오래다. 눈을 비벼 뜨고 있는 순간에는 단 일분일초도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이 땅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졸업 때까지 무한경쟁독점쌓음소비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 이데올로기를 학습한다. 태어나서부터 자라고 성인이 되어 경제활동을 하는 온 생()이 생존경쟁의 전쟁터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에서 단 한차례라도 실패하면 평생을 가난과 채무노예상황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눈뜨면 일어나서 죽기 살기로 경쟁하고, 피투성이 되어서야 눕고, 피투성이로 일어나 또 싸워야 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 이 땅에서 발 딛고 사는 모든 이들이 삶으로 학습하고 경험하는 생()의 현장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기독교신앙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이어야 할까? 21세기 우리시대 상황에서 교회는 결코 긍정적인 답을 내지 못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교회는 과거 친일반공수구군사독재 지배체제의 내부자였다. 21세기 지금에 이르러서도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의 맨 앞장 길놀이 패로 떨어지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의 승리와 독점을 통한 부와 권력쟁취를 하나님의 복이라고 선전선동 한다. 교회가 스스로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에 기생해서 대형화와 독점화를 이뤘다. 독점종교로써 부와 권력을 쟁취하며 이를 세습한 후 사유화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변혁해야만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맨 앞잡이 길놀이 패 이어야한다. 그것이 기독교회의 희년신앙 행동정신이기 때문이다.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의 재구성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 한국교회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체제로는 대한민국 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가 없다. 무한경쟁독점쌓음소비욕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체제는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에 더해서 하나님과 하나로 창조생명생태계를 말살할 뿐이다. 노령화와 노인빈곤 그리고 인구절벽 문제 등 우리사회 미래의 절망들을 양산해 낼 뿐이다. 나아가 21세기 지구촌 기후위기에 가속페달을 장착 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변혁할 것인가? 이제부터 본문을 읽고 해석하면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본문풀이

연보(捐補)신앙 공동체 네트워크

 

헌금인가, 연보(捐補)인가?

 

한국교회는 지난세기의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면서 귀에 거슬리는 교회용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연보(捐補)를 헌금(獻金) 또는 제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 이렇게 되었을까? 추측해 보면 지난세기의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경제가 고도성장하면서 부에 대한 욕망이 한국교회 안에 넘쳐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교회성장이 발맞추어 나갔다. 그러면서 야훼 하나님께 현세와 내세의 온갖 복과 행운을 비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 교회 안에 퍼져나갔다.

또한 과거 가난한 시절의 경험들 속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재난과 사고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따라서 재난과 사고가 자신의 인생에서 만큼은 비껴가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비는 ()땜 신앙도 활발해졌다. 그렇게 교회 안에 터를 잡은 기복신앙과 액땜신앙으로 인해 야훼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쳐야 한다는 제사의식도 간절해 졌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복과 액땜을 비는 헌금 또는 제물이 예배의식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참으로, 한국교회 안에 똬리 틀고 앉은 사이비하고 미신적인 제사신앙 또는 제물신앙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본문읽기를 하면서 헌금이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다. ‘주일이나 일정한 축일을 맞이해서 교회에 돈을 바침이라고 검색되었다. 대한민국사회에서 교회의 헌금은 유대교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제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헌금을 옛 유대교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제물로 자리매김 시키려고 노력해왔다. 그래서 마침내 한국교회 헌금봉투에 일천번제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헌금신앙 행태는 유대교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제사와 제물개념을 기독교회 헌금으로 잘못 이해한 대표적인 오용사례다.

결론으로 말하면 기독교교리 안에는 성전제사종교체제의 제사와 제물로써 헌금(獻金)이라는 신앙개념이 없다. 아니 있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제사와 제물은 예수의 십자가행동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기독교교리에 따르면 예수의 단 한 번 십자가 희생제물로써 모든 죄용서가 완결되었다. 다시는 죄 사함을 위한 성전제사와 제물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기독교회에는 교우들과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섬기는 일에 필요한 연보(捐補)’가 있을 뿐이다. 이제 본문읽기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연보가 어떤 신앙의미를 갖는지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연보

 

초대교회 교우들은 참으로 많은 연보를 했다. 예루살렘 예수부활신앙 공동체에서 부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과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와 쓰임을 채웠다. 예루살렘교회의 연보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을 내어놓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완전한 공유생활경제를 이루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는 온전한 예수부활신앙 공동체를 꿈꾸고 실천했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교회의 이웃사랑 실천행동은 연보(捐補)라는 신앙개념으로 지중해세계 교회들로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특별히 고린도 전후서는 연보에 대한 기독교회의 신앙정신과 개념 그리고 실천방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본문읽기에서 증언하는 고린도교회의 연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궁핍함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 연보는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함께 하는 것이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다. 바울은 예루살렘 예수부활신앙 공동체를 위한 이 모금을 예루살렘교회와 다른 이방인지역 교회들 간의 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 분배와 나눔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α 섬김과 봉사라고 선포했다. 나아가 바울의 연보는 카리스 χαρίς 선행과 은총으로써 기독교회의 신앙표지(標識)라고 선언했다.

이렇듯이 바울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기독교회의 신앙실천 행동으로써 연보를 강조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뿐 만아니라 마케도니아와 갈라디아 등 소아시아 여러 교회에 이 연보를 요청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모금을 분명하게 테스 로게이아스 테스 에이스 투스 하기우스 τς λογείας τς ες τούς γίους 성도들을 위한 모금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말 옛 성서에는 이 표현을 한자말로 연보(捐補)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연()버릴 연인데 버리다, 주다라는 뜻이다. 또한 보()도울 보인데 돕다, 보태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연보란 내 것을 헐어서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메우는 것을 말한다. 본문읽기에서 성도들을 위한 모금 또는 거룩한 모금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번역이다.

이렇듯이 70년대 이전 한국교회에서는 연보라는 말을 사용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모금 또는 거룩한 모금을 이어받은 것이다. 한마디로 연보는 자기재물들을 내어놓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것이었다.

이점에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마케도니아 교우들의 연보를 칭찬한다. 마케도니아 교회와 교우들은 환난을 만나 큰 시련에 시달리면서도 오히려 기쁨이 넘쳤다고 칭찬한다. 또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많은 연보를 통해 큰 기쁨으로 이웃들을 섬기고 도왔다고 고마워한다. 실제로 마케도니아는 로마제국 시대에 금광과 은광이 많은 광업도시였다. 또한 농업이 발달했고 목재산업도 활발했다. 그러다보니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금융착취와 경제착취가 지나치게 사나왔다. 그러면서 마케도니아 풀뿌리 사람들은 크게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연보는 서로를 공평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연보는 얼마를 내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연보는 없는 것을 억지로 내게 하는 강요가 아니기 때문이다. 채무노예세상에서 빚을 지우고 이자와 이윤을 쥐어짜는 착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와 벌이라는 종교교리로 협박해서 뜯어내는 헌금 또는 성전제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돕는 다는 명목으로 내가 괴로움을 당하거나 부담을 져서는안 된다.

도리어 바울은 연보야말로 서로를 공평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본문이 사용하는 이소테스 σότης라는 헬라어 낱말의 뜻은 공평하게 또는 동등하게이다. 이 낱말은 이소스라는 헬라어 형용사에서 왔는데 동등한 또는 같은이라는 의미다. 나아가 바울은 지금 내가 넉넉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될 때에 또한 나의 모자라는 것을 채워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결국 모두가 공평하게 되는 것이 연보의 참 뜻이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연보는 옛 히브리들의 만나사건에서 그 밑바탕을 찾을 수 있다. 히브리 성서 출애굽기 1617에서 18절 본문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그들이 많이 거두어 모으기도 하고, 적게 거두어 모으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오멜로 되어 많이 거두어 모은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고, 적게 거두어 모은 사람도 모자라게 하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의 먹을 식구수대로 거두어 들였다.”

 

고대 파라오의 노예제국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들은 야훼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세상을 체험했다. 이 신앙체험을 밑바탕으로 히브리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야훼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양식 만나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했다. 야훼 하나님이 주신 하늘양식 만나를 거두고 모아들이는 가운데 불평등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 성서 만나사건 본문을 살펴보면 그들이 많이 거두어 모으기도 하고 적게 거두어 모으기도 했다라고 증언한다. 하늘로부터 내린 양식인 만나를 거두었는데 어떤 이는 많이 거두어 모으고 어떤 이는 적게 거두는 불평등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옛 히브리들은 하늘양식 만나사건에서 벌어진 거둠의 불평등을 통해서 바울의 연보신앙의 참뜻과 결과들을 완벽하게 이뤄냈다.

 

그래서 그들은 오멜로 되어 많이 거두어 모은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고, 적게 거두어 모은 사람도 모자라게 하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의 먹을 식구수대로 거두어 들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많이 거둔 사람이 있고 적게 거둔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이 서로가 필요한 식량만큼 분배되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의 능력에 따라 소득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 불평등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 같은 분배의 평등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기적일까? ‘, 놀라운 하늘양식의 신비여라고 얼버무려야만 할까? 아니다. 옛 히브리들의 만나사건에서는 많이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 사이에 분명한 불평등이 발생했다. 그러나 옛 히브리들은 야훼하나님이 주신 하늘양식을 서로의 식구수대로 평등하게 분배했다. 거두어 모은 것들을 오멜에 담아서 많이 거둔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다. 또한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했다.

실제로 옛 히브리들의 하늘양식으로써 만나사건은 기적이 아니다. 종교 신비도 아니다. 옛 히브리들의 하늘양식 만나사건은 신앙과 생활영성 훈련이다. 옛 히브리들이 야훼하나님과 더불어 맺어야할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우는 신앙행동 훈련이었다. 따라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세상을 세우고 누리려는 예수신앙인들도 옛 히브리들처럼 부단한 신앙행동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도 본문읽기에서 초대교회의 연보를 히브리 성서 만나사건에 직접 비유한다. 연보야말로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게 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하는신앙행동이라고 선언한다. 옛 히브리들이 경험한 하늘양식 만나사건에서처럼 연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공평하게 하는 신앙실천이라고 선언한다. 이렇듯이 연보야말로 넉넉한 이들이 자기 재물들을 내어놓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부족한 쓰임과 필요를 채우는 신앙행동이다. 이로써 바울은 연보를 통해서 서로의 삶이 평등해지는 신앙은총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자기소유물에서 넘치는 것들로 이웃의 모자람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초대교회 연보신앙의 핵심이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연보할 때에 마음과 뜻에 이끌리는 대로 내어놓으며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사실, 초대교회 교우들은 많은 연보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소유물을 탕진했다. 그러면서도 초대교회 교우들은 연보신앙 행동을 통해서 현세나 내세에서 받을 복이나 혹시 모를 액땜 방지를 빌지 않았다. 초대교회 교우들에게 연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해방과 구원은총에 대한 감사였을 뿐이다. 연보는 예수신앙인들의 진심어린 이웃사랑과 관심과 염려로만 가능할 수 있는 신앙행동이었다.

 

맘몬자본숭배 노예세상 종교들에서는 복과 액땜을 빌며 제물과 헌금을 바친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지구촌 여러 종교들에서 복과 액땜을 빌며 신들에게 바쳐지는 간절한 기도들과 헌금들이 넘쳐난다. 복과 액땜을 빌기 위해 서로 다른 거룩한 성전을 찾아가서 서로 다른 종교언어로 서로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른다. 어느 종교에서나 복과 액땜을 비는 사사롭고, 주술적이며, 무속적인 신앙 관념과 의도는 똑같다.

이렇듯이 복과 액땜을 비는 수많은 헌금과 기도들 가운데서 기독교회가 드리는 기도와 헌금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종교와 신앙들의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소원성취 제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21세기 한국대형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우들 사이에 널리 퍼져 터 잡은 기복과 액땜의 헌금신앙 행태로 보아 더욱 더 그렇다.

실제로 21세기 예수신앙인으로서 는 부의 쌓음과 풍요로운 삶을 비는 소원성취 헌금을 드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그 간절한 소원성취 소망을 부동산, 주식, 펀드, 채권투자에 쏟아 붇는 것이 훨씬 낫다. 아니라면 이자가 높은 적금을 찾아서 거기에 헌금할 돈을 넣어두는 것이 좋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면서 언제 닥칠지 가늠해 볼 수조차 없는 재난에 졸아서 야훼 하나님께 일천번제 액땜헌금을 바칠 필요는 없다. 차라리 괜찮은 보험을 몇 개 들어두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도 되고 현실적인 대처방법이다.

이제 21세기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교우들의 기복과 액땜신앙으로 바쳐진 고액헌금들이 갈 곳을 잃었다. 엄청난 헌금이 교회건축과 교회세력 불리기에 투자된다. 그런 가운데 이 땅에는 여전히 가난의 고통과 절망이 존재한다. 우리이웃들 가운데에는 근근이 끼니를 연명하는 것도 힘에 겨워 교회의 도움을 바라는 이들로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들은 반 예수신앙 또는 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행태로써 교회건축과 교회몸집 키우는 일에 교우들의 헌금을 탕진한다. 쥐꼬리보다 작은 구제헌금으로 생색내기에 급급하다.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기복과 액땜헌금 행태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이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잇다.

 

이제 21세기 맘몬자본세상에서 마땅히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초대교회의 연보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기재물을 덜어 가난한 이웃의 밥그릇을 채우는 초대교회 교우들의 연보신앙을 겸허하게 따라가야 할 때다. 한국교회와 교우들에 대한 야훼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사랑은 교우들의 헌금여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야훼하나님의 사랑은 한국교회의 교우들을 당신의 자녀로 사랑하시는 아빠하나님의 한없는 은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야훼하나님 영의 사람, 생명사람, 참사람 예수는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밑바탕을 놓았다. 이제 필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야말로 옛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의 재구성이고 완결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연보신앙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억압과 착취 속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잇는 신앙행동이었다. 이제 한국교회와 교우들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선언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도 옛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이어갈 수 있다.

한국교회와 교우들이 예수를 따라, 예수와 함께, 예수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을 선언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바로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참된 복이다. 그러할 때 예수는 우리 삶의 스승이고 길벗이시며 우리 삶의 주님이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