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희년신앙』 맥(脈)

초대교회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19. 바울이 제안하는 희년세상

희년행동 2024. 8. 12. 16:34

초대교회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19. 바울이 제안하는 희년세상

아무것도 아무에게도 빚지지 마시오.

오직, 서로 사랑하시오.

로마서 13:8-10

 

본문읽기 1. 빚지지 않는 삶 로마서 13:8-10

 

당신들은 아무에게도, 아무것도빚지지 마십시오

만약,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이는

이미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너는 간음하지 마라

너는 살인하지 마라

너는 도둑질하지 마라

너는 탐내지 마라

라는 것도

그 외에 다른 어떤 계명이라도

이 말씀 안에 모아져 거두어집니다.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사랑(사랑하는 이)은 이웃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본문읽기 2. 사랑은 하루하루 삶의 길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견딥니다.

사랑은 친절(유용)합니다.

시기하지 않고, 허세부리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무례하지 않고, 자기 것을 바라지 않고, 성질내지 않고, 악을 계획하지 않습니다.

불의에 대하여는 기뻐하지 않으나, 진리를 함께 즐거워합니다.

모든 것을 막아내고(덮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본문 이해하기

바울 새로 보기

 

본문을 읽고 해석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질문 하나, 바울은 누구인가? 바울은 초기독교회의 예수신앙 밑바탕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에서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체성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약성서에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바울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그런 정도다.

바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다소 사람으로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 그러면서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소유했다. 바울은 유대베냐민 지파 출신으로써 예루살렘에서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바리새파 소속이었다. 바울이 스스로 밝혔듯이 그는 어린 시절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철저한 율법교육을 받았다.

이렇듯이 바울이 유대 디아스포라로서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바리새파가 되었다면 도대체 그의 신앙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신학교에서 성지연구로 독보적이었던 교수님으로부터 바울의 출신성분에 대해 들었던 강의내용을 기억한다.

 

바울의 아버지는 갈릴리 호수 가버나움에서 두로와 시돈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던 기스칼라출신이었다고 한다. 바울의 아버지는 열혈유대인으로서 헤롯대왕 사후에 유대지역과 갈릴리에서 일어났던 풀뿌리사람들의 봉기에 휩쓸렸다. 로마군은 이 유대인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갈릴리에서 이 봉기에 참여한 2천여 명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지만 로마군은 항복한 반란군들을 사면하기도 했는데 바울의 아버지도 로마군에 항복한 후 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바울의 아버지는 다소로 가서 디아스포라로 살았는데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돈을 주고 로마시권까지 얻게 되었다. 바울의 아버지는 열혈유대인이었다. 자기아들인 바울을 예루살렘의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러한 바울의 출신성분에 대한 이야기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는 필자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바울서신서를 진지하게 읽기로 마음먹으면서 바울의 출신성분에 대한 이러한 내용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바울이 누구인가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그려보았다.

필자는 본문을 읽고 해석하면서 바울이 로마제국을 향해 대항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로마제국을 옹호하지는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 도리어 바울은 로마제국 폭력과 죽임의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로마제국을 향한 대항행동으로써 대안세상을 꿈꾸었다고 믿게 되었다. 필자는, 바울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부활신앙 또는 부활세상선교활동을 통해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대한 대항세상운동을 펼쳤다고 이해한다.

이제 필자는, 본문에서 바울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예수부활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 본문을 자세히 읽으며 살펴볼 것이다. 예수가 로마제국 폭력과 죽임의 권력을 향한 대항세상으로 선포한 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바울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지궁금할 뿐이다.

 

 

본문풀이

바울이 제안하는 희년세상

아무것도 아무에게도 빚지지 마시오.

오직, 서로 사랑하시오.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이제,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변혁해야만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맨 앞잡이로 나서야만 한다. 그것이 기독교회의 신앙정신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진실이 그렇게 하도록 교회와 교우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실제로 21세기 예수신앙인들에게는 희년신앙 행동계약에 따른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세상 의무가 있다.

이제 21세기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로는 지구촌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가 없다. 무한경쟁독점쌓음소비욕망만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로는 사회양극화와 불평등의 참혹한 미래를 만들뿐이다. 더해서 하나님과 하나로 창조생명생태계 파괴와 지구촌 기후위기를 깊어지게 할 뿐이다. 노령화와 노인빈곤 그리고 인구절벽 문제 등 우리사회 미래의 절망들을 양산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변혁할 것인가? 과거 군사독재 개발시절의 하면 된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따위로는 새로운 변혁이 불가능하다. 무한성장과 무한개발을 앞세운 자본주의 탐욕경제, 정복경제, 성장경제로도 안 된다. 21세기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 안에서 불로소득 대박경제를 향한 대항세상 행동이 절실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변혁이 필요하다. 너와 나 우리가 서로 기대어 사는 공동체세상으로 삶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이제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의 삶의 마당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향한 절절한 신앙영성으로 가득 채워야한다.

그러나 21세기 한국교회로는 싹수가 아예 노랗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제 필자는, 초대교회와 서구교회가 2천년 기독교역사 안에서 때마다 기독교신앙정신을 우려내고 기대어 온 바울에게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본문이 로마서 13:8-10절 말씀이다. 이제껏 필자가 본문으로 선택해서 자세히 읽었던 기억이 별로 없는 로마서본문을 읽으면서 필자는 이렇게 해석제목을 붙였다.

 

바울이 제안하는 희년세상.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아무것도빚지지 마십시오.

오직, 서로 사랑하십시오.

 

빚지지 않는 삶

 

이제 본문읽기1.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말성서는 본문읽기1. 첫 문장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고 두루뭉술하게 번역을 해놓았다. 그래서인지 어떤 목회자가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를 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러분, 결코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빚을 지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서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진리는 빚 없이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 빚지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보증서거나 세우지 말라것입니다.”

 

물론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은 탐욕적이고 착취적인 투기금융자본경제 체제에서 살면서 빚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많이 보고 경험한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가족이 해체되어 노숙자가 되거나, 한 부모 가정이 되거나, 소년소녀가정이 되는 등 수많은 사연들을 직접보고 듣고 경험한다.

특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채무자의 온 가족들을 보증인으로 엮어서 다함께 빚더미에 나앉게 만드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투기금융자본들의 영업행태가 다른 가족들을 보증인으로 끌어 들일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사회의 많은 빈곤운동 단체들이 투기금융자본들의 보증인제도 철폐운동을 해왔다. 몇 년 전부터 시중은행에서는 보증인제도를 없애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어째든 본문읽기에 대한 어떤 목회자의 설교는 참으로 엉터리 같은 일이다. 본문읽기의 내용과 신앙의미를 빚지지 말고 살아라, 서로 빚보증서지 말라라고 이해하는 설교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나아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결코 서로에게 빚이 되거나 빚을 지우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 합시다라는 설교도 마뜩찮기는 마찬가지다. 한국교회는 본문을 읽고 해석하면서 하나님 사랑을 운운하며 실천행동하지도 못할 사랑타령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로마제국 착취와 독점과 쌓음의 욕망에 대한 대항세상으로써 빚지지 않는 삶을 강조한다. 또한 서로사랑 하나님나라를 제안한다. 바울은 빚지지 않는 삶을 통한 서로사랑 하나님나라 실천행동 하도록 요구한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본문에 앞선 로마서 13:1-7절 본문에서 로마제국의 터무니없이 폭력과 죽임의 권력행사에는 웅크려 있으라고 권유한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지배체제는 내가 선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적대행위를 자제하라고 권면한다. 자세히 보면 바울은 로마제국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대항세상으로써 빚지지 않는 세상을 강조한다.

이점에서 본문읽기의 첫 문장을 제대로 읽고 바르게 번역해보자. 실제로 본문전체는 산문으로 읽히지만 문장하나하나는 시()처럼 쓰여 졌다. 첫 문장은 가정법 문장인데 조건절과 주절의 순서가 뒤바뀌어서 강조의미를 나타낸다. 우리말성서는 본문의 가정법문장을 편한 문장으로 바꾸어 번역하면서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빚지지 마십시오. 만약,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때 본문은 메데니 메덴 Μεδενμεδένʹ 아무에게도, 아무것도라는 헬라어 낱말을 사용한다. ‘메데이스라는 접속사를 여격으로 또 목적격으로 겹쳐서 사용했다. 따라서 낱말의 격변화를 살려서 아무에게도, 아무것도라고 번역했다. 참으로 바울은 진심으로 빚지지 않는 세상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읽기의 첫 문장은 만약, 서로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면이라는 가정법문장이다. 따라서 성서 헬라어문법에 맞게 에이 메 εμηʹ 만일 ~가 아니라면이라는 가정법 조건 절이 문장의 맨 앞에 나와 있어야 정상이다. 이렇게 조건절과 주절의 뒤바꾼 이유는 문장의 내용과 의미를 강조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서로가 빚을 지우거나 빚을 진다면 오롯이 사랑의 빚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빚은 선물이고 은혜다. 나에게 넘치는 쓰임과 필요를 헐어서 다른 사람의 모자라는 쓰임과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은 빚이 아니다. 빚지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나아가 본문읽기의 첫 문장은, 바울이 유대교 바리새파였다는 점에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율법)의 새로운 재해석이다. ‘사랑의 빚은 희년신앙 행동계약의 이자금지와 사회경제 돌봄 그리고 약자보호와 쉼이 있는 노동세상 행동법규들을 한통으로 묶어서 완성할 수 있다.

 

고대 아테네 풀뿌리 사람들의 해방투쟁, ‘풀뿌리 정의(또는 民衆正義)

 

그런데 바울이 강조한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빚지지 말라는 제안은 그리스 풀뿌리사람들의 해방투쟁전통 안에서 아주 오래 된 풀뿌리 정의’(또는 民衆正義). 이와 관련하여 21세기 성서독자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실하나는, 그리스와 로마제국 등 지중해세계가 전통적인 노예사회라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탈레스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노예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노예제도는 고대 지중해세계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 모든 사회에 다 있었던 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 등 지중해세계 노예제도에서 핵심문제는 채무노예였다. 이 채무노예 문제가 고대 그리스 풀뿌리사람들의 해방투쟁의 원인이었고 그리스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핵심내용이었다.

이렇듯이 고대 지중해세계의 채무노예제도의 핵심요소는 옾페일레마 φείλημα 이다. 옾페일레마()의무, 가치, 얽맴, 구속등 여러 사회경제정치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 등 지중해세계에서 빚은 죄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고대 지중해세계에는 옾페일레마 = 옾페일레테스 φειλέτης , 죄인이라는 사회경제종교정치 이데올로기가 팽배했다.

이처럼 채무노예제도는 그리스와 로마 등 지중해세계에서 사회종교경제정치의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채무노예제도에 대한 사회종교경제정치 정당성 이데올로기획득으로 인해 사회경제 약자였던 풀뿌리사람들은 채무노예제도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채무노예는 약탈노예나 전쟁노예와 달리 저항과 반란의 염려 없었다. 평생을 주인의 땅에 매여 살면서 대대로 주인에게 충성해야하는 소작농노로 딱 맞아 떨어졌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등 지중해세계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워 채무노예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은 경제활동이며 부의 축적수단이었다.

그런데 채무노예라고, 땅에 매여 사는 소작농노라고해서 사람이 아닐 수 있을까?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 해방투쟁이 고대 그리스 채무노예들에게서 일어났다. 오롯이 주인의 땅에 매여서 살 수밖에 없었던 소작농들과 소작농노들이 함께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해방투쟁을 일으켰다.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데모스 δμος라고 부른다.

실제로 데모스는 고대 그리스 도시주변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노 또는 소작농 등 농투성이들만의 마을이었다. 이렇게 기원전 6세기 고대 아테네의 데모스 해방투쟁을 통하여 그 유명한 솔론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풀뿌리해방투쟁을 등에 업은 솔론의 개혁의 핵심내용은 세이샄테이아 σεισάχθεια 빚더미 둘러메치기였다. 솔론은 채무노예해방과 빚 탕감과 채무노예제도금지포고령을 발표했다.

이처럼 고대 아테네의 데모스풀뿌리 해방투쟁은 21세기 민주주의의 핵심권리인 직접민주주의의 꽃 데모 demo 집회와 시위가 되었다. 데모는 데모크라티아 δημοκρατία 시민권력, 국민주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21세기 민주주의 핵심은 데모크라시 = 데모 demo 풀뿌리사라들 + 크라시 cracy 정치. 시민정치 또는 풀뿌리정치. 실제로 풀뿌리정치에 더해서 ‘+a 대의정치가 이루어 져야만 21세기에 걸맞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안타포디도미 νταποδίδομι 빚을 되돌려 주다.

 

본문읽기에서 바울은 데모스풀뿌리 해방투쟁을 통해서 고대 그리스사람들이 깨닫게 된 위대한 풀뿌리 정의를 꼭 집어서 제안한다.

 

당신들은 아무에게도, 아무것도빚지지 마십시오.”

 

실제로 고대 그리스 풀뿌리사람들에게 빚지지 않는 삶이란 빚을 되갚는 것이었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풀뿌리사람들이 해방투쟁을 통해서 깨달은 풀뿌리 정의(正義)’.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풀뿌리 정의를 풀어서 새기면 이렇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ὀφείλημα)의 실체는 사람의 쓰임과 필요. 이 쓰임과 필요를 헬라어로 크레마’(χρα)라고 하는데 이 말은 크라오마이 χράομαι 쓰다, 필요로 하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그런데 사람의 모든 쓰임과 필요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크라오 χράω 빌려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각자의 쓰임과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쓰임과 필요를 크라오’(χράω)빌려올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곧 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의 필요와 쓰임에 따라 다른 이들로부터 빌려온 것들을 반드시 안타포디도미 νταποδίδομι 되돌려 주어야한다. 이때 안타포도디도미라는 헬라어 동사는 안티 ντί ~대신에 또는 알맞게 + 아포디도미 ποδίδωμι 되돌려주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나의 쓰임과 필요에 알맞게 또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쓰임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풀뿌리사람들이 해방투쟁을 통해서 깨달은 풀뿌리 사람들의 정의’(또는 민중정의).

이렇듯이 빚지지 않는 삶 곧 빚을 되돌려 주는 것이야말로 풀뿌리 사람들의 정의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밑바탕이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도 언제든 자기의 빚 곧 우리의 빚(우리의 쓰임과 필요)’을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노동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직업과 우리의 재능과 달란트를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 빚(우리의 쓰임과 필요)을 되갚아 오고 있다.

그런데 이 빚, 곧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나의 쓰임과 필요를 되돌려주지 않고 쌓아놓았을 때, 그것이 바로 자산, 재물, 자본이다. 한마디로, ‘자산-자본-재물의 실체는 다른 사람들의 쓰임과 필요를 착취하고 독점하여 쌓아 놓은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온 나의 쓰임과 필요를 되돌려주지 않고 쌓아놓은 것을 사유재산이라고 한다.

또한 사유재산을 많이 쌓아놓은 사람을 플루시오스 πλούσιος 부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부자란 플레토 πλήθω 넘치도록 쌓은자 일뿐이다. 그 부자들의 사유재산을 또 다른 말로 휘파르콘타 πάρχοντα 독점자산이라고 부른다. 이때 휘파르콘타라는 헬라어 낱말은 휘포 πό ~아래로 + 아르코 ρχω 지배하다 또는 움켜쥐다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독점자산가(또는 자본가)들이란, 다른 사람들의 쓰임과 필요를 끌어 모아 내 손안에 움켜쥐고 되돌려주지 않는 스크루우지들이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사람들은 데모스풀뿌리 해방투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쓰임과 필요)을 되돌려주지 않고 쌓아놓는 것을 불의 또는 죄악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이 고대 그리스 풀뿌리사람들의 사회경제정치 깨달음은 고스란히 초대교회의 공유생활경제로 전이(轉移)되었다. 실제로 신약성서에서 죄 사함이라는 헬라어 용어는 빚 탕감용어와 동의어다. 주기도문은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이 사실을 증언한다.

 

당신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빚들을 탕감하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라들에게 빚 탕감을 해준 것처럼.”

 

이제 주기도문에서 더 뚜렷해지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쓰임을 끌어 모아 쌓아둔 우리의 불의한 빚(독점사유자산)’을 반드시 그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워 그들을 채무노예로 만들었던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신앙진실이다.

 

바울이 제안하는 대안세상.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아무것도빚지지 마십시오.

오직, 서로 사랑하십시오.

 

바울은 그리스 풀뿌리사람들의 삶속에 깊이 뿌리내린 풀뿌리 정의(빚지지 않는 삶 또는 빚을 되돌려주는 것)에 보태서 옛 히브리들의 율법(십계명)기독교 신앙의 정의로 제시한다.

 

너는 간음하지 마라, 너는 살인하지 마라, 너는 도둑질하지 마라, 너는 탐내지 마라

 

히브리 성서에서 십계명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야훼하나님과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의 총칙이다. 이제 바울은 본문을 통해 십계명가운데서도 히브리들이 꼭 자신들의 삶에서 몸으로 행동해야 하는 실천항목들을 강조한다. 거기에 더해서 바울은 야훼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총화로써 서로사랑을 강조한다.

 

그 외에 다른 어떤 계명이라도 이 말씀 안에 모아져 거두어집니다.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사랑(또는 사랑하는 이)은 이웃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본문읽기에서 바울의 서로사랑은 하늘로부터 시대의 풀뿌리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늘은총이고 하늘능력이다. 바울은 서로사랑플레로마 노무 πλήρωμα νόμου 율법의 완성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서로사랑은 곧 옛 히브리 지파동맹이 야훼하나님과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의 완성(성취)이다. 나아가 서로사랑은 피라미드 빨대착취구조 채무노예사회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대한 대항행동으로써 대안세상(alternative society)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핵심은유다.

 

당신들은 아무에게도, 아무것도빚지지 마십시오. 만약,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은 이 문장에서 조건부와 서술부를 도치시킴으로써 서로사랑의 무조건성을 강조한다. 서로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의 관계성을 확립한다. 마치 누구나 서로에게 쓰임과 필요를 빌려야 하고 누구나 서로에게 쓰임과 필요를 되 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서로사랑이 없는 삶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서로가 서로를 겨누는 무기이고 서로가 서로를 얽매는 올무다. 서로가 서로를 괴롭게 하는 악순환의 조건일 뿐이다. 이제,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삶의 관계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마주한다. 참으로 우리시대 예수신앙인들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을 통하여 서로를 사랑하는 삶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서로의 쓰임과 필요를 되돌려 주는 빚 탕감 행동에 나서도록 부추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시대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를 향한 대항행동으로써 대안세상인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을 열수 있기를 기도한다.

 

서로사랑은 매일매일 삶의 길

 

사랑은 오래 견딥니다. 사랑은 친절(유용)합니다.”

 

그렇다면 서로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읽기2에서 바울은, 사랑이야말로 일상적인 삶의 태도와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유명한 사랑의 일상성과 우선성을 강조한다.

사랑은 오래 견딥니다.” 본문읽기2는 이 문장을 마크로튀메이 μακροθύμεῖ’라는 헬라어 동사로 표현한다. 여기서 마크로튀메이라는 동사를 분석하면 마크로스 μακρός 지루한 또는 먼 + 튀모스 θυμός 열정이라는 문자의미를 갖는다. 본문읽기2에서 바울은 서로사랑을 지루한 열정이라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서로사랑의 사람은 참을성 있는 사람이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본문읽기2는 이 말을 크레스튜에티 χρηστεύετι라는 헬라어 동사로 표현한다. 크레스튜에티라는 헬라어 동사는 크레스토스 χρεστός 유용한 또는 필요한이라는 형용사에서 유래했다. 한마디로 서로사랑은 이웃과 공동체관계에서 꼭 필요하고 유용한밑바탕조건이라는 뜻이다. 이점에서 바울은, 서로사랑의 사람이야말로 시기하지 않고 허세부리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참으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사랑은 이웃과 공동체를 향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예의(禮儀). 무례하지 않고, 자기 것을 바라지 않고, 성질내지 않고, 악을 계획(또는 계산)하지 않는다. 불의에 대하여는 기뻐하지 않으나, 진리를 함께 즐거워한다.

실제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의에 저항하고 착한 일을 기뻐하고 실천하는 것은 예수신앙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태도임이 분명하다.

참으로 서로사랑은 모든 것을 막아내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 이때 본문읽기2스테게이 στέγει 막아내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한다. 한마디로 서로사랑의 사람은 이웃과 공동체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상처를 덮어주고 모든 다툼과 비난을 막아내는 사람이다.

이렇듯이 바울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온갖 달란트와 뛰어난 능력들에 대하여 서로사랑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본문읽기2에서 고린도교회 안에서 넘쳐나는 갖가지 은사들을 뛰어넘어 더 위대한 신앙의 길로써 서로사랑을 제시한다. 이점에서 서로사랑은 예수신앙인들이 열망해야 마땅한 하늘은총으로써 하늘선물이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사랑의 일상성을 말한다. 바울은 서로사랑이야말로 너와 나, 우리의 관계 안에서 꼭 필요한 공동체 삶의 태도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서로사랑은 사람의 일상 안에서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행동임을 주장한다. 이점에서 고린도전서 13:4-7절의 사랑의 찬가는 군더더기 없는 명사와 동사로만 일관한다. 한마디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마당에서 실천적인 행동들로 드러나는 서로사랑이다.

이제, 바울이 제안하는 희년세상으로써 서로사랑의 빚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나 소망은 시류와 탐욕에 편승하기 십상이다. 사랑의 일상성과 우선성과 불멸성에 이끌림을 받지 못하는 믿음이나 소망 따위는 언제든 시류와 사익에 따라 왜곡되거나 과장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서로사랑이 결여 된 믿음과 소망은 요란스럽고 허탄한 종교말잔치로 끝을 맺는다. 실제로, 21세기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의 무한경쟁, 독점, 쌓음, 소비신화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우겨대는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기복주의신앙이 딱 그렇다.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의 온갖 불의와 폐해와 죄악에 눈감아 버리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신앙삶이 딱 그렇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서로사랑을 외면한 채 오롯이 개인영혼구원 또는 죽어서 가는 천당만을 외쳐대는 한국교회의 사이비구원론이 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