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가운데 가난한 이가 없었다.
기복과 액땜헌금, 반 신앙행태를 치유하는
연보(捐補)에 대하여
고전 16:1-4 / 고후 8-9장
읽기-1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지시한 것처럼, 여러분도 그와 같이 하시오. 주일(안식일 첫날)마다 여러분 각자 얼마씩이든 형편에 따라서(좋은 대로) 자기 곁에 비축해 두시오. 내가 갔을 때에 그때서야 모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요. 내가 도착할 때에, 여러분이 인정할 만한 이들에게 편지를 주어 여러분의 성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도록 이 사람들을 보낼 것이오. 만약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들은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1-4
낱말풀이
* 테스 로게이아스 테스 에이스 투스 하기우스 - τῆς λογείας τῆς εἰς τούς ἁγίους
성도들을 위한 모금 = 연보(捐補)
* 티 에안 유오도타이 τι ἐάν εὐοδῶται 얼마씩이든 형편에 따라서 또는 좋은 대로, 유오도오 εὐοδόω = 유 εὖ 좋은 + 호도스 ὁδός 길
* 카린 χαρίν 성금, 다른 말로 번역하면 ‘은혜, 선물, 은총’
읽기–2
참으로 만일 기꺼이 내려는 마음이 정해졌다면, 가진 것에 따라 내키는 만큼 내시오. 가진 것이 없는데도 억지로 내면 안 됩니다. 참으로 다른 이들에게 편안함을 주려고 여러분에게 괴로움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공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때(지금) 여러분의 넉넉함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메워준 후에 그들 스스로 넉넉하게 되어서 여러분의 부족함을 메워주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는 스스로 공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8:12-15
낱말풀이
* 헤 프로튀미아 프로케이타이 ἡ προθυμία πρόκειται 기꺼이 내려는 마음이 정해졌다면, 프로케이마이 - 앞에 놓이다.
* 카토 에안 에케 유프로스뎈토스 καθὸ ἐὰν ἔχῃ εὐπρόσδεκτος 가진 것에 따라 내키는 만큼 내시오.
유 εὖ 좋은 + 프로스 πρό ~로부터 + 데코마이 δέχομαι 받다, 영접하다.
읽기-3
환난(억압)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의 기쁨이 넘쳤다. 그들의 쪼들리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순순한 많은 연보로 넘쳤다. 고린도후서 8:2
낱말풀이
* 호티 엔 폴레 도키메 틀리프세오스 ὅτι ἐν πολλῇ δοκιμῇ θλίψεως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도 틀리보 θλίβω 억누르다, 괴롭히다.
* 헤 카타 바투스 프토케이아 아우톤 ἡ κατὰ βάθους πτωχεία αὐτῶν 그들의 쪼들리는(깊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카타 κατὰ + 속격 대항하여
* 에페릿슈센 ἐπερίσσευσεν 넘쳤다. 페릿슈오 - 과잉하다
시작하는 말
저는 대를 이어서 예수를 믿는 집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8-90년대 10년여 넘게 교회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 후 90년대 말 다시 교회로 돌아왔을 때, 조금은 생소하고 귀에 거슬리는 교회용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보(捐補)를 헌금(獻金)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추측해 보면, 7-8-90년대 한국경제가 고도성장하면서 부에 대한 욕망이 한국교회 안에 만연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시절 한국경제의 성장과 교회의 성장이 발맞추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현세와 내세의 온갖 복과 행운을 비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 교회 안에 난무 했습니다. 또한 과거 가난한 시절의 경험 속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재난과 사고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따라서 재난과 사고가 자신의 인생에서 만큼은 비껴가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비는 ‘액(厄)땜 신앙’도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만연해진 기복신앙과 액땜신앙의 일환으로 하나님께 무언가 바쳐야 한다는 의식도 간절해 졌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복과 액땜을 비는 헌금이 예배 의식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한국교회 안에 똬리 틀고 앉은 사이비하고 미신적인 헌금신앙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말씀을 읽으면서 헌금(獻金)이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습니다, ‘주일이나 일정한 축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돈을 바침’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유대교 예루살렘 성전제사의 제물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헌금개념을 구약성서의 성전제사 제물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한국교회 헌금 봉투에 ‘일천번제’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헌금신앙 행태는 유대교 예루살렘 성전제사 제물개념을 기독교회 헌금으로 잘못 인식한 대표적인 오용사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회에는 성전제사 제물로써 헌금(獻金)이라는 신앙개념이 없습니다. 아니 있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제사 제물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예수의 단 한 번 십자가 희생제물로써 모든 죄의 용서가 완결됩니다. 다시는 죄 사함을 위한 제사와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독교회에는, ‘교회가 교우들과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섬기는 일에 필요한 연보’가 있을 뿐입니다. 이제 본문말씀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연보가 어떤 신앙적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끄는 말
초대교회 교우들은 참으로 많은 연보를 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부자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과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자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교회의 연보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내가 소유한 모두를 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완전한 공유경제를 이루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온전한 신앙공동체 사회를 꿈꾸고 실천행동 했습니다.
이러한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이웃사랑 신앙정신과 실천행동은 연보(捐補)라는 개념으로 지중해 전 세계 교회에 전파되고 확산되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전․후서에는 연보에 대한 기독교 신앙정신과 개념, 실천방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증언하는 고린도교회의 연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궁핍함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연보는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함께 하는 것이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예수신앙공동체를 위한 이 모금을 예루살렘교회와 다른 이방인 지역 교회들 간의 ‘코이노니아 – 친교와 나눔’ 또는 ‘디아코니아 - 섬김과 봉사’ 나아가 ‘카리스 - 선행과 은총’의 표지로써, 매우 소중한 기독교 신앙실천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뿐 만아니라 마케도니아, 갈라디아 등 소아시아 여러 교회에 이 ‘연보’를 간청했습니다.
이 점에서 바울은 이 모금을 분명하게, ‘테스 로게이아스 테스 에이스 투스 하기우스 - 성도들을 위한 모금’이라고 표명합니다. 우리말 옛 성서에는 이 표현을 한자말로 연보(捐補)라고 번역 했습니다. 여기서 연(捐)은 ‘버릴 연’인데 ‘버리다, 주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보(補)는 ‘도울 보’인데 ‘돕다, 보태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보란 ‘내 것을 버려서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메우는 것’으로써 본문말씀의 ‘성도들을 위한 모금, 또는 거룩한 모금’이라는 표명에 딱 들어맞는 번역입니다.
이렇듯이 70년대 이전 한국 기독교회에서는 ‘연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유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모금, 또는 거룩한 모금’입니다. 한마디로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다른 사람의 궁핍함을 채워준다는 뜻입니다. 이점에서 바울은 본문말씀을 통해 마케도니아의 교우들이 연보를 칭찬합니다. 마게도니아 교회 교우들은 환난을 만나 큰 시련에 시달리면서도 오히려 기쁨이 넘쳤습니다. 또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많은 연보를 통해 큰 기쁨으로 이웃들을 섬기고 도왔습니다.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연보는 얼마를 내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연보는 없는 것을 억지로 내게 하는 강요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돕는 다는 명목으로 ‘내가 괴로움을 당하거나 부담을 지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연보는 서로를 공평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넉넉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 또한 나의 궁핍을 그들이 덜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두가 공평하게 되는 것이 연보의 참 뜻입니다.
이러한 연보는 구약성서 만나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17-18말씀에는 이렇게 증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많이 거두어 모으기도 하고, 적게 거두어 모으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오멜로 되어 많이 거두어 모은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고, 적게 거두어 모은 사람도 모자라게 하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의 먹을 식구수대로 거두어 들였다.”
고대 이집트제국 파라오의 노예였던 히브리들은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에 대한 신앙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신앙체험 속에서 히브리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야훼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양식 만나를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주신 하늘양식 만나를 거두고 모아들이는 가운데, 불평등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성서 만나사건 말씀을 살펴보면 ‘그들이 많이 거두어 모으기도 하고, 적게 거두어 모으기도 했다’라고 증언되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린 양식인 만나를 거두었는데 어떤 이는 많이 거두어 모으고 어떤 이는 적게 거두는 불평등의 결과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만나사건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 그래서 그들은 오멜로 되어 많이 거두어 모은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고, 적게 거두어 모은 사람도 모자라게 하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의 먹을 식구수대로 거두어 들였다 - 라고 증언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분명히 하늘양식 만나를 많이 거둔 자가 있고, 적게 거둔 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부족함이 없이 각자에게 필요한 식량대로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소득의 많고 적음의 불균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적 같은 분배의 평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기적일까요? 그저 ‘놀라운 하늘양식의 신비’라고 이해해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만나사건에서는 많이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사람 사이의 분명한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야훼 하나님이 주신 하늘양식을 각 사람의 식구수대로 평등하게 분배했습니다. 거두어 모은 것들을 오멜에 담아서 많이 거둔 사람도 남을 만큼 가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했습니다.
사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하늘양식으로써 만나사건은 기적이 아닙니다. 신비도 아닙니다. 하늘양식 만나 사건은 훈련입니다. 독점자본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성공신화 마약이 아니라,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야훼 하나님의 정의와 평등사회를 사는 신앙인들의 부단한 신앙훈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연보’야말로 구약성서 만나사건에서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라고 증언된 대로 ‘실천하는 신앙행동임’을 선언합니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경험한 하늘양식 만나사건에서처럼 연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공평하게 하는 신앙실천행동’입니다. 이렇게, 연보는 넉넉한 이들이 자신의 것들을 내어놓아 궁핍한 이들의 부족함을 채우는 신앙행위를 통해 서로의 삶이 알맞게 균등해지는 신앙은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소유물에서 넘치는 것들로 이웃의 모자람을 지탱해 주었던 것이 초대교회 연보 신앙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연보함에 있어 마음과 뜻에 이끌리는 대로 하고,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사실, 초대교회 교우들은 많은 연보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소유물을 탕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초대교회 교우들은 ‘연보 신앙행위를 통하여 현세나 내세에 받을 복이나 혹시 모를 액땜 방지’를 소원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에게 연보란 오로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해방과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연보는 ‘예수 신앙인들의 이웃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과 사랑과 염려로만 가능할 수 있는 철저한 신앙행동’이었습니다.
맺는 말
21C 우리시대에서도, 어느 종교에서나 복과 액땜을 빌며 신들에게 바쳐지는 간절한 기도들과 헌금들이 넘쳐 납니다. 복과 액땜을 빌기 위해 각각의 거룩한 장소를 찾아, 각각의 종교언어로, 각각의 신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복과 액땜을 비는 사사롭고, 주술적이며, 무속적인 신앙 관념과 의도는 또렷하게 한가지입니다. 그렇게 복과 액땜을 비는 수많은 헌금과 기도들 가운데서, 기독교회 교우들이 드리는 기도와 헌금이라서, 다른 종교․신앙들의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비나리 소원과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우들 사이에 만연한 ‘기복과 액땜의 헌금신앙’으로 보아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 당신은 예수신앙을 부르짖으면서 부의 축적과 풍요로운 삶을 소원하는 헌금을 드리고 계십니까? 차라리, 그 간절한 소원을 부동산, 주식, 펀드나 채권, 아니면 이자가 높은 적금을 찾아, 거기에 쏟아 붓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면서 언제 닥칠지 가늠해 볼 수조차 없는 재난에 쫄아서 하나님께 일천번제 액땜헌금을 바치고 있다면, 차라리 괜찮은 보험을 몇 개 들어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것들이야말로 당신에게 더 큰 위안이 되고, 실제적인 대처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교우들이 기복과 액땜신앙으로 교회에 바친 고액의 헌금이 갈 곳을 잃었습니다. 엄청난 헌금이 교회건축과 교회의 세력불리기에 투자됩니다. 그런 가운데, 이 땅에는 여전히 가난의 고통과 절망이 존재합니다. 우리 이웃들 가운데에는 근근이 끼니를 연명하는 것도 힘에 겨워 교회의 도움을 바라는 이들로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반 예수신앙, 반 하나님나라 신앙행태로써 교회건축과 교회 몸집 키우는 일에 교우들의 헌금을 탕진합니다. 그러면서 쥐꼬리보다 작은 구제헌금으로 생색내기에 급급합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기복과 액땜헌금 행태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본문말씀의 초대교회 교우들의 연보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기 것을 덜어 가난한 이웃의 밥그릇을 채우는 초대교회 교우들의 연보신앙을 겸허하게 따라가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와 교우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사랑은 교우들의 헌금 여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와 교우들을 당신의 자녀로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의 마땅한 자녀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와 교우들에게 마땅하고 당연한 복은 예수신앙인으로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교우들이 예수를 따라, 예수와 함께, 예수처럼, 이 땅의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이야말로 한국교회와 교우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참된 복입니다. 그러할 때 예수는 우리 삶의 스승이고 길벗이시며 우리 삶의 주님이 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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