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드리는 주기도문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하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당신께서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당신께서도 우리에게서, 우리의 빚들을 탕감하소서!
실제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탕감했던 것처럼.
또한 당신께서는 우리를 유혹(시련)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당신께서는 우리를 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끌어내소서. 마태복음 6:9-13
낱말풀이
▶ ‘운’(οὖν) 그러므로 : 이 낱말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문맥으로 보아 ‘주기도문이 예수의 산상설교의 핵심’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낱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 산상설교를 ‘예수의 하나님나라 대헌장’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마태복음6:9-13 주기도문이 ‘예수의 산상설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주기도문 이야말로 - 어떻게, 산상설교의 참 뜻을 우리의 신앙과 삶으로 구체화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 에 대한 해답이다. 한마디로 주기도문에 따라 신앙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기도문에 따라 신앙의 삶을 살면 될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11:2-4에는 마태복음 주기도문과는 달리 짧은 주기도문이 들어 있다. 성서학자들은 누가와 마태 모두 주기도문을 예수의 어록에서 옮겨 적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성서학자들은 누가복음 짧은 주기도문을 예수의 어록에 충실한 본문으로 여기는 반면, 마태복음의 긴 주기도문에는 마태의 첨가부분이 많다고 설명한다. 더하여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은 마태의 기록 이전에 이미 초대 기독교회가 규범으로 정한 주기도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태복음 주기도문은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의 정식 주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점에서 마태복음 주기도문에는 일곱 개에 달하는 교회와 신앙공동체의 청원이 들어 있다. 그 일곱 개의 청원 가운데 처음 세 개는 하나님께 대한 교회의 청원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 /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 개의 청원은 초대교회의 ‘신앙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두 가지 청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신앙공동체의 청원으로써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 / 우리의 빚들을 탕감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빚들을 탕감해 달라는 청원’에는 ‘실제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탕감했던 것처럼’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한마디로 주기도문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청원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삶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주기도문 일곱 개 청원 가운데 여섯째와 일곱째 청원은 ‘우리의 시련(유혹), 우리의 악’ 등 ‘그리스도인의 신앙 삶의 위기’에 대한 신앙공동체의 청원이다. 그 구체적인 청원 내용은 ‘우리를 시련(유혹) 속으로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 / 우리를 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끌어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조차도 이 세상에서의 돈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주기도문의 이 마지막 두 청원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영성의 핵심’으로써 아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하나님의 참여와 행동을 요청’한다.
▶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실제로, 예수는 누구에게 청원하고 기도했을까? 또한 우리에게는 누구를 향하여 기도하고 청원하라고 할까? 저 멀리 하늘 너머에 절대타자로 계시는 그 분에게일까? 마태복음 주기도문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제시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하게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신 하나님의 이름마저도 감히 대놓고 부르지 못했다. 그러던 유대인들도 신약성서 시대에 이르러서는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아버지’(아브)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아가 혹자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아비누)라고 부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유대인 예수 신앙공동체’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마태복음 신앙공동체의 상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우주란? 하늘과 땅과 바다, 그 안의 존재하는 뭇 생명 등, 하나님의 온존한 창조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세계 곳곳에, 어디에서나 계신다.
이렇듯이, 마태복음 공동체가 초대교회 유대인들의 예수신앙 공동체라는 전제하에서, 마태복음 주기도문의 위 헬라어 문구를 히브리어로 번역한다면 ‘아비누 쉐바솨마임’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의 하늘 ‘솨마임’은 헬라인들의 이원론적 세계관 속에서의 ‘하늘 - 그 너머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다. 또한 유대인의 하늘 ‘솨마임’은 현대과학의 우주그림처럼 무한대로 확장되지도 않는다. 도리어 유대인의 하늘 ‘솨마임’은 ‘여기 - 사이 - 틈(間)’의 세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세계 영역의 모든 사이사이에서 충만하게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 물론, 마태복음의 이 표현에는 가족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가부장적인 ‘명예와 존경’으로써의 아버지를 드러낸다. 또한 이 낱말은 ‘창조와 교조’라는 사회적 의미로써 ‘지배자 아버지’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다르다. 예수는 대놓고 하나님을 ‘아빠’(ἀββᾶ)라고 부르고 그렇게 가르쳤다.(막14:36) 그런데 ‘아빠’라는 용어는 아람어로써 매우 친밀하고 정감이 넘치는 호칭이다. 이 호칭은 그 무엇도 끼어 들 여지가 없는 아버지와 아이 사이의 무한한 신뢰와 친밀함 속에서 사용되어지는 ‘관계용어’이다. 한마디로 ‘아빠’는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가정 용어’이며 또한 ‘아이 말’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이 사이에 이러한 신뢰와 친밀함이 돈독하다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에라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점에서 ‘아빠’는 가부장적이고 지배 권력적인 사회용어 ‘아버지’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앙언어’이다. 새로운 ‘신앙가족’이며 ‘거룩한 가족’인 ‘예수 신앙공동체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로써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제자도 안에서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귀하고 사랑스러운 자녀라고 인식했다.(롬8:15, 갈4:6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아빠’라는 호칭을 헬라어로 옮기면서 ‘아버지’(πάτηρ)라고 젊잖게 표현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몇몇 신학자들이 주기도문의 이러한 표현을 가부장적인 표현이라고 지적하면서 ‘하늘에 계신 어머니, 또는 어버이’라고 표현 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 첫 번째 청원 : 당신(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 ‘하기아스테토’(ἁγιασθήτω 수동 명령형).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사람의 역할과 활동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다. 다만,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게 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느끼고, 이해하며, 기쁨으로 누리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내용은 무엇일까? 유대인들의 공동체 신앙경험 속에서 –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창조 사건’이다. 하나님은 자신생명의 힘으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 하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생명의 씨를 ‘온 생명 - 하나님의 창조생명 공동체’위에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 아빠의 아들과 딸들이 끊임없는 생명 삶을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빠의 거룩하심의 토대’이다.
또 하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사건’이다. 하나님 아빠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의 능력으로 이집트제국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시고 구원하셨다. 이로써 히브리 노예들이 ‘자유․정의․평등․생명․평화세상’을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 아빠는 이집트제국 파라오의 노예였던 히브리의 해방과 구원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딸들이 당신의 사랑과 은총, 생명과 평화, 정의와 평등 세상을 건설하도록 하셨다. 당신의 생명의 아들․딸들이 거리낌 없는 ‘생명살이’를 통하여 이 땅에 거룩한 해방세상을 건설하기를 고대하신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청원하라고 할까? 한마디로,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시대에 로마제국의 일상적인 폭력과 전쟁 속에서 하나님 아빠의 아들․딸들이 무고한 죽임을 당한다. 제국주의․식민주의․노예주의 사회에서 하나님 아빠의 해방과 구원신앙은 조롱의 대상이다. 로마제국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 아래서 하나님 아빠의 아들․딸들의 거룩한 삶이 무참히 짓밟힌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자기시대 하나님 아빠의 아들․딸들의 거룩한 생명살이의 터전이어야 한다.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 아빠의 해방과 구원의 보루로서 이 땅에서 거룩한 하나님 아빠의 생명세상을 열어가야 할 소명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의 생명살이의 보루로서 하나님 아빠의 거룩하심을 증언하고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신앙삶 속에서 ‘하나님 아빠의 거룩한 생명사건들’을 일으켜 냄으로써 ‘하나님 아빠의 이름’이 거룩해지도록 요청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러한 신앙 삶의 요청조차도, 하나님 아빠가 우리의 신앙과 삶의 후원자시고 지지자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신앙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라는 우리의 신앙 요청은 어떻게 이 땅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오면 그렇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선포되고 예수의 삶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지금 ․ 여기 ․ 이 땅에서부터 바르게 세워지는 것이 바로 ‘이 땅위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거룩’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의 둘째 청원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내용을 찾아야 한다.
▶ 두 번째 청원 :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ἡ βασιλειʹα τοῦ θεοῦ 하나님 나라) / ‘엘테토’(ἐλθήτω - 능동 명령형, 오소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구약성서의 빛 아래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임금 되시어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종말적 통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는 이 하나님 나라를 종말의 일로 여겨 무작정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예수는 여러 가지 비유와 말씀을 통하여 지금 ․ 여기․ 이 땅에서, 사람들의 삶의 마당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또한 예수는 로마제국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기득권에 얽매여 억압받고 고난 받는 민중들에게 여러 가지 ‘삶의 기적’을 실천했다. 그럼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해방과 구원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예수의 존재 ․ 인격․ 말씀과 삶 ․ 십자가 안에서 이미 하나님나라는 시작되었고 이루어졌다.(마태복음11:1-6, 13:44-46, 누가복음1:20 등 참조)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종말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역시 지금 ․ 여기 ․ 이 땅에서의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통하여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금 ․ 여기 ․ 이 땅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마주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회개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개 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자신의 생각과 원칙․행동 등, 자신의 모든 삶의 태도를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맞게 변혁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온 몸과 온 맘을 다해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맞이함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지금 ․ 여기 ․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 아빠의 현존을 경험하는 삶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빠의 현존을 통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누리는 ‘온전한 신앙의 삶’이다.
▶ 세 번째 청원 :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 ‘텔레마 테우’(θέλημα θεοῦ 하나님의 뜻) / ‘호스 엔 우라노 카이 에피 게스’(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ί γῆς 하늘과 같이 땅위에서도) / ‘게네테토’(γενηθήτω 중간태(수동) 명령형, 이루어지소서).
여기서 ‘하나님의 뜻’(텔레마 테우)라는 헬라어 용어의 관용적 의미는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나라 도래에 대한 요청’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완성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하나님 자신의 요청’이 내포되어 있다. 그 요청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대헌장인 예수의 산상설교를 구체적인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의 하나님 아빠가 바라시는 참 뜻이며 기쁨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교회와 신앙공동체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의 삶으로 살아 낼 때, 이 땅의 뭇 사람들이 하나님 아빠의 거룩한 다스리심을 깨닫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예수의 제자 된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통하여, 뭇 사람들도 미래의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다다르게 되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주기도문의 처음 세 가지 청원은 기독교회의 신앙핵심이다. 거룩한 교회의 증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창조 사건’이다.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사건’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사건’이다. 이 세 가지 하나님 아빠의 거룩하심의 내용을 우리의 교회가 실천해 냄으로써,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이다.
▶ 네 번째 청원 : 당신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 ‘도스’(δός 능동 명령형, 주소서) /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υʹσιον 우리의 일용할(내일의) 양식).
21C 금융자본경제 체제에서 교회란 무엇이어야 할까? 주기도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청원은 ‘예수 신앙인의 삶과 생활영성’에 대한 초대교회 신앙공동체 청원으로써 ‘교회와 신앙과 삶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마태복음 주기도문의 네 번째 청원은 ‘당신께서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이다. 여기서 ‘일용할’이라고 번역한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라는 형용사 대해서는 두 가지 전통적인 해석들이 전해져오고 있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뜻을 그대로 히브리어로 옮기면 ‘우리 몫의 양식’(레헴 후케누)이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청원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절절하고 마땅한 삶의 토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는 우리에게 당연하고 마땅한 일용할 양식을 청원하라고 요구할까? 우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일상적으로 수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맘몬(자본)세상에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분명하고 당당하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우리 몫의 양식’을 빼앗아 가는 맘몬(자본)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을 맥없이 포기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빠께 우리의 절절하고 마땅한 일용할 양식을 적극 청원해야 한다. 하나님 아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분명하고 당당한 요구를 맘몬(자본)세상을 향하여 외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분명하고 당당한 삶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제국 파라오의 노예였던 히브리들이 해방과 자유, 정의평등세상 건설을 위해 광야의 삶을 훈련했던 것과 같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광야의 고난훈련을 통하여 파라오의 고기 가마와 떡 광주리에 대한 노예적 그리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마치, 예수와 갈릴리 민중들이 일으킨 빈들에서의 ‘오병이어 기적’과 같다. 예수와 갈릴리 민중들은 아무것도 기댈 것 없는 빈들에서 오병이어 밥상공동체 기적을 실천했다. 그럼으로써, 로마제국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종교기득권에 대한 삶의 종속을 떨쳐내고 이 땅의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21C 맘몬(자본)권력숭배의 시류를 밀쳐내어 당당한 공동체 삶의 터전을 실험하는 몇몇 대안 교회들의 활동과 같다. 이들 대안교회들은 맘몬(자본)세상의 무한경쟁․무한독점․무한축적․무한소비라는 삶의 구조를 거부한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신앙공동체의 실천 행동을 고민하고 실행함으로써, 이 땅의 하나님나라 소망을 선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교회들은 분명하고 당당하게 ‘당신께서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청원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오늘 우리시대의 맘몬(자본)세상에 대한 변혁의 선봉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맘몬(자본)세상에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상을 탐하거나 소비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생명의 몫’을 착취하거나 빼앗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청원은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사는 이들의 가장 큰 신앙 삶의 잣대이다. 한마디로 일용할 양식 이상을 탐하거나 축적하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불신앙이다.
또 하나,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라는 형용사는 ‘내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라는 형용사의 어원이 ‘에페이미’(ἔπειμι 다가오다)라는 동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의 네 번째 청원은 ‘당신께서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내일 양식을 주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래나 글피 등, 먼 앞날의 양식을 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 앞날의 양식을 구하는 행위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안에서 쓸데없는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맘몬(자본)세상의 무한경쟁․무한독점․무한축적․무한소비 삶의 구조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독점과 쌓음의 나라가 아니라, 탕감과 돌봄과 내어줌을 통한 자유․정의․평등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청원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탕감과 돌봄과 내어줌이 기초적인 ‘삶의 질서’이다. 혹여, 조금 모자는 상황 속에서라도 여럿이 함께 모자람 없이 넉넉함을 누릴 수 있다.
이와 같은 주기도문 네 번째 청원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구약성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만나사건’에 잘 드러나 있다. 사실, 히브리들의 만나 사건은 어떤 신비롭고 경이로운 종교적 사건이 아니다. 또한 우연한 신화적 사건도 아니다. 만나사건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광야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다. 또한 만나사건은 하나님께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에게 주시는 하늘 양식이다. 나아가 만나사건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반드시 실행해야만 했던 신앙 삶의 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 양식은 맘몬(자본)권력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도저히 이해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하늘양식은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세상을 사는 사람들만의 것이다. 하나님 아빠께서 ‘생명의 아들딸들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며 ‘생명의 아들․딸들의 삶의 존엄’이다.
한편으로 일부 종교 기득권자들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의 승자독식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맘몬(자본)세상의 승자독점․증식․축적은 곧 썩어서 냄새가 나고 구더기가 들끓게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독점자본주의 금융경제체제의 가장 부도덕한 기술 발전은 ‘독점과 쌓음의 기술’이다. 그 기술 발전이 얼마나 놀라 운지, 국가 사법기구들도 수 백 조원에 이르는 지하 불법자금의 흐름을 찾아내지 못한다. 실제로, 수많은 재벌들과 기득권계층들은 지구촌 곳곳의 조세피난처에 천문학적 불법자금을 비밀리에 쌓아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은 단 한 건의 불법자금 사례도 적발해 내지 못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승자 독점․증식․축적은 또 다른 독점과 쌓음을 낳는다. 한마디로 돈이 돈을 생산한다. 그렇게 해서 승자독점 자본은 마침내 맘몬 신(神)이 된다. 이제, 자본가라도 자본의 노예이다. 자본가는 무한독점․무한증식․무한축적을 욕망하는 맘몬(자본)권력의 하수인일 뿐이다. 결단코 자본가들은 독점자본을 해체하여 가난한 이웃들에게 흩어주지 못한다.
이제 21C 금융자본경제 시장경쟁 체제에서는 옛 ‘소박한 자본주의’의 설자리가 없다. 작고 소박한 자본과 노동이 서로 도와 필요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서민 경제체제는 죽었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에서는 초국적 독점자본의 무한독식․증식․축적의 탐욕만 난무한다. 그들의 무지한 탐욕으로 인해 지구촌 저개발 국가의 노동자들은 하루벌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이르러 저개발 국가들에 산재한 ‘애플 아이폰 생산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자살소동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남아시아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온갖 사고로 떼죽음을 당한다. 우리의 삼성반도체 공장에서도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이런 저런 산업재해로 날마다 죽어 나가고 있다.
이렇게, 맘몬(자본)의 무한독점․증식․축적의 탐욕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탈취함으로써, 이들의 노예적 삶을 영속화한다. 맘몬(자본)의 탐욕은 기어코 하나님의 정의․평등, 생명․평화세상을 파탄 내고야 말 기세이다. 우리사회에서 삼성 등 유수 재벌들이 쌓아 올린 금권 바벨탑은 이제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 국가․종교․문화 등 우리사회는 이미 재벌들의 금권 바벨탑에 대하여 저항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맘몬(자본)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의 청원은 용기와 의지와 실천을 담보하는 부단한 삶의 훈련일 수밖에 없다. 그 훈련은 맘몬(자본)권력의 독점과 쌓음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염원하는 이들의 특권이다. 참으로, 그 훈련은 여럿이 함께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 누리려는 예수 신앙인들의 피나는 신앙과 삶의 투쟁이다.
물론, 맘몬(자본)세상에서는 일용할 양식조차도 각 사람의 달란트에 따라 많고 적은 불평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 양식으로써 일용할 양식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남음도 없이, 모자람도 없이 나누어진다. 따라서 무한경쟁․무한독점․무한축적․무한소비 삶의 구조 속에서는 결코 일용할 양식을 청원할 수 없다. 21C 금융자본경제 시장경쟁 체제 아래서 승자독식은 결코 하늘 양식이 아니다. 승자독식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맘몬(자본)세상의 악덕일 뿐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청원을 주목해야 한다.
▶ 다섯 번째 청원 : 당신께서도 우리에게서, 우리의 빚들을 탕감하소서! - ‘압폐스’(ἀφες 능동 명령형, 탕감하소서) ‘압피에미’(ἀφίημι 탕감하다/용서하다) / ‘옵헤일레마’(ὁφεὶλημα 빚) / ‘카이’(καὶ 기본접속사, ~역시도, 실제로)
‘우리의 빚들을 탕감해 달라’는 주기도문 다섯 번째 청원에는 ‘실제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탕감했던 것처럼’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빚’은 종종 ‘죄’를 가리키는 상징어로써의 역할을 한다.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을 죄로 여기는 지중해 세계의 채무노예제도 때문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채무노예제도는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땅한 징벌이다. 이점에서 예수 시대에 흔히 사용되던 아람어 ‘호바’라는 용어에는 ‘빚 그리고 죄’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또한 ‘호브’라는 동사 역시도 ‘빚지다 그리고 죄를 짓다’라는 이중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지중해 세계에는 고대로부터 채무노예제도가 성행해 왔다. 이미 상고시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채무노예제도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구약성서는 요셉이야기를 통해서 고대 이집트제국의 채무노예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BC 6C 그리스 솔론의 개혁이야기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채무노예제도를 통하여 민주공화정을 지탱해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노예제도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나아가 이들의 인종차별적 노예제도 논리를 수용한 서구기독교회는 아프리카 흑인 등 이교도 이방인들을 노예로 삼는 일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렇게, 노예제도를 통하여 발전한 고대 헬라와 로마의 도시들에는 노예를 사고 파는 노예시장이 존재했다. 전쟁 시에는 전쟁노예와 약탈노예들이 노예시장에 공급되었다. 또한 평화 시에는 빚으로 인한 채무노예들이 공급되었다. 특히, 지중해 세계가 로마제국에 의해 평정되면서부터 채무노예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점에서, 로마제국의 평화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일용할 양식을 탈취해서 독점하고 축적할 수 있었던 제국의 기득권자들만의 평화이다.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빼앗긴 대중들은 고리의 빚을 지고 채무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채무노예 제도야 말로 기득권계층의 아주 중요한 돈벌이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 이러한 채무노예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매우 큰 선행이며 명예로운 일이었다. 이점에서 구약성서는 ‘이웃들의 빚을 탕감해주거나 되 갚아주는 이’를 가리켜 ‘구속자’라고 한다. 따라서 일찍이 구약성서는 안식년과 희년제도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에 대한 빚 탕감을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의무로 규정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구약성서의 안식년과 희년 정신을 한층 더 심화’시킨다. 주기도문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탕감함으로써, 하나님께 우리의 빚들을 탕감해 달라’고 청원할 수 있다. 즉, 우리 스스로의 빚 탕감 실천행동을 통하여, 맘몬(자본)세상 속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빚을 지워 그들을 괴롭혀온, 우리의 더 큰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맘몬(자본)세상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몫’ 이상의 일용할 양식을 탐하거나 허비한다. 또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상의 것들을 독점하고 쌓음으로써 삶의 불안을 해소하기도 하고, 자부심을 누리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난한 이들의 ‘생명의 몫’을 빼앗는 죄를 짓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죄악들은 우리사회의 공동체성 및 연대성을 파괴한다. 또한 우리의 삶의 마당을 하나님 없는 맘몬(자본)세상으로 전락시킨다. 나아가 가난한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를 지고 절망의 나락에 빠져 허덕이게 한다.
이제, 21C 교회는 더 이상 맘몬(자본)세상의 승자독식과 축적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호도할 수 없다. 배타적인 독점과 쌓음은 탕감과 돌봄과 내어줌이 상호 순환하는 하나님나라와 결코 공존할 수 없다.
또한 이제, 우리가 맘몬(자본)세상의 승자독식과 쌓음을 포기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이제, 우리가 맘몬(자본)지배체제에 기생하여 가난한 이들을 편 가르고 차별하며 배제하는 종교기득권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나라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
특별히 21C 우리의 교회가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 ․ 정리해고자 ․ 무직자 ․ 과중채무자들의 삶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 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미래에서 영원하고 참된 하나님나라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태복음 주기도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청원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영성’에 대한 강조이다.
▶ 여섯 번째 청원 : 당신께서는 우리를 시련(유혹) 속으로 끌어들이지 마소서! - ‘메 에이세넹케스’(μή εἰσενέγκῃς 능동 명령, 끌어들이지 마소서), ‘에이스페로’(εἰσφέρω = εἰς 안으로 + φέρω 안내하다) /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 시련 또는 유혹, 시험).
▶ 일곱 번째 청원 : 당신께서는 우리를 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끌어내소서! - ‘흐뤼사이’(ῥῦσαι 중간태(재귀-보다 적극적인 행동표현) 명령형, 끌어내소서) / ‘아포 투 폰네루’(ἀπό τοῦ πονηροῦ 악에 속한 것으로부터).
이 청원들은 우리에게 ‘예수영성의 내용과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마태복음 주기도문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청원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기와 고난에 대한 예수 신앙공동체의 청원이다. 이제 주기도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청원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과 삶의 영성’을 자세히 살펴본다.
실제로, 21C에 들어서 한국교회의 큰 화두는 ‘영성’(靈性 - spirituality)이다. 큰 교회로부터 작은 교회들까지 이런 저런 영성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목회에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도입되는 수많은 영성 프로그램들은 그 내용과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관통하는 영성은 무엇인지? 지금 한국교회에 난무하는 영성 프로그램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일치하는지? 서구교회의 유명 영성프로그램들을 그대로 베껴와 한국교회 상황에 이식하는 것이 맞는지? 한국교회 일부에는 사람의 고유한 인성과 양심을 무시하는 사이비영성 프로그램들이 난무한다.
이점에서 주기도문의 이 마지막 두 청원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영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청원들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대한 아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하나님의 참여와 행동을 요청’한다. 그 구체적인 요청 내용은 ‘우리를 유혹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하라는 것’과 ‘우리를 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끌어내라는 것’ 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주기도문 여섯 번째 청원 ‘우리를 유혹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유혹’일까? 한마디로 예수가 몸소 겪었던 유혹이다. 사실 우리는 ‘예수조차도 이 세상에서의 돈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예수조차도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유혹을 받았다면, 이러한 유혹들은 하나님 없는 맘몬(자본)세상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가장 강력한 유혹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러한 유혹들은 ‘사탄의 유혹’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사람의 탐욕은 그 자체에 마력(魔力)이 있다. 한 사람의 의지와 결기로는 능히 감내하기 어렵다. 아무리 마음이 바르고 곧은 사람일지라도 ‘돈과 권력과 명예의 위력’앞에 무릎 꿇기 십상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려는 결의를 새롭게 함으로써, 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만 섬기고 살겠다는 의지와 결기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맘몬(자본)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뒤집어엎는 ‘예수의 복음’이다. 예수의 복음은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로서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맘몬(자본)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 숭배’에 저항하는 ‘생명․평화 공동체 세상’이다.
따라서 예수에게 영성이란? 이 땅에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역시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을 따라 ‘우리를 유혹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청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복음 주기도문 여섯 번째 청원의 헬라어 문장에 대한 우리말 성서의 번역은 ‘당신께서 우리를 유혹 속으로 빠지게 않게 하소서’이다. 하지만 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당신께서 우리를 시련 속으로 끌어들이지 마소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기도문 여섯 번째 청원에서 사용한 헬라어 동사 ‘에이세넹케스’는 ‘에이스 εἰς 안으로 + 페로 φέρω 이끌다’라는 합성동사이다. 따라서 여섯 번째 청원의 문자적 번역은 ‘당신께서 우리를 시련(유혹)속으로 끌어드리지 마소서’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번역상의 관용에 따라 주기도문 여섯 번째 청원에 대한 ‘해석 의미’를 두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다.
하나는,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우리의 ‘욕망 다스리기’이다. 즉, 맘몬(자본)세상에 대응하는 하나님 나라 신앙과 그에 따르는 우리의 삶의 태도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맘몬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신앙과 삶의 태도를 우리의 신앙행동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하나님 나라 ‘일용할 양식’만을 바라는 신앙과 삶의 자족이고 자존(自尊)이며 자유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사는 신앙인들의 ‘가난한 삶의 욕구’이다. 여기서 ‘가난한 삶의 욕구’란, 예수의 팔복 선언 중 ‘가난한 이들의 행복 - 프토코스 πτωχός’라는 헬라어 형용사에 숨겨진 은유로써 ‘움츠러든 욕구’이다. 이점에서 ‘프토코스 가난한’이라는 헬라어 형용사는 ‘프토스소’(πτώσσω 움츠러들다, 웅크리다)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예수의 팔복 선언에 사용된 ‘프토코스 가난한’이라는 헬라어 용어는 ‘한 끼 배부른 식사만으로도 삶의 모든 것을 만족하는 가난한 이들의 움츠러든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무엇에든, 무엇으로든 만족하는 움츠러든 삶의 욕망을 훈련한 것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의 행복의 지름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의 가난한 삶의 욕구’는 맘몬(자본)세상에서의 부단하고 혹독한 생활영성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맘몬(자본)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대한 뒤집기’이기 때문이다. 이 뒤집기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참된 생활영성이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우리를 유혹 속으로 빠지게 않게 하소서’라는 청원이야말로 예수신앙 생활영성의 밑바탕이다.
이점에서 이 땅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올바른 신앙과 생활영성의 내용은 맘몬(자본)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깨닫고 체험하는 신앙실천 행동’일 수밖에 없다. 맘몬(자본)권력에 저항하는 일상적인 신앙 실천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역동성과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 신앙인들은 맘몬(자본)권력에 대한 저항과 깨달음과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가난한 삶의 욕구를 갖게 된다. 나아가 예수 신앙인들은 하나님나라 신앙실천 행동 생활영성을 통하여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더 크게 확장하고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또 하나,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청원이 갖는 해석상의 은유와 의미는 ‘맘몬(자본)권력이 일으키는 삶의 위기와 시련 속에서 예수의 제자 됨에 관한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의 위기와 시련을 통하여 예수의 제자 됨을 훈련하는 생활영성이다. 실제로, 맘몬(자본)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는 우리에게 큰 유혹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우리의 신앙과 삶의 태도를 훈련하는 시련이고 시험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라는 헬라어 낱말은 ‘유혹 또는 시련/시험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 때문에 맘몬(자본)세상에서 시련과 시험을 당할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려고 할 때 그렇다. 예수와 제자들은 갈릴리 민중들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실천해 가면서 온갖 시련과 시험을 만났다. 그리고 끝내 예수는 로마제국권력과 거기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려오던 예루살렘 종교 엘리트 집단에 의해 십자가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 죽음의 시련 속에서 예수를 부활시키셨다. 그럼으로써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갈릴리 민중들의 일상 삶마저 부활시키셨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로서 예수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졌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신앙 공동체를 통하여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 예수의 제자 됨을 실천했다. 하지만 초대교회 이후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서구교회는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말로만 고백하는 데 머물러 왔다. 교회를 위한 교리와 신학으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진실을 비틀어 꾸미고 선포’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서구교회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신앙공동체로서 진정성 있는 예수제자 됨의 신앙 지표(指標)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서구교회의 교리와 신학 밑바탕에는 반 예수신앙, 반성서, 반 생명․평화 메시지가 난무한다. 이점에서 21C 우리 교회가 ‘예수제자 됨의 신앙과 삶의 실천행동’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언제든 돈과 권력과 명예를 숭배하는 맘몬(자본)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과 그 실체적 체험을 포기하는 순간, 맘몬(자본)권력은 언제든지 우리를 시련과 시험 속으로 끌어드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우리 모두는 맘몬(자본)권력을 숭배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맘몬(자본) 세상 속에서 우리의 신앙과 삶, 신앙실천 행동을 통하여 예수제자 됨을 증언해야 한다. 이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께서 우리를 시련 속으로 끌어들이지 마소서’라고 청원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맘몬(자본)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신앙과 삶의 태도를 훈련하게 된다. 예수제자 됨을 확고히 하게 된다. 돈과 권력과 명예로 인한 삶의 시련과 시험을 능동적으로 헤쳐 나가게 된다. 맘몬(자본)세상 속에서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며 지켜 나갈 수 있게 된다.
끝으로 마태복음 주기도문 일곱 번째 청원은 ‘당신께서는 우리를 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끌어내소서’이다. 여기서 ‘악’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낱말은 ‘중성(中性) 포네론 πονηρόν’으로 보면 ‘악한’이라는 형용사이다. 하지만 ‘남성(男性) 포네로스 πονηρός’로 보면 ‘악한 것, 또는 악한 자’라고 새겨서 읽을 수 있다. 이점에서 주기도문 마지막 일곱 번째 청원은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억압과 폭력에 대한 도움의 요청으로 들려진다. 실제로 마태복음 저자는 자신의 신앙공동체에 몰아닥친 로마제국의 박해위기와 고통 속에서 이 주기도문을 기록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시리아지역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예수공동체의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저작연도는 90~100년 사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이 무렵 로마제국 열세 번째 황제 ‘트라야누스’로 인한 세 번째 대 박해(98-111년)가 일어났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오현제(五賢帝)로 불릴 만큼 제국의 중흥에 이바지 했을 뿐만 아니라, 사형을 폐지하는 놀라운 법률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 법률적용에서 그리스도인을 제외시켰다. 따라서 이 시대 로마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발된 이들이 예수신앙을 부인하는 대신 황제숭배를 인정하면 무죄 방면했다. 반면에 예수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은 짐승들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했고, 심지어는 산채로 소금절임을 당하기도 했다. 실제로 서기 107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시리아 안티오카지역 주교 ‘이나시우스’를 로마로 소환해서 직적 심문하고 고문한 후 기름을 먹인 나무에 매달아 화형 시켰다. 그리고 그 시체를 난도질해 짐승먹이로 던져 주었다.
이렇듯이, 로마제국은 지중해세계의 모든 식민지 주민들에게 가장 무자비하고 포악한 통치 권력이었다. 따라서 로마제국 권력은 식민지 주민들의 일상적 삶의 위기를 초래하는 무소불위의 ‘악’이다. 마찬가지로 21C 금융자본경제 시장경쟁 체제를 사는 우리의 삶의 상황도 순간순간 위기와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 시대의 영악하고 집요하며 탐욕스러운 독점 자본권력에 대한 저항은 곧 생존의 위기이며 고난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악’은 서로 정반대의 뜻을 가진 한 쌍의 단어와 함께 표현된다. 사람의 일상생활 속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서로 뒤 엉켜 있기 때문’이다.(데살로니카 전서 5:21-22참조) ‘악’은 ‘선’을 껍데기로 삼는다. 또한 ‘선한 것’은 ‘악한 것들’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맘몬(자본)세상에서 ‘악’은 모든 선한 것들을 악하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다. 또한 ‘악한 자’는 모든 선한 이들을 아주 쉽게 유혹하고 동조자로 끌어 들인다. 나아가 ‘악한 자’는 수많은 선한 자들을 학대하고 억압하며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아무런 죄책과 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선 한 이'라도 웬만한 의지와 용기가 아니고는 악한 자를 물리치거나 선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악하기 짝이 없는 맘몬(자본)권력에 맞서 싸우며 ‘예수의 제자 됨을 실천하려는 이들’에게 몰아닥치는 시대적 위기와 고난은 어쩌면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그러기에 21C 예수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당신께서는 우리를 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끌어내소서’라고 하나님아빠께 청원을 올릴 수밖에 없다. 우리시대 상황에서 이 청원이야말로 ‘돈과 권력과 명예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맘몬(자본)세상’에 대한 예수 신앙인으로서의 ‘저항과 투쟁의 생활영성 표어’이다. 우리는 이 생활영성 표어를 통하여 ‘예수의 하나님 아빠’를 가까이 불러 모시고 함께 살아 갈 수 있다. 이러한 시대의 지배체제를 향한 ‘저항과 투쟁의 생활영성’이야말로 ‘시대의 예수제자 됨의 특권이며 행복’이다.
이제, 21C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마주하고 서서, 가난한 이들을 향한 탕감과 돌봄과 내어줌의 신앙실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 여기,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나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예수신앙의 길이다. 예수의 말과 행동, 예수의 삶과 신앙, 예수의 십자가를 따르는 이들은 이 땅의 하나님나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유하게 된다. 예수신앙 실천행동을 통하여 이 땅에부터 ‘여럿이 함께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누릴 수 있다.
이렇듯이, 21C 교회공동체는 이 땅위에서 새로운 하나님나라이다. 21C 교회공동체 스스로가 금융자본경제 시장경쟁체제 승자독식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21C 금융자본경제 시장경쟁 체제에서 ‘많이 거둔 내가 적게 거둔 이웃들에게 날마다 자발적인 탕감과 돌봄과 내어줌을 실행하는 삶의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한 삶의 훈련이야말로 ‘주기도문으로 드리는 예수신앙 삶의 기도이며 생활영성’이다, 이렇게 탕감과 돌봄과 내어줌의 삶의 훈련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땅의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써, 진정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삶으로 드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21C 우리 교회의 바른 모습을 실천행동 해야만 한다. ‘삶으로 드리는 주기도문’이야말로 맘몬(자본)세상에 저항하며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맘몬(자본)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생활영성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아빠의 현존’을 경험한다. ‘하나님 아빠’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찾아내고 불러내어 함께 살아간다. 여럿이 함께 서로의 삶으로 드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행복한 하나님나라의 삶을 함께 누리며 함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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