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본문 번역하기 : 이것 좀 봐! 참 아름답구나!
창세기 1장 ~2장 3절

미켈란제로 천지창조
사역
한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땅은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으며, 깊음의 바다 위에 짙은 깜깜만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 물위에서 휘돌았다. 하나님이 소리치셨다.
“빛이 있어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하나님이 그 빛을 보셨다.
“참 아름답구나!”
하나님이 그 빛과 어둠사이를 나누셨다.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다.
이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첫째 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소리치셨다.
“물 가운데 둥근 천장(天障)이 생겨서 물과 물이 갈라져라!”
하나님이 얇게 편 둥근 천장을 만드시고 천장 아래 있는 물과 천장위에 있는 물을 나누셨다. 그래서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그 둥근 천장을 하늘이라고 부르셨다.
이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이튿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소리치셨다.
“하늘 아래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라! 마른 뭍이 나타나라!”
그러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마른 뭍을 ‘땅’이라고 부르고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이 보셨다.
“참 아름답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셨다.
“땅은 푸른 새싹이 돋아나게 하라! 풀과 씨 맺는 채소(또는 곡식)와 ‘그 안에 제 씨가 있어서 그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는 나무(또는 과일나무)’가 땅위에 자라나게 하라!”
그러자 그대로 되었다. 땅이 풀과 그 종류에 따라 씨 맺는 채소를 내어 놓았다. 또 그 종류에 따라 그 안에 제 씨가 있어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어 놓았다. 하나님이 보셨다.
“참 아름답구나!”
이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셋째 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소리치셨다.
“빛나는 것들이 하늘 천장에 있어서 낮과 밤을 나누게 하라! 그것들이 절기들과 나날과 해(年)를 나타내는 표가 되게 하라! 그들 빛나는 것들이 하늘 천장에서 땅위를 비추게 하라!”
그러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크게 빛나는 것들 두 개를 만드셔서 더 크게 빛나는 것으로 낮을 책임지게 하시고 작게 빛나는 것으로 밤을 책임지게 하셨다. 또한 별들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땅위를 비추게 하려고 그것들을 하늘 천장에 늘어놓으셨다. ‘낮과 밤’을 책임지게 하시고 ‘빛과 어둠’사이를 나누게 하셨다. 하나님이 보셨다.
“참 아름답구나!”
이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넷째 날이 지나갔다.
하나님이 명령하셨다.
“물들은 살아서 꿈틀대는 생명체를 우글거리게 하라! 새는 땅위에서 하늘 천장 가장자리에 까지 날아라!”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그들 종류에 따라 물속에서 꿈틀대며 우글거리는 온갖 살아 있는 생명체(또는 물고기)와 그들 종류에 따라 날개달린 온갖 새를 만드셨다. 하나님이 보셨다.
“참 아름답구나!”
하나님이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명령하셨다.
“새끼를 많이 쳐서 번성하라! 물과 바다를 가득 채워라! 새도 땅위에서 번성하라!”
이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다섯째 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명령하셨다.
“땅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내어라! 그 종류에 따라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그러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그 종류에 따라 그 땅의 야생동물’과 그 종류에 따라 집짐승과 그 종류에 따라 땅에 기어 다니는 온갖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보셨다.
“참 아름답구나!”
그런 다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따라 우리의 닮은꼴로 사람을 짓자! 그러면 사람들이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보살피겠지!”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기 모습을 따라 지으셨는데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지으셨다. 남자와 여자,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해라!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을 밟아라(또는 디뎌라).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보살펴라!”
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온 땅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또는 곡식)와 그 안에 씨가 있어 나무의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또는 과일나무)를 주겠다. 그것이 너희를 위한 먹을거리이다. 또한 땅에 모든 들짐승과 하늘의 새와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주겠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바라보셨다.
“이것 좀 봐! 참 아름답구나!”
이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여섯째 날이 지났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하시던 당신의 노동(또는 일)을 일곱째 날에 다 끝내셨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에 하시던 당신의 모든 노동으로부터 쉬셨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시고 만드시던 당신의 모든 노동으로부터 그날 푹 쉬셨기 때문이다.
낱말 풀이
* ‘베레쉬트’ בְּרֵאשִׁית : 한 처음에. 이 낱말이 히브리어 성서의 ‘첫 낱말’이다. 우리말 성서는 ‘태초에’라고 번역했고 영어성경은 ‘시작, 출발점’(beginning)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은 서구인들의 직선적인 시간개념과 역사관 때문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서의 시간개념은 서구의 직선적 시간개념과 다르다. 히브리어 성서의 시간개념에서 ‘과거’는 화석처럼 굳어져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동하고 새로워지며 메아리쳐 오는 현재’이다. 나아가 미래란? 직선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 흘러 마침내 도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바람과 노력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닥쳐오는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의 첫 낱말 ‘베레쉬트’는 인류의 경험이 닿을 수조차 없었던 까마득한 때로부터 메아리쳐온 ‘하나님의 창조사건’에 대한 히브리들의 현재적 삶의 신앙고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히브들의 시간개념을 따라 우리말로 ‘한 처음’이라고 새겨 읽었다.
* 토후 תֹהוּ : 땅은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말 성서는 ‘땅은 혼돈하고’라고 번역했다. 서구교회의 종교심성 속에 자리 잡은 그리스신화 ‘카오스 ↔ 무질서, 혼돈’을 마음에 둔 번역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땅은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의 밑바탕’으로써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 혼돈(混沌)하지 않다. 그래서 고대 헬라어성서(70인 역)는 ‘아오라토스 ἀόρατος 나타나지 않았고 또는 드러나지 않았고’라고 번역했다.
* 보후 בֹהוּ :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으며. 우리말 성서는 ‘공허(空虛)하며’라고 번역했는데 ‘빌 공(空)↔빌 허(虛)’이다. 고대 헬라어성서(70인 역)도 ‘아카타스큐아토스 ἀκατασκεύαστος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았으며’라고 번역했다.
* 테홈 תְהֹום : 깊음의 물 또는 깊음의 바다. 이 깊음의 물이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의 밑바탕인 땅’위를 뒤덮고 있었다. 이 깊음의 물이야말로 ‘태초의 반생명 깊음의 바닷물’로써 ‘혼돈의 바다↔카오스’가 아닐까?
* 호쉐크 חֹשֶׁךְ : 짙은 깜깜. 생명과 그 어떤 생명의 가능성마저도 찾아 낼 수 없는 ‘짙은 깜깜’이다. ‘이 태초의 반생명 깜깜함’과 더불어 ‘그 어떤 생명 가능성마저 말살해 버리고야말 깊음의 물’이 함께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의 밑바탕이 되어야 할 땅’위를 뒤덮어 짓누르고 있었다. 이로써,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의 도드라지는 참뜻은 ‘생명창조’이다.
* 루아흐 רוּחַ : 우리말 성서는 ‘영’이라고 번역했는데 문자적으로는 ‘바람, 영, 생명’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낱말이다. 여기서는 ‘영’이라고 번역했는데 우리말로 하면 ‘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히브리어 성서는 ‘루아흐’라는 낱말에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여서 ‘살아있는 영, 거룩한 영’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 오르 אֹור : 빛.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이 ‘빛’은 그냥 ‘햇빛’이 아니다. 바로 반생명의 깜깜함과 그 어떤 생명 가능성마저 말살하는 깊음의 물을 향한 하나님의 생명선언으로써 ‘빛’ - 하나님의 ‘창조생명의 빛’이다.
따라서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태초의 반생명 짙은 깜깜’은 하나님의 창조생명세계에서 ‘하나의 실체’로 자리매김 할 수 없다. 한 처음 하나님의 창조생명세계에서 ‘짙은 깜깜’은 그저 ‘창조생명의 빛’에 대한 ‘반영’일 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창조생명세계 생명의 빛 안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반생명 깜깜함’을 마음에 둘 필요조차 없다. ‘반생명 깜깜함’을 생명에 대한 지배와 해코지의 상징으로 조작하는 모든 종교적 행태는 단연코 비성서적이다.
* 키 토브 כי: טוב : 참 아름답구나! 우리말 성서는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번역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인 생명의 빛을 좋게 보셨다’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첫 창조물인 ‘생명의 빛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라는 증언이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 하나하나를 살펴보시고 ‘창조물 그 자체로써 아름다움’을 알아채시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감탄하신 창조생명세계를 파괴하는 사람의 모든 행위는 ‘불신앙 가운데 불신앙’이다.
* 욤 יֹום : 낮. 이 히브리어 낱말은 ‘날↔생명의 나날’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 라일라 לָיְלָה : 밤. 생명의 빛↔낮에 대한 반영으로써 밤
* 라키아 רקיע : 천장. 메소포타미아 문명세계에 널리 알려진 우주관에 따른 하늘. 망치로 두드려서 얇고 둥글게 펼친 금속판처럼 만든 하늘 천장을 가르친다. 이 낱말은 ‘라카아↔쳐서 펼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한다.
* 솨마임 שָׁמָיִם : 하늘. 우리말 성서는 ‘궁창(穹蒼)’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는 하늘을 복수로 표현한다. 이러한 복수표현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우주관↔세 개의 하늘 이해’에 따른 것이다. 세 개의 하늘은 ‘땅과 둥근 하늘 천장 사이 공간↔둥근 하늘 천장↔둥근 하늘 천장위의 하늘’이다.
* 땅은 푸른 새싹이 돋아나게 하라! :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주목할 점은 풀과 채소(또는 곡식)과 과일나무 등 모든 식물들을 직접 만드시지 않고 땅으로 하여금 스스로 내어놓도록 맡기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땅에게 당신의 생명력 일부를 위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땅은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의 창조신앙고백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조차도 하나님의 소유이다. 사람이 사유하거나 독점할 수 없다.
* 리메오르트 לִמְאֹורֹת : 빛나는 것들 또는 발광체들. 동서고금막론하고 ‘일월성신’은 신적존재로써 사람들의 섬김의 대상이었다. 특별히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을 포함한 지중해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세계에서의 모든 신적존재들을 비신화화 한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일월성신은 그저 ‘빛나는 것들(또는 발광체들)’로 창조 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성서는 신격화 되고 우상화 된 일월성신을 비신화화 함으로써 신화세계 신의 아들(또는 대리자)로 자처하는 지배자에게 ‘예속된 민중의 삶’을 해방한다.
* 쉐레츠 שֶׁרֶץ : 살아서 꿈틀대는 또는 우글대는
* 이쉬레추 יִשְׁרְצוּ : 우글거리게 하라. 여기서 또 한 번,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능력’을 창조생명공동체에게 넘겨주신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안에서 모든 창조생명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창조생명들은 하나님의 ‘생명축복↔생명유전 위탁’에 따라 땅과 바다와 하늘을 가득 채워야만 한다.
* 핱타니님 학게도림 : 큰 물고기. 바다괴물 ↔ 리웨야단 : 용 또는 뱀↔사탄?
* 레부 רְבוּ : 번성하라.
* 베찰메누 בְּצַלְמֵנוּ : 우리 모습을 따라.
* 첼렘 צלם : 모습. 이 히브리어 낱말은 영어로 ‘이미지’(image)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또한 ‘모형’(model)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미지와 모형’으로 통합된 ‘하나님의 실체’라는 의미로서 ‘모습’이라고 새겨 읽었다.
* 키드무테누 כִּדְמוּתֵנוּ : 우리와 닮은꼴로.
* 드무트 דמות : 이 히브리어 낱말은 ‘~와 같은, 닮은’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에서는 전치사구 ‘키드무테누 כדמותנו 우리와 닮은꼴로’라고 쓰였는데 고대 헬라어성서(70인 역)에서도 ‘카트 호모이오신 καθʹ ὁμοίωσιν 닮게, 비슷하게’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실체↔첼렘↔모습’으로서 ‘하나님과 닮은꼴’로 지어졌다.
물론 여기서 ‘사람과 하나님사이의 존재유비↔동일성’을 강조하거나 논쟁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성서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사람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창조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섭리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근친관계’(近親關係)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모습’을 따라 ‘자기와 닮은꼴’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따라 우리와 닮은꼴로 사람을 짓자! : 이 문장은 하나님이 스스로에게 하시는 말씀 - 곧 하나님의 ‘자기논의’ 또는 ‘자기결단’이다. 이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써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자유와 책임성을 가진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지킴이로써 전 존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남자와 여자,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남자 한쪽에게만 또는 사람 일반에게 말씀하시지 않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처럼 둘이 하나인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복을 주신다. 따라서 둘이 하나로써만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하나님과 닮은꼴로 지어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책임성 있게 감당할 수 있다.
* 키베슈하 כִבְשֻׁהָ : 땅을 밟아라 또는 땅을 디뎌라.
* 이르두 יִרְדּוּ : 다스려라 또는 보살펴라. ‘다스려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보살피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 안에서 사람은 ‘모든 창조물들의 꼭지 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생명으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하나님과 닮은꼴’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 안에서 ‘하나님과 모든 창조물들과 하나의 생명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에 대한 ‘깨달음과 책임성’을 가지고 청지기로써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 조레아 זֹרֵעַ : 씨 맺는 또는 씨 있는.
* 씨 맺는 모든 채소(또는 곡식)와 그 안에 씨가 있어 나무의 열매를 맺는 모든 과일나무 :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먹을거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창조생명체들은 하나님의 생명유전 위탁에 따라 온 땅과 하늘과 바다를 가득 채워야 할 생명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창조생명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축복으로써 다양하고 독특한 생명유전 능력들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창조생명체들에게 스스로 생명유전이 모두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무분별한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의 생명생태계가 파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의 먹을거리의 대부분은 ‘씨 없는 채소와 과일과 곡식들’이다. 그것은 바로 ‘GMO ↔ 유전자조작 골물 또는 유전자조작 가축들’인데, 이로 인해 지구촌 모든 과일과 곡식들은 스스로 생명유전능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 힌네 토브 메오드 : 이것 좀 봐 참 아름답구나!
* 메오드 מְאֹד : 너무 너무 또는 더할 수 없이 크게, 많이.
* 21세기 무한탐욕 돈 세상에서, 더 이상은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의 아름다움에 시비 걸 필요조차 없다.
* 멜라크토 מְלַאכְתֹּו : 하나님의 노동 또는 일. 이 히브리어 문구야말로 ‘하나님도 노동(일)하신다’라는 신앙고백의 근거이다.
* 바이쉬보트 וַיִּשְׁבֹּת : 그리고 하나님이 쉬셨다.
* 싸바트 שָׁבַת : 안식일. 이 날은 한마디로 ‘쉬는 날’이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창조 노동을 끝내시고 이렛날에 푹 쉬셨다. 이점에서 노동(일)은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노동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은 ‘쉼’이 있어야 거룩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엿새 동안 노동하시고 이렛날에 푹 쉬시면서 그 쉼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노동과 쉼’의 ‘거룩함’에서 결코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창조생명노동의 완성으로써 ‘쉼’(거룩함)을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성서는 십계명 안식일 계명을 통해서 ‘노동과 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그러므로 ‘쉼이 없는 노동’은 어떤 시대에서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노예노동일 뿐이다. 이렇듯이 21세기 이 땅에서도 ‘쉼이 없는 노동을 강요’함으로써 ‘하나님 없는 노예노동 세상을 조장’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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