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구약성서

에덴동산 본문 다시 해석하기2 : 맞상대할 짝 - 맨 처음 남자와 맨 처음 여자

희년행동 2022. 5. 21. 22:19

에덴동산 본문 다시 해석하기2 : 맞상대할 짝 - 맨 처음 남자와 맨 처음 여자

창2:4-25)

 

 

이것이 하늘과 땅 -그것들이 만들어지던 때에 이야기이다. 곧 야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이야기 이다.

들판의 모든 덤불나무가 아직 땅에 있지 않았고, 들판의 풀들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이 땅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을 일굴(또는 돌볼)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땅으로부터 지하수 안개가 솟아올라 온 땅거죽을 적셨다. 그때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 그리고는 야훼 하나님이 그의 코에 살아있는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이 되었다.

야훼 하나님이 동쪽 에덴이라는 곳에 농원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야훼 하나님이 그 땅에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기에도 좋은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나게 하셨다. 또 농원 한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아는 지식의 나무’를 자라나게 하셨다.

한편 강이 농원을 젖게 하려고 에덴으로부터 나와 흘렀다. 거기로부터 강이 나뉘어서 네 개의 강줄기가 되었다. 첫 번째 강줄기의 이름은 ‘피숀’인데 그 강은 ‘거기서 금이 나는 하윌라’ 온 땅을 돌아 흘렀다. 그 땅의 금은 순금이고 거기서 ‘베돌라흐’라는 향료와 호마노(또는 청금석)이 난다. 두 번째 강줄기의 이름은 ‘기혼’인데 그 강은 ‘쿠쉬’ 온 땅을 돌아 흘렀다. 세 번째 강줄기 이름은 ‘힏데켈’ 인데 그 강은 ‘앗슈르’ 동쪽으로 흘렀다. 네 번째 강줄기 이름은 ‘페라트’이다.

야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와서 ‘에덴의 농원을 일구고 지키도록’ 그를 에덴의 농원에 두셨다. 야훼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농원에 있는 모든 과일나무로부터 열매를 마음껏 따 먹어라! 그러나 너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아는 지식의 나무’로부터 열매를 따먹지 마라! 네가 참으로 그 나무로부터 열매를 따먹는 날에 너는 그것으로 인해 반드시 죽는다.”

야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구나. 내가 사람을 위하여 ‘그와 맞상대 할 짝’을 만들어 주어야지.”

야훼 하나님이 진흙으로 온갖 살아있는 들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들을 빚으셨다. 야훼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이라고 그것을 부르는가 보시려고 사람에게 데려오셨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부르는 모든 것이 그 생명체의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온갖 집짐승과 하늘의 새들과 온갖 들짐승의 이름들을 불렀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를 위하여 그와 맞상대 할 짝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이 사람을 깊은 잠에 떨어지게 하셨고, 그는 잠들었다. 그리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살로 그 자리를 메우셨다. 야훼 하나님 사람에게서 빼낸 갈비대로 여자를 지으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 데려 오셨다. 그러자 아담은 큰 소리로 외쳐댔다.

“아 마침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

이를 여자라고 부르리라!

참으로 이 여자가 남자로부터 나왔지 않은가!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어우러져 한 몸을 이룰 것이다. 이렇듯이, 그 사람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에덴동산 창조이야기 : 본문 해석하기

 

에덴동산 창조이야기는 첫 문장에서 ‘톨레도트’라는 낱말을 사용함으로써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톨레도트’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세대, 역사, 족보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말 성서에서는 ‘대략(大略) 이야기의 줄거리?’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성서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이 히브리어 낱말이 하나의 이야기를 기록한 ‘토판 또는 돌판’으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톨레도트’를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새겨서 ‘이야기’라고 읽기로 한다. 그렇다면 이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의 발화자는 누구일까? 아니, 이렇게 짜임새 있는 작품으로 21세기 독자들의 눈앞에 놓여 있는 만큼 ‘저자가 누구일까’라고 물어야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야훼 하나님’이라는 칭호에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서구교회 성서학자들은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오랜 과정 속에서 ‘JEDP’라는 4개의 문서양식들을 밝혀냈다. 여기서 J문서의 특징은 히브리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야훼문서의 저자들은 기원전 10세기 다윗왕조 솔로몬 왕국의 서기관들이다. 실제로 기원전 10세기 무렵 다윗왕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가나안 지역 전체를 정복한 후 소제국주의 패권을 쟁취했다. 다윗왕조 소제국주의 패권은 솔로몬 왕국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무렵 솔로왕국에는 이집트제국 지혜문학에 버금가는 서기관문학이 꽃을 피웠다. 이들 솔로몬 왕국의 서기관들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 전승들을 모아서 다윗 왕조신앙 이데올로기로 재해석하여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야훼신앙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야훼 하나님의 창조이야기를 가나안 토착 창조신화에서 빌려왔다. 솔로몬 왕국의 서기관들은 가나안지역 토착 창조신화를 다윗왕조 신앙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편집하고 고쳐서 새로운 에덴동산 창조이야기를 지어냈다.

이와 관련하여 ‘야훼’라는 이름은 출애굽기 3:14에서 계시 된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의 하나님 이름’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지나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지 못하고 에둘러 ‘아도나이’(주님)이라고 읽었다. 그렇게 수천 년이 지난 후 유대인들조차도 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영어나 독일어 등의 발음 체계로 인하여 수많은 혼선이 빚어졌다. 예호바↔여호와 / 야훼↔야베 / 예흐베↔야흐베 등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본래 히브리어 성서에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은 자음으로만 기록되었다. 모음은 오직 유대인들의 기억력과 관습에만 의존 했다. 그러다가 기원후 5-10세기 유대교 학자들은 히브리 성서 자음에 모음을 붙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음뿐인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요트/헤/바브/헤'에 ‘주님 - 아도나이 ádônâi’라는 히브리어 낱말의 모음을 붙여서 사용했다. 그 결과 유대교 하나님의 이름은 ‘예호바’라고 불려졌다. 우리말 성서의 ‘여호와’라는 발음은 히브리어 자음 ‘바브 - ו’를 ‘w’로 발음하는 영어발음규칙에 따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기독교 성서학자들은 고대 헬라어 문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야베 ἱαβηʹ’라고 표기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할렐루야’라는 히브리어 낱말에 붙어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어미 - 야’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현대 성서학자들은 구약성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야흐베’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야베↔야웨↔야훼’ 등 ‘독일어와 영어의 발음규칙으로 인한 오해들’이 난무한다.

필자는 이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말로 ‘야흐베’라고 새겨서 읽는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밝혀진 성서학연구에 따라 웬만한 소리는 모두 적을 수 있는 우리말로 ‘야흐베’라고 발음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히브리 해방공동체의 하나님 이름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3장을 읽을 기회에 다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가나안지역 토착 창조신화로서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노동하는 인간의 창조’이었을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노예노동 위한 인간창조’라는 주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중심지역에서나 변방지역 가나안에서나 똑같다. ‘노동하는 인간↔노예노동’은 고대 이집트문명 지역과 가나안지역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 종교 신화들 속에 숨어있는 핵심주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는 ‘라아보드 ↔그 땅을 일굴 사람이 없었다’라는 전치사 구를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는 ‘아바드’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는 ‘경작하다, 노동하다’ 또는 ‘봉사하다, 섬기다’등이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와 마찬가지로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도 사람의 창조는 ‘노동하는 인간’ 창조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의 노동은 ‘생명노동↔돌봄노동↔섬김노동’이다.

이렇듯이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땅에게 ‘온갖 씨 맺는 풀과 곡식과 과일나무들’을 내도록 ‘창조위탁 명령’을 내리신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개입 없이 땅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셔서 당신의 창조생명공동체 청지기로 임명하신다. 창세기 2장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는 ‘땅에 대한 사람의 노동역할’을 따로 남겨 놓으신다. 그 노동역할은 바로 땅을 일구는 것인데 한마디로 야훼 하나님의 하나로 창조생명공동체의 밑바탕인 ‘땅을 돌보고 가꾸며 보존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서구교회의 제국주의 정복신학은 참으로 맞갖지 않다. 제국주의 정복신앙에 따르는 ‘땅에 대한 정복과 개발 폭력’ 그리고 ‘땅에 대한 독점과 사유화’등은 결코 야훼 하나님의 하나로 창조생명공동체 섭리에 합당하지 않다. 오늘날 땅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개발과 독점사유화’야말로 철저하게 ‘야훼 하나님의 하나로 창조생명공동체 신앙’에 반하는 행태이다.

한편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는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사람을 지으시려는 ‘그 장엄한 하나님의 자기결단’을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그런 하나님의 결단에 걸맞은 ‘사람의 위상’을 찾기도 쉽지 않다. 왜 그럴까?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1장에서의 천지창조이야기는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주권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반면에 창세기 2장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는 사람의 삶의 경험과 성찰 그리고 사람의 삶 속에서의 신앙고백이 반영되어 있다. 바로 동서고금의 온 인류가 고백해온 사람의 유한함과 덧없음과 소멸성에 대한 증언이다.

이점에서 에덴동산 창조신화에서는 ‘아파르 민 하아다마 - 땅의 먼지 또는 티끌’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이 먼지와 티끌들은 때때로 안개처럼 솟아올라 땅바닥을 적시는 지하수 안개로 인하여 진흙이 되곤 했다. 야훼 하나님은 그 진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이점에서 사람의 재료는 흙보다도 못한 먼지와 티끌이다.

이와 관련하여 야훼 하나님이 지으신 맨 처음 사람의 이름은 ‘아담↔사람↔인류’이다. 따라서 아담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써 고유명사가 아니다. 맨 처음 야훼 하나님의 창조시점부터 지금까지 온 인류를 가리키는 대명사로써 사람일 뿐이다. 또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담↔사람’은 ‘아다마↔흙, 먼지’로부터 태어났다. 더불어서 에덴동산 창조이야기는 ‘야차르’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이 동사의 의미는 ‘모양을 내어 빚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1장 천지창조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 야훼 하나님은 마치 토기장이처럼 진흙을 주물러서 사람을 빚으신다.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 사람을 지으시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은 언제라도 ‘사람들이 다가가 손을 내밀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격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야훼 하나님은 진흙을 주물러서 사람을 모습을 만드신 후 당신의 ‘니쉐마트 하이임↔살아있는 숨’을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신다. 이 때 ‘네쉐마’는 ‘숨 또는 호흡’을 의미하는데 사람의 생명은 자연으로부터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숨을 빌려서 얻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숨을 빌려서 얻은 것이기에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당신의 살아있는 숨을 도로 요구하실 수 있다.(시편 104:29)

이와 관련하여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는 ‘네페쉬 하야↔생명’이라는 히브리어 낱말을 사용하는데 문자적 의미는 ‘목구멍 또는 목’이다. 사람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숨’을 힘입어서 ‘생명’이 되었는데, 곧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로 생명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명신앙 이해를 이원론적 의미에서 특히 고대 헬라시대의 사고를 통하여 ‘영혼’이라고 결론 내는 것은 하나의 큰 오해이다.

한편 그렇다면,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 사람들의 종교 신화적 경험과 상상력의 밑바탕으로써 ‘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말성서는 ‘겐’을 ‘동산’이라고 번역했다. 이 히브리어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정원, 농장, 농원’ 등 인데,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의 상황에서 살펴본다면 커다란 ‘농원, 농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나타아↔포도나무 등을 심다’라는 동사와 함께 ‘야훼 하나님이 에덴이라는 곳에 농원을 마련하셨다’라고 새겨서 읽었다.

그런데 에덴동산 창조이야기가 그려내는 맨 처음 에덴동산의 자연환경은 척박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에덴동산의 자연환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에드’라는 히브리어 낱말을 살펴보자. 이 낱말은 ‘안개, 구름’이라고 번역하는데 본래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는 ‘메마른 땅에 지하수가 터져 올라 안개처럼 뿌려지는 것’을 가리키는데, 오아시스의 샘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척박한 자연환경에 대한 묘사는 에덴동산 창조이야기 전승이 가나안 지역 창조신화에서 왔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마침내 야훼 하나님께서 메마른 땅을 경작해야할 노동하는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이라는 곳에 농원이 만드시며 땅에 온갖 식물과 먹기 좋은 과일나무들이 자라나게 하신다. 그러자 이어서 물이 농원을 적시려고 에덴에서 흘러나와 네 개의 강줄기를 만들었다. 실제로 이 강줄기들의 위치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첫 번째 강줄기가 돌아 흐르는 ‘하윌라’라는 지명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아라비아를 가리키는 듯하다. 두 번째 강중기가 흐르는 ‘쿠쉬’는 신약성서 시대의 ‘누비아 곧 에티오피아’를 말하는 것 같다. 세 번째 강줄기 ‘힏데켈’은 티그리스 강일 것이고, 네 번째 강줄기 ‘프라트’는 유프라테스 강일 것이다. 에덴에서 발원하는 네 강과 함께 언급하는 지명들은 그야말로 구약성서 시대의 온 누리를 하나로 묶는다. 구약성서 에덴동산 창조이야기가 그리고 있는 태초의 고대지도는 에덴동산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이루며 확장되어 나간다.

이렇듯이 에덴에 있는 농원을 중심으로 야훼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면서 이 생태계 안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노동역할이 도드라지고 중요해졌다.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 안에서 인간노동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에덴동산 창조이야기에서는 ‘레오브다흐’ 라는 히브리어 전치사 구를 사용한다. 우리말성서는 ‘경작하며’라고 번역했는데 문자적 의미는 ‘그것을 일구도록’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전치사 구는 야훼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 안에서 하나님이 중재하신 땅의 생산 활동에 대한 사람의 노동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하나 에덴동산 창조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노동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레솨므라흐’라는 히브리어 전치사 구를 사용한다. 우리말성서는 이 전치사 구를 ‘지키게 하시고’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전치사 구의 동사 ‘솨마르↔지키다’의 관용적 의미는 ‘돌보는 것’이다. 실제로 시편121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고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솨마르)’ 그분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노래한다. 이렇듯이 야훼 하나님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 안에서 사람의 노동의 역할은 이 생태계의 안정을 지키고 돌보며 보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이 보시기에 당신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 안에서 사람의 노동역할을 감당하기에 한 사람 홀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신다. 야훼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구나’라고 깨달으신다. 이때 사용하는 히브리어 낱말이 ‘바드’인데 ‘부분 또는 조각’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한편 ‘바드’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 ~ 에 상관없이 또는 ~ 외에’라는 관용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듯이 에덴 농원의 창조생명공동체 안에서 사람은 ‘다른 ~과 상관없이, 다른 ~들을 제외하고’ 결코 나홀로 생존을 꾀할 수 없다.

그러기에 야훼 하나님은 ‘내가 사람을 위하여 그와 맞상대 할 짝을 만들어 주어야지’라고 결심하신다. 이때 사용한 히브리어 문구가 ‘에제르 케네그도’인데 우리말 성서는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 문구를 직역하면 ‘그의 상대자로써 돕는 자’이다. 여기서 ‘에제르’는 ‘돕는 자 또는 후원자’인데 ‘케네그도↔그의 맞상대 자로써’라는 전치사구의 꾸밈을 받는다. 이러할 때 에덴농원 창조이야기의 문맥에 따라 이 히브리어 문구를 ‘그와 맞상대할 짝’이라고 번역하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야훼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와 맞상대할 짝’으로서 여러 동물들을 안내한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를 위하여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서 ‘그와 맞상대 할 짝’을 찾지 못했다. 도리어 아담은 ‘여러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통하여 ‘사람과 동물사이 관계를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에덴농원의 창조생명공동체 생태계 안에서 야훼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듯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고유한 사귐과 공동체성’은 ‘사람과 동물들의 관계’를 통하여 분명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다. 한마디로 자연과 동물들은 ‘야훼 하나님의 하나로 창조생명공동체’ 안에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사람과 맞상대할 짝’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제, 야훼 하나님은 처음 사람 아담의 실체로부터 ‘그와 맞상대할 짝’을 지으시기로 결정하신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이 아담을 깊은 잠에 떨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그의 ‘첼라아↔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갈비대로 여자를 지으셨다.

‘남자의 갈비대로 만든 여자’ 이 표현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던가? 그러나 에덴농원 창조이야기에서 남자의 갈비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표현은 ‘남자와 여자 서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과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첼라아’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한 쪽 옆구리 또는 앞과 뒤의 반대편’이라는 관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참고로 남자나 여자나 갈비대수는 똑같다.

이렇듯이 우여곡절 끝에 야훼 하나님께서 ‘그와 맞상대할 짝’을 지어서 아담에게 데려오셨다. 그러자 아담은 큰 소리로 외치며 떠들어댔다.

아 마침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

이를 여자라고 부르리라!

참으로 이 여자가 남자로부터 나왔지 않은가!

이때 사용한 히브리어 문구 ‘조트 하파암’은 ‘아, 마침내...’라는 감탄문으로 번역할 수 있다. 맨 처음 야훼 하나님의 창조시점에서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났는데 어찌 놀람과 환희와 경탄이 없었겠는가? 이어지는 아담의 외침을 우리말로 실감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맨 처음 사람 아담은 그와 맞상대할 짝을 ‘잇솨↔여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히브리어 낱말 ‘잇솨↔여자’는 ‘잇쉬↔남자’라는 낱말과 동의어로써 아무런 차별점이 없다. 다만 히브리어법에서 ‘이솨’는 여자를 표시하는 여성어미가 붙은 낱말이고 ‘잇쉬’는 남자를 표시하는 낱말일 뿐이다. 또한 ‘이쉬/이솨’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그 어원조차 불분명하다. 다만 구약성서 안에서 ‘짐승에 대조되는 사람(창세기 7:2) 또는 하나님의 상대자로써 사람(출애굽기 11:7)’이라고 추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에덴농원 창조이야기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아루밈↔벌거벗음’이라는 히브리어 낱말이다.

“이렇듯이 그 사람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에덴농원 창조이야기의 이 상황을 남녀사이의 성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오해이다. 현대사회에서도 그렇지만 고대사회에서 옷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낸다. 벌거벗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에덴농원 창조이야기에서는 벌거벗음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벌거벗음은 남자와 여자의 동질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람사이에서 사회적 관계의 평등성을 강조한다. 더하여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까지 벌거벗음은 자연스러움의 공동체성을 표현하는 낱말이다. 그러나 에덴농원 창조이야기 이후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들이 애매하게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