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 다시읽기 -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에 부쳐서
소돔과 고모라, 그 처절한 죽임의 폭력은 동성애 때문일까?
창세기 18:20 ~ 19:29
읽기 – 1
그들이 거기로부터 일어서서 소돔을 향해 내려다보았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걸어갔다. 그때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가 하려는 것을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이 참으로 크고 강한 민족으로 일어나리니
그 땅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내가 아브라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야훼가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그의 후손 집안에게 명령하리니
그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려고 야훼의 길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것을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어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의 아우성이 참으로 크다.
그들의 죄가 참으로 매우 무겁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보겠다.
나에게 이르러온 그 땅의 아우성처럼
그들이 모든 것을 실제로 했는지 아닌지, 내가 알아보겠다."
그래서 그 사람들(천사들)이 거기로부터 발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아브라함은 아직 야훼 앞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모조리 쓸어 없애시렵니까?
혹시라도, 그 성 안에 정의로운 사람 오십 명이 있다 해도
당신께서는 그 땅 가운데 있는 정의로운 사람 오십 명을 위하여 그 곳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진짜 모조리 쓸어 없애시렵니까?
정의로운 사람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것
정의로운 사람을 악인처럼 똑같이 다루는 것
이런 일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당신에게 걸맞지 않습니다.
온 땅을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공의를 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당신에게 걸맞지 않습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소돔에서 그 성 가운데서 정의로운 사람 오십 명을 찾는다면
그들 때문이라도 내가 그곳 모두를 벌하지 않고 용서하겠다."
아브라함이 맞장구치며 말했다.
"제발, 보십시오.
저는 티끌과 재입니다.
제가 주제넘지만 주님에게 말씀드립니다.
혹시라도, 정의로운 사람 오십 명에서 다섯 명이 모자란다면
당신께서는 그 다섯 명 때문에 그 성 전부를 때려 부수어 없애시렵니까?"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는다면
나는 그 성을 끝장내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다시 야훼에게 말을 더 보태서 여쭈었다.
"혹시라도, 거기서 사십 명이 찾아진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사십 명 때문이라도 실제 행동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제발, 제가 주님에게 망설이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거기서 삼십 명이 찾아진다면."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는다면
나는 실제행동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제발, 보십시오.
제가 주제넘지만 주님에게 말씀드립니다.
혹시라도, 거기서 이십 명이 찾아 진다면."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이십 명 때문이라도 실제행동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제발, 제가 주님에게 망설이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제가 진짜 한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거기서 열 명이 찾아진다면."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열 명 때문이라도 실제행동하지 않겠다."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다 마치셨을 때에, 야훼께서 가셨다. 아브라함도 자기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다.
두 천사가 저녁때에 소돔으로 왔다.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 롯이 보고 그들을 맞으려고 일어나 얼굴을 땅에 구부리며 말했다.
"보십시오. 제발, 내주여!
당신들의 종의 집으로 걸음을 돌리소서.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밤을 지내소서.
이른 아침 일어나 길을 떠나소서.
당신들의 길을 가소서."
그들이 말했다.
"아니다. 참으로, 우리는 너른 광장에서 노숙하겠다."
하지만 롯이 그들을 끈덕지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들이 롯에게 돌이켜 롯의 집으로 갔다. 롯이 그들을 위하여 만찬을 벌이고, 무교병을 구웠다. 그들이 먹었다.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성 소돔 사람들, 젊은이부터 늙은이들까지 온 백성이 끝에서부터 몰려와 롯의 집을 에워쌌다. 그들이 롯을 불러서 그에게 캐물었다.
"밤에 너에게 온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너는 그들을 우리에게 나오게 하라.
우리가 그들을 알아야겠다."
롯이 문어귀로 그들에게 나가서, 자기의 뒤로 그 문짝을 닫아걸고, 말했다.
"제발 이러지 마시오. 내 형제들이여! 악을 행하지 마시오.
제발 보시오.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 둘이 있다오.
제발, 내가 여러분에게 그녀들을 나아가게 하시오.
여러분이 그녀들에게 여러분의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
다만,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어떤 사건(문제)도 일으키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들이 ‘내 집 그늘 손님’으로 왔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들이 소리쳤다.
"저리 비켜라!"
그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한 놈이 떠돌이로 들어와서는 재판관 노릇을 하려는 구나!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네 놈에게 더 악을 행해야겠다."
그들은 한 사내로 하여금 롯을 거세게 죄어치고 문짝을 부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 사람들(천사들)이 그들의 손을 내밀어 롯을 그 집 안의 그들에게로 끌어 들이고 문짝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집 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쳐서 작은 놈으로부터 큰 놈까지 눈뜬장님들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문을 찾지 못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말했다.
"여기 너에게 속한 사람이 더 있느냐?
사위나, 너의 아들들이나, 딸들이나,
이 성안에서 너에게 속한 모든 이들을 이곳으로부터 나가게 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이곳을 부수고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야훼 앞에 그들의 아우성이 커서
야훼께서 그 땅을 부수어 없애도록 우리를 보내셨다."
롯이 나가서 자기 딸들을 아내로 맞기로 한 그의 사위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일어나 이곳으로부터 나가라!
왜냐하면 야훼께서 이 성을 부수어 없애려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위들의 눈에는 그 일이 장난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새벽 동틀 무렵,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여 외쳤다.
"일어서라! 네 아내와 두 딸을 거느려라.
이 성의 죄악으로 인해 너마저 휩쓸려가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라."
롯이 머뭇거렸다. 그러나 야훼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신 까닭에,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의 아내의 손과 그의 두 딸들의 손을 강하게 붙잡아, 롯을 나가게 했다. 그들이 롯을 그 성 바깥으로 이끌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바깥으로 나오게 한 뒤에, 말했다.
"네 생명을 위해 도망쳐라.
네 뒤를 돌아보지도 마라.
주변 모든 평지에서 서지도 마라.
휩쓸려 없어지지 않도록 산으로 도망쳐라."
롯이 그들에게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내주여!
보십시오. 당신의 종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얻었습니다.
당신께서 제 생명을 살리시려고 저에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사랑이 큽니다.
그러나 저는 ‘그 재앙이 저에게 달라붙어서 제가 죽지 않도록’
산으로 도망칠 힘이 없습니다.
제발, 보십시오. 저 성이야말로 거기로 도망치기가 가까울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이 작습니다.
제발, 제가 거기로 도망치게 해 주십시오.
저 성은 보잘것없이 작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생명이 살 것입니다."
천사가 롯에게 말했다.
"보라! 내가 네 형편(얼굴)을 봐주겠다.
또한 네가 말한 그 성을 ‘나더러 뒤집어엎지 말아 달라’는 그 부탁도 들어 주겠다.
너는 빨리 거기로 도망쳐라.
왜냐하면, 네가 거기로 갈 때까지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성의 이름을 ‘소알’라고 불렀다. 해가 땅위로 솟아올랐고 롯은 소알로 갔다. 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 위에 유황과 불을 쏟아지게 하셨다. 하늘로 부터, 야훼께로 부터 쏟아지게 하셨다. 야훼께서 그 성들에 대하여, 그 온 들판과 그 성들의 모든 주민과 그 땅에 자라난 것을 뒤집어 엎으셨다. 그때, 롯의 아내가 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소금기둥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거기, 야훼 앞에 섰던 곳으로 갔다. 그가 소돔과 고모라, 그 들판 온 땅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보았다.
보라! 그 땅이 연기를 뿜어 올리는데, 옹기점이 연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그 들판의 성들을 부수어 없앨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던 그 성들을 뒤집어엎을 때,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로부터 롯을 내보내셨다.
낱말 풀이
* 알-프네 세돔 עַל־פְּנֵי סְדֹם : 소돔의 향하여
* 니브레쿠 보 נִבְרְכוּ בֹו : 그 땅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 라아쇼트 체다카 부미쉬파트 לַעֲשֹׂות צְדָקָה וּמִשְׁפָּט : 정의와 공의를 행하려고
* 데레크 야훼 דֶּרֶךְ יְהוָה : 야훼의 길
* 세돔 바아모라 סְדֹם וַעֲמֹרָה : 소돔과 (아)고모라
* 자아카트 זַעֲקַת : 아우성 - 악을 쓰며 크게 외치는 소리나 그 상태. ‘자아크 - 소리치다 또는 아우성치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한마디로 힘없는 이들을 향하여 여럿이 무리지어서 힘과 세력을 뽐내며 윽박지르는 상황을 말한다.
* 하타아탐 חַטָּאתָם : 그들의 죄 죄 – 빚나가다(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 하아프 티세페 הַאַף תִּסְפֶּה : 참으로 당신께서 모조리 쓸어 없애시렵니까?
* 할릴라 레카 חָלִלָה לְּךָ : 당신에게 걸맞지 않습니다.
* 하타쉐히트 הֲתַשְׁחִית : 당신께서 때려 부수어 없애시렵니까?
* 바 아브루 하 아싸라 בַּעֲבוּר הָעֲשָׂרָֽה : 그 열 명 때문이라도
* 민나아르 붸아드 자켄 콜 하암 מִנַּעַר וְעַד־זָקֵן כָּל־הָעָם : 젊은이로부터 늙은이까지 온 백성이
* 네데아 오탐 נֵדְעָה אֹתָֽם : 우리가 그들을 알아야겠다. 우리말 성서 –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相關하다 - 상대로 하여 육체적 관계를 맺다)
* 베첼 코라티 בְּצֵל קֹרָתִֽי : 내 집 그늘손님. 21세기 우리시대 상황에서 내 집 그늘손님 때문에 딸들을 희생물로 삼는 것은 옳은 일인가?
* 레카 메헴 לְךָ מֵהֶם : 그들보다 네놈에게 더
* 바아온 하이르 בַּעֲוֹן הָעִֽיר : 이 성의 죄악으로 인해
* 초아르 צֹֽועַר : 작다, 비천하다
* 야하포크 יַּהֲפֹךְ : 뒤집어 엎으셨다
읽기 – 2
또한 ‘신전에서 몸 파는 남자’가 그 땅에 있었다. 그들(이스라엘 자손들)이 ‘야훼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싫고 미운 모든 짓거리들을’ 따라했다.
열왕기상 14:24
또한 그(요시야)가 야훼의 집에 있는 ‘몸 파는 남자들의 집들을’ 허물었다. 거기 그 집들 안에 아세라를 위하여 천을 짜는 여자들도 머물렀다.
열왕기하 23:7
낱말풀이
* 코데쉬 שׁ?? : 신전에서 몸 파는 남자(男娼). 우리말 성서는 ‘남색 하는 자’라고 번역했다.
* 에트-바테 핰케데쉼 אֶת־בָּתֵּי הַקְּדֵשִׁים : 몸 파는 남자들의 집들을. 우리말 성서는 ‘남창 또는 미동(美童-곱상하게 생긴 사내아이)의 집’이라고 번역했다.
읽기 – 3
너는 여자와 눕는 것처럼 남자와 함께 눕지 마라. 그것은 싫고 미운 짓이다.
레위기 18:22
낱말풀이
* 토에바 후 תֹּועֵבָה הִֽוא : 그것은 싫고 미운 짓이다
시작하는 말
나는 ‘21세기 반인권 반사회 폭력의 구조를 해체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에 부쳐서’ 다시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을 읽는다. 그러면서 21세기 한국교회 안에서 날이 갈수록 거칠고 사나워지는 ‘반인권, 반사회, 반신앙 종교행태들’에 대하여 크게 근심하고 분노한다.
실제로, 21세기 한국 대형교회와 독점종교권력 기득권세력들은 소돔과 고모라본문을 읽고 해석하면서 한결같이 반인권, 반사회, 반신앙의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을 일삼는다. 본문에 나타난 ‘이해할 수 없는 야훼 하나님의 처절한 죽임의 우주불꽃놀이 폭력’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동성애 죗값으로 얼버무려 떠넘기려고’ 한다. 그러나 한국 대형교회와 종교 엘리트들의 이러한 성서읽기 행태는 21세기 지구촌 제국주의 전쟁과 죽임의 권력, 그 처절한 피 흘림의 폭력에 기생하여 종교기득권을 독점하려는 음모이며 술수이다. 왜냐하면 해방이후 한국 대형교회와 독점종교 엘리트들은 친일재벌․사회정치 모리배들과 친미반공․군사독재 세력들과 더불어 사악한 전쟁이데올로기 커넥션을 이루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사회 종교권력과 부를 마음껏 독점하고 누려왔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한국교회의 소돔과 고모라 본문읽기와 관련하여, 나는 두 차례 대만여행의 경험들을 떠올렸다. 나는 대만여행에서 부농(布農)족 원주민의 전통문화를 경험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내 아내 김옥연 목사는 대만 타이난 신학교에서 1년간 연수하면서 좋은 인연들을 만들었다. 그 덕에 나는 ‘부농 원주민들에게 ‘우니짱’이라 불리며 존경받는 호천국(胡天國) 장로님 댁‘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부농 원주민들의 오랜 ‘농사일지’였던 그림달력에 대하여 장로님으로부터 자세한 해설을 듣게 되었다. 장로님은 오래전부터 부농 원주민 전통문화 해설사로 유엔과 미국 등에서 여러 차례 전통문화 해설공연을 해왔는데, 지금은 은퇴한 상황이었다. 장로님은 오롯이 우리부부를 위해 장로님 댁을 방문한 은퇴교장선생님과 그분의 아들을 영어 통역사로 내세워 부농 원주민들의 그림달력 내용들을 설명해 주었다. 장로님은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열정적으로 그림달력 내용들을 설명했는데, 영어로 통역하는 이도 덩달아 노래하고 춤추며 통역했다. 아내는 나에게 그런 상황들을 우리말로 설명해주었다. 가끔씩, 은퇴교장선생님은 아들의 영어통역에 보태어 미진한 부분들에 대해 손짓발짓으로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게 장로님이나 은퇴 교장선생님이나 외국인 우리부부를 위해 정말 온힘을 다해 부농 원주민 전통문화 해설공연을 열어 주었다.
장로님이 해설한 바에 따르면, 부농 원주민들의 그림달력은 ‘샤오미’(小米)라는 곡물의 한 해 농사와 관련된 것이다. 샤오미는 우리나라 좁쌀보다도 작은 열매인데 한줄기에 더덕더덕 수천 개의 열매가 달려 있었다. 부농 원주민들은 열매줄기를 수확해서 자기 집 처마 밑에 걸어서 말린 후 발로 밟아 털어서, 절구에 찧고, 키질로 까불러 껍질을 벗겨낸다. 그리고 밥을 짓는데 밥을 짓는 과정에서도 솥에서 익히고, 큰 나무주걱으로 여러 차례 치대어 찰지고 맛있는 밥으로 만든다. 그렇게 밥이 다 지어지면 연잎에 싸서 여러 가지 나물 무침과 돼지고기 찜 등과 함께 밥상에 내어놓는다. 한편 부농 원주민들은 샤오미로 술을 빚기도 하는데 그 맛 또한 일품이다. 한마디로 내가 경험한 21세기 대만 부농원주민의 삶은 웰빙(Well-being) 그 자체이고 그들의 밥상 또한 웰빙밥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님의 부농 원주민 전통문화 해설가운데 마지막 장면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부농 원주민은 대만의 열여섯 개 부족 가운데 그 세력이 중간쯤인데 매우 용감하고 전투적인 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장로님은 마지막으로 부농 원주민 전사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마치 자신이 옛날 옛적 부농전사인 것처럼 온몸으로 표현하며 해설했다. 장로님의 해설에 따르면 부농 원주민 전사는 마을과 사냥터 영역 끝에서 경계를 서는데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험상궂은 얼굴로 낯선 사람을 을러댔다고 한다.
“우아 우아! 내게 말해봐! 어디서 왔어? 무엇하러 왔어? 이름이 뭐야? 우아 우아!”
부농 원주민 전사는 그렇게 을러대다가 위협과 악감정을 느끼는 순간 낯선 사람에게 달려들어 목을 따버렸다고 한다. 장로님은 웃으며 자기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몸짓을 통하여 그 순간을 표현했지만 나는 그 순간의 ‘긴장과 적대감, 배타성과 폭력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인류사회․문화 역사 속에서 낯선 이들을 향한 토박이 원주민들의 이러한 긴장과 적대감, 배타성과 폭력성은 동서고금 모든 사회문화전통에서 여실하게 나타나는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듯이 나는 21세기 한국 대형교회와 종교 엘리트 기득권세력들의 거칠고 사나운 반인권, 반사회, 반 신앙 성서읽기행태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 다시읽기’를 제안한다. 또한 나름대로 해석을 더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나름의 본문읽기를 위한 해석질문을 던진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그 처절한 죽임의 폭력, 동성애 때문인가?!”
이끄는 말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은 ‘이스라엘 선조들의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읽고 이해하며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흥미롭다. 이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가 이스라엘 12지파 연맹으로 발전하고 국가형태를 갖추면서 나름 선조들의 발자취를 발굴하여 재구성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라고 여긴다. 실제로, 맨 처음 이스라엘 선조들의 발자취를 재구성하고 문서화 한 주체는 다윗왕조 솔로몬 왕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12지파 연맹체가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발자취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다윗왕조는 그 선조들의 발자취와 뿌리 깊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증언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바벨론 제국 포로시대 이르러는 이스라엘의 민족 신앙과 민족정통성 강조하기 위해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 확장하고 강화하는 세밀한 편집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성서본문의 역사과정 속에서 이제, 야훼 하나님은 우주 불꽃놀이 죽임의 폭력을 통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하려고 하신다. 그 성들과 주변의 온 들판과 모든 주민 그리고 그 땅에서 자라난 모든 생명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뒤집어 엎으시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불가항력적이고 속수무책인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그 처절한 죽임의 폭력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일부 성서고고학자들은 BC 1,900년경 이스라엘 사해(死海)지역에서 대지진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BC 2,000년경 청동기시대까지 소돔과 고모라 주변지역은 맑은 물을 사해로 흘려보내는 비옥한 땅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진으로 인해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땅속에 매장되어 있던 석유와 천연 가스가 대 폭발을 일으켰다. 물길이 바뀌었고 땅이 메말랐다. 그 대폭발의 참상과 공포의 기억들이 ‘유황과 불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신화’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또 다른 성서학자들은 소돔과 고모라 멸망이야기의 밑그림으로 수메르문명의 애가(哀歌)들을 살핀다. 이와 관련하여 수메르문명의 애가들 가운데 ‘우르의 몰락에 대한 애가’(Lament for the Destruction of Ur)가 유명하다. 이 애가는 BC 2,112 ~ 2,004년 메소포타미아 남쪽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우르 제3왕조의 멸망을 애도하는 노래이다. 수메르문명의 부흥기라고 불리는 우르 제3왕조는 아카드제국이 무너진 후 약 100여년 정도 세력을 유지했으나, 엘람․바빌로니아에게 완전하게 멸망을 당했다. 그러면서 그 역사적 흔적마저 희미해 졌다. 실제로 수메르 애가들에서 ‘아누와 엔릴’ 등 수메르문명 최고위 신들은 우르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우르를 수호하는 여신 ‘닝갈’은 그 최고위 신들의 결정을 돌이키게 할 힘이 없었다. 이러한 수메르 애가들의 이야기 구도가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의 ‘야훼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논쟁’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나아가 21세기 우리 시대의 성서독자들은 소돔과 고모라 본문을 읽고 해석하면서 ‘폼페이 최후의 날’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폼페이는 인류역사 속에서 까맣게 잊혀 졌다가 다시 살아난 고대 로마제국 문명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서기 79년 로마제국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고 한순간에 로마제국 최고의 문명도시 폼페이가 화산재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2,000여 년 동안 사람들은 고대 로마제국 최고 문명도시 폼페이를 잊었다. 그러나 그렇게 잊혀 진 로마제국 고대 문명도시 폼페이에 대한 현대적 발굴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폼페이 도시 전역에 인도를 설치한 포장도로가 놓여 있었는데 도로 전체를 넓적한 돌로 포장했다. 그리고 도로 양쪽 끝을 살짝 낮추어 양 옆으로 빗물이 흘러가게 만들었다. 도로가에는 빵집도 있었고 목욕탕도 있었는데 목욕탕에는 사우나에 마사지실까지 딸려 있었다. 도로를 따라 광장들과 신전들도 들어서 있었다. 이렇게 고대 로마제국 최고 문명도시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 대폭발로 인해 한순간에 끝장났다.
그렇다면, 고대 로마제국 최고의 문명도시였던 폼페이의 멸망은 로마제국주의 문명 속에서 펄펄 살아 활동하던 ‘전쟁과 파괴의 신 아레스의 심판과 저주’ 때문이지 않았을까? 로마제국 전쟁과 파괴의 신 아레스의 심판과 저주로 인한 폼페이 최후의 날은 고대 로마제국 최고의 문명도시를 4m 넘는 화산재로 덮어버렸다. 그렇게 폼페이는 2,000여 년 동안 인류문명사 속에서 잊어지고 묻혀 졌다.
이렇듯이 21세기 성서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야훼 하나님의 처절한 죽임의 폭력’을 소돔과 고모라 본문읽기와 해석의 주제로 삼는다면, 본문은 독자들에게 ‘바벨론 포로기 유대지식인 성서편집자들의 목소리’를 아주 세세하게 들려줄 것이다. 그 편집자들의 목소리는 본문 안에서 ‘야훼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논쟁’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질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를 모조리 쓸어 없애시려는 야훼 하나님’과 더불어 ‘머뭇거림이나 주저함이 없는 과격한 논쟁’을 벌인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본문 편집자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야훼께서 벌이시려는 처절한 죽임의 폭력에 대해 윽박지르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논쟁’은 바벨론제국의 포로로써 ‘바벨론 제국의 혹독한 전쟁과 죽임의 권력, 그 처절한 피 흘림의 폭력’을 낱낱이 까발리고 폭로하는 ‘성서본문 편집자들의 목소리’이다. 그들의 숨은 목소리가 ‘무한 폭력과 죽임의 신을 앞세운 제국주의 피 흘림과 전쟁권력에 대한 저항신앙 은유’를 본문의 ‘야훼와 아브라함의 논쟁’속에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논쟁의 결론은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에서 ‘정의로운 사람 열 명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문 편집자들의 목소리는 ‘죄악과 타락으로 점철된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자신들의 삶의 마당에 비유하고 은유’한다. 그럼으로써 본문 편집자들의 목소리는 야훼 하나님을 배신하고 마침내 멸망당하여 바벨론 포로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죄악들을 처절하게 성찰하고 회개’한다.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 본문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의 반제국주의 저항신앙’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앞세운 그 처절한 제국주의 전쟁과 죽임의 폭력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야훼 신앙인으로써의 처절한 자기 성찰과 회개’를 증언한다.
이에 반하여 본문 안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남녀노소 모든 주민들은 온갖 사회⸳정치⸳경제 구조악(構造惡)을 저지르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나 책임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아우성과 죄악을 이렇게 성토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아우성이 참으로 크다.
그들의 죄가 참으로 매우 무겁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보겠다.
나에게 이르러 온, 그 땅의 아우성처럼..
그들이 모든 것을 실제로 했는지 아닌지, 내가 알아보겠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타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아우성은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무겁고 참담한 그들의 죄악은 무엇이었을까?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 편집자들의 목소리는 본문 맨 앞 단락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정리해 놓았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가 하려는 것을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이 참으로 크고 강한 민족으로 일어나리니
그 땅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내가 아브라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야훼가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그의 후손 집안에게 명령하리니
그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려고 야훼의 길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것을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어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본문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아우성의 실체이다.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마구잡이로 벌어지는 온갖 사회⸳정치⸳경제 구조악(構造惡)의 핵심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성서 야훼신앙 전통에 따르는 ’정의 - 차디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올바름이다. 더 나아가 정의는 ’사람과 하나님 나아가 사람과 하나님과 모든 창조세계 사이의 관계의 올바름‘이다. 또한 ’공의 – 미슈파트‘는 법정판결로써 사회 공동체정의를 지키기 위한 ’사회적 책임과 의무‘이다. 이렇듯이, 구약성서 야훼신앙 전통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길‘은 이집트제국 파라오의 노예였던 히브리 해방노예에게 계시된 ’야훼의 길‘을 지키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세상을 향해 ’야훼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 바로 ’야훼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전체 이야기 줄거리를 살펴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아우성과 죄악 특성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타자와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낯섦과 다양성을 향한 집단 두려움과 히스테리, 집단 폭력의 광기’이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타자와 낯선 것에 대한 집단 두려움과 히스테리 그에 따르는 집단 인격장애와 폭력광기’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아우성과 죄악은 ‘21세기 우리 시대의 아우성과 죄악’을 쏙 빼 닮았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타자와 약자와 소수자, 낯섦과 다양성을 향한 집단두려움과 히스테리, 집단 인경장애와 폭력광기’로 인해 밤낮 아우성친다. 스스럼없이 떼를 지어 온갖 사회⸳정치⸳경제 구조악을 음모하고 실행한다. 우리는 그 모든 아우성과 죄악들 속에서 매일 매일의 희생양을 찾아 헤매고 허덕이며 헤어지 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이러한 아우성과 죄악의 맨 처음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21세기 독자들은 고대 구약성서 시대에 만연했던 약탈과 지역 패권전쟁에서 그 밑바탕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 본문에 앞선 창세기 14장에서 시날왕과 엘람왕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 소 제국주의 왕들은 소돔과 고모라 등 가나안지역 토착 봉건세력들을 징벌하고 약탈하는 전쟁을 벌인다. 이 소 제국주의 약탈전쟁에서 소돔과 고모라 등 가나안지역 토착 봉건세력들은 처절하게 패배를 당한다. 모든 재물들을 빼앗기고, 심지어 가족들마저 노예로 내주어야만 했다. 이때, 떠돌이 나그네로써 가나안지역 토착 세력들과 동맹을 맺게 된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기른 사병 318명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지역 소 제국주의 왕들을 추격하여 회복전쟁을 벌인다. 아브라함은 이 전쟁에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아브라함은 그 승리를 통해서 되찾은 모든 재물과 노예로 잡혀간 사람들을 가나안지역 토착 봉건세력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모두 되돌려 주었다. 이렇듯이 본문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지역 소 제국주의 왕들의 징벌과 약탈과 패권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 그로 인한 히스테리 광기와 폭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 점에서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의 ‘아우성 - 자아카트’라는 히브리어 낱말을 사용한다. 이 히브리어 낱말은 ‘악을 쓰며 크게 외치는 소리나 그 상태’인데 ‘자아크 - 소리치다 또는 아우성치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한마디로 히브리어 ‘자아카트 - 아우성’은 타자와 약자를 향해 ’떼를 지어 힘과 세력을 뽐내며 윽박지르는 상황‘를 말한다. 또한 본문은 ’그들의 죄가 참으로 무겁다‘라고 말한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타자와 약자와 소수자, 낯섦과 다양성을 향한 집단두려움과 히스테리 폭력광기가 그들의 삶의 자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자리’를 실오라기도 남김없이 지워버렸다.
마찬가지로 21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이 땅 한반도에서 ‘핵전쟁 불꽃놀이, 그 처절한 죽임의 폭력’을 고스란히 맞이하게 될 위기상황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미 21세기 지구촌제국 미국과 북한사이에서 ‘한반도 비핵화 협상’은 파탄 난 상황이다. 도리어 미국의 전쟁세력들과 일본 제국주의세력 그리고 이 땅의 미치광이 전쟁광들이 이 땅 한반도를 피 흐림과 죽임의 광기로 뒤덮으려고 한다. 그 피 흘림과 죽임의 광기가 이 땅 한반도와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 지역 평화정착을 위협하며 훼방하는 덫이 되고 있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는 파탄 난 한반도 비핵화 평화 프로세스를 아예 폐기처분하고 지구촌제국 미국의 한반도 핵우산과 전략자산 및 사드배치를 구걸하고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과 대거리를 하고픈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미국의 전쟁세력, 그리고 한국의 미치광이 전쟁광들의 전쟁놀음 광기를 제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그리고 지금 지구촌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피흘림의 아우성 속에서 21세기 신 냉전체제 광기에 휩싸여 있다. 참으로, 이 땅 한반도에 몰아치고 있는 이 처절한 죽임의 폭력, 그 파멸의 위기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모든 문제해결의 핵심열쇠는 오직 하나, 이 것 뿐이다. 혹시라도 이 땅에서 정의로운 사람 열 명을 찾을 수 있을까?
"참으로, 당신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모조리 쓸어 없애시렵니까?
혹시라도, 그 성 안에 정의로운 사람 오십 명이 있다 해도,
당신께서는 그 땅 가운데 있는 정의로운 사람 오십 명을 위하여 그 곳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진짜 모조리 쓸어 없애시렵니까?
정의로운 사람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것
정의로운 사람을 악인처럼 똑같이 다루는 것
이런 일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당신에게 걸맞지 않습니다.
온 땅을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공의를 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당신에게 걸맞지 않습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소돔에서 그 성 가운데서 정의로운 사람 오십 명을 찾는다면
그들 때문이라도 내가 그곳 모두를 벌하지 않고 용서하겠다."
아브라함이 맞장구치며 말했다.
"제발, 보십시오.
저는 티끌과 재입니다.
제가 주제넘지만 주님에게 말씀드립니다.
혹시라도, 정의로운 사람 오십 명에서 다섯 명이 모자란다면
당신께서는 그 다섯 명 때문에 그 성 전부를 때려 부수어 없애시렵니까?"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는다면
나는 그 성을 끝장내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다시 야훼에게 말을 더 보태서 여쭈었다.
"혹시라도, 거기서 사십 명이 찾아진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사십 명 때문이라도 실제 행동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제발, 제가 주님에게 망설이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거기서 삼십 명이 찾아진다면."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는다면
나는 실제행동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제발, 보십시오.
제가 주제넘지만 주님에게 말씀드립니다.
혹시라도, 거기서 이십 명이 찾아 진다면."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이십 명 때문이라도 실제행동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제발, 제가 주님에게 망설이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제가 진짜 한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거기서 열 명이 찾아진다면."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열 명 때문이라도 실제행동하지 않겠다."
참으로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아브라함처럼 야훼 하나님을 맞대면해서 따지고 윽박지르며 하소연 하는 등 날카롭고 거센 논쟁을 벌인 이가 있었을까? 바벨론 포로기에 이르러 구약성서 편집자들에게 ‘야훼 하나님 앞에 맞세워서 이렇듯 거센 논쟁을 할 수 있도록 내세울 수 있는 이’가 아브라함과 모세뿐이었다.
그렇더라도, 아브라함이 조금의 머뭇거림이나 주저함 없이 야훼 하나님과 더불어 이렇게 날카롭고 거센 논쟁을 벌여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당신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모조리 쓸어 없애시렵니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에서 유대지식인 편집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야훼 하나님의 처절한 죽임의 폭력’을 매우 못마땅해 하게 여기며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유대 지식인으로서 바벨론제국 포로였던 성서 편집자들은 바벨제국 지배체제에 순응하고 제국의 관료로 일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 바벨론 제국의 죽임과 피흘림과 폭력’을 낱낱이 까발리고 폭로하려고 한다. 그렇게 나마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 바벨론제국의 처절한 전쟁과 죽임과 폭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신앙언어를 성서본문 안에 기록해 넣는다. 이렇듯이 아브라함은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일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당신에게 걸맞지 않습니다’라고 윽박지른다. 그럼으로써 끝끝내 본문 편집자들의 목소리는 아브라함의 이의제기논쟁 안에서 ‘나는 그 열 명 때문이라도 실제행동하지 않겠다’라는 야훼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되고 증언된다.
무엇보다도,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에서 터무니없이 중요해진 히브리어 문장 ‘네데아 오탐’. 우리가 그들을(또는 그들에 대해) 알아야겠다!
한국 대형교회와 몇몇 종교엘리트 기득권세력들은 끝끝내 본문을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으로 읽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렇게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행태는 21세기 한반도를 뒤덮고 있는 전쟁과 죽임의 지배체제에 기생하여 교회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려는 음모와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대형교회와 종교엘리트 기득권세력들은 그동안 친일 정치‧경제 기득권세력들과 사익의 뒷배를 맞추어 왔다. 지구촌 제국주의 반공냉전을 앞세운 군사독재‧전쟁세력들과 더불어 사악한 이데올로기 커넥션을 조직하고 독점 종교권력과 부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제 한국 대형교회와 종교엘리트 기득권세력들의 어둠 속 사악한 종교행태가 국민주권혁명 촛불 앞에서 그 추악한 실태를 낱낱이 드러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이 절치부심 다시 끄집어낸 음모와 술수의 도구가 바로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이다.
실제로 서구 기독교회는 2,000 여년 어둠의 종교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그 처절한 죽임의 폭력’을 도구로 삼아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을 일삼아왔다. 서구 기독교회의 이러한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은 중세 암흑시대에 이어 근대 서구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20세기 지구촌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독점 종교권력과 부’의 추구‧쟁탈‧음모‧술수‧도구로 이용 되어져 왔다.
일찍이 중세 서구기독교회는 중세 금욕주의 영성에 기생하여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민중들의 삶을 옥조이는 독점 종교권력과 부의 ‘추구‧쟁탈‧음모‧술수‧도구’로 본문을 이용했다. 중세 암흑기 유럽에서는 동성애로 의심되거나 동성애 누명을 뒤집어 쓴 민중들이 산 채로 가죽부대에 담겨 물속에 던져졌다. 아마도, 중세 마녀사냥의 희생자보다 더 많은 ‘동성애 의심 자 또는 동성애 누명을 뒤집어쓴 이들’이 물속에 수장되거나 불구덩이 속에서 화형을 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프랑스 루이황제 시대의 교회와 행정 관료들과 야경대원들은 동성애로 의심되는 이들을 대상으로 비참하고 끔직스러운 인간사냥을 자행했다. 이러한 동성애 인간사냥은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지울 수 없는 ‘반인륜‧반인권‧반사회‧반신앙의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다.
이렇듯이 중세 서구기독교회의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이야말로 야훼신앙‧예수신앙에 대한 반역이다.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 사랑과 용서’라는 기독교 신앙진리에 대한 퇴행으로써 철저한 반 신앙 밑바탕이며 뿌리이다. 이러한 중세 서구기독교회의 반 신앙 퇴행은 중세 유럽의 종교예술‧문학의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거짓신앙 진리로써 그 핵심역할을 해 왔다. 중세 신비극 ‘롯과 아브라함의 역사 History of Lot and Abraham’ 등. 중세 서구기독교회의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과 관련한 주제들은 중세유럽 이후 근‧현대 서구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서까지 서구사회의 시와 문학, 예술작품에서 끊임없이 다루어져왔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도 서구사회에서 ‘동성애 또는 수간(獸姦)’이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어지는 ‘소도미’(sodomy)라는 용어는 ‘소돔과 고모라 본문’에서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막연하게 ‘소돔사람들이 동성애 또는 수간 행위를 했을 것’이라는 중세 서구교회의 상상일 뿐이다. 본문에서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이름은 동성애와 관련한 그 어떤 특이한 사전적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중세 서구기독교회의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 전통’이 그렇게 상상하도록 지구촌 교회들을 부추기고 이끌어 왔을 뿐이다.
단지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은 ‘네데아 오탐 - 우리가 그들을(또는 그들에 대해) 알아야겠다’라는 히브리어 문장을 사용한다. 이 문장은 글자 그대로 ‘타자와 낯섦,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다양성’을 향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집단 두려움과 히스테리 폭력광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러한 집단두려움과 히스테리 폭력광기로 인해 ‘그 성 소돔 사람들, 젊은이로부터 늙은이들까지 온 백성’이 끝에서부터 몰려와 롯의 집을 에워싸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타자와 낯섦,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다양성’을 향한 집단두려움과 히스테리 인격장애 그에 따르는 집단 폭력광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성서는 소돔과 고모라 본문의 이 히브리어 문장을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라고 번역했다. ‘상관(相關)하다 - 상대로 하여 육체적 관계를 맺다’라는 뜻일 터인데 100% 오역이다. 만약, 우리말 성서의 번역이 맞는다면 ‘그 성 소돔 사람들, 젊은이부터 늙은이들까지 온 백성이 끝에서부터 몰려와 롯의 집을 에워쌌다’라는 본문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성 소돔의 젊은이들부터 늙은이들까지 모두가 동성애자들이란 말인가? 그 수를 알 수도 없는 무리들이 두 천사를 상대하여 한꺼번에 동성애를 하려고 몰려왔단 말인가? 참으로 우리말 성서의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라는 번역은 어처구니가 없다.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 본문에서 사용한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성관계를 맺다’라는 뜻보다 ‘깨닫다, 깊이 이해하다, 알다’ 등 인문학적 표현에 더 많이 사용되는 동사이다. 도리어 성관계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야다’라는 동사 외에 다른 동사들도 많다. 예를 들면 ‘아가브’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음욕을 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한 이 동사를 명사화해서 ‘아가바 - 정욕, 음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호쉐크’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보다 구체적인 성관계를 나타내는 동사로 사용 되는데 문자적인 뜻은 ‘달라붙다,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아주 적나라한 성관계를 표현하는 동사로 ‘쉐카바 - 정액을 쏟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밖에 ‘솨카브’라는 동사가 있는데 이 히브리어 동사는 ‘눕다’라는 뜻으로 매우 다양한 관용표현을 위해 사용된다.
한편 본문읽기 2 열왕기상 14장 24절에서는 ‘코데쉬’라는 히브리어 낱말을 사용하는데 ‘신전에서 몸 파는 남자(男娼)’을 의미한다. 우리말 성서는 ‘남색 하는 자’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낱말의 의미를 ‘동성애’로 제한하여 상상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제멋대로의 추측일 뿐이다. 도리어 이 히브리어 낱말의 의미는 ‘성전에서 남색을 파는 자’로써 ‘신전창녀(娼女)의 반대 역할’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본문읽기 2 열왕기하 23장 7절의 ‘에트-바테 핰케데쉼’이라는 히브리어 문구도 ‘신전에서 몸 파는 남자(男娼)들의 집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말 성서는 이 문구를 ‘미동(美童) - 곱상하게 생긴 사내아이의 집’이라고 번역했다. 이 문구는 성서 안에서 늙은 다윗왕의 경우처럼 동서고금의 황제나 왕 등 권력자들이 ‘곱상하게 생긴 사내아이 또는 어린 소녀들을 성적노리개로 취급했던 죄악들’을 되새기게 한다. 이렇듯이 ‘신전에서 몸 파는 남자(男娼) 또는 미동(美童)의 집’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야훼 신앙을 배반하고 부와 권력을 쫓은 바알신앙으로 타락했음을 증언한다. 나아가 시대마다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성적욕망과 타락 그에 따르는 종교‧사회구조악을 증언한다. 동성애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신전종교 용어이거나 시대마다 권력자들의 성적일탈을 증언하는 용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에는 본문읽기–3 레위기 18장 22절처럼 ‘동성애를 떠올릴 만한 문장’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본문읽기-3 레위기 본문은 레위기 18장에서 20장까지 하나하나 나열하는 그 시대의 반인륜‧반인권 종교제의와 온갖 성적인 타락 그리고 사회구조악과 폭력들 가운데 하나의 예로 끼여 있을 뿐이다.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자, 몰렉을 따라 음행하는 자들, 영매들과 신접한자들을 따라 음행하는 자들, 자기부모를 저주하는 자,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아버지의 아내와 간통하는 자, 며느리와 간통하는 자, 장모와 음행하는 자, 수간하는 남자와 여자, 누이․이모․고모․숙모․형수 등과 근친상간 자 등"
이렇듯이 레위기 18장에서 20장까지에는 그 시대의 반인륜‧반인권 종교제의와 온갖 성적인 타락 그리고 사회구조악과 폭력들을 나열하고 폭로하며 금지한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인 동성애를 떠올릴만한 구절만 꼽아서 야훼 하나님께서 저주하는 ‘죄악의 표상’으로 해석하고 내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한 성서읽기와 해석행태는 구약성서 전체가 증언하는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의 야훼 신앙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21세기 우리시대의 종교권력과 부와 사익을 쟁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증오와 배타와 폭력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반 신앙 퇴행’일 뿐이다. 이미 2,000년 서구 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독점 종교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수많은 종교 모리배들과 이단들이 그러한 성서읽기와 해석행태를 보여 왔다.
나아가 신약성서에도 ‘로마서 1장 27절,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10절, 디모데전서 1장 10절 등’ 동성애 혐오에 이용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러나 이 신약성서 구절들 가운데 예수가 직접 말한 것으로 보여 지는 것은 단 한마디도 없다. 실제로 예수는 생전에 동성애에 대하여 가타부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앞에서 예로든 신약성서 구절들은 모두 바울서신이라고 알려진 것들인데 바울의 동성애관련 발언의 맥락 역시도 구약성서와 똑 같다. 바울은 동성애를 자신의 서신들에서 열거한 ‘그 시대의 수많은 반인륜‧반인권 종교제의와 온갖 성적인 타락 그리고 사회구조악과 폭력들 가운데 하나의 예’로 제시할 뿐이다.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한 자,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한 자,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불손한 자, 오만 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꾸미는 자, 모략 꾼,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신의가 없는 자, 무정한 자, 부자비한 자, 욕정에 불타는 자, 음행을 하는 자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 간음을 하는 자들, 도둑질을 하는 자들, 탐욕을 부리는 자들, 술 취한 자들, 남을 중상모략 하는 자들,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 순종하지 않는 자, 경건하지 않는 자, 속된 자, 아비를 살해하는 자, 어미를 살해하는 자, 살인자, 유괴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등"
특별히 꼭 집어서 신약성서의 어떤 구절 하나를 내세워 동성애만을 비난하는 것은 ‘성서와 예수신앙에 비추어 아무런 정당성’도 없다. 도리어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21세기 우리시대의 종교와 사회윤리’에 비추어서 마땅히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성폭력, 공금횡령, 교회세습 등’을 비난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형교회 교우들은 ‘교회에서든, 길거리에서든, SNS를 통해서든, 언론을 통해서든’ 할 수만 있다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목청껏 소리를 높여서 동성애만을 비난한다.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성폭력과 공금횡령과 교회세습에 대하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참으로 부끄럽고 철면피한 한국 대형교회와 교우들의 ‘반인권‧반인륜‧반 신앙 아우성’이 자못 듣그럽다.
그렇다면, 21C 한국 대형교회와 교우들의 이러한 반 신앙‧반인륜‧반인권‧반이성적인 신앙행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까?
지금에서 왜, 한국 대형교회와 종교 엘리트 기득권세력들은 그 근거를 따지기조차 어려운 성서구절을 동원하여 동성애만을 물고 늘어지는 걸까? 반공 매카시즘 빨갱이 사냥이 한물 간 때문일까? 한국 대형교회와 종교 엘리트 기득권세력들의 독점 종교권력과 사익추구와 온갖 더러운 성범죄들을 하나로 몰아서 동성애 희생양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일까? 사이비하고 사악한 ‘반인권‧반인륜‧반 신앙 아우성’을 통하여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 희생번제 굿판’을 벌이려는 것일까?
이러한 21세기 한국교회의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속에서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소속 조성암 정교회 대주교는 『온전한 포용을 향해』라는 책을 번역 출간했다. 이 책은 캐나다 연합교회의 역사와 성소수자 포용을 위한 교회의 결의과정을 있는 그대로 풀어놓는다. 캐나다 연합교회는 1925년경 감리파, 장로파, 회중교회가 연합해 결성했다. 현재는 캐나다 전역에 3,000여개 교구와 200여만 명의 교우들이 있다. 캐나다 연합교회는 1988년 제32회 총회에서 ‘성적 지향과 교회 회원권, 그리고 교회 지도력’에 대해 두 개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래의 두 가지 선언은 이 성명서들의 핵심내용이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를 향한 순종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적 지향과 상관없이 캐나다 연합교회의 온전한 회원으로서 환영 받는다.
2. 캐나다 연합교회의 모든 회원들은 목회자가 될 자격을 가진다.
이제야말로 21C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스스로의 ‘오만과 비겁함, 불의와 불법, 저주와 증오’를 참회해야만 한다. 그 길만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를 해방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되고 바르며 유일한 신앙실천 행동의 길이다.
맺는 말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 다시읽기 -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에 부쳐서. 소돔과 고모라, 그 처절한 죽임의 폭력은 동성애 때문일까?
이제 21세기 우리시대의 독자들은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도구로 ‘우리시대의 보편적 인권과 사회 정의’를 사용하는 일에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 시대의 독자들이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해석 질문들을 상상하고 열거 할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그 처절한 죽임의 폭력, 동성애 때문인가? 사회 구조악(構造惡) 때문인가? 도대체 야훼의 이 처절한 죽임의 폭력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소돔과 고모라의 아우성은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무겁고 참담한 그들의 죄는 무엇이란 말인가? 더 나아가 롯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아우성과 집단폭력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그의 두 딸을 성노리개로 내어놓는 것‘은 마땅한 것일까? 롯의 터무니없는 가부장환대신앙과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의 아우성과 사회구조악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본문읽기와 해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참으로 소돔과 고모라 성서본문 속에 나타난 ’가부장주의 반인권‧반인륜 환대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나는 여기서 앞에 열거한 여러 가지 해석질문들을 모두 한꺼번에 다루지는 않는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우리시대의 독자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마구잡이로 벌어지고 있는 ‘동성애 절대폭력 선전선동’을 거부하고 저항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야훼 하나님의 우주불꽃놀이 처절한 죽임의 폭력’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동성애 아우성과 죄’로 뭉뚱그려 퉁 치는 ‘본문읽기와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21세기 한국교회의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 적대폭력 선전선동’은 몇몇 독점 종교권력 엘리트 기득권세력의 무한 종교권력사유화와 사익추구를 위한 음모와 술수일 뿐이다. 일찍이 그들은 한국교회 안에서 반공 매카시즘 광풍을 통하여 ‘무한 종교권력 사유화, 사익추구, 독점기득권’을 맘껏 누려왔다.
21세기 우리시대 상황에서 독점 종교권력과 사익을 지키기 위한 몇몇 대형교회와 종교 엘리트 기득권세력들의 ‘동성애 마녀사냥 음모와 술수’는 참으로 사악하고 모질고 끈질기다. 21세기 우리시대의 예수 신앙인들과 성서 독자들이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사랑과 용서, 생명과 평화’ 예수신앙 진실로 무장하고 길고 깊은 신앙과 삶의 호흡을 통하여 정의로운 신앙실천 행동에 나서야 할 때이다. 그 첫 번째 신앙실천 행동으로써 ‘차별금지법제정운동 참여’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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