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실패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4:2-9
읽기
예수가 많은 비유들로 그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예수가 가르치는 가운데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들어라! 보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다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씨앗이 더러는 길가를 따라 떨어졌는데, 새들이 와서, 씨앗을 먹어버렸다.
다른 씨앗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곳으로 날아가 돌짝밭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흙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싹이 나자마자, 해가 솟았을 때 그 싹이 시들어졌다. 그리고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말라 버렸다.
또 다른 씨앗 더러는 가시덤불 안에 떨어졌다. 그러자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씨앗을 억눌렀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반대로 대부분의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싹이 올라와 무성하게 되어 열매를 내어 주었다. 씨앗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예수가 말했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
낱말풀이
* 씨 뿌리는 사람 : 스페이론 σπείρων
* 그가 씨를 뿌리다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 에게네토 엔 토 스페이레인 ἐγένετο ἐν τῷ σπείρειν.
* 길가를 따라서 : 파라 텐 호돈 παρὰ τὴν ὁδόν
* 돌짝밭 위에 : 에피 토 페트로데스 ἐπὶ τὸ πετρῶδες, 페트라 πέτρα 바위 + 에이도스 εἶδος 보다
* 가시덤불 안에 : 에이스 타스 아칸타스 εἰς τὰς ἀκάνθας
* 좋은 땅에 : 에이스 텐 겐 텐 칼렌 εἰς τὴν γῆν τὴν καλήν
들어가는 말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실패일까, 성공일까? 아니, 21C 우리시대의 예수신앙인들에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들의 눈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야말로 처절한 실패로만 보여 졌을 것이다. 물론, 로마제국 지배체제로써도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실패냐, 성공이냐’를 따질 필요조차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에게 십자가처형을 판결한 로마제국 법정의 빌라도 총독의 언행으로 보아 여실히 증명 된다.
“참으로,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 너희가 알아서 해라.”
이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엘리트들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해서 유대 종교․정치․사회 기득권을 누려왔다. 그들의 기득권의 눈으로 보면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대한 반역이다.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서 멀어져 이 땅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열광하는 갈릴리 민중들은 그들에게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들이었다.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공동체에서 하루라도 빨리 쫓아내야할 해로운 무리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 예루살렘에서 자리 잡기 전에 쳐부수어 없애 버려야만 했다. 따라서 예수와 갈릴리 민중들이 함께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처절한 실패로 마무리 되고 끝장나야 마땅한 일이었다.
한편,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맞서서 위대한 다윗왕조를 회복하려는 열혈당원, 유대 선민주의(選民主義)자들의 눈에도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는 오합지졸일 뿐이다. 가난하고 나약하며, 불의하고 부정한 죄인들은 하나님나라에 전혀 걸맞지 않은 인간군상일 뿐이다. 도리어 그런 인간 군상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이방인들과 함께 멸망당해야 마땅한 자들이다. 앞으로 머잖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몰아칠 터인데, 이들 인간군상은 이스라엘의 남겨진 소수의 의로운 이들이 만들어 나갈 종말적 하나님나라에 대한 훼방꾼들일 뿐이다.
나아가 유대교 랍비,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엘리트 종교이론가들인 서기관과 율법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도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운동은 이단사설(異端邪說)일 뿐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사는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불의하고 부정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지금 여기,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온다 해도, 그 나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살아온 이들의 몫이어야 한다. 하다못해 죄인들이라면 서기관과 율법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통해서 죄 씻음을 받고서야 하나님나라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신앙 관념은 예수 따르기를 거부한 부자청년의 사건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통하여 예수의 대안세상, 아빠 하나님나라의 무한한 성장과 성공을 증언하려고 한다. 예수의 아빠 하나님 나라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대한 대안세상이다. 비폭력 세상, 생명․평화세상,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과 죄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대동세상이다. 그 나라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나라이며, 그 어떤 실패도 없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하는 아빠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빠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역사 이후로 끊임없이 성장해 온 민중들이 삶이다
이끄는 말
마가복음 저자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이렇게 말머리를 튼다.
“예수가 많은 비유들로 그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예수가 가르치는 가운데 그들에게 말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을 증언 할 때, 많은 비유들을 이야기했음이 분명하다. 씨 뿌리는 사람비유도 예수가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가운데 나온 하나의 비유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어떤 진실을 증언하려고 했을까? 예수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에서 이런 저런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을 증언하는 은유들을 찾아내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 속에서 예수의 실체에 대하여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양하게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러할 때, 예수는 하나님의 영의 사람이지만, 에세네파처럼 신비적이고 은둔적인 영적지도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는 종종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예수를 유대교 랍비로 이해할 수도 없다. 또한 예수의 제자그룹에는 열혈당원들이 있었으나, 예수 자신이 로마제국 지배체제를 폭력적으로 뒤엎으려는 열혈당원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철저한 야훼 신앙인이었을 것이다. 그냥 전통에 매인 야훼신앙이 아니라, 자기 삶 안에서 철저한 깨달음과 재해석을 통하여 새로운 야훼 신앙인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예수는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꿈꾸었던 옛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을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비유해서 재해석했다. 예수는 사는 날 동안 자신의 야훼신앙 깨달음과 재해석을 실천행동 하는 삶의 마당을 꾸렸다. 21C 우리시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예수는 야훼신앙 실천 활동가이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저항하는 대안세상, 하나님나라 복음 운동가이다. 예수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 종교의 실패를 만회하는 새로운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제안하고, 실천행동 하는 활동가이다. 예수는 자신의 야훼신앙 실천행동, 삶의 마당으로 갈릴리 민중들을 끌어들여 그들과 함께 하나나라 복음운동을 벌였다.
따라서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통하여 자신과 갈릴리 민중들이 함께 벌여온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적대자들의 실패논란에 반박하고 하나님나라의 무한성공을 선전선동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비유를 통하여 갈릴리 민중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패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실패가 불가능함을 증언한다. 나아가 유대 민중들에게 그들의 신앙과 삶의 마당에서 깡그리 잊혀 진 야훼신앙과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정의평등 세상을 선전선동 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저자는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무한성공을 은유하는 ‘씨 뿌리는 사람비유’을 아주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했던 것 같다. 예수의 비유의 의미를 아주 다르게 이해하다보니, 저자는 예수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종말론적 메시야 나라 수수께끼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얼버무리고 말았다. 실제로, 마가복음 저자는 본문비유에 이어 곧바로 예수의 입을 빌려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해설한다. 물론, 이 해설조차도 비유 이야기꾼 예수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할 것이다. 도리어 이 해설은 마가와 그의 신앙공동체, 나아가 초대교회의 예수복음 선교의 어려움과 실패의 경험들을 비유에 빗대어 해설한 것일 뿐이다.
이러할 때, 씨 뿌리는 사람은 하나님이거나 또는 예수복음 전도자를 의미하고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 또는 예수에 대한 복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복음’이 길가 사람들에게 떨어졌고, 사탄인 새가 와서 길가 사람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갔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에 대한 복음 선포’가 실패하는 이유를 사탄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그런데 이어지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 해설에서는 아예 예수복음이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뿌려진다고 말한다. 나아가 비유해설 자체가 초대교회의 예수복음 선포의 어려움과 그에 따른 예수복음 선포 자들에 대한 박해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마가와 그의 신앙공동체, 그리고 초대교회의 비유 해석은 예수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의 현실과 전혀 다르다. 예수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는 ‘예수시대 유대농부들의 하루하루의 농사일기’와 똑같다. 본문비유는 유대농부들의 농사현장 이야기이다. 유대 땅은 매년 5월에서 6월까지 추수가 끝나고 오랫동안 혹독한 건기를 견뎌내야만 한다. 그 혹독한 건기 동안에 밭은 내팽개쳐지게 되고, 잡풀이 땅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거들떠보지 않는 동안에 사람들이 밭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길 아닌 길이 나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우기에 맞추어 광야로 나가 있던 가축들이 농경지 안으로 넘어 들어오기도 한다. 가축들이 들어와서 밭에 터 잡고 살면서 밭을 빠대기고 하고 망쳐 놓기도 하겠지만, 가축들의 배설물로 밭을 기름지게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건기가 끝나고 10월 중순에 이르러 지중해 쪽으로부터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우기가 시작된다. 유대 농부들이 밭에 씨를 뿌려야하는 농사철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유대 농부들은 우리시대의 농부들처럼 씨를 뿌리기전에 밭을 갈아 고랑을 내거나 두둑을 짓지 않는다. 물론 묘판을 만들어 모종을 기르고 옮겨심기를 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밭에 씨앗을 뿌린 후에 밭을 갈아 밭 흙으로 씨앗을 덮어서 싹이 트고 자라게 한다. 이렇듯이, 예수의 비유는 유대 농부들이 밭에 씨를 뿌리는 첫 농사 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너희는 들어라! 보라,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다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첫 농사일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그로인해 한해 농사 모두가 실패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씨앗이 더러는 길가를 따라 떨어졌는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어버렸다. 다른 씨앗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곳으로 날아가 돌짝밭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흙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싹이 나자마자, 해가 솟았을 때 그 싹이 시들어졌다. 그리고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말라 버렸다. 또 다른 씨앗 더러는 가시덤불 안에 떨어졌다. 그러자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씨앗을 억눌렀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유대 땅 농부들은 우기가 시작되면서 혹독했던 건기 내내 내팽겨 쳐진 밭에 직접 씨앗을 뿌린다. 그러는 과정에서 씨앗들이 더러 밭둑에, 밭둑을 넘어 길가에, 길가 후미진 가시덤불에 떨어지곤 한다. 그것은 유대 농부들의 첫 농사일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씨앗이 더러는 길가에, 돌짝밭에,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일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씨앗이 씨 뿌리는 농부의 손을 떠나 길가에, 돌짝밭에. 가시덤불 안에 떨어지는 것을 농부의 한해 모든 농사일의 실패로 딱 잘라서 판단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에서 씨앗이 허튼 곳에 흘려지는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렇게, 예수가 해마다 거듭해서 되풀이 되는 농부들의 피할 수 없는 씨앗흘림에 대해 세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예수의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보다 뚜렷한 비유의 은유들을 흘려놓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과 갈릴리 민중들이 함께 벌여온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무시하고 헐뜯고 훼방하는 기득권 지배체제와 맞선다. 전쟁과 피흘림과 죽임의 폭력으로 세워진 로마제국 지배체제는 필연코 실패 할 수밖에 없다. 그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려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역시 정의평등․생명평화 야훼신앙에 대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비유는 농부들의 손에서 허튼 곳으로 흘려지는 씨앗들을 통하여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실패를 꼬집는다. 물론, 이것은 예수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의 핵심은유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종교․사회 기득권세력의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야훼신앙에 대한 필패’를 폭로하는 현실 신앙은유이다.
이렇듯이 만약, 예수의 비유에서 ‘길가를 따라 떨어진 씨앗을 사탄이 와서 빼앗았다’라고 알레고리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세상에 대한 실패를 은유하는 것일 수 있다. 이점에서 본문비유의 ‘길가를 따라서’라는 문구는 제국의 대로를 떠올리게 한다. 고대로부터 팔레스틴 지역에는 지중해 해변을 따라 이집트에서 다메섹으로,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해변 길’이라는 큰길이 있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다메섹으로, 다시 이집트로 이어지는 ‘왕의 대로’도 있었다. 이 두 길 모두 군대가 이동하며 전쟁과 죽임과 피흘림이 마구잡이로 벌어지는 제국의 길이었다. 또한 약탈과 독점과 축적을 위한 제국의 대상인들의 길이었다.
특별히 로마제국 시대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 로마제국의 모든 도로들은 전쟁과 죽임과 피흘림의 로마제국 통치를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로마제국은 제국 내 어디에서든 로마로 통하는 새 길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모든 길들을 새롭게 정비해서 운용했다. 그 길들 곳곳에 표지판이 세워졌고 군대를 위한 숙박 시설과 보급소들을 건설했다. 로마제국은 잘 정비된 제국의 길들을 따라 제국의 군단들을 주둔 시켰다. 로마제국의 군단은 6천 명에서 1만여 명 사이였는데, 제국전역에 25개 이상의 군단들이 있었다. 이렇게 지중해 세계 전역을 지배하는 로마제국 군단의 힘은 재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로마제국 내의 잘 닦여진 길들을 따라 군대가 움직였는데, 한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주변의 로마제국 군단들에게 둘러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이, 로마제국의 길들을 따라 벌어지는 피흘림과 죽임의 전쟁이 히브리들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 야훼신앙 진실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또한 본문비유에서는 ‘다른 씨앗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곳으로 날아가 돌짝밭 위에 떨어졌다’라고 한다. 실제로 유대 땅은 대체로 흙이 깊지 않은 메마르고 거친 땅이다. 조금만 깊이 흙을 걷어내면 돌들과 바위들이 드러난다. 물론 바지런한 농부라면 날마다 자기 밭에서 크고 작은 돌들을 골라내어 밭둑을 쌓을 것이다. 또한 자기 밭 땅위로 드러난 바위를 캐내거나 부수어 트리고자 애쓸 것이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농부의 손을 떠난 씨앗 중 더러는 돌짝밭 위에 날아가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비유에서 이러한 상황을 세세히 그려냄으로써 야훼신앙 진실을 외면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하나님나라 복음실패를 증언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비유는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이 흙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싹이 나자마자, 해가 솟았을 때 그 싹이 시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말라 버렸다’라고 한다. 한마디로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는 야훼신앙 진실을 전혀 증언하지 못했다. ‘죄와 벌, 성전제사와 죄 사함’이라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이데올로기는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과 맞아 떨어지는 신앙진실이 하나도 없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꿈꾸었던 야훼신앙진실,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 하나님나라 신앙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는 오로지 ‘죄와 벌, 성전제사와 죄 사함’만을 앞세워 ‘백치 아다다 성전제사종교 중독질환자’들만을 늘려왔을 뿐이다.
이렇듯이, 21C 한국교회 안에서는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에 대한 반동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온갖 폐해들이 거리낌 없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반인권, 반민주, 반이성, 특권․기득권 무소불위 종교권력이 교회와 교우들의 올곧은 신앙실천행동의 발걸음을 옥죄고 있다. 거룩한 성령의 은총을 훼방하고, 바알․맘몬 잡귀신에 씌어, 교회와 교우들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이끌고 있다. 교회여, 교우들이여! 거룩한 성령세례를 통하여 바알․맘몬 잡귀신에서 해방되시라! 하루라도 빨리, 반인권, 반민주, 반이성, 특권․기득권 무소불위 종교권력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하시라!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실천행동을 통하여 ‘21C 백치 아다다 성전제사종교 중독질환’을 치유하시라!
또 나아가 본문비유는 ‘다른 씨앗 더러는 가시덤불 안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자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씨앗을 억눌렀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 땅의 농경지에는 혹독한 건기임에도 불구하고 거친 덤불잡초들이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간다. 따라서 10월 중순 우기가 시작되어 씨를 뿌리는 때에도 유대 땅 농경지에는 가시덤불 잡초들이 무성하다. 물론 유대 땅 농부들은 이러한 잡초를 깨끗이 제거하고 씨뿌리기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대 땅 농사일지 상황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매여 사는 예루살렘 날품팔이 대중들과 가난한 유대 군중들의 하나님나라 신앙실패’를 은유한다.
성서학자들은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주민수를 약3만 명 정도라고 추산한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대부분은 하루벌이 일용 노동자들이거나 과부나 고아 등 유대 종교․행정자치 당국의 구호를 받아 생계를 꾸리는 빈민들이다. 예루살렘과 유대 민중들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전쟁과 죽임과 피흘림에 무서워 떨며 억압당한다. 또한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체제의 종교노예로 살아간다. 유대지역 농부들은 대부분 자기 땅을 빼앗기고 대지주의 땅에 매여 사는 소작농이거나 임금농부들이다. 구약성서는 이들을 ‘암 아레츠(am-areṣ) – 그 땅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신약성서는 ‘오클로스(ochlos ὄχλος) – 군중’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속절없이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와 유대지역 대지주들의 땅에 매여 살아야만 하는 힘없는 민초들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대 민중들의 삶의 마당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야훼신앙에 대한 처절한 실패를 증언할 뿐이다. 예루살렘과 유대민중들의 종교심성 안에는 야훼신앙의 진실이 한 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다. 예루살렘 군중과 유대 민중들의 삶의 마당에서는 오래전에 야훼신앙의 진실이 죽었다.
그러나 예수는 비유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씨 뿌리는 사람 비유의 앞선 세 가지 실패 사례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성공을 증언한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싹이 올라와 무성하게 되어 열매를 내어 주었다. 씨앗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로써 예수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처참한 실패와는 달리,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대 전환의 신앙은유를 내어 놓는다. 앞서서 예수는 ‘다른 씨앗 더러는’ 이라는 비유의 문구로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과 유대민중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실패를 비유한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비유 이야기의 끝에서 ‘다른 대부분의 씨앗은’이라는 문구로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놀라운 성공을 은유한다.
이렇듯이,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 끝에서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놀라운 성공을 증언함으로써,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예루살렘 성전제사 종교의 실패를 새삼 강조한다.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로마제국과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처참한 실패와 비유의 청중들 또는 독자들의 신앙 발걸음 사이를 갈라치기 한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전쟁과 죽임과 피 흘림으로 인한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세상에 대한 실패는 소수의 지배체제 내부자들의 실패일 뿐이다. 또한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해서 가난한 민중들의 피와 땀을 빨아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야훼신앙에 대한 실패 역시도 소수 엘리트 기득권세력의 실패일 뿐이다. 그러므로 로마제국 지배체제 내부자들과 그들과 손잡은 예루살렘 엘리트 기득권세력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패를 비난하고 헐뜯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졌다.”
로마제국 지배체제 내부자와 예루살렘 종교엘리트 기득권세력은 소수이고 그들의 실패 또한 소수 기득권세력의 실패이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민중들의 삶의 마당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실패하지 않는다. 이 땅의 대다수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삶의 마당이 곧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예수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는 온갖 실패에 대한 은유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민중들의 삶의 마당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열매 맺는, 언제 어디서나 실패하지 않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신앙은유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에서 ‘다른 씨앗 더러는’은 뚜렷하게 실패를 은유한다. 그러나 이 실패를 예수와 갈릴리 민중들의 삶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패로 잘못 읽고 엉뚱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실패는 전쟁과 죽임과 피흘림의 로마제국 사이비 평화복음의 실패이다. 또한 로마제국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의 반 야훼신앙 실패이다. 예루살렘 군중과 유대 민중들의 줏대 없는 반 야훼신앙 휩쓸림의 실패이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민중들의 삶의 마당에서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실패를 뛰어넘는 위대한 성공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대부분의 민중들의 삶의 마당에서는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가 풍성하다.
맺는 말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
우리말 성서는 ‘들을 귀 있는 사람’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본문비유에서 ‘들을 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듣기위해 애쓰고, 언제 어디서나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쟁과 죽임과 피흘림의 로마제국 지배체제가 ‘예수와 갈릴리 민중들이 함께 벌여온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제국 지배체제 안에서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실패의 소식만 들려질 뿐이다. 또한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해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을 은폐하고 실패만을 선전선동 할 뿐이다. 그러므로 전쟁과 죽임과 피흘림의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이데올로기로 인해 귀가 어두워진 대중들에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이 잘 들려지지 않을 것은 뻔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통하여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가려진 신앙진실을 증언한다. 전쟁과 죽임과 피흘림의 로마제국 사이비 평화복음에 가려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놀라운 성공의 실체를 증언한다. 또한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해서 기득권을 누려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패를 선전 선동하는 반 야훼신앙 구호에 대해 맞선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삶의 마당에서 싹트고 무성하게 자라서 열매 맺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놀라운 성공을 의심의 여지없이 밝혀내어 증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실패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맞서는 야훼신앙 대안세상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시대의 민중들의 삶의 마당에 함께하시는 예수의 아빠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아빠 하나님께서 시대의 민중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시는 민중 네트워크 세상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삶의 네트워크, 자유롭고 개방된 공유세상,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나누고 누리는 협동의 나라이다. 그러기에 결코 실패할 수 없는 민중의 나라, 아빠 하나님의 나라이다.
'21세기 성서읽기 > 『시대의 언어로 읽는 예수의 비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불 비유 - 이제부터, 촛불신앙이다. (0) | 2022.07.11 |
---|---|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비유 - 새로운 대안세상,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0) | 2022.07.11 |
겨자씨앗 비유 - 하나님나라는 잡초처럼 (0) | 2022.07.11 |
저절로 자라는 씨앗 비유 -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의 삶, 저절로 자라는 하나님나라 (1) | 2022.07.11 |
예수의 큰 잔치 비유 - 지배체제 기득권자들의 만찬을 뒤집고 모욕하다,하나님나라 무지렁이들의 큰 잔치. (0) | 2022.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