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예수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앗 비유 -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의 삶, 저절로 자라는 하나님나라

희년행동 2022. 7. 11. 21:23

저절로 자라는 씨앗 비유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의 삶, 저절로 자라는 하나님나라

마가복음 4:26-29

 

읽기

 

그리고 예수가 말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흘린 것과 같다. 또한 마치, 그 사람이 밤낮으로 자고 일어나게 되지만, 씨앗이 싹트고 자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같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내는 데, 처음에는 싹, 다음에는 이삭, 그다음에는 이삭에 가득한 알곡을 낸다.

그러나 알곡이 고개를 숙일 때에야, 그가 곧장 가서 낫을 댄다. 왜냐하면 추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낱말풀이

 

*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 : 후토스 Οτος지시대명사 이렇게, 그렇게’.

* 알아채지 못한다. : 우크 오이덴 οκ οδεν, 여기서 사용된 오이덴 οδεν 이라는 동사는 호라오 ράω 둘러보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 저절로 : 아우토마테 ατομάτη, ‘아우토스 ατος 3인칭 재귀대명사 + 멤마 μέμαα 흥분하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 알곡이 고개를 숙일 때에야 : 파라도이 παραδοῖ, ‘파라 παρά 나란히 + 디도미 δίδωμι 주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인데, 기본 뜻은 내어주다, 넘겨주다이다.

* 그가 낫을 댄다. : 아포스텔레이 ποστέλλει, 기본뜻은 그가 보낸다이다.

* 추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 파레스테켄 παρέστηκεν, ‘파라 παρά 옆에 + 히스테미 στημι 서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들어가는 말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무엇일까? 예수의 비유들은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한 신앙은유이다. 이렇듯이, 예수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비유를 읽으면서 마음속에 언뜻 떠오르는 그림은 게으름뱅이의 시골생활이다. 게으름뱅이의 시골생활에서도 연연이 봄은 오고, 집안 뜰과 담장 밖 고샅에 온갖 풀들이 싹트고 자란다. 조금만 무심해져도 온갖 잡풀들이 마당을 덮고 무성해진다. ‘에라하고 내버려 두면 몇 날을 지나지 않아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 또한 볼만한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우들은 본문비유를 읽으면서 죽어서야 가게 되는 어마 어마하게 크고 신비스러운 하나님나라를 마음속에 그릴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죽어서 가는 천당에 목을 맨 교우들은 살아생전에 천당을 갔다 왔다는 이들의 간증을 들으며 혹()하는 마음을 갖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이 세상에서 살 때부터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나라에 걸맞은 특별한 신앙행위를 해야 한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많은 빚을 내서라도 소위 성전건축특별헌금이라는 것들을 바치곤 한다.

그러나 본문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비유를 하나하나 따져 읽다 보면,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가 본문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흘린 것과 같다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본문비유의 이 첫 문장이야말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와 맞물려 비유의 하나님나라 진실을 더함도 뺌도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실제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는 버려진 사람들, 주류사회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이들,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보잘 것 없는 이 땅의 무지렁이들 사이에서 싹트는 유언비어 세상이다.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비주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나름대로 꿈꾸고, 바라며, 실천행동을 해 나가는 삶의 미래이다. 주류 인생에서 밀려나고 쫓겨나 버려진 비주류 인생들의 삶, 주류사회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삶이 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이다. 이렇듯이 주류사회로부터 버려지고 소외되어 쫓겨난 비주류 인생들의 삶속에는 하나님나라 복음의 신비와 진실이 가득하다.

 

이끄는 말

 

예수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 비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과 실체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회가 예수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비유를 세상 끝 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하고 놀라운 성공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어이없는 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예수의 저절로 자라는 씨 비유를 자세히 읽고 비유의 참 뜻을 밝혀 보고자 한다.

예수는 본문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 마치,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흘린 것과 같다라고 말문을 연다. 그런데 실제로 모든 농부들은 한 톨이라도 일부러 씨를 땅에 흘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농부도 자기 씨를 거칠고 딱딱하고 메마른 땅에다 뿌리지 않는다. 따라서 비유에서 농부는 어쩌다가 생각지도 않게 거칠고 메마른 땅에 씨를 흘렸다. 자기 밭에서 씨를 뿌리던 농부가 어쩌다 무심코 후미진 밭둑 맨땅에 '씨를 흘린 것'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는 밀농사와 보리농사를 지었는데, 현대 농법처럼 골을 켜고 두둑을 만들어 씨를 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밭에다 씨를 뿌렸다. 이때 소규모 자작농들은 허리춤에 씨앗주머니를 차거나, 씨앗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조심스레 손으로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앗들을 후미진 밭둑 맨땅에 흘리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고대 유대지역 전승에 의하면, 대지주들은 당나귀 등에 씨앗자루를 얹어 양쪽으로 늘어뜨리고 밑에 구멍을 낸 다음, 한 사람이 당나귀 고삐를 움켜쥐고 다른 한 사람은 당나귀 꽁지를 잡아채거나 엉덩이를 채찍질하여, 당나귀가 겅중겅중 뛰게 해서 씨앗을 뿌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씨앗을 엉뚱한 곳에 흘리게 되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실제로,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대부분은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이 한마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후미진 밭둑 맨땅에 흘려진 씨앗의 상황과 똑 같다. 버려진 자들, 소외된 자들의 삶의 마당이 곧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잘나고 힘도 있고 시대의 기득권특권마저 가지고 태어나 마음껏 누리는 주류인생들에게 밀려난 막살이 민중들의 유언비어 희망세상이다. 후미진 뒷골목 맨 땅에 삶의 마당을 편 서글픈 못난이들의 삶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싹트고 자라고 커가는 대동세상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진실은 주류사회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 가운데 나름대로 씩씩하고 꿋꿋하게 성장해 가는 이 땅의 잡초 민중들의 공동체적 삶의 터전이다. 예수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비유가 은유하는 하나님나라 진실이 이와 같다.

이점에서 본문비유에서 이야기하는 이 아니라 그냥 맨땅이다. 본문비유의 어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다가 무심결에 후미진 밭둑 맨땅에 씨를 흘린 것이다. 따라서 농부는 흘린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 맺는 것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농부는 매일 밤에 충분히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낮이 다하도록 열심히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한다. 그러나 흘린 씨앗이 후미진 밭둑 맨땅에서 무성한 잡풀과 섞여 싹트고 자라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농부는 아예 그 일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예수는 이러한 농부의 하루하루의 농사일에 비유해서 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을 밝힌다. 예수는 이렇게 비유 이야기를 이어간다. “또한 마치, 그가 밤낮으로 자고 일어나면서도, 씨가 싹트고 자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같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내는 데, 처음에는 싹, 다음에는 이삭, 그다음에는 이삭에 가득한 알곡을 낸다.”

본문비유에서 농부는 실수로 후미진 밭둑 맨땅에 씨앗을 흘렸고, 그렇게 흘려진 씨앗은 농부의 무관심 속에서 메마르고 거친 맨땅에 버려졌다. 그러나 흘린 씨앗은 후미진 밭둑 맨땅에서 억센 잡풀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저절로 싹을 틔워내고 자라서 이삭을 피워 올린다. 그리고 어느덧 유대 땅의 우기가 지나고 건기가 다가와 온갖 잡풀들이 말라비틀어질 때, 당당하게 알곡을 맺는다. 후미진 밭둑 맨 땅이 농부의 흘린 씨앗에서 저절로 싹이 나게 하고, 자라게 하며, 이삭을 내서 알곡으로 키워낸 것이다.

이렇듯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생명평화공동체로써 민초들의 삶은 스스로 성장한다. 주류세상의 돌봄을 받지 않고도 제 스스로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생명평화공동체 삶의 가치는 21C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사회의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돈과 권력과 기득권을 통하여 획득한 일류 학벌, 최고의 스펙,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 등이 무용지물이다. 예수의 하나님 아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시민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평화공동체 삶을 이루고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그러므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 비유가 은유하듯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생명평화공동체는 선물이다. 이 땅에서 버려지고 소외되고 잊혀 진 무지렁이들의 삶의 마당에 내리는 하늘은총이다. 아무도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돈과 권력과 힘으로 쟁취할 수 없다. 아무도 자신의 부와 권력과 기득권으로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좌지우지 하거나 망가트릴 수 없다. 후미진 밭둑 맨땅이 흘린 씨앗을 받아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며 열매 맺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는 야훼하나님께서 직접 가꾸고 다스리시는 생명평화공동체 세상이다.

이와 관련하여 비유의 농부는 밭둑 후미진 맨땅에 흘린 씨앗이 저절로 자라서 이삭을 내고 이삭에 가득한 알곡이 무르익어 고개를 숙였을 때, 그때야 비로소 흘린 씨앗이 알곡으로 열매 맺은 것을 알게 된다. 농부는 너무도 뜻밖의 알곡들을 대하자마자 곧바로 낫을 들고 추수를 한다. 참으로 농부의 마음은 뜻밖의 수확을 얻고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다. 이제, 농부는 바야흐로 풍성한 추수의 때가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그렇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생명평화공동체 열매는 뜻밖의 하늘선물이며 하늘은총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무지렁이 못난이들에게 주어지는 야훼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이다.

따라서 실제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인 제사장그룹이나 부유한 자들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유대교 종교엘리트들인 서기관 율법학자 등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기에는 엄연한 불신앙이었다. 또한 그것은 불굴의 의지와 용기와 결단으로 새로운 다윗왕조를 꿈꾸는 유대교 혁명가들에게 아주 하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머잖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생명평화공동체 세상의 진실이 되어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때를 아는 이라면 누구든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알곡추수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대의 수많은 민중들이 아무런 자기 노력과 수고를 자랑하지도, 주장하지도 못하는 속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시대의 깨어있는 민중들이 기쁨과 행복에 겨워 하나님나라의 추수 때에 낫을 들게 될 것이다.

이점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생명평화공동체 세상은 뜻밖의 하늘선물이고 하늘은총인 반면, 또한 그것은 필연이고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후미진 밭둑 맨땅이 농부의 흘린 씨앗을 받아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며 이삭을 내어 풍성한 알곡을 내는 것처럼,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무지렁이들의 삶의 마당에서 손수 가꾸어 가시는 생명평화세상이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의 생명평화세상은 주류세상의 맘몬자본 권력뿐만 아니라, 무지렁이 민중들조차 이래저래 힘써볼 일이 전혀 없는 하늘 내리비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가 본문비유를 통하여 이 땅을 사는 무지렁이 민중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풍성하고 아름다음 열매를 마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곧장 낫을 들고 나가서 그 풍성한 열매를 거두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시대의 무지렁이 민중들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풍성한 추수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맺는 말

 

21C 한국교회는 여전히 서구교회의 전통에 따라 본문비유를 읽고, 죽어서 가는 천당의 위대한 승리와 보상만을 꿈꾼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라. 추호도 의심하지마라! 너희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놀랍고 풍성한 결실을 주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신앙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예수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 비유에 대한 서구교회의 이러한 해석은 맞갖지 않다. 예수가 비유에서 청중과 독자들에게 주는 올곧은 신앙은유는 죽어서가는 천당에 대한 환상이 아니다. 청중들과 독자들이 지금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삶의 현실이다. 어쩌다 농부가 후미진 밭둑 맨땅에 흘린 씨앗이 저절로 싹트고 자라며 이삭이 나서 풍성한 알곡으로 열매 맺듯이,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소외되고 잊혀 진 못난이들의 삶의 마당에서 속절없이 싹트고 자라며 열매 맺는 생명평화공동체 삶의 진실이야말로 곧 하나님나라라는 것이다.

사실, 21C 우리 시대 독자들의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도 자세히 따지고 살펴보면, 버려지고 소외 된 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다. 하찮은 것들도 오래도록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다. 나름대로 버려지고 소외 된 것들만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 그리고 고귀함이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일부러 거부하고 밀어 내치려고만 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들의 핀 풀꽃들을 보며 말한다.

솔로몬왕의 온갖 화려하게 치장된 옷과 영광이 이 풀꽃만도 못하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비유는 이야기꾼인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와 맞물려 의심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주 뚜렷한 신앙은유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주류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 소외되고 억압당하는 이 땅의 무지렁이 민중들의 삶의 마당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신앙은유이다. 이렇듯이, 시대의 무지렁이들의 삶은 누가 배려하고 키워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성장하고 열매 맺는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삶에 간섭하시고 참여하시며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민중들이 누리는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열매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아무라도, 이 땅의 무지렁이들의 삶의 마당에서 열매 맺는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추수 때를 깨닫는 이 라면 곧장 낫을 들고 시대의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추수의 기쁨에 참여하라.

 

풀꽃 - 나 태 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