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희년신앙』 맥(脈)

『희년신앙』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10. 예수의 십자가 행동, 이천년 예수십자가 신앙결사를 이끌다.

희년행동 2024. 8. 10. 20:44

희년신앙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10. 예수의 십자가 행동, 이천년 예수십자가 신앙결사를 이끌다.

마가복음 15:1-15

 

본문읽기

 

이른 아침에 곧바로 대제사자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산헤드린 모든 공회원들과 함께 회의를 연후, 예수를 결박하고 압송해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가 빌라도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소.”

 

그때 대제사장들이 많은 것들로 예수를 고발했다. 빌라도가 다시 예수에게 물어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려느냐? 보아라, 저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로 너를 고소하는지.”

 

그러나 예수가 더 이상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매우 놀랐다. 그런데 축제 때마다 빌라도가 군중(사람들)이 요구 해오던 죄수 한 명을 풀어주었다. 그때 바랍바스라고 불리는 사람이 폭동 속에서 사람을 살해한 폭도들과 함께 구속되어 있었다. 군중이 올라가서 빌라도가 그들에게 해왔던 것처럼(관례대로) 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유대인들의 왕을 풀어주기 원하느냐?”

 

왜냐하면, 빌라도가 대제사장들이 질투 때문에 예수를 넘겨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빌라도가 그들에게 (군중에게) 바랍바스를 풀어달라고 더 세게 요구 하도록군중을 선동했다. 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그러면 내가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사람을어떻게 하기를 너희가 원하느냐?”

 

그래서 그들은 더 크게 소리쳤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했다.

 

정말로(참으로) 그가 어떤 나쁜 짓을 했느냐?”

 

그러나 그들은 더욱 더 크게 소리 질렀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마침내 빌라도는 군중이 바라는 바대로 만족하게 해주려고 그들에게 바랍바스를 풀어주었다. 또한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 한 후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넘겨주었다.

 

 

본문 이해하기

21세기 한국교회의 성서읽기와 해석

 

가끔은 필자를 마치 이단처럼 여기는 분들이 있다. 그분에게는 어쩌다가 공개적으로 말하게 되는 필자의 성서읽기가 전혀 귀에 익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필자와 교류하는 여러 신앙모임들과의 관계는 별탈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21세기 한국교회에 난무하는 교활한 맘몬자본숭배 신앙세태 속에서 김교신선생님과 그분의 제자이신 유달영 박사 말씀이 새롭다. 의심하지 않고 어떻게 참 신앙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혹여 라도 21세기 성서독자들이 필자의 본문풀이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이와 관련하여 21세기 현재에 이르러 서구교회 종교개혁은 이미 5백년세월을 지났다. 으레 그렇듯이 몇 해 전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새로울 것도 없는 행사준비로 시끌벅적했었다. 우후죽순 화려한 기념행사와 종교개혁발생지 유럽순례여행들이 홍보되었다. 이런 것들이 21세기 서구교회 종교개혁 5백주년을 넘기면서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이렇듯이 필자는 종교개혁 5백주년을 훌쩍 넘겨서도, 한국교회는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여전히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편일률적으로 서구교회의 화석화된 그리고 퇴화된 교리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21세기 지구촌 제국주의 정복신학과 신자유주의 번영신학에 의해 점령당한 한국 신학교들의 편향과 퇴행으로써 교리신학 교육이 참으로 걱정스럽다. 무엇보다도 21세기 지구촌 신자유주 맘몬자본 숭배신앙으로 한국교회가 병들어가고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시대마다 신앙인들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읽고 해석하며 삶에 적용해야한다. 왜냐하면 성서자체가 유구한 인류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고백과 신앙실천행동역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성서는 야훼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을 체험한 옛 히브리들의 길고 오랜 희년신앙 행동서사 잇기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초대교회 신앙교리의 핵심은 생활신앙 실천행동교리이었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 예수부활신앙은 신앙고백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이천년 예수부활신앙역사 속에서 수많은 예수신앙인들의 부활신앙행동으로써 예수부활신앙의 진실성을 증언해 왔다.

그러나 이제 21세기 교회들에게 예수부활신앙은 기독교회 부활교리로만 되뇌어 지는 퇴행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 예수부활신앙은 기독교회의 신앙생활에서 아무런 실체적 능력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회의 신앙핵심인 예수부활신앙을 되살리려면 예수의 십자가신앙에 대한 새로운 읽기와 해석과 적용이 절실하다. 왜냐하면 신약성서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신앙은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십자가신앙을 초대교회 신앙고백으로 철저하게 편집 훼손했다. 또한 서구교회의 부활교리해석으로 인해 예수의 십자가신앙이 완전 왜곡 된 부분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예수의 십자가신앙은 천편일률적인 사순절 교리신앙으로 전락한 바도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 안에서 현실적이고 객관적이며 참된 예수십자가신앙 고백과 실천행동의 증거들을 수없이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가 뚜렷하게 증언하는 예수의 십자가신앙 실천행동 이후에라야 예수부활신앙을 바르게 고백할 수 있고 예수부활신앙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필자는 예수의 십자가신앙의 의미를 본문사건의 등장인물들의 상황과 행동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의 마땅한 예수부활신앙 행동을 촉구하려고 한다.

 

 

본문풀이 

예수의 십자가 행동, 이천년 예수십자가 신앙결사를 이끌다.

 

예수에게 십자가는 무엇이었을까?

 

본문읽기에서 십자가사건의 주인공인 예수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 문제는 이천년 기독교회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그 답을 찾아 헤매어 왔다. 필자 역시 이 문제에 대한 평생의 신앙질문과 답을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도 그 참된 의미를 찾기에 모자라는 바가 많다. 물론 그것은, 아직 필자가 2천년 서구교회의 부활교리신앙을 완전히 벗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과 생애 속에서 십자가 행동은 정말 아리송하다. 분명한 것 몇 가지만 짚고 살피고 숙고하자는 생각이다.

먼저,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풀뿌리 사람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갈릴리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은 너무도 사실적이다. 따라서 갈릴리라는 지역의 역사성과 지역의 특수성으로 보아 갈릴리 풀뿌리 사람의 아들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신앙고백은 진실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처형은 시대의 풀뿌리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고 겪어야만 했던 고난이다.

두 번째, 예수는 하나님 영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혁명가이고 깨달은 사람이며 또한 시대의 스승이라는 등 신앙이미지가 확고하다. 그렇더라도 예수를 향한 모든 신앙이미지의 밑바탕은 예수가 하나님 영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고대 유대역사에서 또 그 밖의 고대인류사에서 시대의 하나님 영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왕이거나 지배자이거나 권력자이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지중해세계의 하나님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양자로서 하나님을 대리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렸다. 히브리 성서의 다윗왕조신학이 그렇고 지중해세계의 여러 제국주의 정복신학이 그렇다.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와 중국의 천자사상도 당연히 하나님의 양아들 지배자라는 맥락이다. 나아가 이들 하나님의 양아들 지배자 신앙맥락에서 하나님은 절대타자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양아들 지배자라는 신앙맥락에서 절대타자 하나님의 나라는 저 멀리 절대세계로써 이 세상과는 무한의 차이가 가로질러 놓여 진 상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풀뿌리사람으로서 하나님 영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예수는 저 멀리 절대타자의 세계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지금, 여기, 가난하고 나약하고 고통당하는 죄인들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양아들 지배자 신앙에서처럼 상속이나 권리가 아니라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미래로부터 지금, 여기로, 짓쳐오는 하나님의 직접세상이다. 다만,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양아들 지배자 대리세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직접 다스리심이 매우 불편한 하나님 양아들 지배자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거부한다. 또 하나님의 양아들 지배자가 다스리는 독점권력 세상의 기득권자들도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 영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에 대한 철저한 재해석이다. 그리고 재구성이다. 예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의 꿈 희년신앙을 이 땅의 하나님나라에 담아냈다. 그것은 곧 임마누엘신앙,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세상에 대한 꿈이다.

 

예수의 아빠(Άββᾶ) 하나님의 나라

 

그러다보니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로마제국과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를 향한 대항행동으로써 대안세상일 수밖에 없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는 필연의 혁명성과 그에 따르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 영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로마제국 황제숭배체제를 거부한다. 로마제국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예수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선포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

 

예수의 표현 그대로 읽고 해석하면 한마디로 하나님나라는 아빠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의 십자가처형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위험성을 제거하려는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체제로부터 오는 박해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 행동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순교다. 한마디로 복음서에서 예수의 예루살렘 상경 길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순교의 길이다.

 

예수는 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순교의 길을 가야 했을까?

 

예수는 정말 순교한 걸까? 그렇다면 예수는 왜, 순교의 길을 갔을까?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처형을 여러 차례 예고했다. 구체적인 내용들이 예수의 예루살렘 상경이야기 안에 증언되어 있다. 예수는 요한복음의 증언을 따르면 세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요한복음11장에서 그 위험성을 실감나게 증언한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도마라는 사람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가자라고 외친다.

마가복음도 마치 예수가 순교를 위해 행동한 것처럼 증언한다. 예수는 여러 차례에 거쳐 예루살렘 십자가처형을 예고하고, 이를 막아서는 베드로에게는 사탄이라는 막말까지 퍼부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예루살렘성전 철폐사건을 일으켰다. , 황제의 세금과 관련된 데나리온 사건을 통하여 로마제국 황제권력 지배체제를 거부했다. 나아가 복음서들은 예루살렘성전 파괴 예고사건, 십자가처형을 눈앞에 둔 예수의 처절한 기도사건, 본문의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의 자기변론 포기 등을 증언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예루살렘 십자가처형의 순교를 자처했을까? 예수의 예루살렘 십자가 처형순교는 정말 수수께끼다. 이와 관련하여 던져볼 질문이 하나있다.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물리적으로 성공이었을까?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물리적으로 실패라는 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복음서들은 세례요한의 죽음과 관련하여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억압하는 내용을 증언한다. 마가복음 6장에서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전해 듣고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다라고 의심한다. 예수도 누가복음 13장에서 바리새파 몇몇 사람들이 여기서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라는 경고를 전해 듣는다.

이후 마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15장에서 예수 일행을 두 차례 갈릴리 땅을 벗어나 피난 여행을 떠난다. 첫 번째 피난여행은 갈릴리 호숫가 마을 가버나움을 출발해서 지중해로 나가는 길을 따라 갈릴리 땅을 벗어났다. 예수일행은 바울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키스칼라를 지나서 두로와 시돈까지 피난여행을 이어갔다. 이후 예수일행은 다시 두로로 내려와 2,814m 높이의 헬몬산 기슭을 가로질러 시리아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요르단 골란고원지역 데카폴리스(열개의 헬라도시)가운데 가다라를 거쳐서 갈릴리호수 남쪽지역을 통해 갈릴리 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갈릴리 내륙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예수 일행은 첫 번째 피난여행에 이어서 곧바로 두 번째 짧은 여행을 떠났다. 예수일행은 가버나움 맞은편 벳세대를 떠나 헬몬산 끝자락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페트로-반석)를 방문한다. 예수일행은 가이사랴 빌립보로부터 가버나움으로 되돌아온 후 예루살렘으로 상경한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처형을 당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갈릴리 땅을 벗어나 외국여행을 해야만 했을까? , 예수는 이 여행 이후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십자가처형 순교를 자초했을까?

이 여행을 기점으로 예수가 제자들에게 거듭 거듭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을 예고한다. 예수의 속마음은 무엇일까?

물론 이러한 모든 의문들은 예수 대속제물(代贖祭物)’이라는 교리로 해석하면 간단하다. 그리고 예수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외국여행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예수의 외국여행을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위험과 물리적 실패로 연결해서 보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예수는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물리적 실패를 만회하고 새로운 활로를 여는 길을 찾았다. 예수는 마지막 온힘을 다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큰 신앙사건을 결단을 했다. 그것은 곧 예수의 십자가 행동이었다.

 

예수의 십자가행동은 예수자신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외국여행 길에서 보다 뚜렷해지고 단단해진 예수의 십자가처형 순교결단은 예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이었을까? 이 문제는 이천년 기독교회역사 속에서 교리신앙에 매몰되지 않은 수많은 예수신앙인들의 신앙과 영성의 고민거리였다.

또 한편 예수는 스스로를 다윗의 후손 정치메시아(또는 그리스도)로 여겼을까? 그랬다면 베드로 등 열혈당원 제자들과 함께 로마제국과 한판 저항전쟁을 벌였어야하지 않았을까?

나아가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 부활할 것을 아셨을까?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어린양 속죄 제물로 여기셨을까?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처형 현장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는 외침은 너무도 처절한 불신앙이지 않을까?

이 모든 질문과 고민과 묵상의 출발은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물리적 실패에서 출발해야한다. 예수시대의 갈릴리 풀뿌리 사람들은 네 개 이상의 피라미드 지배체제로부터 착취와 억압을 당했다. 로마제국 지배체제,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지배체제, 헤롯 왕가의 억압착취 지배체제, 나아가 부재지주들의 소작료착취 지배체제 등. 갈릴리 풀뿌리 사람들의 고단하고 처참한 삶의 자리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 들어서서 뿌리를 내릴 틈이 없었다.

실제로 세례요한은 곧 다가올 하나님의 날을 기대하며 유대 풀뿌리 사람들에게 회개와 죄용서의 세례를 베풀었다. 유대 풀뿌리 사람들에게 묵시종말론으로써 하나님의 날을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지금 여기 이 땅에서의 현실로 받아들여 공동체축제를 벌여왔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선포했고 실천행동 했다.

그렇지만 예수는 갈릴리 땅의 네 개 이상 피라미드 지배체제의 억압과 착취 사회구조를 돌파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했다. 갈릴리 땅에서 네 개 계층으로 겹겹이 뿌리내린 사회경제정치 피라미드 빨대착취 거대기계구조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물리적 실패로 내몰았다.

물론 필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물리적 실패로 이끈 결정적 원인을 따로 꼽는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제자그룹 안에서 논쟁하던 다양한 하나님나라 이해였다. 예수의 그룹 안에서 하나님나라 이해는 다양했고, 서로 충돌했으며, 도저히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이해하지 못했다. 먼저, 예수의 제자그룹에는 묵시종말론 하나님나라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0장에서 세배대의 아들 야곱과 요한은 예수에게 이렇게 청원한다.

 

당신이 영광의 자리에 앉을 때 우리를 하나는 당신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않게 하소서.”

 

두 번째, 유대교전통의 다윗의 후손 정치메시아를 대망 사람들이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예수의 십자가처형 순교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무지막지 하게 나무란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라는 책망을 듣는다. 또한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 앞에서 칼을 빼어 들기까지 한다.

이와 관련하여 갈릴리 지역에는 시카리우스 σικάριους 단도를 품은 사람들이라는 자객 단이 활동했다. 이외도 마가복음 12장에서처럼 로마제국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거부운동 등, 열혈당원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이들 열혈당원들의 저항전쟁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마지막 왕조 마카비왕조가 설립되었고 100여 년 동안 존속했다. 이 마카비 왕조사가 개신교성서에는 빠졌지만 천주교 성서에 정경으로 실려 있다.

세 번째,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가장 큰 어려움과 실패원인은 예수를 따르는 오클로스 χλος 풀뿌리 사람들 또는 군중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이해. 유대와 갈릴리 풀뿌리 사람들 대다수는 다윗왕조신학에 따른 다윗의 후손 정치메시아 대망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아가 유대와 예루살렘 풀뿌리 사람들은 우주 불꽃놀이 종말 쇼를 통해서 로마제국세상을 뒤엎고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예수의 지금 여기 이 땅에서 가난하고 힘없고 억압당하는 풀뿌리 사람들이 누려야 할 하나님나라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세례요한에게서처럼 다가오는 하나님 날의 묵시종말론 심판과 징벌 땅위도 아니다. 지금 여기 이 땅에서 풀뿌리 사람들과 하나님이 함께 꿈꾸고 만들어 누리는 나라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시대를 넘어 민족을 넘어 미래로 끝없이 전수되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다. 그것은 곧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잇기 이다.

그러므로 유대와 갈릴리의 풀뿌리 사람들에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흔쾌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점에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열광하고 환호하던 유대와 예루살렘 풀뿌리 사람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이해 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향한 오크로스(ὄχλος)의 호불호로 인한 위험성을 요한복음 11장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또렷하게 증언한다.

 

한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멸망치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당신들은 생각지 않고 있소.”

 

이렇듯이 예수의 제자그룹 안에서 제자들의 다양한 하나님나라 열망들과 그에 따른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몰이해가 어지럽게 얽혔다. 더해서 마가복음 9장에서처럼 시도 때도 없이 누가 크냐라고 싸움질이나 해대는 제자들의 삶의 행태 때문에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물리적 실패를 피하지 못했으리라. 무엇보다도 예수의 예루살렘입성 때 환호성을 치던 풀뿌리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아우성치는 속에서 예수는 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물리적 실패를 인정했으리라.

예수는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물리적 실패의 모든 원인들과 문제들을 한꺼번에 정면 돌파하기 위해 예루살렘 십자가행동을 결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본문읽기를 하는 가운데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은 예수의 뜻 곧 예수의 십자가행동 의미가 무엇인지 새롭게 고백하고 새로운 신앙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는 지금 로마제국 십자가처형을 앞에 놓고 스스로 어마어마한 고뇌와 갈등에 휩싸였다. 마가복음 14장과 다른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감람산 기슭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다. 제자들에게 조차 내 영혼이 매우 상심하여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라고 호소했다.

 

아빠 호 파테르, 판타 뒤나타 소이 Άββᾶ ὁ πατήρ, πάντα δυνατά σοι 아빠 아버지,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빼앗아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의 절규하는 기도가 밤새도록 감람산 기슭을 메아리쳐 울렸다. 예수는 갈릴리 풀뿌리 사람의 아들 나사렛 사람으로서 위로부터 태어남을 통하여 하나님 영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깨닫게 해 주신 지금,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물리적 실패를 처절하게 맛보고 있다. 예수는 마지막 결단으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향한 모든 위협과 억압과 실패에 대항하여 예루살렘 십자자처형의 순교를 결단한다. 예수는 자신이 신뢰하고 신앙하는 아빠 하나님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모든 미래를 던져 넣은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로마제국 십자가처형의 순교 속으로 던져 넣음으로써 자신의 꿈꾸고 행동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모든 가치와 미래완성에 대한 장엄한 신앙행동을 선택을 한 것이다.

그렇게, 예수는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완성을 위한 십자가처형의 순교에 자신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하나님 아빠는 예수를 부활시켰다. 그렇게 예수는 십자가처형 순교를 통하여 예수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부활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신앙할 수 있다. 21세기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를 열겠노라며 결단하는 하늘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행동을 둘러싼 군상(群像)

 

이제 필자는 본문읽기에서 드러나는 인물군상들의 상황을 더 살펴보면서 예수의 십자처형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확인해 보려고 한다. 먼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과 산헤드린(식민자치의회)의원들을 살펴보자. 로마제국 식민지 유대사회종교정치 모든 기득권계층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방해세력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행동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실패의 큰 요소였던 유대사회종교정치 모든 기득권을 향한 대항행동이다.

이어서 로마제국 식민지 유대와 예루살렘총독 빌라도를 살펴보자. 빌라도는 서기 26-36년 사이에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이름 없는 집안 기사출신이었다. 빌라도는 로마제국황제 티베리우스의 측근실세 세야누스에게 선을 대서 유대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빌라도는 기회주의적이고 약삭빠르며 잔혹한 사람이라고 성서외부 문헌들이 증언한다. 본래 유대와 사마리아는 헤롯 대왕의 큰아들 아켈레오의 봉건영지였다. 그러나 아켈레오의 포학한 통치로 인해 로마제국은 그에게서 왕권을 빼앗고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황제관할 속주로 만들었다.

그런데 로마제국 황제관할 식민지 속주들 가운데서 동방의 주요거점은 시리아지역이었다. 로마제국 동방식민지 전지역에 8개 로마군단이 주둔 해 있었는데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3개 군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레게온λεγεών 이라고 불리는 로마제국 1개 군단병력 수는 약 6,000~10,000명이었다. 그 아래로 스페이라σπείρα 부대가 조직 되었고 병력 수는 600~1,000명이었다. 스페이라 부대는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지역 수비대역할을 감당했다.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부대는 백부장부대 정도였다.

빌라도는 평소에 지중해변 가이사랴에서 지내면서 명절 때가 되면 스페이라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헤롯궁전에 머물렀다. 빌라도는 자신의 관할구역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관리했는데 강온양면을 정책을 사용했다. 해마다 유월절 명절 때가 되면 예루살렘 성안과 성 밖에 12-18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붐볐다고 한다.

따라서 빌라도는 명절 때마다 군중을 환심을 사려고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한명에게 사면권을 행사했다. 이 빌라도의 사면권행사에는 빌라도의 잔혹성과 관련한 사건이 얽혀 있다. 빌라도는 총독부임 초 티베리우스황제에게 돋보이려고 황제숭배 물품인 황제군기와 금 방패를 예루살렘성전에 모셨다. 또한 예루살렘의 수도관 공사를 위해 성전금고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불거진 유대인 소요사태 때 로마 군인들을 유대인으로 분장시켜 군중 속에 투입하고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빌라도는 유대인 죄수 사면권이 약속 했다. 이어서 빌라도는 서기 36년 사마리아지역 그리심 산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잔혹한 학살행위를 한 것으로 인해 시리아 총독에게 고발당했다. 이후 빌라도는 로마로 소환 되어 처벌을 받았다.

본문읽기에서 빌라도는 아무리 유대 풀뿌리 사람들과 약속된 사면권이지만 폭동의 주범을 사면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본문이 사용한 헬라어 낱말 바랍바스 βαραββς는 아람어의 음역인데 아바(Άββᾶ)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이다. 유대인들의 표현으로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 군중들에게 거듭거듭 확인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유대인들의 왕을 풀어주기 원하느냐?”

 

그러나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이 난리를 치고 폭동이 일어날 조심이 보이자 할 수 없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바랍바스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는 자신을 위한 모든 변명을 포기한다. 예수는 이미 로마제국 십자가 처형의 순교를 결단했다. 이 과정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태도를 보고 깜짝 놀란다. 우리말 성서에서는 빌라도가 기이하게 여기더라라고 했는데 참 기이한 번역이다. 빌라도는 자신의 평생 삶의 태도로 보았을 때 예수의 순교를 무릅쓴 터무니없는 변명 없음 태도에 깜짝 놀랐다. 그로인해 빌라도 역시 폭도두목을 풀어줄 수밖에 없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요즈음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14세기 기독교회 문학자품으로 보이는 빌라도의 죽음과 빌라도의 보고서등은 아무런 역사근거가 없다. ‘로마제국 유대총독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처형에 책임이 없다는 성서 밖의 모든 문서들은 위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수의 십자가행동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물리적 실패의 첫 번째 핵심 원인인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피라미드식 착취와 억압구조에 대한 예수의 대항행동임이 분명하다.

 

오클로스 χλος 풀뿌리 사람들이여, 깨어라.

 

끝으로 유대와 예루살렘 오클로스 χλος 군중, 풀뿌리 사람들을 살펴보자. 도대체 왜, 예수를 따르던 풀뿌리 사람들 또는 군중들(ὄχλος)은 그렇게 표리부동 할 수밖에 없었을까?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 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환호성을 치던 군중들은 나약하고 무지하며 깨달음 없는 무지렁이 인생의 상징이다.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맘몬자본숭배 사회종교정치경제와 친일재벌수구기득권 사유화국가 이데올로기에 속아서 한없이 미련하고 나약하며 깨달음이 없다. 이렇듯이 아무런 존재감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21세기 이 땅의 풀뿌리 사람이다.

늘 그랬듯이 인류역사 속에서 풀뿌리 사람들은 모두 성서속의 오클로스(ὄχλος)가 아니었던가?

21세기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속에서 풀뿌리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사이비 민주정치에 대한 한 푼어치의 분별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이다.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실속 없는 탐욕으로 불타는 불나방이다. 21세기 불로소득 탐욕에 불타는 풀뿌리 사람들은 나와 얽히지 않은 세상만사 모든 억압과 착취에 눈감기 일쑤다. 온갖 사회종교정치경제사건의 사회구조와 폐해를 따져보려 하지 않고 오롯이 눈앞에 작은 이익에만 매달릴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행동은 로마제국과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억압과 착취구조 속에서 날마다 죽임당하는 오클로스(ὄχλος)를 위한 예수의 대항행동이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해서 풀뿌리 사람들의 삶을 빼앗고 그들의 영혼을 갈취하는 도둑의 무리들,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반생명 반 신앙을 향한 예수의 대항순교다. 예수의 십자가행동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시나브로 소멸되고 죽어나가는 오클로스의 삶과 생명, 죽어버린 영의 부활을 위한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파괴하는 모든 지배체제와 지배이데올로기를 한꺼번에 쳐부수어 걷어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요청하는 신앙행동이다.

 

오클로스 χλος 풀뿌리 사람들이여, 깨어라.

예수의 십자가행동, 죄 없는 이의 피 흘림을 보라.

21세기 지구촌 곳곳의 생때같은 젊음들의 죽음을 큰 소리 내어 울어라.

오클로스 χλος 풀뿌리 사람들이여, 깨어라.

지금 우리의 슬픔들과 절망들과 한스러움이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화산맥(火山脈)이려니. 풀뿌리 사람들의 화산맥이 터지지 않고서야

무에 혁명이 있으랴. 무에 새 세상을 바라리오.

 

예수 십자가행동 신앙결사

 

이제 21세기 지구촌제국주의 시대상황에서 예수의 십자가행동을 향한 기계적이고 맹목적이며 교리적인 신앙고백은 풀뿌리사람들의 종교아편일 뿐이다.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는 사이비한 부활교리만으로는 예수의 십자가행동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할 때 예수의 십자가행동의 참 의미는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부활을 증언하는 신앙행동이다.

갈릴리 풀뿌리 사람의 아들 나사렛사람 예수, 하나님 영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 참사람 예수의 로마제국 십자가 순교. 그것은 곧 이 땅의 고난 받는 풀뿌리사람들의 신앙 삶 속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부활을 꿈꾸는 예수의 신앙행동이다. 아빠 하나님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모든 미래를 던져 넣음으로써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로 부활하는 신앙순교이다. 자신의 생명을 시대의 어둡고 사악한 지배체제 죽임의 현장 속으로 내어 던짐으로써 자신의 꿈꾸고 신앙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모든 가치와 가능성을 살려내는 예수의 부활신앙이다.

무엇보다 예수의 십자가행동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시나브로 죽어나가는 오클로스(ὄχλος)무지렁이들의 부활신앙행동이다. 세상 모든 일에 또는 세상 모든 사건들의 사회구조와 폐해에 눈감아 버리는 어린 오클로스의 위로부터 남 또는 거듭남의 신앙행동이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으로 부활하는 신앙행동이다.

그러므로 이제 21세기 모든 교회들과 교우들의 성만찬예식은 예수 십자가행동 신앙결사(信仰結社)이다. 이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의 십자가행동의 기림을 넘어 21세기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를 여는 신앙선언이고 의지이며 결단이다. 나아가 옛 히브리들의 출애굽 해방과 구원 세상에 잇대어 21세기 희년신앙 행동서사 잇기를 결단하는 신앙결사이다.